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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루나 칼럼 >
기러기 울어 예는 글 | 이원익 leewonik@hotmail.com
한국 불교의 전파와 대중화에 힘을 보태려는 발원으로
태고사를 도와 왔으며 우담바라회 회원이다. 포항에서
태어나 경남고와 서울 문리대를 졸업했다. 오래 전에
회사 주재원으로 와서 LA 지역에 살며 국제운송업을
하고 있다.
누나가 좀 이상해졌다. 시골 초가집 어스름한 사택의 방에서 단둘이, 나더러 딴 데 쳐다보지 말고 꼼짝 말고 고대로 자기를 마주 바라보며 줄곧 앉아 있으라면서 앉은뱅이 밥상에 공책을 펼쳐 놓고 펜으로 잉크를 찍어 내 얼굴을 그리던 누나가 갑자기 훌쩍이며 울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다. 갑자기는 아니고 그림이 거진 다 돼 가던 그 어름에서부터 누나는 어느 결에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고 나는 그게 무슨 노래인 줄도 몰랐다. 그러면서 이제는 누나가 잠깐씩 나를 빤히, 혹은 힐끗 바라봤다 고개를 숙이고 하던 그 잦기가 줄고 더 그림에만 쏠리어 싹싹 철필을 그으며 혼자 잔손질을 하는구나 했는데, 그러다 어느 대목에선가 얼굴을 감싸고 흐느끼더니 숫제 밥상에 엎어져 목 놓아 울고 마는 것이다. 그때가 내가 아마 네댓 살 아니면 대여섯 살? 누나는 열네댓 살, 중학생이었을 테다.
그 후로도 누나는 가끔 그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소리 내어 부르며 분위기가 좀 야릇해지고 때로는 내가 아주 조금 염려스러워지기도 했는데 차차 귀에 익은 바 그 노랫말은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은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아아~’로 흐르고 있었다. 아는 말도 있고 모르는 말도 있어 ‘우는 것’은 알겠는데…, ‘예는 것’은 뭐며 ‘구만리’는 혹시 ‘그 멀리’ 아닌가? ‘바람이 산에 불어~’ 해야 될 낀데 ‘바람은 산을 불어~’는 뭐지? 이리 갸웃거리면서 한창 낱말 곳간이 늘고 있었을 어린 귀에도 이런 건 영 말의 아귀가 잘 안 맞는 것 같았다. 하기야 우리 동네에서는 시옷과 쌍시옷 발음을 구별 안했으니까, 아니 못했으니까 ‘싸늘’이 ‘싸늘하다’의 말토막임은 꿈에도 생각 못했고, 누나나 나나 그걸 ‘산을’으로 부르고 들어 뜻이 그리 헷갈렸을 것임은 중학생이 되어서야 어느 순간 알아차릴 수 있었지라.
그리고 여자가, 소녀가 왜 갑자기 아무 까닭도 없이 혼자서 울음을 터뜨릴 수 있겠는지도 곧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머슴애도 남 보기에 아무 이유 없이 혼자서 울먹일 수 있음을 스스로 겪을 즈음이었다. 그나저나 아깝다, 내 생애 최초의 작은 초상화여! 원통하다, 시계의 분침이 돌아가듯 너무나 완벽하게 저물고 있던 잃어버린 그 화실의 저녁이여! 좁은 어깨에 멜빵을 하고 누나를 바라보던 공책장 속의 그 성긴 숱의 어린 얼굴이며 희미하게 비추던 벽지 위의 어스름 빛이며 단발머리 누부야의 흥얼거림이며…, 잔영만 남긴 채 쓰레기통으로 훨훨 날아 들어가 버린 컴퓨터 파일처럼 이제 영영 되살릴 수가 없게 되었구나.
그런데 어릴 때 들은 이 노래 가사를 박목월이 지었다는 것은 중학교에 들어가서 교과서에서 <윤사월>인가 하는 시를 접하고 난 이후다. 그리고 아마 고등학교에서였지? <나그네>라는 시를 국어책이서 읽는 등 이 시인의 몇몇 시는 보편적 의무교육 덕분에 거의 국민 시가처럼 널리 우리 세대 청소년들의 머릿속에 박혀 버린 셈인데 이 <이별의 노래>의 진짜 배후를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 후, 미국에 건너와서다. 언젠가부터 목월의 행보가 권력에 줄을 대며 남의 전기나 꾸미는 등 좀 마뜩찮은 면이 있어 내 관심에서는 좀 멀어져 있었는데 우연찮게 알게 된 그의 젊은 날 사연으로 말미암아 다시 그를 찾았었다. 사연은 이러하다. 우선에 잠시 고등학교 국어 시간으로 되돌아가 보자. 시험 칠 일은 더 이상 없겠지만.
박목월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경북 경주에서 자란 목월(木月 朴泳鍾 1916~1978)은 본래 동시 작가로 시작했는데(‘송아지 송아지 얼룩송아지’도 그의 작품이다) 1939년에 정식으로 문단에 이름을 알렸다. 1945년 대구 계성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는 이듬해 조지훈, 박두진과 함께 <청록집(靑鹿集)>을 발간하여 토속적인 정서를 잘 표현한 시인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납북인지 월북인지 애매하단 핑계로1988년에 해금될 때까지 남한에서 금지된 작가였던 정지용(鄭芝溶 1902~1950)은 그의 시를 높이 평가하여 북에는 소월(素月 金廷湜 1902~1934)이 있고 남에는 목월이 있다고까지 한 바가 있다.
여기까지야 참고서에도 나와 있는 이야기이고 오늘 본론은 이 다음이다.
청록집
목월은 1950년에 이화여고로 자리를 옮겼으나(영화배우 윤여정이 그때 제자다) 곧 6ㆍ25가 터져서 공군 문인 종군단에 들어가 문관으로 군복무를 마친다. 이후 홍익대, 서라벌예대, 중앙대 등에서 강의를 하였다. 1959년 한양대 조교가 되어 근무하였고 은퇴 후 1978년, 63세에 고혈압으로 죽었다. 당시 그보다 못한 직장 없는 사람들도 흔했는데 목월은 그래도 차례로 교편이라도 잡았지만 다섯 자녀를 둔 가장으로서 그는 한평생 가난에 쪼들린 것 같다. 말년에는 순수시인답지 않게 대통령 찬가를 짓는 따위로 어용작가로 치부되기도 하여 핀잔도 들었지만 무슨 일 때문에 물어물어 그의 집에 찾아가 본 소설가 이호철(李浩哲 1932~2016)이 목월의 딱한 형편을 눈으로 보고는 다소 지조 없이 흐릿한 그의 행태를 이때까지와는 달리 좀 봐 줄 마음의 틈이 생겼다고 한다. 아무튼 가난이란 호랑이보다 무서운 것인데 그래도 아이들에겐 넉넉하고 자상한 아버지였다는 것이 서울대 국문과 교수를 지낸 맏아들 박동규(朴東奎 1939~)의 회상이다.
이렇게 자상하지만 버겁게 버텨 오던 목월이 한국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1952년, 그러니까 30대 후반이네, 피난지인 대구의 교회에서 대형 사고를 친다. 그 교회에는 목월을 따르던 홍가 자매가 있었는데 그 중 언니가 목월에게 깊은 감정으로 다가온 것이다. 목월은 모범 가장답게 이를 단호히 뿌리친 후 상경하고 마니 언니는 결국 단념하고 혼처를 찾아 시집을 간다. 그런데 여우굴 피하니 범굴이라고 이번에는 서울에서 명문 여대를 다니던 동생이 목월에게 착 달라붙어 자신의 감정을 맞대놓고 고백하였고 마침내 목월도 피하지 못하고, 아니 아마도 자신이 더 열정적으로 이 여대생과 사랑에 빠져서는 에라 모르겠다, 모든 것을 다 팽개치고 당시만 해도 저 먼나라 같던 제주도로 사랑의 도피를 하여 둘이서 꽁꽁 숨어 지낸다.
하지만 평소에도 이재에 별 재간이 없던 목월이 만날 둘이서 붙어앉았는데다 아는 사람 거의 없는 제주도에서 무슨 용빼는 재주가 생겼으랴? 돈도 없고 도와주는 사람도 없으니 이른바 사는 꼬라지가 말이 아니었는데 얼마 후 목월의 아내인 유익순 여사가 이들의 종적과 거처를 알게 돼 섬을 찾아온다. 하지만 막상 이들을 찾고 보니 그 둘의 몰골이 인간적으로 말이 아니게 너무 처량하여 ‘힘들고 어렵지 않느냐’며 도리어 갖고 간 여비를 발라 내어 두 사람의 겨울옷부터 사다 주고 나머지는 쓸 돈으로 다 쥐어 준 채 몸만 되돌아간다.
김성태
그런 얼마 후 홍양의 아버지가 그 소식을 듣고는 대구에서 딸을 데리러 물건너 온다. 딸은 굶어 죽어도 내 사랑과 같이 죽겠다며 완강히 버틴다. 그 양반 그래도 피붙이 딸이라 바다에 던져 버릴 수도 없고…, 자식 앞에 장사 없다지만 달래고 일깨우고 타이르고 참고 기다리고 으르고 왈기고 맞서다 자물시고…, 다시 가누고 뉘우치고 잡다루고 다잡고 머라카고 시루고 겨루고 다독이다 빌고 받아주고 추어주고 새겨듣고 접어듣고…, 보채고 뒤채고 꼬시고 챙기고 앵기고 호리고 추스르고 눙치고 꾀고 이끌어 먹이고 갈아입히고…, 쓰다듬고 일받치고 공구고 지둥쿠고 부추기고 다그치고 잡아끌어세우고 잡도리하고 보듬어 다지고 또 달래고…, 이러기를 밤낮 사흘이 꼬박 지나서야 마침내 딸은 설득이 되어 아비를 따라 나서기로 한다.
목월 동상과 연혁비
때는 아직 전쟁 중이라 배가 흔치 않아 부두에 대어 놓은 연락선에 시간 맞춰 곧장 올라타야 하는데 딸은 뒤꿈치에 찐드기가 붙었는지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가다가 서고, 가다가는 서고…, 이윽고 뱃전에 올랐어도 고개만 떨구고 있는 그 모습을 더 이상 애타게 지켜보기 어려웠던 목월은 이제는 식어 버린 보금자리로 돌아와 일필휘지 시 한 수를 갈겼것다. 곧 이어 작곡가 김성태(金聖泰1910~2012)가 이에 곡을 붙이니 이렇듯 <이별의 노래>가 탄생하여 그림 그리던 열다섯 어름의 우리 누나까지 울린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 두고 홀로 울리라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편 제주 제일중학에는 그때 목월의 글친구인 양중해(梁重海 1927~2007)가 국어 선생을 하고 있었는데 그도 발걸음을 못 떼던 이 홍양의 이별 장면을 지켜본지라 친구의 일이지만 가슴이 너무 아려 집에 돌아와 대뜸 시 한 수를 쓴다. 세상이 참 너무 평화롭고 만사가 순조로우면 그게 바로 도대체 시다운 시가 안 나오는 문예의 암흑시대라는 건가? 그래서 웬만큼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오려면 얼마간의 비극이란 필요악인 모양이다. <떠나가는 배>가 그리하여 나온 시인데 음악 선생인 변훈(邊焄 1926~2000)이 왔구나 하고 곡을 붙이니 또 하나의 명시에다 명곡의 탄생이다. 당사자야 괴로웠겠지만 홍양은 후세를 위해 참 큰일을 한 셈이다.
저 푸른 물결 외치는 거센 바다로 떠나는 배
내 영원히 잊지 못할 님 실은 저 배는 야속하리
날 바닷가에 홀 남겨 두고 기어이 가고야 마느냐
터져 나오라 애슬픔, 물결 위로 한 된 바다
아담한 꿈이 푸른 물에 애끓이 사라져, 내 홀로
외로운 등대와 더불어 수심 뜬 바다를 지키련다
저 수평선을 향하여 떠나가는 배, 오 설움이여
임 보내는 바닷가를 덧없이 거닐던, 미친 듯이
울부짖는 고동소리, 님이여 가고야 마느냐
오산학교 재학시의 소월
전통적이고 완고한 관점으로 보아 이런 난리굿을 고상하게 말해 순수한 사랑이라 해야 하나? 아니면 불장난? 치기나 사련, 다시 말해 불륜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내가 이 나이에 철 지난 사춘기가 도래한 것도 아닌데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한살이를 새삼 돌이켜볼 때 짚이는 것은 있다.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남녀간의 이러한 정서와 밑바탕 에너지는 가히 삶의 큰 원천이요 온갖 예술의 끊임없는 새암임에는 틀림없어 보여 그런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으로는 이게 모든 번뇌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맞다. 등불에 뛰어드는 나방같이 한 번 타오른 번뇌의 불꽃은 아름답고도 잔인하게 사람을 짓이겨 깡그리 불태우고 그 재마저 흩어 버린다. 정지용이 감히 목월을 위해 모셔와 빗대었던 북쪽의 소월도 그 희생에서 예외가 아니다. 그는 서른 줄에 들어서 얼마 못 살고 삶을 마감한다. 그 번뇌 때문이었을까?
평안북도 구성에서 태어난 소월은 세 살 때 아버지가 일본사람들에게 두들겨 맞아 미치광이가 돼 버렸다. 소월은 아버지 없이, 어쩌면 없는 것보다 못하게 자란 셈이다. 이어 정주의 오산학교에 들어간 그는 세 살 많은 오순이란 소녀를 알게 돼 사귀면서 연인으로 발전하였다. 조숙하기도 했겠지만 이런 가정환경도 이 천재의 감수성을 일찌감치 건드린 것 같다. 그러다 소월이 열네 살 때인데 할아버지가 자기 친구의 손녀인 ‘홍단실’이라는 처녀와 자기 손자를 강제로 혼인시켰고 소월은 아무 말도 못하고 이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오순이도 열아홉 살 때 다른 데로 시집을 갔다. 그런데 그런 오순이가 의처증이 있는 남편에게 3년 뒤에 맞아 죽고 만다. 한없이 아픈 마음을 안고 오순이의 장례에 갔던 소월이 지은 시가 <초혼(招魂)>이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물론 이렇듯 애끓는 사연들이 얽히고설킨 사연이 현대문학이든 고전문학이든 국문학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 사람들은 오랜 세월 한문을 즐겨 읊고 지었으니 한국의 한문학에도 연심을 울리는 작품들이 제법 있으련만 불행히도 실상은 그렇지가 못해 보인다. 웬만한 내용은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로 여겨 아예 소재 선택에서부터 걸러졌는데다 남는 것은 거의 천편일률적으로 음풍농월에다 도덕군자 타령이라 예외가 오히려 드물다. 물론 그런 좁혀진 범주 안에서도 놀랄 만치 세련된 표현과 깊이 있는 작품들이 많지만 근본적으로 작품의 소재나 초점이 너무 치우친 점은 부정할 수 없어 보인다. 그런 각도에서 볼작시에 이 동쪽나라의 선비들은 수백 년, 수천 년간 남의 글 가지고 헛기침하며 헛고생만 한 게 아닌가 의구심이 든다면 너무 지나침일까?
그런 면에서는 본고장인 중국에 있어서도 비슷한 점이 있다. 다만 나라가 엄청 큰데다 기록된 역사가 좀 더 길고 푸지다 보니 더 다양성이 있다는 점은 인정하더라도. 중국 고전문학에서 시라면 당시(唐詩)를 먼저 치는데 하고많은 시인들 중에서 그래도 내 눈에 좀 색다르게 띄어서 이건 참 보배다 싶은 작가가 이하(李賀 791~817)이고 그의 시 중에서도 <나는 성성이(猩猩이) 입술을 먹고(원제: 大提曲)>라는 상당히 희한한 작품이 있다. 아래는 원시와 이원섭(李元燮 1924~2007) 선생의 번역이다.
妾家住橫塘 첩가주횡당
紅絲滿桂香 홍사만계향
靑雲敎綰頭上髻 청운교관두상계
明月與作耳邊瑭 명월여작이변당
蓮風起 연풍기
江畔春 강반춘
大堤上 대제상
留北人 유북인
郎食裡魚尾 낭식이어미
妾食猩猩脣 첩식성성순
莫指襄陽道 막지양양도
綠浦歸帆少 녹포귀범소
今日菖蒲花 금일창포화
明朝風樹老 명조풍수로
제 집은 횡당이구요, 창에는
계수 향이 풍기는 붉은 사가 쳐 있지요
푸른 구름을 시켜 머리를 틀어 올리게 하고
둥근 달이 내 귀고리 된답니다
연꽃에 바람 일어
강은 봄인데
긴 둑 여기에
내사 임 못 놓겠어요
당신은 잉어의 꼬리를 잡수세요
나는 성성이 입술을 먹고
이렁성 여기서 지내시되
아예 양양에 갈 생각은 마세요
다시 돌아오기 어려우니까
보세요, 오늘 창포꽃이 향기롭지만
내일이면 단풍이 벌써 시들어 버릴 걸요
‘대제’라는 색향에 사는 창녀가 떠나가려는 정부의 붙잡으면서 자기는 원숭이 입술을 씹을 테니까 당신은 파닥이는 잉어 꼬리를 깨물어 먹으라는 농염한 노래다. 이하도 서른이 되기 전에 요절했는데 내가 대학생 때 이 시를 비롯한 그의 시를 몇 편 처음 읽으면서 수묵화 같은 담담한 한시의 세계에도 이런 게 다 있나 싶어 몸이 다 떨렸었다. 요즘은 뭐가 다 너무 많아서 그런지, 웬만큼 색다를 것을 대해도 그저 그러려니 하니 어느새 나이 들어 모든 게 웬만큼은 다 그렇고 그런 지나간 얘기일 뿐이라 여겨서 그런건가!
그러고 보니 서양의 여러 시인들의 발췌된 문고판 시집 시리즈에서 하나씩 뽑아 사다 하숙집 방바닥에 널어놓고 이것저것 집어 골라 읽으며 한참 달리는 외국어 실력으로 영어, 불어, 독일어로 된 원시와 우리말 번역시를 견주어 보며 시간을 보내던 좀 무모하면서도 뿌듯하고 겨르롭던 오래 전의 순간들이 떠오른다. 그러던 나날들도 한 나절의 해 그림자처럼 이미 다 스쳐 지나가 버린 지난 날의 얘기일 따름이던가. <로렐라이(Die Lorelei)>를 비롯하여, 가장 익숙해서 그나마 좀 쉬웠던 것이 독일의 서정시인 하이네(Heinrich Heine 1797~1856)의 작품들이었다는 기억이다.
하이네
Im wunderschönen Monat Mai
Im wunderschönen Monat Mai,
Als alle Knospen sprangen,
Da ist in meinem Herzen
Die Liebe aufgegangen.
Im wunderschönen Monat Mai,
Als alle Vögel sangen,
Da hab ich ihr gestanden
Mein Sehnen und Verlangen.
눈부시게 아름다운 오월에
눈부시게 아름다운 오월에
모든 꽃봉오리 벌어질 때
내 마음 속에서도
사랑이 싹텄어라
눈부시게 아름다운 오월에
온갖 새들 노래할 때
나의 불타는 마음을
그대에게 고백했어라
입센
그리이그
이런 시는 아주 순수하며 서정적이고 얼핏 소녀 취향이지만 실상 하이네는 프랑스 7월 혁명에 감동받아 독일의 민주화에 투신한 굳건하고 과격한 반정부 운동권 투사였다. 혁명정신이란 본래 순수한 피끓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이겠지. 어쨌든 하이네는 그러다 결국 고국에 못 돌아오고 파리에서 병들어 죽는다.
파리에서 좀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이탈리아에 단테(Durante degli Alighieri 1265~1321)가 있고 웬만하면 이름은 들었을 법한 베아트리체(Beatice)와의 짝사랑이 있다. 그리고 이 소녀가 모티브를 준 서사시 <신곡(神曲 La Divina Commedia)>이 있지만 길기도 하고…, 다 읽어 보지는 못했다.
페르 귄트 삽화
남쪽이 아니라 파리에서 위쪽으로 가면 북해 바다 동쪽에 남북으로 길쭉한 노르웨이가 있다. 이 나라의 유명한 작품으로는 희곡 <페르 귄트(Peer Gynt)>를 꼽는데 극작가 입센(Henrik Johan Ibsen 1828~1906)이 글을 쓰고 그리이그(Edvard Hagerup Grieg 1843~1907)가 곡을 붙였다. 거기 실린 노래 가운데 널리 우리 귀에 익은 것은 <솔베이지의 노래 (Solveigs Sang)>다. 내가 중학생 때 점심시간이면 교무실 옆 조그맣고 볕 드는 방송실에서 일찍 도시락을 까먹은 방송반 계집아이들이 착각은 자유라고 꼭 날 들으라고 한 건 아니었겠지만, 옥상에 달린 스피커로 운동장 저 끝 현사시나무 그늘에까지 들리도록 노상 틀어 주던 그 곡이다.
솔베이지는 북구에 흔한 여자 이름인데 Sol 이 보통 태양을 뜻하니까 우리말로는 얼추 ‘해순이’쯤 되겠다. 나도 그랬지만 그 아이들도 노랫말의 뜻은 모르고 틀었을 것이다. 여러 번역 버전이 있지만 이 희곡의 원어는 당시에 덴마크에서 노르웨이까지 글말로 두루 통하던 덴마크어(Dano-Norwegian)였으니까 말이다(사실 노르웨이어나 덴마크어나 서로 금방 알아듣기는 힘든 좀 심한 사투리 수준이다. 이들의 요샛말도 글말은 한 눈에 엇비슷하다). 나도 아래에서 보이듯 덴마크어는 잘 모르는데 한 다리 영어를 거쳐 대략 말뜻을 풀자면 이러하다.
Kanske vil der gå både Vinter og Vår,
og neste Sommer med, og det hele År,
men engang vil du komme, det ved jeg vist,
og jeg skal nok vente, for det lovte jeg sidst.
Gud styrke dig, hvor du i Verden går,
Gud glæde dig, hvis du for hans Fodskam mel står.
Her skal jeg vente til du kommer igjen;
og venter du hist oppe, vi træffes der, min Ven!
그 겨울도 봄도 가고
여름도 가고 한 해도 가리
하지만 믿노니 그대 다시 돌아오리라
그리고 내 언약한 대로 난 그대를 기다리리
신이여 도우소서, 늘 홀로 가는 그대의 길
무릎 꿇은 그대에게 힘을 주소서
만약 그대 이미 하늘에서 날 기다리고 있다면
거기서 다시 만나리, 언제까지나 둘이서 사랑 나누며
이 가사에는 안 나와 있지만 <페르 귄트>의 이야기는 일종의 해피엔딩이다. 완전한 허구는 아니고 노르웨이의 오랜 민담에서 아주 엉성하게 줄거리를 따왔다. 신혼에 아내 해순이를 위해 돈 벌러 집 나간 남편 페르 귄트가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고생 끝에 큰돈을 벌고 귀향길에 올랐으나 도적에게 몽땅 털리고 빈털터리가 되어 노구를 이끌고 천신만고 끝에 집을 찾아온다. 마침내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에 다다랐는데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는지라. 들여다보니 백발 노파가 홀로 바느질을 하고 있는데 다가가 보니 그게 바로 수십 년 전에 헤어진 아내가 수절하며 여태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장면이 아닌가! 아무튼 둘 다 장수했으니 그나마 살아생전 다시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렇더라도 무턱대고 죽을 때까지 서로 찾고 기다렸다니 요즘 같으면 참 보기 드문 이야기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렇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에 금발 벽안의 서양 사람들도 감동을 한다니 이로 미루어 우리가 인종을 뛰어넘어 심사에 공통부분을 가진 하나의 종족[Homo Sapiens]이 맞긴 맞나 보다.
솔베이지 오두막 그림
하기야 우리 모두가 본래 하나의 종족이라면 갈라져 나간 어느 나라, 어느 겨레, 어느 세대에선들 가슴 아리는 사랑의 이야기가 없으랴? 밤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나성의 불빛보다도 많고 구름 없는 남가주의 산꼭대기에서 올려다보는 밤하늘의 별빛보다도 많으리라. 청천하늘에 잔별도 많고 우리 가슴에 수심도 많듯이 그 모든 불빛과 별빛은 아름답고 아픈 번뇌의 씨앗이며 짧은 기쁨과 긴 괴로움의 샘물이다. 그 가운데 내 희미한 별들이 몇이라도 파묻혔는지 모르겠지만 그리워 살뜰히 못 잊는데 어쩌면 생각이 떠지는 건지 이제는 괴롭고 아팠던 기억조차 터 오는 먼동을 따라 마저 빛을 잃으려 하누나. 이는 다 얄궂고 모진 세월의 잔인함이요 늘 그러함이란 본래 없는 그림자일 뿐임을 다시금 일깨움이다. 그 빛바램과 망각의 그늘에 홀로 앉아 미국에까지 따라온 몇 안 되는 오래 된 공책을 펼쳐 본다. 국민학교 4~5 학년 때부터 대학 초년생 때까지, 많이 흩어지고도 운 좋게도 한 곳에 오롯이 살아남아 모여 있는 여러 편의 치기 어린 글귀 중에 이런 것이 보인다.
노을처럼
하늘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두 머리 묶은
강 너머 소녀
해 질 무렵
나루 건널 때
물 아래 붉게
타고 있다
*고1
피만 못 속이는 게 아니라 사람이 제가 보고 듣고 자란 건 못 속인다. 이 한 편에도 확실히 목월의 그림자가 어려 있다. 그 목월도, 어쩌면 그의 어위큰 아내나 홍양까지도 이미 저 세상에 있을지니 나도 이제부터는 이호철이 그랬던 것처럼 무얼 너무 그리 빡빡하게 챙기지는 말기로 하자.
아 그리고 이 졸시를 새삼 보니 그때, 객지에서 하라는 공부에는 손 놓고 책상 앞에서 이 생각 저 생각, 누구였을까? 한 가지 번뇌의 대상을 가운데에 놓고서는 수백 번 주위를 맴돌며 공상으로만 하염없이 어느 시골 출신의 소년은 시간을 때웠나 보다. 코로나 핑계 대며 벌라는 돈은 안 벌고, 하라는 집구석 일도 제쳐두고, 목청 해맑고 높은 <해순이의 노래> 작게 틀어 가늘게 배경에 깔아 둔 채 이 나라 시편에서 저 나라 노랫가사로 너울너울, 해가 저물도록 넘나들기만 한 어느 이민자의 오늘 하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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