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기억하는 브뤼기에르 주교]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소(蘇) 주교의 사람들 (1)
설득하고 해명할 것, 보고할 것, 나눌 이야기도 많았던 조선대목구의 첫 대목구장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Barthélémy Bruguière, 蘇, 1792~1836) 주교. 그의 자료에는 다양한 인물과 많은 사건이 등장하는데, 특히 남겨진 여러 서한을 통해 그의 신앙과 신념, 혼란과 고뇌를 잘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다.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1)에는 수록되지 못한 브뤼기에르 주교 관련 서한들을 모든 신자가 쉽게 접할 날이 머지않기를 바라며, 그와 편지를 주고받았거나 그의 조선 선교 여정에 큰 반향을 일으킨 인물들에 대해 간단히 정리하여 소개할 것이다. 이를 통해 독자들이 브뤼기에르 주교를 이해하고 바로 아는 데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 역자 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여정으로 점철된 삶
2023년 10월 21일 브뤼기에르 소(蘇) 주교의 시복 추진 안건이 교황청 시성부의 ‘장애 없음(nihil obstat)’을 받으면서, 교회 매체에서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의 언급을 꽤 자주 들을 수 있게 되었다.2) 조선의 교회가 자체의 온전한 대목구로 인정되도록 한 몸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브뤼기에르 주교의 생애와 영성이 한국교회 신자들 사이에서 재조명받기 시작하였다.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는 1815년 12월 23일 카르카손 교구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지 4년 만인 스물여섯의 나이로 명예 참사회3) 회원이자 대신학교 교수 신부로 활동하였다. 사제 수품 10년 만인 1825년 선교에 소명을 느끼고 고향을 떠나 파리외방전교회에 들어가 파리에서 5개월 동안 수련 후 1826년 2월 보르도 항구에서 자바섬 바타비아(Batavia, 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로 향하는, ‘희망’이라는 뜻의 에스페랑스(l’Espérance)호에 승선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희망호에서 하선한 브뤼기에르 신부는 목적지이자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가 있는 마카오로 가는 배를 찾지 못해 싱가포르를 경유하여 돌고 돌아 마카오 대표부에 도착하였다. 원래 부임지였던 코친차이나(현 베트남)가 아닌 시암(Siam, 현 태국)대목구에 부임하게 되었다. 첫 단추부터 쉽지 않았던 그의 여정은 이제 시작이었다.
브뤼기에르 신부가 1827년 6월 방콕에 도착해 시암대목구장 플로랑(Esprit-Marie-Joseph Florens, 1762~1834) 주교를 보좌하며 신학교 교수직과 본당 사목, 교구 행정, 선교 활동 등에 임한 지 2년 만인 1829년 5월이었다. 파리외방전교회 파리 본부의 1828년 1월 25일 자 공동 서한4)을 뒤늦게 받아본 그는 그전부터 관심을 가져왔던 조선에 선교지 수립과 선교사 파견이 여러 현실적 문제와 이해관계로 늦춰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선교 열망이 다시 끓어올랐다. 자신의 시암 부대목구장 임명이 기정사실화5) 된 것과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마침내 허락된 조선 선교사
당시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으로부터 조선 선교를 제안받은6) 파리외방전교회는 인력 부족, 비용 부담, 불가능에 가까운 조선 입국의 어려움, 그리고 선교지에 파견된 장상들의 의견에 대한 불확신 등 현실적인 이유를 들며 완곡한 거절에 가까운 답을 보냈다.7) 브뤼기에르 주교는 아직 파리외방전교회가 조선 선교지에 대해 확답을 내리기도 전에 정 선교사가 부족하다면 자신이 가겠다고 자원하였다.8) 조선 선교를 애타게 바라던 포교성성은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의 칙서를 통해 1831년 9월 9일 조선대목구를 설정함과 동시에 시암 부대목구장인 브뤼기에르 주교를 조선의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했다.
파리외방전교회 본부는 1832년 2월 선교사 공동 서한9)을 통해, 이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단독 행동이며 조선 선교지는 포교성성 직할이라고 규정하였다. 조선이 파리외방전교회 관할 선교지가 되기를 바랐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2년 11월 9일 포교성성 장관 추기경에게 쓴 서한10)에서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의 회원으로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고 소명하고, 그 이튿날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지도 신부들에게 쓴 서한11)을 통해서는 본부의 오해에 대해 조목조목 해명하였다. 이 서한에는 그 밖에도 그를 시달리게 한 주변 동료 선교사들의 여러 오해 또는 고발에 대한 해명이 담겨 있다. 이 시점에 그가 아직 조선을 향해 출발도 하지 않았다는 점12)에서 앞으로 약 4년 후인 1836년 선종까지의 여정이 얼마나 고되었을지 짐작만 해볼 뿐이다.
앞서 언급한 『서한집』은 17년 전인 2007년 9월에 출간되었다. 그동안 브뤼기에르 주교가 쓰거나 받은, 또는 관련된 서한이 발견되고 연구되어 교회사학계에 소개되었으며, 앞으로도 더 많은 사료가 발견되어 브뤼기에르 주교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퍼즐이 맞춰지기를 바란다. 이번 글에서 소개한 이들은 오직 주님만을 자신의 희망이자 의지처13)로 둔 브뤼기에르 주교가 험난한 선교 여정을 시작하며 두고 간 사람들이다. 이들을 소개하며 해당 문서나 서한의 본문이 출판된 경우 각주나 본문에 표시해 놓았다. 이들 말고도 앞으로 소개될 더 많은 인물들과 브뤼기에르 주교가 느꼈을 감정, 그들이 처했을 상황을 함께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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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양모 · 윤종국 역,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가톨릭출판사, 2007. 본 글에서는 편의를 위해 ‘『서한집』’으로 표기한다.
2) 절판되었던 『서한집』이 최근 재판되었으며, 리길재 선임기자의 기획 특집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는 『가톨릭평화신문』 1745호(2024년 1월 21일 자)부터 현재까지 매주 연재 중이다. 지난 2023년 12월 2일에는 서울대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와 역사와 고문서 관련 실무를 맡은 본 연구소가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소 주교 시복 추진 제1차 심포지엄 : 브뤼기에르 소 주교의 생애와 배경」을 공동 주최하였다. 해당 심포지엄 자료집 전문은 한국교회사연구소 도서관 홈페이지(http://lib.history.re.kr)에서 내려받을 수 있다.
3) 교구 사제 평의회 회원 중 일부로 구성되는 교구의 대표 기관이자, 때에 따라 교구장이 자문과 동의를 구하는 기구.
4) 조현범, 「시암 대목구 선교사 브뤼기에르 신부와 조선 선교지」, 한국교회사연구소 주최, ‘하느님의 종’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소(蘇) 주교 시복 추진 제1차 심포지엄 발표문, 2023. 12. 2, 36~37쪽.
5) 포교성성 장관 카펠라리(Bartolomeo Alberto Cappellari, 1765~1846, 훗날 교황 그레고리오 16세) 추기경은 파리외방전교회 랑글루아(Charles Langlois, 1767~1851) 총장 신부에게 보낸 1828년 1월 26일 자 서한(파리외방전교회 고문서고[AME] v. 238 f. 386)을 통해 자신이 조선 선교지 수립과 관련한 파리외방전교회 의견을 포교성성 경리 담당자에게 전달했으며, 시암 선교사 브뤼기에르 신부의 시암 부대목구장 임명과 대목 승계와 관련하여 교황 레오 12세의 허락을 받았다고 알렸다.
6) 「포교성성 장관이 파리외방전교회 총장에게 보낸 1827년 9월 1일 자 서한」(AME v. 238 ff. 374~375).
7) 「파리외방전교회 총장이 포교성성 장관에게 보낸 1827년 9월 29일 자 서한」(AME v. 238 ff. 375~380).
8) 『서한집』 10신.
9) 조현범, 앞의 심포지엄 발표문, 40~42쪽.
10) 『서한집』 19신.
11) 『서한집』 20신.
12)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2년 11월 18일 조선 선교지로 가기 위해 마카오에서 중국 복주(福州, 푸저우)로 출발하였다.
13) 「브뤼기에르 주교가 부스케 신부에게 보낸 1835년 9월 28일 자 서한」(AME v. 577 f. 331~334, 『서한집』 48신).
14) 귀알리(de Saint-Rome-Gualy) 주교가 1825년 5월 24일 착좌 전에 작성된 해당 서한은 “카르카손의 주교로 임명된 드 귀알리 몬시뇰(à Monseigneur De Guali nommé Evêque de Carcassonne)” 앞으로 보내졌다.
15) 지금까지 부스케 신부의 이름이나 이니셜 등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카르카손 교구 고문서고 소장 『서품 대장(Registre Ordinations)』의 1812년 5월 23일 자 시종품 기록 중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Bartholomeum Bruguière)’ 아래 ‘요한 바오로 부스케(Joannes Paulum Bousquet)’가 바로 브뤼기에르 주교의 동료인 부스케 신부일 가능성이 높다.
16) 여정 중 어려운 사정으로 부모님께 편지를 쓰지 못했을 때는 포교성성 마카오 대표부 경리부장 움피에레스(Raffaele Umpierres, 1788~?) 신부와 마카오 대표부장 르그레즈와(Pierre-Louis Legrégeois, 1801~1866) 신부에게 부탁해 부모에게 자신의 근황을 알리려 노력하기도 하였다(「르그레즈와 신부가 브뤼기에르 주교의 부모에게 보낸 1834년 1월 8일 자 서한」(AME v. 320 ff. 3~4).
[교회와 역사, 2024년 7월호, 글 김정민 효주 아녜스(한국교회사연구소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