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명한 사람이 되길 원하지 않는다. 오늘의 "나"는 내 앞을 살아간 수 많은 선인들이 남긴 지혜의 서(書)들을 읽고 사유하고 소화시켜서 내것으로 만든 거기서 오늘의 나가 된 것임에도 나는 내게 그런 생명의 양식을 준 분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그랬듯이 내 후세의 사람들도 그럴 것이 당연하다. 내가 죽고 나서 세상에 내 이름을 남겼다고 내가 그걸 어디다 써 먹겠는가? 누군가에게 유익하였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본 게시판 <마음의 정원>에 올린 글인데 카톡으로 전파하는 기능이 없어 더 많은 다중이 읽기를 소망하는 마음에서 일반 게시판에 중복해서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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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발표하고 모교 대 강당에서 고교 1, 2학년 생 후배 전원(3학년은 수능준비 중이라 제외)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작가와의 대화>를 주제로 강연을 하는 크나 큰 영광을 얻었습니다. 아버님은 돌아가시는 날까지 필자의 첫 수필집 졸저 <꼴찌로 달리기>를 소중하게 여기시고 지인들이 오면 자랑을 하셨는데, 그것으로 작가된 보람을 필자는 누릴 만큼 누렸다고 생각합니다. 수필가가 된 일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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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남 (1)
예수께서 가르침을 펼치실 때, ‘니고데모’라고 하는 바리세인 관헌을 만났다. 그는 예수께서 행하시는 이적들을 보고 ‘하늘에서 온 선생’인 줄 알겠다고 신앙고백을 한다. 천국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니고데모에게 예수께서는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천국도 모르는데 거듭남은 더욱 알 턱이 없는 니고데모가 사람이 나이가 들어서 어찌 어미 뱃속에 다시 들어가서 태어나겠느냐고 되묻는다.
나는 세 번 거듭났다.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 난 것 까지 하면 네 번이나 다시 태어 난 셈이다. 그 거듭 난 단계적 이야기를 다 쓰려면 긴 회고록이 될지 모르겠다.
중학교 시절을 만화책과 무협지, 소설 읽기로 보내버린 나는 동계진학제도 덕에 고등학교를 진학 할 수 있었다. 실력은 뒤에서 헤아려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였다. 고교로 진학해서도 중학시절과 같은 생활의 연속이었다. 뚜렷이 무엇을 해야겠다는 의식이나 목표가 없었다. 그러나 학년이 올라가니 막연하였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 감 같은 것이 가슴을 눌러오고 있었다.
2/4분기 등록금을 여름 방학이 가까워 오도록 납부하지 못했다. 중학교 이후부터 줄 곳 그런 상태가 반복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부모를 원망하거나 탈선을 하지도 않았다. 공부는 하지 않고 줄기차게 만화나 소설, 무협지 같은 것을 구해서 읽었다. 지금 생각하니 아마 가난이란 현실을 잊으려고 나도 모르게 그리했지 싶다.
어느 일요일 이었다. 등록금을 마련하려고 아버지는 5백 평이나 되는 파밭의 파를 하루 종일 뽑았다. 나도 거들고 동생들도 거들고 온 식구가 하루 종일 파를 뽑아서 작은 단으로 묶었다. 월요일까지 선생님과 약속한 등록금을 가져가야 했다. 모두 500단이었다. 당시는 소가 끄는 우마차가 농촌의 유일한 운반 수단이었다. 고향에서 대구 팔달시장 까지 두 시간을 걸어가야 했다. 새벽 두 시경에 일어나서 아버지가 끄는 우마차 뒤를 따라 갔다. 새벽장이 서기 전에 미리 자리를 잡아야 했다. 종일 일을 하고 새벽에 일어나려니 눈이 떠지질 않았다.
새벽 두시, 별들이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시각이다. 나무도 산도 풀벌레들마저도 잠들어 적막하기만 한 길을 아버지는 수레 앞에서 나는 수레 뒤에서 서로 얼굴도 보지 않은 채 그렇게 걸었다. 별빛이 비치는 뿌연 황톳길을 황소는 요령 소리를 딸랑거리며 느릿느릿 가고 있었다.
새벽 4시, 통행금지 덕분으로 시내 도로에는 차량한대 다니지 않았다. 아버지는 거적을 뜯어 수래 뒤에 소똥을 받는 그물을 달았다. 통행금지 도로를 걸어서 팔달시장 까지 갔다. 아무도 잡아가는 사람이 없었다. 일찍 도착한 덕에 시장은 조용하였다. 어느 건물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았다. 가마니를 펴고 앉아 장꾼들이 올 시간을 기다렸다.
교복을 입은 채로 가마니를 깔고 앉았다. 땀이 식으니 새벽 한기가 돌았다. 아버지가 “배고프지” 하며 말을 건네 왔다. 나는 고개만 옆으로 젓고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얼마 쯤 시간이 지났을까 깜박 잠들었다 싶었는데 시장이 왁자지껄 하였다. 장꾼들이 밀려들어 오고 있었다.
자릿세를 거두러 다니는 경비가 호루라기를 불며 우마차를 빼라고 아버지를 닥달하고 있었다. 사정사정 하여 간신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는 파를 살 사람을 기다렸다. 아버지가 상인 한 사람을 대려 왔다. 한 단에 15원에 팔라는 것을 아버지는 16원을 달라고 사정을 하고 있었다. 내 등록금이 7천600원인 때문이었다. 총 500단, 16원은 받아야 8천원이 되니 등록금 주고 자릿세를 줄 수가 있는 것이었다. 계약이 되었다.
나는 우마차 위에서 파를 내리고 상인은 받아서 자기 트럭에 실었다. 내가 하나요. 하면 상인도 하나요라고 복창하면서 같이 숫자를 헤아렸다. 교복의 윗도리를 벗어놓고 우마차에 올라가서 파를 내렸다. 한 참을 세는데 내가 “ 삼백 일흔다섯”이요 하는데 상인이 “삼백 서른다섯이요”라고 복창한다. 몇 단을 더 내렸는데 상인은 계속해서 40단을 줄여서 복창을 하는 것이었다. 파를 내리다 말고 허리를 펴고 “ 아저씨 지금 몇 단이라 했어요.” 하고 물으니 40단을 줄여서 말한다. 숫자 때문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화가 난 나는 다시 세어 보자고 했다. 교복을 입은 학생이 따지니 상인은 미안한지 슬그머니 자리를 뜨더니 아버지에게 파를 사지 않겠다고 했다. 시간은 벌써 7시를 넘어가고 있었고 장꾼들은 하나 둘 자리를 뜨고 있었다.
아버지는 나를 타이르며 그냥 상인이 요구하는 대로 주라고 하셨다. 받아 쥔 돈이 등록금에 몇 백 원 모자랐다. 아버지는 그 돈을 몽땅 내 손에 쥐어 주시면서, 모자라는 돈은 며칠 후 아버지가 마련해 준다고 선생님께 말씀드리라고 하셨다. 아침도 먹지 못하고 아버지와 헤어져 팔달시장에서 남산동 학교 까지 걸었다.
약은 상인에게 당한 분노와 아무 것도 잡숫지 못하시고 빈 우마차를 끌고 먼 길을 돌아가는 아버지가 서러워서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소리를 죽여 울었다. 한 없이 울었다. 사람들이 쳐다봐도 부끄러운 줄 몰랐다. 아버지의 마음을 져버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도 안 하고 아무 생각 없이 허송세월을 보낸 것을 한 없이 자책 하였다. 그때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나는 그때까지 영어는 알파벳을 다 쓰지 못할 정도였고, 수학은 x+y= 3 이란 말도 이해를 못할 정도로 먹통이었다. 영어 선생님을 찾아 갔다. 당시 영어 부교재가 “표준종합영어”라는 책이었다. 이 책을 다 외우면 대학에 들어갈 수 있겠는지 여쭈었다. 선생님께서는 대뜸 서울 대학교도 갈수 있다고 하셨다. 거의 600페이지가 되는 책을 하루 25페이지 씩 한 달에 한 번씩 읽었다. 책이 두꺼워 다섯 권으로 분리하였다. 처음에는 단어는 물론, 하나부터 열까지 모르는 것뿐이었으니까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그러나 그날 읽어야 할 목표는 반드시 채워 나갔다. 단어 찾는 시간을 줄이고자 모르는 단어는 쪽지에 적어 페이지마다에 풀칠하여 붙였다.
잠이 오질 않았다. 시계도 없었다. 짐작으로 시간을 알았다. 어떤 때는 새벽 한시에 잠들었다가 밝은 달 빛 때문에 30분 만에 일어났다. 아무리 책을 읽어도 날이 새질 않았다. 그날의 목표량을 다 읽고 나서야 비로소 교회 종소리가 들렸다. 교회 종소리는 새벽 4시와 4시 반에 두 번 울렸다. 깨우는 시간, 예배를 시작하는 시간 그렇게 두 번 울렸다.
나는 그 영어 책을 넉 달 만에 다섯 번을 읽었다. 세 번째부터는 쉬웠다. 나중에는 보름 만에 한 번씩 읽을 수가 있었다. 나는 과묵해 졌고 주위를 곁눈질 하지 않았다. 노는 시간 10분 까지 촌음을 아껴 썼다. 수업료도 제때 못내는 처지이니 학원 같은 것은 처음부터 생각지를 않았다. 잠은 점심시간에 학교 책상위에 엎드려서 잠시 눈을 붙였다. 공부하다 죽는 것을 영광으로 삼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모르는 것은 궁금하여 잠이 오질 않았다. 혼자서 연구하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교무실까지 찾아다니며 선생님을 괴롭혔다.
모르면서 아는 채 하는 것이 창피한 것이고, 알려고 노력도하지 않고 계속 모른 채로 지내는 것이 부끄러운 짓이라고 생각 했다. 알파벳을 몰라도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알려고 무진 애를 썼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영어의 첫 문장 첫 글자는 대문자로 쓴다. 그런데 나를 뜻하는 영어 I 는 문장의 가운데서도 늘 대문자로 쓰여 있었다. 이 책 저 책 다 찾아보아도 역시 대문자로 쓰여 있었다.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날이 어서 밝기를 기다렸다. 영어선생님을 찾아 갔다. 선생님은 아직 그것도 모르냐고 웃으시며 영어 문화권은 자기중심적 사회라서 I 는 어디에서든지 대문자로 쓴다고 하셨다. 자신은 만물의 중심이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존재라고 하셨다. 나는 내가 참으로 대단한 존재란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 이후로 나는 굉장히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 되어갔다. 내 고교 졸업 앨범의 사진을 보면 눈빛이 신념에 불타고 있다. 영혼의 각성, 새로운 깨우침,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되었도다.” 라고 한 바로 그 경지였다.
궁구해야 깨달음에 이른다. 인수분해도 모르던 수학을 미적분뿐만 아니라 벡터와 스칼라를 구해 낼 줄도 알게 되었다. 수학 정석 Ⅱ, 그 두꺼운 수학책을 3번이나 풀었다. 모든 책은 반복해서 다섯 번씩 읽었다. 책 한권을 다섯 번 정도 읽으면 어느 페이지에 무슨 내용이 나온다는 것을 훤히 알 정도가 된다. 같은 책을 여러 권 사는 행위는 집중력을 낭비하는 행위다. 모든 내용이 총 망라된 책 한권을 잡고 100% 이해 될 때까지 매달렸다. 암기를 중심으로 하였지만 이해가 되지 않으면 암기도 되질 않았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암기과목을 공부하였다. “새 국사”란 500페이지가 넘는 참고서를 하루 만에 절반씩 읽었다. 나의 역사적 지식은 전부 그때 읽은 기억들이다.
나는 지금도 공부라면 자신이 있다. 암기해야겠다고 결심한 책은 먼저 목차를 외운다. 목차를 세 번 정도 백지에 쓰면서 외운다. 그 다음 본문을 공부하면 앞에 익힌 것을 잊지 않을 뿐더러 다음에 무엇이 나온다는 것을 안다. 책 한권의 골격과 그 연결고리를 알게 되는 것이다. 공부는 공부하는 이치와 방법을 터득하면 쉽다. 본질을 궁구하여 그 문리를 터득하고 나면 나머지는 변죽이다. 세세히 암기하지 않아도 무슨 사건들이 나올 것인지를 짐작으로도 알게 된다. 나는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기쁨 때문에 잠이 오질 않았다.
내가 수학에 취미를 잃은 것은 중학교 들어가면서 수학 책에 영어가 나온 때문이다. x + y = 3 이란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영어시간도 아니고 수학시간도 아닌 이상한 시간이란 생각에 흥미를 잃었던 것이다. 그 의미를 고등학교 2학년 2학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모르는 하나를 x라 한다. 그리고 다른 모르는 하나를 y로 한다. 그 둘을 더하면 3이다. x와 y에 다른 언어적인 의미는 없다. ‘내가 그렇게 간주한다.’는 그 간단한 의미를 깨달은 그날 밤은 너무 기뻐 잠이 오질 않았다.
모든 사물에는 이치가 있다. 그 이치를 깨달으면 나머지는 저절로 알게 된다. 나는 늦게 시작하였지만 고등학교 2학년 2학기 때, 18세의 나이에 비로소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경지에 이른 것이었다. 근원을 밝히려는 마음에 불타고 있었으니 물리, 화학, 생물, 지학 기타 그런 공부들도 크게 어려울 게 없었다. 영혼이 크게 한번 각성 된 사람은 절대 다시 몽매한 옛날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 글은 내가 첫 번째 거듭난 이야기이다. 내 자랑을 하고자 쓴 것이 아니고 “거듭남”을 말하고자 쓴 것이다. 내가 무슨 일이든 한번 시작하면 집념을 보이는 것도 이때 깨달은 경험과 습관 때문이다. 인생에서 거듭남을 경험하지 못하면 결코 진리에 이르지 못한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불쌍한 영혼이 되고 만다.
진리란 무엇이냐? 천국이다. 천국은 또 무엇이냐? 구속이 없는 자유로운 곳이다. 무지로부터의 자유, 결핖으로부터의 자유, 부귀공명으로 부터의 자유, 질병과 사망으로 부터의 자유, 이 땅의 그 어떤 것으로도 내 영혼을 얽어 매지 못하는 경지. 그곳이 바로 천국이다.
돌아보면 정말 진리(=대오각성)가 나를 자유롭게 하였다.(2008.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