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에게 사과하다.
아침 공양을 하다가 혀가 깨물렸다. 피가 조금 날 정도니 꽤 세게 물렸나 보다. 조심해서 공양을 마저 하고 절 아래 통방아 정원까지 산책을 나섰다. 상처 난 혀가 계속 욱신욱신 아려왔다. 평소에 그렇게 음식물을 이렇게 굴리고 저리 돌리면서 자유자재하게 움직이더니, 어쩌다가 스텝이 꼬여 이렇게 아픔을 준단 말인가? 그렇다고 어쩌다 한 실수를 혼낸다며 더 세게 물어봤자. 나만 손해고. 하편으론 이 혀가 존재감을 나타내기 위해 일부러 그랬지 않나 싶기도 했다.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도대체 주인은 귀한 줄 알지 못하는 듯하니 시위를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알아달라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문제와 갈등은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오직 내 생각만 옳고, 방법이 옳고, 결과가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누가 물었다. 불교가 무엇이냐고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네, 부처님께선 평생 가르친 법문을 두 글자로 줄이면 ‘배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팔만대장경은 어떻게 하면 서로 다투지 않고 화합하면서 잘 살아갈 수 있는지, 그 방법을 근기에 맞게 풀어 놓는 것입니다. 그렇다 보면 자연스럽게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행복하게 되는 것이지요.” 배려? 그것 쉽지 않다. 먼저 나를 낮추고 상대방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생각이 다른 사람을 설득하려면 지혜로워야 한다. 지혜란 책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몸으로 깨닫는 수행과 인과의 경험으로 얻어진다. 나만 아는 고집불통이 아닌,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이 상생하는 것이다.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더라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겠지, 한번 들어나 보자.’라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산책길에서 돌아오며 잠시 근무태만(?)했던 혀에게 사과했다, “혀야, 미안하다. 네가 그렇게 애쓰는 줄도 모르고 깨물린 고통만 생각해서 잠시 원망했구나. 괜찮아, 내가 하는 실수에 비하면 넌 아무것도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 뭐.”
동은스님의 눈먼 보리와 도둑고양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