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람에게 가장 치욕적인 것은
사람이 짐승으로 비유될 때일 것입니다.
성경에 가득한 짐승의 비유는 인권의 모독이요,
그래서 소위 말하는 인권 운동가들은 성경을 가장 싫어합니다.
자칭 인권 공화국, 그 자유의 해방구는
인권의 옷을 입은 벌레들의 코스푸레, 그 의식의 굿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탈을 쓴 짐승,
흔히들 양의 탈을 쓴 이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마7장 6절 말씀에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개와 돼지는
개 같은 사람, 돼지 같은 사람을 일컫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마태복음7장 15절 말씀에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여기서 이리는 거짓 선지자요,
양의 옷을 입은 광명한 천사를 가장한 사탄의 일꾼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2절 말씀에서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개는 행악자들이요,
복음을 방해하는 유대주의자며,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손할례당입니다.
또한 바울은 사도행전 20장 29-30절 말씀에서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애서 사나운 이리는
오늘날 이단과 사이비의 종교적 탐욕에 목마른 그 사기꾼들입니다.
베드로는 벧후2장 22절 말씀에서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개와 돼지는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자들 곧 배신과 배교자요,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음란으로 육체의 정욕 가운데 유혹된 자들입니다.
사도 요한은 계시록 22장 15절 말씀에서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개는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와 동격인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는 개같은 사람입니다.
개로 분류된 작자와 그 동격인 무리들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그 통치를 거역하고 구원의 기쁨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시야 선지자는 이사야서 56장 10-12절 말씀에서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에 대한 비유의 말씀으로 탐욕과 몰지각한 목자들을 책망하며 경고하였습니다.
☞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들이요 누워 있는 자들이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
다 제 길로 돌아가며 사람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마시자
내일도 오늘 같이 또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사56:10-12)
또한 이사야서 66장 3-4절 말씀에서
타락한 성전의 제의식을 개의 목을 꺾고 돼지의 피로 제사하는 것과 같다고 종말론적인 경고를 하였습니다.
☞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이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하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이 하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행하는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나 또한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듣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며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라 하시니라(사66:3-4 )
잠언서 11정 22정 말씀은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 코에 금 고리 같으니라고 교훈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돼지는 잠언서의 표현 그대로 기생의 옷을 입은 간교한 계집이요
에스겔서의 말씀대로 하면 네가 네 화려함을 믿고 네 명성을 인하여 행음하되
무릇 지나가는 자면 더불어 음란을 많이 행하므로 네 몸이 그들의 것이 되도다는 말씀이요
나훔서의 말씀대로 마술의 주인 된 아리따운 기생이 음행을 많이 함을 인하여 그 음행으로 열국을 미혹하고
그 마술로 여러 족속을 미혹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외에도 인간의 탈을 쓴 짐승에 대한 말씀은
시인의 글이 되고 잠언의 교훈이 되었으며 선지자의 신탁이 되었습니다.
최근 언론에서 다룬 종교의 종말론적인 타락은
우리 사회의 쓰레기 더미가 되었으며 오물을 흘려보내는 하수관이 되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축복의 통로, 그 이면은
탐욕으로 가득한 이단과 사이비의 굴레가 되었습니다.
최근 PD 수첩과 그알에서 다룬 불교계의 타락상과 기독교 이단의 창궐은
종교의 옷을 입은 개와 돼지의 추태, 그 천태만상이었습니다.
고대로부터 원래 종교는 부패와 타락의 대명사요,
종교가 거룩할 것이라는 생각은 소위 말하는 경전의 위상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 위에 세워진 유대교의 타락은 성서의 환상 골짜기를 이루었고
바이블이라는 신구약의 성서가 완성되면서 카톨릭은 부패한 천년의 역사를 기록하였습니다.
종교 개혁으로 탄생한 개신교는 참혹한 종교 전쟁으로 얼룩졌으며
자유주의 신학과 인본주의신학과 다원주의 신학으로 종말론적인 타락의 그 벼랑과 마주하였습니다.
죄악을 탐닉하는 타락의 본성은 종교의 허울이요,
하나님의 일꾼을 가장하는 삯꾼들의 본말이 전도된 목적 지향적 가치의 허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흔히들 부정한 일로 언론과 방송에 오르내리는 종교인에 대한 기사에 민감한 사람들은
어느 권사가 화장실에서 나오는 목사를 보고 실망했다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신부나 목사나 스님 등 어느 종교인이든 질풍노도의 사춘기 시절을 보냈고
첫 사랑을 비롯한 많은 이성 친구를 경험하였으며 청년시절 환락가의 유흥을 즐겼고
또 포르노에 함몰되었습니다.
출생 때부터 나실인으로 태어났던 삼손도
이성의 유혹과 정욕적인 삶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종교인의 삶은 거룩할수록 흰놈의 골짜기를 가졌고
돈과 권력과 명예를 가진 정상의 자리는 복마전, 그 타락의 온상일 뿐입니다.
성서지대 바알브올의 이야기는
타락할 수 밖에 없는 모든 종교의 표상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이룬 비느하스의 창끝은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영광을 얻었지만
그 제사장 직분의 후손은 사사 시대의 암흑을 장식하였습니다.
약속의 가나안 땅에서 모세의 율법을 계승하지도 못하였고 절기의 뿌리를 내리지 못한 실로의 성막은
엘리 가문의 종말론적인 타락과 그 심판의 끝자락을 남겼습니다.
실로 성소의 파괴와 엘리 가문의 파문한 그 자리에는
아론 후손의 제사장을 대신하여 제사장 직분을 요구하다가 심판받은 고라의 후손 레위인 사무엘이 섰습니다.
뿐만 아니라 솔로몬 시대 아론 후손의 마지막 제사장이었던 아비아달은 제사장직을 파문당하고
고향 아나돗으로 쫓겨난 그 곳에서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성전을 도적의 소굴이라며 그 신탁을 외쳤습니다.
다윗시대 제사장 사독은 역대기와 에스라서에서 아론의 후손 제사장이라고 하였지만
에스겔서는 레위인 제사장의 표상으로 삼았습니다.
성서의 갈등 구조는 그 심오한 난제를 낳았고
오늘날 이신칭의, 그 믿음의 의는 영생을 얻는 구원의 능력이 아닌
그 은혜의 생명력을 완전 상실한 종교적 신념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이단과 사이비의 굴레를 끄는 동아줄이 되었습니다.
이쯤해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말며 돼지 앞에 진주를 던지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양의 탈을 쓴 삯꾼 목자인 사나운 이라와 어그러진 말을 따르게 하는 자들에 대한
강력한 경고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최종 문제를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을 따르는 무리의 혼란으로 정리하고 올바른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이처럼 종교의 타락에는 그 이유가 있고.....
뿌리없는 나무의 마른 가지에 영생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당근입니다.
사도 바울은 초대 교회 당시에도
에베소 교회와 고린도 교회와 갈라디아 교회를 비롯하여
디모데 전후서를 통하여 디모데에게 다른 복음과 이단에 대한 종말론적인 경계를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