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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에게 인정받는 종
39: 1~6
○ 애굽에 내려간 요셉
1.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그를 사니라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시1:3, 잠10:6
4.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 창39:21
5.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6. 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 삼상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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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해답을 가지신 하나님
요셉은 형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렇게 되기 직전까지는 열 두 아들 중 아버지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꿈을 꾸며, 희망에 부푼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집에서는 왕자처럼 살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루아침에 노예로 팔려가서 남의 집의 종이 되었으니 그가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환경과 신분의 급격한 변화는 당사자에게 큰 충격을 줍니다. 주인이었던 이가 하루 아침에 종이 되는 변화를 겪고 나면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일을 맞이하면 어떤 경우는 그 충격으로 인해 쓰러지기도 하고, 전신마비가 되기도 하고,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하고, 정신병에 걸리기도 하는 등 폐인이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런 신분과 환경의 변화에 쓰러지지 않고 더 강건해 지는 줄로 믿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시위 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그를 사니라”
억울하게 최악의 상황에 떨어진 요셉. 지금 요셉을 도울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주변에 도울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의 미래는 닫혀버렸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떤 운명이 닥쳐올지 그 자신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깜깜한 한 밤중과 같은 상황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2가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첫번째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라는 질문입니다. 요셉이 무엇을 잘못 했길래 갑작스럽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해답은 요셉에게 있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고난의 해답이 여러분에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에서도 이런 일들이 펼쳐지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이 고난의 이유를 설명해주시기를 바라게 됩니다. 요셉의 경우에도 미리 그에게 ‘이 모든 것이 총리대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한 과정이다’라고 알려준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나님께서 문제의 실마리에 대해서 한 마디만 해주신다면 13년이 아니라 1백년도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경우도 하나님으로부터의 대답은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한 밤중과 같은 상황에 던져집니다. 요셉이 바로 그런 경우였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요셉이 약관 30세에 천하를 호령하던 이방 나라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였지만 요셉이 그것을 알 까닭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가끔 인생을 살아가는 가운데 그토록 착한 사람이 왜 고난을 겪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해답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손길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믿을 때 우리는 고난과 역경과 어려움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질문 하나는 이렇습니다.
‘요셉은 수 많은 집이 있는데 왜 보디발의 집에 가게 되었는가?’라는 것입니다.
‘수 많은 가능성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그곳일까?’
그 해답도 보디발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 해답 역시 하나님께 있습니다.
보디발의 집이 선택된 이유는 요셉이 바로를 만나는 끈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섭리와 경륜을 보게 됩니다. 물론 우리의 삶에는 기계적인 예정론은 없습니다. 모든 섭리와 예정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지나온 모든 과거의 해답은 한 가지입니다. ‘예수 만나기 위해서’라는 것이 그 해답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서 지금까지의 모든 성공과 실패와 좌절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야만 이 사건들 가운데 의미가 생깁니다.
삶의 의미, ‘예수를 위해서’
그러면 우리의 인생의 앞으로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를 위해서’가 그 해답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결혼하게 되거나, 아기를 낳거나 등등 어떤 상황이 미래에 펼쳐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은 ‘예수를 위해서’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 나의 과거가 있었고, 예수를 위하여 나의 미래가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인생은 무척이나 흥분되고 재미있고 가치있는 것이 됩니다. 사영리 전도지의 제1원리를 기억하십니까?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셔서 당신의 생애를 위하여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것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는 성경 전체의 요약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여러분을 향하여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에서 이 사실을 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성경은 요셉의 생애에 대해서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난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것이 오히려 문제입니다. 고통이 저주 그 자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께 계시지 않는 것이 저주입니다. 즉 반대로 보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복입니다. 요셉의 형편과 신분의 변화는 큰 고통이었지만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는 오히려 만사에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람의 특징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날마다 순간마다 그 사람과 동행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임마누엘의 믿음’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나와 또 내 자녀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민족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 여러분 한분 한분의 하나님임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죽어도, 실패해도, 병이 들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죽음조차도 두렵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곧 만사형통입니다. 그분이 함께 하시고 우리의 삶의 주인이 되시면 무엇을 하든지 만사형통할 것입니다. 요셉은 어릴 때 일찍 어머니를 여의었습니다. 그의 어린시절에서의 놀라운 사실은 요셉이 어린시절부터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어렸지만 그의 마음은 하나님으로 가득했던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사랑은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생각했기 때문에 정직한 성품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직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순결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순종하는 삶을 살 수가 있었습니다.
형통한 삶의 비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라는 구절의 말을 요셉의 입장에서 본다면 요셉이 하나님을 잊은 적이 없다는 의미가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책임이라고만 생각하게 됩니다. 그 반대의 입장, 즉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한다고 생각해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잊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요셉은 한 순간도 하나님을 잊어버린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한 순간도 요셉과 떨어져 있지 않았다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아마도 교회를 들어서는 순간부터 하나님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비록 고통이 있고, 고민이 있을지라도 적어도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루를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계속해서 하나님과 동행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속에 끊임없이 하나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결과는 만사형통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룰 것입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할 것입니다. 여기서의 ‘무슨 일’이란 감옥에 들어가는 일일 수도 있고, 병이 드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좋은 일로만 여기기 때문에 시험에 빠져듭니다.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고 헌신했는데 결과가 엉망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관심은 돈을 버는 일, 그리고 성공하는 데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어떤 경우에도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말했습니다. 감옥에 있든지, 자유하든지, 죽든지, 살든지 상관없이 마음속에 하나님이 가득한 것이 만사형통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죽음이 와도 두렵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사형통이란 고난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뚫고 이겨내는 것입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갔지만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고, 그 믿음이 어떤 환경에서도 만사형통했기 때문에 그는 노예의 신분을 가지고도 주인처럼 살았다는 놀라운 사실을 보게됩니다. 요셉은 주인처럼 떳떳합니다. 그의 얼굴에는 비굴함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환경의 주인공이 됩니다. 만사는 믿음을 가진 사람을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세상은 돈이 있고, 권력을 가진 사람을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을 중심으로 세상은 움직이는 것입니다.
요셉의 삶속에 계신 하나님
3절을 보십시오.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요셉의 주인이 요셉의 삶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과 여러분의 가족들이 여러분의 삶속에서도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라고 모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교회를 볼 때 하나님이 이 곳에 살아계신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곳이 참 교회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이를 돕고, 서로 용서하고 사랑할 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기적일 때, 서로 싸울 때 어떻게 하나님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포기하고 순종하고 남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할 때, 초자연적인 일을 자기를 포기하며 할 때 ‘하나님이 계신다’고 세상 사람들은 말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도 요셉처럼 두려움이 없어지기를 바랍니다. 결과는 상관없이 어떤 경우에도 당당하게 살아나가기를 바랍니다.
요셉은 당당하면서도 겸손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당당하지만 교만합니다. 요셉은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옳은 말을 하고도 상처를 주게 됩니다. 겸손한 사람은 다른 이를 위로합니다. 요셉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남을 지배하려들지 않는 겸손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17세의 어린 나이였지만 무슨 일을 해도 지혜롭게 일했을 것입니다.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 있는 것을 ‘지혜가 있다’라고 합니다. 지혜가 있는 사람은 일의 전후의 상황을 파악하고는 간단하고 능률적으로 일을 쉽게 처리합니다. 일을 못하는 사람은 일을 복잡하게 처리합니다. 핵심을 파악하느냐 못하느냐의 차이를 보입니다. 요셉은 능력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일에 있어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이런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요셉은 이렇게 겸손하고, 지혜롭고, 밝은 얼굴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에게도 구원받은 자로서의 밝은 자아상이 필요합니다.
4∼6절을 보십시오.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
요셉은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복을 받게 합니다. 진정한 복이란 자신으로 인해 다른 이가 복을 받는데 이르는 것입니다. 요셉 덕분에 주인의 가정이 복을 받게 됩니다. 우리 자신이 있는 곳마다 우리로 인하여 복을 받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제 보디발은 요셉을 자신의 동역자로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그를 가정 총무로 삼습니다. 그에게 모든 소유를 맡깁니다. 돈을 맡길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을 향한 신뢰를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요셉처럼, 선한 청지기처럼 직장에서 인정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민족 때문에 세계가 살아나기를 원합니다. 우리 때문에 북한이 복을 받고, 여러분 때문에 여러분의 이웃이 복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복을 받는 사람은 그 사람을 헐뜯으려 던 사람들이 주변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그리고 복은 그의 밭의 소유까지 이르게 됩니다. 복이란 인간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에 목말라하는 이유는 스스로가 복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가 복을 가지려고 하면 할수록 복은 사라집니다. 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복을 가지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을 가지려고 하십시오. 하나님을 생각하십시오.
여러분,
복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을 복받게 해주는 것이 진정한 복입니다. 물론 자신도 복을 받아야 하겠지만 진정한 복의 본질은 다른 이에게 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 28장 1, 2절에 복을 받는 비결에 대해서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이 말씀은 ‘네가 먼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를 다 순종하고, 우상을 섬기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준비하신 모든 복을 네게 모두 쏟아 부어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실 때 우리로 하여금 세상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해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복을 부어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 하신 복
이 복을 구체적으로 신명기 28장 3∼13절에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네 대적들이 일어나 너를 치려 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여호와께서 명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면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너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세계 만민이 보고 너를 두려워하리라 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육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으로 많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하나님은 이런 복들을 우리를 위해 준비하셨습니다. 여러분에게 이 복을 받을 기대감이 있기를 바랍니다. “나에게 천국은 보장되어 있다. 나는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복받을 자로 만들어주실 것이다”라는 기대감을 갖기를 바랍니다. 모든 이에게 흘러 갈 복의 근원으로 나를 부르셨다고 생각하면 정말 행복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요셉과 같은 모습으로 살게 되면 세상은 변할 것입니다.
>출처/저자| 하용조 목사
출처: 성경 벌레들 원문보기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