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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말씀/ 마가복음 14:27-72 요절/ 마가복음 14:36 | 2024. 9. 8 | |
마가복음 제 23 강 |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의 하나는 기도입니다. 기도 없이는 영적 세계를 알 수 없고 생명역사를 이룰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남겨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새도록 기도하심으로 기도란 무엇인가를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기도에 대해서 새롭게 눈을 뜨고, 한 영혼을 살리는 역사에 다시 도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마지막 식사를 마치시고 감람산으로 가는 도중에 제자들에게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그동안 한 식구처럼 지냈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스가랴서 말씀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 목자 예수님을 치실 때 양들은 다 흩어질 것을 예고한 것입니다. 양들이 흩어지는 사건은 예수님도 감당키 힘든 일이요 실패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흩어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부활과 제자들과의 재회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예수님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살아나실 것입니다. 그리고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 회복의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멀리 보지 못하고 즉시 반발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버릴지 몰라도 나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라고 장담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반에 대해 리얼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몇 시간 후에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할거라고 하시니 베드로는 힘 있게 말했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베드로뿐만 아니라 모든 제자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베드로처럼 우리도 자신의 연약함을 알지 못하고 큰 소리 치며 자신을 과신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흙으로 지어진 연약한 존재입니다. 자기 말을 지키지 못하고 무너지고 실패하고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저는 요즈음 제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비참한 죄인인지 깊이 깨닫고 있습니다. 승승장구 잘 나갈 때는 나의 연약함을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실패와 절망을 통해서 나의 연약함 깨닫고 다시 주님 앞에 나아가게 됩니다. 제가 날마다 오직 주님의 은혜만을 붙들고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이르러 아홉 명의 제자들에게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셨는데 그들에게 자신의 연약함과 고민을 진솔하게 보이시며 기도 요청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체를 가지셨기에 십자가 죽음 앞에서 눌리시고 괴로워하셨습니다. 가장 힘든 순간에 예수님은 자신이 기도하실 뿐만 아니라 핵심멤버 세 제자들에게 기도 요청을 하실 만큼 겸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조금 더 나아가서 땅에 엎드려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는 것입니다. 기도는 서서 할 수도 있고, 앉아서 할 수도 있고, 걸어가면서 할 수도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 이것이 기도입니다. 하지만 큰 문제를 가지고 기도할 때는 엎드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자신을 철저히 낮추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36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예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신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반발하거나 원망을 쏟아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절대적으로 믿고 친밀한 관계 속에서 기도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소원을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이 잔은 십자가 죽음의 잔입니다. 예수님은 할 수만 있으면 십자가를 피하고 싶었습니다. 육체를 가지신 예수님이 십자가 형벌을 감당하는 것은 정말 끔찍하고 고통스런 일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잔 마시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다면 그렇게 해 주시도록 간구했습니다. 기도할 때 우리 자신의 소원을 감추지 않고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나의 소원이 하나님의 소원과 맞는 것인지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기도란 무엇입니까? 기도는 내 뜻과 내 소원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소원을 찾는 것이요, 내 자신을 하나님께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뜻을 고집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뜻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소원은 너무나 분명했고 변경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의 잔을 마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간구하며 자신을 하나님께 굴복시켰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찾고 심령 깊이 받아들이고, 그 뜻에 순종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어떤 신자들은 기도란 나의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알려서 관철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뜻과 자기 소원을 이루는 것이 기도입니까? 아닙니다. 물론 어릴 때는 떼 쓰는 기도도 잘 들어주십니다. 하지만 거기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더 깊은 세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요 하나님께 내 자신을 굴복시키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내 자신과의 싸움이요, 나를 넘어뜨리고자 하는 사탄과의 싸움이요 치열한 영적 전투입니다. 기도는 시간을 드려야 하고 마음을 드려야 하고 영혼까지 쏟아부어야 하는 힘든 노동입니다. 성경과 신앙서적을 통해서 기도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거룩한 독서를 한다고 해서 기도의 사람이 되고 기도의 능력을 덧입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하는 행동과 기도하는 삶을 통해서만 기도의 사람으로 성장하고 기도의 깊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가을은 독서하기 좋은 계절일 뿐 아니라 기도하기 좋은 계절입니다. 우리가 이번 가을에 기도의 세계를 경험하고 내 자신과 가정과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갈 수 있길 소망합니다.
세 제자들은 예수님의 간곡한 기도 요청대로 깨어 기도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 자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큰 소리쳤던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우리가 깨어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사단의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사단은 우는 사자와 같이 공격하기도 하고,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여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단의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는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기 때문에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마음으로는 기도하고 싶은데 육신이 약해서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하며 기도를 소홀히 합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타협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사는데 하면서 다수의 논리에 매몰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는 고독한 것이며 힘든 것입니다. 기도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습니다. 당장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기도를 그토록 많이 하고 혼을 쏟아 부었는데도 응답이 없고 어떤 변화도 없으면 낙심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게 됩니다(갈6:9).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입니다(데전5:17).
예수님은 더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같은 기도제목으로 밤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응답 받기까지 마음의 확신이 들어올 때까지 위로부터 능력을 덧입기까지 기도의 씨름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오사 제자들을 보셨습니다. 그들은 눈이 심히 피곤하여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마치시고 세 번째 오사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님은 기도를 통하여 새 힘을 얻으셨습니다. 기도 하기 전과 기도 한 후 예수님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지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향해 당당하게 나아가십니다.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지느냐 아니면 괴로운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느냐는 기도의 씨름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순간마다 쉽고 편한 삶을 살라는 유혹을 받습니다. 친구들은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봐’ 라고 부추깁니다. 이렇게 유혹이 많은 세상에서 캠퍼스에 올라가 전도하고 한 양을 먹이는 것은 너무 힘들고 내 인생을 허비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 잔을 옮겨 주십시오’ 라는 기도가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하지만 이 잔을 마시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은 무리와 제자들에게 제자도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가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8:34) 기도의 시간을 확보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고 내 자신을 하나님께 복종시키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워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고난의 잔을 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마심으로 한 생명을 살리는 역사에 동참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유다의 인도로 중무장한 군인들이 현장에 나타나 예수님을 체포하고자 했습니다. 그때 곁에 서 있는 자 중의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렸습니다. 그는 충성심이 넘쳐서 목숨 걸고 예수님을 보호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성경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을 자발적으로 원수들에게 내어주십니다. 측근의 배반과 십자가 처형은 모두 구약에 예언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한 청년이 베옷을 입고 예수님을 따라가다가 예수님이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갔습니다. 이 청년은 예수님에게 유월절 만찬 장소를 제공해 준 마가입니다. 그는 자신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었지만 두려움 때문에 도망갔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생생하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할 때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두려움의 세력에 잡힐 때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마가는 여러 번의 실패를 통해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오직 주님의 은혜를 붙들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은혜에 붙들렸을 때 그는 연약함과 두려움을 이기고 용기와 스피릿 넘치는 삶, 열매가 풍성한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예고하신대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졌습니다. 베드로는 도망갔다가 예수님이 걱정 되서 다시 돌아와 멀찍이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공회는 증언을 듣기도 전에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많은 고소가 있었지만 예수님은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하지만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라는 대제사장의 질문에 예수님은 ‘내가 그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인정하시고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그들이 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 승천하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고 다스리신다는 것과 마지막 날 최후의 재판장으로 재림하셔서 심판과 구원역사를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재판 받는 피고인이었지만 위축되지 않고 부활과 재림의 복음을 증거하시며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초대하셨습니다. 하지만 대제사장은 귀를 막고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를 범한 자로 규정하고 분노의 표시로 자기 옷을 찢었습니다. 예수님은 시편과 이사야서의 예언대로 침 뱉음과 조롱과 주먹질을 당하셨습니다.
베드로는 힘든 순간에 제자로의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철저하게 실패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의 여종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베드로는 두 번째도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며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어제 밤에 그렇게 큰 소리쳤던 천하의 베드로가 이렇게 예수님을 철저하게 부인하다니 세상 일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충성심이 특별했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다는 것은 누구라도 예수님을 부인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일제 강점기에 많은 신자들이 신사참배에 참여했습니다. 인간은 참으로 나약한 존재입니다. 두려움의 파도가 밀려올 때 요동하지 않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하지만 베드로의 인생은 배반자의 인생, 실패자의 인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가 세 번째 예수님을 부인했을 때 닭이 두 번째 울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정확하게 성취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두 번 째 닭 울음 소리를 듣고서야 베드로는 정신이 번쩍 들었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울었습니다. 통한의 눈물이요 회개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는 실패를 통해 자신의 연약함과 죄성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연약함과 실패를 아시고도 오래 참으시고 그를 사랑의 눈으로 지켜보시며 그를 위해 기도해주신 예수님의 사랑에 감동이 되었습니다. 유다는 자신의 죄만 생각하고 정죄감에 시달리다가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회개하고 예수님의 은혜를 붙들었습니다.
실패한 사람들은 상처가 깊고 오래 갑니다. 스스로 일어서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날 때 자신의 연약함과 죄성을 인정하고 오직 예수님의 은혜를 붙들게 됩니다. 그렇게 볼 때 실패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요, 실패했다고 인생이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복과 치유의 길은 말씀이 생각나는 것이며, 주님의 은혜에 붙들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영적 전쟁터에 있는 우리에게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했습니다(엡6:17). 하나님의 말씀은 가장 강력한 무기로서 성령의 검입니다. 성령은 말씀을 통해서 회복과 치유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짐으로서 실패의 자리에서 일어나 회복의 역사, 치유의 역사를 이루고 능력과 기쁨과 희망이 가득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악한 세력들이 많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빠뜨리게 하는 것들이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마음은 요동하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내 마음을 다스리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도 그것을 실천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기도의 사람이 되고 기도의 능력, 말씀의 능력,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날마다 기도의 씨름을 하고 우리 삶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