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압록강에서
신경림
강은 가르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을 가르지 않고
마을과 마을을 가르지 않는다.
제 몸 위에 작은 나무토막이며
쪽배를 띄워 서로 뒤섞이게 하고,
도움을 주고 시련을 주면서
다른 마음 다른 말을 가지고도
어울려 사는 법을 가르친다.
건너 마을을 남의 나라
남의 땅이라고 생각하게
버려 두지 않는다.
한 물을 마시고 한 물 속에 뒹굴며
이웃으로 살게 한다.
강은 막지 않는다.
건너서 이웃 땅으로 가는 사람
오는 사람을 막지 않는다.
짐즛 몸을 낮추어 쉽게 건너게도 하고,
몸 위로 높이 철길이며 다리를 놓아,
꿈많은 사람의 앞길을 기려도 준다.
그래서 제가 사는 땅이 좁다는 사람은
기차를 타고 멀리 가서 꿈을 이루고,
척박한 땅밖에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강 건너에 농막을 짓고 오가며
농사를 짓다가, 아예
농막을 초가로 바꾸고
다시 기와집으로 바꾸어,
새터전으로 눌러 앉기도 한다.
강은 뿌리치지 않는다.
전쟁과 분단으로
오랫동안 흩어져 있던 제 고장 사람들이
뒤늦게 찾아와 바라보는
아픔과 회한의 눈물젖은 눈길을
거부하지 않는다.
제 조상들이 쌓은 성이며 저자를
폐허로 버려 둔 채
탕아처럼 떠돌다 돌아온
메마른 그 손길을 따듯이 잡아 준다.
조상들이 더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하여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수없이 건너가고 건너온
이 강을 잊지 말란다.
강은 열어 준다, 대륙으로
세계로 가는 길을,
분단과 전쟁이 만든 상처를
제 몸으로 말끔히 씻어 내면서.
강은 보여준다,
평화롭게 사는 것의 아름다움을,
어두웠던 지난날들을
제 몸 속에 깊이 묻으면서.
강은 가르지 않고, 막지 않는다.
《32》어둠 속으로
신경림
앞서거니 뒤서거니 모두들 가고있다
꽃으로 피어 서로 시새우던 안타까움을 두고
뜨거운 햇볕에 몸을 익히던 어려움을 잊고
달빛과 이슬에 들뜨던 부끄러움을 버리고
한낱 과일로 떨어져 푸섶에 썩기 위하여
섬돌에서 우는 귀뚜라미 울음도 듣지 못하는
가을 하늘을 나는 기러기떼도 보지 못하는
깊고 긴 어둠 속으로 허둥대며 가고 있다
《33》여름날
신경림
마천에서
버스에 앉아 잠시 조는 사이
소나기 한 줄기 지났나보다
차가 갑자기 분 물이 무서워
머뭇거리는 동구 앞
허연 허벅지를 내놓은 젊은 아낙
철벙대며 물을 건너고
산뜻하게 머리를 감은 버드나무가
비릿한 살냄새를 풍기고 있다
《34》이런 내가 되어야 한다
신경림
일상에 빠지지 않고
대의를 위해 나아가며
억눌리는 자에게 헌신적이며
억누르는 자에게 용감하며
스스로에게 비판적이며
동지에 대한 비판도 망설이지 않고
목숨을 걸고 치열히
순간순간을 불꽃처럼 강렬히 여기며
날마다 진보하며
성실성에 있어
동지들에게 부끄럽지 않고
자신의 모습을 정확히 보되
새로운 모습을 바꾸어 나갈 수 있으며
진실한 용기로 늘 뜨겁고
언제나 타성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며
모든 것을 창의적으로 바꾸어내며
어떠한 고통도 이겨낼 수 있고
내가 잊어서는 안될 이름을 늘 기억하며
내 작은 힘이 타인의 삶에
용기를 줄 수 있는 배려를 잊지 말고
한 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는 역사와 함께 흐를 수 있는
그런 내가 되어야 한다
《35》장미에게
신경림
나는 아직도 네 새빨간
꽃만을 아름답다 할 수가 없다
어쩌랴, 벌레 먹어 누렇게 바랜
잎들이 보이는데야
흐느끼는 귀뚜라미 소리에만
흘릴 수가 없다
다가올 겨울이 두려워
이웃한 나무들이
떠는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꽃잎에 쏟아지는 달빛과
그 그림자만을
황홀하다 할 수가 없다
귀기울여 보아라
더 음산한 데서 벌어지는
더럽고 야비한 음모의 수런거림에
나는 아직도
네 복사꽃 두 뺨과
익어 터질 듯한 가슴만을
노래할 수가 없다.
어쩌랴, 아직 아물지 않은
시퍼런 상처 등뒤로 드러나는데야
애써 덮어도 곪았던 자욱
손등에 뚜렷한데야
《36》정월의 노래
신경림
눈에 덮여도
풀들은 싹트고
얼음에 깔려서도
벌레들은 숨쉰다.
바람에 날리면서
아이들은 쉬 놀고
진눈깨비에 눈 못 떠도
새들은 지저귄다
살얼음 속에서도
젊은이들은 사랑하고
손을 잡으면
숨결은 뜨겁다
눈에 덮여도
먼동은 터오고
바람이 맵찰수록
숨결은 더 뜨겁다
《37》진달래
신경림
1
냇물 타고 내려온 복대기가
마당을 덮은 가겟집
씨리목 산울타리에
진달래가 섞여 피었다
키가 큰 그 집 의붓딸이
나는 좋았다
가겟방 들마루에 나앉으면
소나무 가지 사이로
달 뜨는 게 보이고
그애 제 죽은 애비 자랑에
툭하면 밤이 깊었다
후미진 골짝 돌자갈 밑에 누워
소쩍새 울음에 눈물 삼킬 그애 애비
2
나는 삼짇날 그애 꿈을 꾼다
산울타리에 섞여 피던
진달래를 본다
재봉틀에 손 찔리며
쏟아지는 잠 쫓는 그애의 딸을 본다
골목 안을 서성대는
가난한 어머니를 본다
무엇인가
우리를 하나로 묶고 있는
이 길고 질긴 줄은
소나무 사이로
달 뜨는 걸 본다
《38》집으로 가는 길
신경림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석양 비낀 산길을
땅거미 속에 긴 그림자를 묻으면서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콧노래 부르는 것도 좋을 게다
지나고 보면 한결같이 빛 바랜 수채화 같은 것
거리를 메우고 도시에 넘치던 함성도
물러서지 않으리라 굳게 잡았던 손들도
모두가 살갗에 묻은 가벼운 티끌 같은 것
수백 밤을 눈물로 새운 아픔도
가슴에 피로 새긴 증오도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그것들 모두 땅거미 속에 묻으면서
내가 스쳐온 모든 것들을 묻으면서
마침내 나 스스로 그 속에 묻히면서
집으로 가는 석양 비낀 산길을
《39》초원
신경림
지평선에 점으로 찍힌 것이 낙타인가 싶은데
꽤 시간이 가도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나무토막인가 해서 집어든 말똥에서
마른풀 냄새가 난다.
짙푸른 하늘 저편에서 곤히 잠들었을
별들이 쌔근쌔근 코 고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다.
도무지 내가 풀 속에 숨은 작은 벌레보다
더 크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내가 가서 살 저세상도 이와 같으리라 생각하니
갑자기 초원이 두려워진다.
세상의 소음이 전생의 꿈만 같이 아득해서
그립고 슬프다.
《40》파도
신경림
어떤 것은 내 몸에 얼룩을 남기고
어떤 것은 손발에 흠집을 남긴다
가슴팍에 단단한 응어리를 남기고
등줄기에 푸른 상채기를 남긴다
어떤 것은 꿈과 그리움으로 남는다
아쉬움으로 남고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고통으로 남고 미움으로 남는다
그러다 모두 하얀 파도가 되어간다
바람에 몰려서 개펄에 내팽개쳐지고
배다리에서는 육지에 매달려지기도 하다가
내가 따라갈 수 없는 수평선 너머
그 먼곳으로 아득히 먼 곳으로
모두가 하얀 파도가 되어 간다
《41》파장(罷場)
신경림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먹걸리들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 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첫댓글 잘읽고, 잘 감상하고, 많이 느끼며 갑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