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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의 정치학 ― 인류학의 입장들
홀브라드, 페더슨, 데 카스트루
처음 보기에 ‘존재론’과 ‘정치학’은 희한한 짝인 듯 다가온다.
존재론은 본질을 상기시키는 한편 정치학은, 현대의 민주적·다문화적 시민들이 보통 이해하는 바에 따르면, 본질을
해체하고 그 대신에 세계를 구성하는 인간집단의 능력들을 긍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재를 사회적으로 구축한다는 생각 자체가 특별한 존재론의, 그것도 강력한 존재론의 사례를 나타낸다.
그리고 여기에 우리는 또한 ‘정치적으로도 강력하다’는 의미를 포함시킨다.
그러나 인류학자들로서 우리는 ‘약자의 힘’(powers of the weak)에 맞추어져 있다.[각주:1]
즉 힘의 차이(정치학)와 차이의 힘(존재론) 사이의 많은 복합적인 연관들―그 가운데 일부는 결정적으로 부정적인
연관들―에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논의가 적절하게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 사회과학 및 그와 유사한 분야들―이들 각각은 특정의 방법론,
분석상의 지침, 도덕적 비전과 연관되어 있다―에서 존재론과 정치학이 서로 연결되는 세 가지 상이한 방식을 대별하는
것으로 시작해보자.
① 전통적인 철학적 존재론 개념으로서 여기서 ‘정치학’은 현 상태(how things are)에 대한 단일한 절대적 진실을 발견
하고 보급하라는 암묵적인 지침 형태를 띤다.
② 이러한 입장 및 기타 ‘본질주의들’(essentialisms)에 대한 사회학적 비판으로서, 이 비판은 모든 존재론적 기획들을
회의론적으로 해체함으로써 그 내밀한 정치적 성격을 드러내며 마지막으로는 해체의 비판적 정치학을 마땅히 되어야
하는 상태(how things should be)에 대한 자신의 견해로서 긍정한다.
③ 구체적인 실천들에서 현실화되는 실존형태의 다양성이라는 인류학적 존재론 개념으로서, 여기서는 정치학이 될 수
있는 상태(how things could be)―우리가 이해하는 바로는 엘리자베스 포비넬리(Elizabeth Povinelli)(2012b)가 ‘다른
존재양태’(the otherwise)이라고 부르는 것―를 위해 이러한 다양한 잠재태들을 비(非)회의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된다.
‘다른 존재양태’가 민족지학(誌學)[각주:2]에서 어떻게 명확하게 서술될 수 있을까?
여기서 우리는, 민족지학의 서술이 모든 문화적 번역들처럼 필연적으로 변형 혹은 왜곡의 요소를 포함한다는 점을 상기
할 필요가 있다.
즉 일정한 인류학적 분석은, 하나의 고립된 사회적 질서 혹은 문화적 총체를 다른 것으로 투명하기 전사하기는커녕
일정한 고의적이며 성찰적인 “생산적 오해”(Tsing 2005)에 의존하여 그 옮김이나 비교―상이한 맥락들, 영역들, 규모들
사이의 비교만이 아니라 그 내에서의 비교를 포함한 것―를 수행하는 “통제된 다의화多義化”(controlled equivocation)
(Viveiros de Castro 2004)에 해당한다.
존재론적 전회(the ontological turn)를 다른 방법론적·이론적 지향으로부터 구분해주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즉 그것이 다른 방법들보다 “더 진지하게” 사람들과 사물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는 의심스러운 전제가 아니라[각주:3]
예술가가 재료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어포던스(affordance)로부터 새로운 형식을 끌어낼 때와 비슷하게[각주:4], 우리가
공부하는 것을 관통하면서, 사물의 어두운 측면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에의 접근을 제공하는 형태들과 힘들을 풀어
내려는 포부와 바람직하게는 그럴 수 있는 능력이다.
따라서 인류학에서의 존재론적 전회가 민족지학적 차이 혹은 ‘타자성’(alterity)에 대한 연구를 그 트레이드마크의 하나로
만들었지만, 진정한 관심은 사물들 사이의 차이에 있다기보다 사물들 내의 차이에 있다.
존재론의 정치학은 개인들과 사물들이 어떻게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핵심으로 한다(Holbraad and Peder
sen 2009; Pedersen 2012b). 우리가 이해하는 바의 인류학에 관한 한, 존재론은 ‘존재’(Being)를 스스로와 다른 것
으로서, 즉 ‘이러저러한 존재(자)’에 내재하는 ‘타자로서의 존재(자)’로서, 비교론적인 방식, 민족지학에 기반을 두면서도
초월적인 방식으로 도출한다.
존재론의 인류학은 존재론으로서의 인류학이다. 존재론들의 비교가 아니라 존재론으로서의 비교이다.
이것이 우리가 이해하는 바로 존재론적 전회의 핵심이다. 그것은 주어진 일단의 민족지학적 자료에 존재하는 개념적
어포던스들로 실험을 함으로써 (Holbraad, 근간) 다른 존재양태를 가시화하려는 낙관적 (비회의론적) 희망으로 고안된
서술의 테크놀로지(Pedersen 2012a)이다.
우리는 그러한 자료를 어디에서나, 언제나, 누구에게서나 끌어올 수 있다고 힘주어 주장한다.
존재론적 분석에 쓰일 수 있는 실천들, 담론들, 인공물들에는 한계가 없다.
실로, 이런 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을 표현하는 것은 독특하게 비(非)규범적 혹은 반(反)규범적 입장을 함축하며,
이 입장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심대하게 정치적인 의미를 가진다.
우선, ‘현재 존재하는’ 것에 대한 언명들이나 ‘존재해야 마땅한 것’에 대한 명령들에 대한 대안을 가정법으로 제시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인 행동이다.
그것이 대안적 가능성들(‘세계관들’ 등)에 대한 단순한 보고들의 그럴듯한 상대주의로부터 시원하게 벗어나서 대담하게
‘다르게 존재하는’ 것에 온전한 존재론적 무게를 실어서 그것을 실재적 대안으로서 생명력 있게 만드는 데로 나아가는
만큼은 급진적인 행동이다.
예를 들어서 상대주의자는 이러저러한 민족지학적 맥락에서 시간은 ‘순환적’인데 ‘과거나 항상 돌아와서 현재가 되는’ 식
이라고 보고한다. 이는 물론 기발한 생각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말이 되지 않는다.
과거 즉 ‘지나갔다’는 것은 바로 ‘현재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로 돌아오는 과거는 결코 과거가 아니다. (결혼한 총각은 총각이 아닌 것과 같은 의미이다.)
이와 달리, 존재론적 지향을 갖는 인류학자는 일종의 ‘상대주의적 터빈’처럼[각주:5] 이러한 다의적·환기적 형식을[각주:6] 시간
개념 자체를 실험대상으로 하는 민족지학적으로 통제된 실험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리하여 ‘순환적 시간’을 실재적 실존형식으로 만드는 식으로 ‘과거’, ‘현재’, ‘존재’ 등을 다시 개념화한다.
이런 가정법적인 ‘존재 가능성’의 실험에서 강조는 ‘가능성’만큼이나 ‘존재’에 두어진다.
‘순환적 시간을 상상이나 해봐!’라고 상대주의자는 놀라워한다.
‘맞아, 그리고 그것이 존재할 수 있는 양태가 여기 있어’라고 존재론적 인류학자는 답한다.
더 나아가 그러한 ‘존재지학적’(ontographic)(Holbraad 2012) 실험들이, 그 삶이 이러저러한 식으로 지배적인 질서
(늘 휘발적이고 격렬하게 뒤섞이는 국가, 제국, 시장)와 대립하는 민족들과의 민족지학적 접촉에 의해 가속화될 때, 그때
존재론의 정치학은 그것을 불러일으킨 민족들의 정치학과 그 핵심부에서 공명한다.
그런 경우에 존재론적 지향의 인류학적 분석은 인류학자들이 연구하는 민족이 관여된 정치적 동학을 논리적으로 조건
으로 삼을 뿐만 아니라 그 동학에 의해 구성되고 그 동학과 도덕적으로 연루된다.
이 동학에는 그 민족 자신들이 택하는 정치적 입장들이 포함되는데, 정치 자체의 ‘가능한 양태’에 대한 입장도 다른 것
못지않게 포함된다.
인류학에서 일어난 존재론적 전회와 관련된 모토 가운데 실로 가장 자주 인용되는 (그리고 비판되는) 것 하나는 저
악명 높은 ‘인류학은 세계의 민족들의 존재론적 자결(自決)의 과학이다’라는 말과 그에 부수되는 것들이다.
즉 이 분야의 사명은 “사유의 영원한 탈식민화”를 증진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Viveiros de Castro 2009, 이 주장의
초기 형태를 보려면 Viveiros de Castro 2013 [2002] 참조).
이러한 맥락에서 불식시켜야 할 첫째 (비생산적인) 오해는, 이것이 세계 열강들과 맞서 토착민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과 동의어라는 생각이다.
전 세계에 있는 토착민들을 정치적으로 지배하고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세력에 맞선 싸움에 동참하는 데에는 인류학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 상당한 정보가 있고 꽤 훌륭한 사람이면 충분할 것이다.
반대로, 인류학적 상대주의와 낡은 전문가적 회의주의는 투쟁에 동참하지 않는 데 대한 변명으로 작용할 수 있다.
둘째, 민족들의 존재론적 자결이라는 생각은 민족 본질주의, 피와 땅 원초주의 및, 기타 형태의 사회문화적 리얼리즘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민족들의 존재론적 자결은 ‘민족’에게 존재론적인 것을 되돌려주는 것을 의미하지 ‘존재론적인 것’에 민족을 되돌려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타자의 자결로서의 존재론의 정치학은 타자의 사유와의 대면에서 모든 사유가 탈식민화되는 것,
즉 사유 자체를 ‘늘 이미’ 타자의 사유와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정치학의 존재론이다.
셋째, 타자의 자결이라는 생각은 인류학자들의 인식론적 윤리의 근본 원리가 ‘서술하고 있는 민족에게 항상 출구를
남겨라’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지나치게 많이 설명하지 말라. 타자의 사유에 내재한 가능성들을 현실화하려 하지 말라. 그러나 이 가능성들을 타자의
공상으로 치부하지도 말고, 그 가능성들이 자신에게도 동일한 실재를 획득하리라고 공상하지도 말며, 다만 그 가능성
들을 가능한 것으로서 막연하게 유지하도록 노력하라(이것이 “사유의 영속적인 탈식민화”라는 어구에서 “영속적인”이
라는 어구가 의미하는 바이다). 그 가능성들은 동일하게 현실화되지 않는다.
적어도 “그대로”는 아니다. 오로지 “타자로서” 그렇게 된다. 타자의 자기결정은 자기의 타자결정이다.
(The self-determination of the other is the other-determination of the self.)
이로써 우리는, 인류학 및 그와 유사한 분야들에서 존재론적 지향의 접근법들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유망성과 관련된
마지막 논점으로 이르게 된다.
이 유망성은, 그 접근법들이 특정의 정치적 목적 혹은 국가비판의 지속적 필요 및 그것을 뒷받침하는 사고성향과 어느
정도로 친화적인 관계에 있느냐와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그 접근법들의 작동 바로 그것에 수반되는 형태의 정치를
실행하는 능력과의 관계에서도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그 논점이다.
이런 식으로 파악되면, 존재론적 전회는 외적으로 정의되는 정치적 목적의 수단이라기보다는 그 자체로 정치적 목적
이다.
지적 삶의 정치적 효율에 대한 계속되는 논쟁들―예를 들어 20세기에 있었던, 공산당들의 정치적 전투성 요구에 대한
맑스주의 지식인들의 이중적인 입장(아도르노, 사르트르, 마그리트 등)―을 어느정도 반복하는 식으로 말하자면,
문제는 존재론적 지향을 가진 분석들이 그들이 포함하는 사유 형태 자체를 정치적으로 만드는가, 그리하여 ‘정치적
으로 되기’가 인류학적 사유 양태 자체의 내재적 속성이 되는가이다.
만일 그렇다면, 존재지학의 정치학은 어떤 미래를 증진하는 것을 돕는 방식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그 실행의
과정에서 미래를 “형상화하는”(Krøijer 근간) 방식에도 있는 것이다.
그런 주장의 주된 전제는 (후설Edmund Husserl적 의미의) 코기토와 같은 필연성(cogito-like apodeicticity)과 유사
할 것이다.
‘사유하는 것은 달라지는 것이다.’ 스스로 차이를 내지 않는 사유는 사유가 아니다. 사유는 하나의 ‘위치(입장)’에서 다른
위치(입장)로 이동하는 형태를 띤다.
따라서 이런 움직임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사유가 발생한 것이 아니다.
이는 존재론적 신념이 아님에 주목하라. (예를 들어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의 최근[2011]의 “존재적 원리”ontic
principle와 비교해보라. 이는 매우 유사하지만, 형이상학적 주장이라는 철학적 기조를 띠고 있다.)
오히려 그것은 사유의 논리적 형식의 진술로서 제시된다.
크리츨리(Simon Critchley)적 의미의 현상학인데 [2012, 55], 이는 더욱이 자신의 발화 가운데 자신을 현실화하는 한
에서 필연적이다.
그렇다면 소전제는 (더 논의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서) ‘달라지는 것은 그 자체가 정치적 행동이다’라는 생각이다.
이는 권력, 지배, 권위와 같은 논란의 여지없이 ‘정치적인’ 관념들은 차이의 가능성과 그 통제에 대한 상대적 입장들이
라는 점을 받아들일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더 직접적으로 (물론, 거칠게) 말하자면, 지배는 다를 수 있는 능력을 통제하는 것이다.
즉 타자성에 한계를 가하는 것이며, 따라서 바로 그 사실로 인해서 (즉 위의 ‘사유하는 것은 달라지는 것이다’라는 말의
내적 함축에 따라) 사유에도 한계를 가하는 것이다.
만일 이 두 전제가 받아들여진다면, 특정 종류의 정치학이 존재론적 전회에 내재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존재론적 전회가 바로 민족지학적 현장작업이 회귀적으로 개념적 창조성과 실험의 형식들로 변이되는 것을 주축
으로 삼는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면, 존재론적인 성향의 인류학은 지속적으로 차이 혹은 타자성 그 자체의 생산을 지향
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분석의 이 수준에서는, 관여할 수 있는 정치적 목표들이 무엇이든, 인류학은 그 작용의 차이 그 자체를 전제하고 차이
를 실험적으로 ‘행하는’ 시도인 한에서 존재론적으로 정치적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반(反)권위적인 인류학으로서, 기존의 사유 형태들을 타자성 그 자체에 의하여 무자비하게 압력을 받
도록 하고 아마도 변화하도록 하는 유리한 대안적 시각들을 발생시키는 것을 자신의 일로 삼는다.
우리는 이 지적 노력을 혁명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만일 이로써 우리가 위에서 말한 의미의 “영속적인” 혁명을,
즉 가능한 것, ‘존재할 수 있는’ 것을 무한정 지속시키는 정치를 의미한다면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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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powers of the weak : 피억압자와 피착취자가 가진 힘을 말한다. “powers of the weak”은 제인웨이(Elizabeth
Janeway)의 저서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 저작에서 제인웨이는 강자가 부과하는 정체성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을 약자가 가진 가장 의미심장한 힘으로 보고 있다고 한다.
2.‘민족지학’은 ‘ethnography’의 옮김으로서, 문화기술지(文化記述誌) 또는 민속지학(民俗誌學)이라고 옮기기도 한다.
3. [원주] 물론, 다른 존재론들을 진지하게 사실의 일로서 받아들이는 저 ‘다른 이들’에게 ‘현 상태’인 것이 존재하겠
지만, ‘우리’에게는 이 다른 존재론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일이란 곧 ‘될 수 있는 상태’라는 정치적 함축을 끌어
내는 것이라고 다소 논란의 여지없이 주장할 수는 있겠다.
4. ‘어포던스’(affordance)는 주체가 특정의 행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객체가 ‘제공’하는 관계를 말한다.
예를 들어 문손잡이는 돌리기나 밀기를, 끈은 잡아당기기를 ‘제공’한다. 예술가는 재료가 제공하는 특정의 표현력을
창작행동을 통해 현실화한다.
5. 터빈은 유체나 기체의 순환을 이용한 장치이다. 시간의 순환성을 이러한 유체 혹은 기체의 순환에 비유한 것이다.
6. 이러한 다의적·환기적 형식 : 저자들은 “this form of e(qui)vocation”이라고 썼다. “e(qui)vocation”은 ‘equivocation’과 ‘evocation’을 겹쳐서 쓴 것이다.
오늘날의 인류학 지형도
레비-스트로스에서 ‘존재론의 인류학’까지
1. 계승되는 구조주의
인류학은 ‘인간’이라는 종에 속하는 주체가 자신의 존재와 활동을 이해하기 위한 재귀적인 지(知)의 실천법이다.
인류학자는 시간축을 통해 자신의 기원인 생명사와의 관계를 탐구하는 한편, 공간축을 통해 미지의 ‘타자’를
발견해낸다.
이 방법은 인간성의 이해를 목표로 하는 인문과학으로서 실로 모순과 긴장을 내재하는 질문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인류학은 총체로서의 인류를 전(前)인류학적인 생물의 역사와 연결 지음과 동시에, ‘문화’라는 활동영역
을 획정함으로써 인류를 생물계로부터 떼어놓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인류학은 항상 연속성과 비연속성이라는 이중의 기준을 자연사 속에서 표명해왔다.
요컨대 인류학의 학지(學知)는 자연계에서 태어난 생물의 일부이면서 그것으로부터 분리된 것이기도 한 인간의
모순적인 조건을 드러낸다.
이때 문화는 자연의 일부로 세계에 내재하면서도 스스로 차이를 만들어내어 인간집단의 독자성을 산출하려는
실천과 결부된다.
문화는 연속성의 계열에서 자연계에 숨겨진 미발견의 정보를 추출하고 스스로를 다른 사회와 차이화하는 조작자로
활동한다.
또 다른 한편에서 문화는 자연계에 살고 있는 생명의 연속성을 부정하고 ‘문명’이라 부르는 집약화된 환경의 윤곽
을 드러내는 원리와 관계한다.
후자는 자신의 세력을 공간적으로 확장할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 자신과 자연의 연속성을 은폐한다.
이 은폐작용에는 타자를 문명권으로부터 배제하려는 모든 지적 조작이 포함되며, 문명인은 바로 이 조작에 의해
자신의 존재기반과 다른 조건의 타자를 배제하거나 정치경제적으로 이용해왔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인류학은 문명의 고질병인 이러한 은폐작용에 항의하는 지혜의 계보학을 계승
하는 학문이자, ‘문명과 야만의 대립’을 넘어서야 하는 과제를 최초로 받아들인 학문이다.
인류의 모든 문명에 은폐된 생명과정의 연속성과 비연속성이라는 문제는 특히 레비-스트로스의 신화연구에서
주요하게 다뤄진다.
1955년에 발표한 『신화의 구조』를 시작으로 그의 신화연구는 보아스(Franz Boas, 1858~1942, 미국의 인류학자)
류의 정밀한 신화연구의 기본자세를 계승하는 한편, 이 문제와 씨름하기 위한 기초를 다졌다.
예를 들어 레비-스트로스가 1967년에 발표한 논문 「아스디왈 이야기」(Claude Levi-Strauss. 1967. "The
Story of Asdiwal", in Leach, ed., The Structural Study of Myth and Totemism, London: Tavistock, pp. 4-7)
(Claude Levi-Strauss. 1973. "La geste d'Asdiwal", Anthropology structurale deux, Paris: Plon)에는
태평양 연안의 캐나다 선주민인 치므시 족(Tsimshian)에서 계승되는 다양한 세계인지의 틀을 ‘도식’(schema)으로
추출해내고 여러 지역의 전승과 비교함으로써 신화의 교환구조를 해명하고자 했다.
이 연구는 지리적, 사회학적, 우주론적, 기술ㆍ경제학적이라는 네 개의 도식에 따라 선주민의 생활 속에서 경험
되는 무의식의 논리를 검토하고 개인과 사회와 언어집단을 넘어서는 인지공간의 양상을 지도화했다.
신화는 집단 간에 공유되는 신화소의 관계에 기반하여, 자연계의 일부로 존재하는 제 사회의 의미론적인 공통성과
차이를 반복하며 치환, 병치, 역전의 신화소의 교환조작을 통해 인간과 비인간을 관통하는 연속성과 비연속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직조한다.
이 섬세한 기술에 의해, 이를테면 영웅 아스디왈, 소녀로 변신한 흰곰, 스키나 강 계곡, 나스 강, 천상계와 지상계,
여름과 겨울 등 표면적으로는 별개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상(事象)이 신화로 편재해 들어간다.
연속성과 비연속성의 배치를 둘러싼 레비-스트로스의 관심은 그 후 토테미즘이라는 인류학적 개념을 재고하는
두 연구(『오늘날의 토테미즘』과 『야생의 사고』)(※이 두 저작은 1962년에 출간되었으므로, 실제로는 「아스
디왈 이야기」보다 앞선다.)를 거쳐 보다 진일보한 단계로 나아간다.
이 저작들에서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아프리카, 남북아메리카의 민족지를 두루 참조하면서, 인간을 땅의 생물ㆍ
무생물과 동일시하는 것을 이론적 오류로 보았던 옛 토테미즘을 넘어서고자 했다.
그는 이제까지 민족학자[인류학자]가 종교적 환상으로 간주해왔던 ‘토테미즘’이라는 사고방식에서 자신의 분류
체계에 기초하여 인간과 비인간의 기호적 관계를 재구축하는 역동적인 지적 실천을 발견해낸다.
즉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각지의 선주민은 ‘토템’이라는 살아있는 기호를 조작매체로 하여 종과 개체, 기호와
신체를 연결하는 가치환원을 현실화해왔고, 이를 통해 ‘다수성의 통일체[동식물의 다양한 종이 만들어내는 자연
의 체계]’에서 ‘통일체의 다양성[인간이라는 하나의 종 내부의 다양성]’을 이끌어내어 자연과 문화라는 서로 다른
인식론적인 위상을 전환할 수 있었다.
그는 이것을 문화권의 ‘길들여진 사고’에 대치하여 ‘야생상태의 사고’로 규정한다.
토테미즘이란 바로 이 ‘코드’를 횡단하는 인간(문화)과 비인간(자연)이라는 두 개의 차이체계 간의 상동성(相同性)을
추출하는 종(種)의 철학이다, 라고 레비-스트로스는 생각했다.
『야생의 사고』가 이끌어낸 ‘철학자 없는 철학’ 혹은 ‘인류최고의 철학’의 탐구는 그 후 인류학자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의 지성에 충격을 주었다.
레비-스트로스는 그 후 십수년에 걸쳐 아메리카선주민의 신화연구를 이어갔고, 그 성과로서 자연과 문화를 관통
하는 포괄적이고 다원적인 생명기호론의 맹아를 촉진했다.
구조주의는 이른바 세계각지의 무수한 선주민 사상을 상호 연관 짓는 다원론의 필드로서, 그 이후에 오는 존재론적
인류학의 요람을 예비한다.
구조주의는 살아있는 문화를 죽어있는 상징성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방식이 아니라, 자연과 문화를 종횡으로 관통
하는 역동적인 기호변환의 사고로서 계승되고 있다.
2. 『신화이론』에서 ‘퍼스펙티브주의’로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는 문화적 활동의 다양한 측면을 세분화하고 그로부터 인간상을 재구축하는 문화인류
학의 전통 속에 뚜렷한 특이성을 던져놓는다.
그것은 『슬픈 열대』의 마지막에 ‘세계는 인간 없이 시작되었으며 인간 없이 끝날 것이다’라는 불가사의한 문장
에서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는 다음 세기의 사변적 실재론의 선구자로서 인류발생 이전의 세계 또는 인류멸망 이후의 세계에 지식활동의
근거를 위치 지었다.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인문과학의 사명이란 인간상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해체하여 이른바
‘인류이전’과 ‘인류이후’에 연속하는 물(物)의 세계로 용해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물(物)이란 관념의 세계와 대척하는 균질적인 질량의 세계가 아니라, 이를테면 재규어, 들고양이,
금붕어, 요괴, 개미, 제비꽃, 바람, 카누, 금성 등이 북적거리는 세계이다.
요컨대 뇌와 물질, 생물과 무생물, 기호와 환경의 차이를 넘나드는 드넓은 실재의 세계에 다름 아니다.
프레데릭 켁(Frédéric Keck)이 지적한 것처럼, 레비-스트로스의 두 권의 토테미즘 연구에 나타나는 ‘주체의
용해(분해)’라는 과제는 그 후의 신화연구에서 보다 철저한 애니미즘 연구로 옮겨간다.
『신화이론』에서는 다수의 신화텍스트가 ‘변환’(transformation)이라는 관점에서 분석되는데, 거기에는 다양한
신화소를 통해 주체의 개념을 변형하여 ‘분자적인’ 차원에까지 용해시키는 조작을 포함한다.
이 조작은 초기 신화연구의 ‘도식’(schema) 개념에서 좀 더 복잡한 가치조작을 가능하게 하는 ‘코드’라는 개념으로
변환된다. 이 변환은 특히 『야생의 사고』에서 전개된 신체와 종의 관계를 추적하는 다원론적인 이해의 성과
이며, 이 이론의 풍요성은 오스트레일리아 선주민의 성물(聖物)인 츄링가를 둘러싼 우주론적인 해석에서 남김없이
발휘된다.
그 후 집필한 『신화이론』에서는 신화분석의 대상이 남북아메리카대륙의 선주민 사회라는 영역으로 옮겨가고,
이 속에서 ‘사회학적 코드’, ‘계절의 코드’, ‘천문학적 코드’, ‘동물학적 코드’, ‘청각적 코드’, ‘후각적 코드’, ‘경제=
기술적 코드’ 등의 다양한 코드로 구사되며 자연과 사회를 횡단하는 선주민사회의 사상이 탐구된다.
1950년대의 ‘도식’에서 ‘코드’로의 분석적 방법론의 전환은, 근린의 부족 간의 생태문화를 비교하는 한정적인
연구에서 나아가 보다 광역적인 집단 간의 생태와 그 생산물인 신화 텍스트 간의 비교연구를 가능하게 했다.
또한 『신화이론』에서는 데스콜라의 ‘토테미즘 사회’ 연구에서 다뤄진 다양체 구조의 분석방법이 전면화해서,
‘애니미즘 사회’라는 보다 큰 문제계가 등장한다.
켁이 말한 것처럼, 여기에는 레비-스트로스가 『야생의 사고』에서 논한 주체화의 문제와는 또 다른 문제가
나타난다. “즉, 토템적인 주체는 미분차이적으로 배분되는 질(質) 전체를 통해 개체를 집합적으로 주체에 귀속
시키는 것이 문제였던 것에 비해, 애니미즘적 주체는 신체의 불연속성을 통해 혼의 연속성을 지각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와 같은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배치는 반드시 자연/문화의 이항대립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외의 다양한 대립항과 ‘코드의 변환작용’에 의해 급격하게 횡단하는 기호 활동의 특징을 나타낸다.
레비-스트로스의 세대를 제2차 세계대전의 프랑스 인류학의 제1세대로 한다면, 1968년 이후 소위 ‘포스트구조
주의사상’의 태두에 직면하여 그에 동참했던 피에르 클라스트르와 모리스 고들리에는 이른바 ‘제2세대’의 인류
학자에 해당한다.
그들은 마르크스주의와 라캉파 정신분석학의 세례를 받았고 파라과이와 뉴기니아에서 민족지조사를 수행했으며
이 성과를 바탕으로 구조주의를 비판적으로 넘어서고자 했다.
이 세대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상징적 교환의 우위를 설파하는 구조주의에 대해 미개사회의 폭력의 메커니즘 혹
은 전제국가적인 정치네트워크를 내세우거나(클라스트르), 증여와 교환을 지지하는 사회의 상상적 차원의 균열에
착목함으로써 교환불가능한 ‘성스러운 것’의 기원에 도달하는(고들리에) 것과 같이, 구조주의에 대항하는 접근에
있었다.
1970년대에서 80년대에 걸쳐 출간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자본주의와 분열증’ 시리즈에 클라스트가 깊은 영감을
주었고, 고들리에는 더 나아가 1990년까지 ‘상상적인 것’에 관한 이론화를 진행하여 경제인류학에 큰 전환을
기도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젊은 세대가 학문영역을 넘나들며 ‘구조주의’에 대치했던 그 당시에 정작 레비-스트로스는
작자미상의 음악을 뽑아내는 악인(樂人)처럼 무수하게 생성되는 신화의 해석에 몰두한다.
1971년 네 권의 대작 『신화이론』을 쓴 후에 그는 『소신화이론』이라고 불리는 아메리카대륙의 선주민 신화
연구에 착수한다. 그러나 그의 고독한 산책길은 착종하는 길목에서 후속세대의 착상과 교착한다.
1980년대에서 90년대에 걸쳐 필립 데스콜라와 에듀아르도 비베이로스 드 카스트로(Eduardo Viveiros de
Castro) 등의 ‘전후에 태어난 세대’의 인류학자들이 맹활약을 펼치게 되는데, 그들은 오히려 레비-스트로스의
광범위한 연구에서 미발견된 철학적/인류학적 발상의 맹아를 추출하여 새로운 조류를 만들어낸다.
‘전후 제3세대’에 속하는 이들은 언어학과 인류학을 석권했던 ‘구조주의’에 대해 ‘포스트구조주의’의 다양한 신사
상을 대립시키지 않고, 오히려 양자를 적극적으로 매개하여 독자적인 방식으로 총합해낸다.
그들은 구조주의 이후의 인류학의 주요 관심사였던 주체화의 이론과 인지인류학의 성과를 경유하여, 나아가
영미계의 인류학자를 중핵으로 하여 1980년대의 민족지학을 석권했던 ‘포스트모던 인류학’의 바람을 맞으면서도,
당시 시대에 뒤쳐진 것으로 여겨졌던 구조주의의 성과를 재검토하여 차세대의 문제계를 장악해간다.
예를 들어 데스콜라는 1976년부터 2년 반에 걸쳐 에콰도르의 아추아르(Achuar) 사회에서 현지조사를 행한다.
그는 그때까지 ‘한 번도 손대지 않았던 자연’이라고 여겨졌던 아마존 밀림이, 실은 선주민이 동식물을 비롯한
생태환경에 손을 가해서 구축해온 것임을 발견해낸다.
아추아르족은 수렵대상의 특정 동물과 화전대상의 재배식물과의 관계를 친족관계의 네트워크에 비유하여 다양한
생물종 사이에 사회적인 아날로지를 형성해왔다.
이 상징적인 실천의 짜임새를 통해, 그들은 야생영역과 인간의 거주공간을 매개하는 광대한 인터페이스로서 산림
생태계를 구축ㆍ유지해왔던 것이다(『길들여진 자연』<La Nature domestique: symbolism et praxis dans
l'écologie des Achuar> 1986년).
데스콜라는 나아가 레비-스트로스류의 시적문체를 이어받아 『황혼의 창(槍)』(<Les de crépuscule. Relations
jivaros, haute Amazonie> 1993년)을 저술하고, 문학적 표현ㆍ철학적 모색ㆍ사회과학적 상상력을 연결하는
유니크한 서술스타일을 선보였다.
그리고 2005년(영어판은 2013년)에 발표한 『자연과 문화의 저 너머』(<Par-delà nature et culture>)에서 그는
자신의 조사를 포함하여 전세계의 민족지를 검토하는 분석개념으로서 ‘내부성’(intériorité)과 ‘신체성’(physicalité)
이라는 두 개의 분석항을 설정하고, 각각의 계열을 연속성/비연속성에 따라 네 개의 변환가능한 유형(‘자연주의’,
‘유추주의’, ‘토테미즘’, ‘애니미즘’)으로 추출해낸다.
데스콜라는 이 모델을 통해 이른바 미셸 푸코류의 지(知)의 계보학과 레비-스트로스의 구조론을 융합시키는 밀도
높은 논의를 전개한다.
이와 같이 연속성/비연속성의 위상에 숨겨있는 존재론적인 조건을 밝히는 전환의 학문으로서 인류학은 세계각지에
전승된 예지를 총합하여 새로운 출발지점에 서게 된다.
데스콜라와 동시대에 지적형성기를 거쳐 19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전반까지 브라질에서 인류학적 필드워크를
행한 비베이로스 드 카스트로 또한 현대의 ‘존재론의 인류학’을 대표한다.
그는 야왈라피티(Yawalapiti)라는 브라질의 선주민 사회에서 민족지조사를 행하였고, 레비-스트로스의 『신화이
론』의 구상을 계승하여 아메리카 원주민의 잠재적인 우주론을 재구축하고자 했다.
이 지적작업을 수행하면서 그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상을 다양한 각도에서 참조한다.
특히 그는 『안티 오이디푸스』와 『천의 고원』에서 인용한 20세기 인류학의 축적을 인류학의 필드로 되가져와
검토한다.
비베이로스 드 카스트로는 이때 구조주의적인 분석의 틀을 확장할 뿐만 아니라 포스트구조주의의 성과인 다원적인
존재생성론을 인류학의 영역에 도입함으로써 세계 인류학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의 자세는 ‘세계는 관점의 다양성에서 구성된다’고 생각하는 아마존의 선주민 사상을 선구적으로 탐구하는 것
이다.
그는 이 사상을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라고 부르고 다른 아메리카사회에까지 확장하여 주체와
객체를 소여의 전제로서 시작하는 일체의 철학과 대치시킨다(Cosmological Deixis and Amerindian Perspectiv
ism in The Journal of the Royal Anthropological Institute, Vol. 4(3), 1998).
비베이로스 드 카스트로에 의하면,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우주론적 사상에서는 관점의 다양성이 주체의 다원
적인 존재방식을 결정하며, 그 반대가 아니다.
따라서 예를 들어, ‘먹는 자(포식자)’와 ‘먹히는 자(피포식자)’의 관계는 생태계에 새겨지는 비대칭의 존재론적인
긴장을 낳는데, 이 비대칭성은 고정적인 것도 절대적인 것도 아닌 복수의 그물코의 결절점으로 구현된다.
예를 들어, 어떤 동물에게 포식자가 다른 동물에게는 피포식자이기 때문에 포식관계에 따라 주체와 객체의 위치
가 항상 변전된다.
나아가 초자연의 정령이라는 제3자의 관점을 우주론으로 펼쳐냄으로써 주체 간에 교착하는 관점의 그물코는
선조와 동물혼령 등의 영역에까지 확장된다.
모든 존재는 각각 별개의 신체를 가짐으로써 그 특이성을 세계에 표출하는데, 그와 동시에 그 개체의 주체성
(정신성)을 맡는 것은 신화시대의 모든 존재로 분유되는 초기조건으로서의 ‘인간성’이며, 인간은 단지 이 인간성을
지금까지 갖고 있는 것만으로 다른 동물들 일반과 차이화된다.
즉 일찍이 모든 생물이 공통문화로서 ‘인간성’을 가졌던 것인데, 시간의 경과와 함께 복수의 경로에 따라 그것을
잃거나 몰래 감춘 우주론적 사상이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에게 공유되어왔다고 비베이로스 드 카스트로는 말한다.
비베이로스 드 카스트로가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사상으로 추출한 ‘퍼스펙티브주의’는 그 후 덴마크의 모르텐
페데르센(Morten Axel Pedersen)에게 계승되어 아메리카 대륙에서 베링거 해협을 넘어 축치(Chukchi, 시베리아
동북부 축치반도의 소수민족), 유카기르(Yukaghir, 시베리아 동북부 지역의 소수민족), 몽골에 이르는 시베리아
와 북아시아 사회에까지 적용된다.
신체를 구체적인 관점의 거처로 하면서 ‘퍼스펙티브가 주체를 결정한다’라는 ‘퍼스텍티브주의’의 이론은, 결코
범세계적인 보편사상에서 애니미즘적 사고의 필요조건은 아니지만, 그 후의 전개과정에서 아메리카 대륙과 유라
시아 대륙을 연결하는 잠재적인 사상의 거처를 비추며 인간과 동물, 정령적 존재의 상호관계를 재고하는 새로운
인류학 연구를 촉진해왔다.
나카자와 신이치의 말을 빌리면, 이러한 사상연구는 “《세계성》가운데 인간을 위치 짓는 새로운 과학”의 일환
으로서 미래의 인류학을 개척하는 가능성을 간직한 것이 아닐까?
3. ‘대단절’을 넘어서는 과학인류학
데스콜라는 레비-스트로스의 ‘자연과 문화의 이항대립’이라는 도식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발생
조건을 발굴해내는 ‘자연의 인류학’으로 향했다고 한다면, 비베이로스 드 카스트로는 ‘자연과 문화의 이항’에
잠재되어 있는 역학에 착목하여 그 근본적인 전제로서 자연의 단일성과 절대성을 전복한다.
비베이로스 드 카스트로는 민족지에서 재구축한 사상(事象)으로서, ‘유일의 문화와 다수의 자연’을 조합하여
성립하는 ‘다자연주의’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유일의 자연과 다수의 문화’로 조합하는 서양의 일반적인 상식(다문화주의 내지는 단일자연
주의)에 대치한다.
이 이론적인 틀의 배경에는 레비-스트로스의 아메리카 선주민의 우주론 연구, 라이프니츠에서 니체를 거쳐
들뢰즈에 이르는 철학적인 다원론이 있는데, 무엇보다 라투르가 개척한 ‘과학인류학’의 성과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라투르는 데스콜라와 비베이로스 드 카스트로와 마찬가지로 철학에서 출발하여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에서 경제
적인 필드워크를 거쳐 보편적인 문제계를 묘사하는 철학적 인류학으로 회귀한다.
흥미로운 것은 데스콜라가 아마존의 민족지 연구에 몰두한 1970년대 후반, 라투르는 과학자의 실험실 생활에 대한
미시사회학적인 조사를 실시했다는 점이다.
라투르는 실험실에서 다양한 활동을 행하는 연구대상과 더불어 그들의 연구가 어떻게 행해지는지의 상호행위와
합리적 설명과정에 착목함으로써 ‘재귀적 민족지’(reflective ethnography)라 칭하는 과학실험을 둘러싼 연구실천
의 수법을 확립한다(『실험실의 생활―과학적 사실의 사회적 구성』<Laboratory life: The Social Construction
of Scientific Facts> 1979년).
이 초기의 민족지적 연구는 일상적인 사회상식을 구성하는 다양한 미시적인 코드를 탐구하는 에스노그라피의
방법론으로 실시되었는데, 관찰자와 피관찰자를 둘러싼 권력관계뿐만 아니라 쌍방이 관여하는 물(物)(비인간)의
세계에 착목함으로써, 후년의 과학인류학을 성립하게 된다.
그 후 라투르는 모국인 프랑스를 대표하는 19세기의 세균학자인 루이 파스퇴르의 실험실 연구를 둘러싸고 ‘과학
자들과 어떤 방식으로 다층적인 현실영역을 오가며 물(物)의 세계와 말의 세계를 매개할 수 있을까’ 라는 문제를
정밀하게 그려낸다.
또 1970년대 파리에서 계획된 그러나 실제로는 실현되지 않고 실패로 끝난 ‘컴퓨터로 제어하는 지하철 계획’
(“아라미스 계획”)을 주도하는 한편, 고도의 과학기술에 기반한 현대사회가 어떤 방식으로 사회적인 세계의 너머
에 있는 물(物)을 동원하여 산업화된 공간에 가치를 실현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의 분석을 시도한다.
이와 같이 라투르는 인간뿐만 아니라 ‘비인간적인 것’의 영역으로 확장되는 행위주체의 네트워크로서 제 사회를
파악하는 이른바 ‘액트 네트워크 이론’(ANT)를 창안한다.
그것은 산업사회의 수많은 기술적 매개를 일종의 비언어적인 해석과정으로 간주하고 사회로부터 격리된 실험실
과 기술시험장을 상호행위로 넘쳐나는 인간적인 의미의 공간으로 불러들이는 시도이며, 근대주의가 전제로
하는 ‘자연과 문화의 대단절’을 넘어 물(物)의 민주화와 공공화에 기반한 새로운 공통세계를 구상하려는 시도이다.
라투르에 따르면, 인류학적인 연구를 행하는 사람들의 사회도, 그 대상이 되는 ‘미개’와 ‘전근대적’이라고 불리는
사회도, 본질적으로는 그 무엇도 다르지 않다.
존재하는 것은 인간적인 것의 영역(사회)과 비인간적인 것의 영역(자연)을 나누려는 ‘순수화’의 힘과 양자를
연결하는 ‘매개’의 힘이며, 이 양극 사이에는 언제나 인격과 물(物)의 영역을 오가는 하이브리트한 존재가 꿈틀
거린다.
다른 점은 매개의 방법일 뿐이며, 그것은 분석자에 따라 다른 형태를 취할 뿐이다.
사람들은 물(物)의 ‘상징적 차원’과 사회의 ‘자연적 차원’ 사이를 오가며 때로는 실재론자로 불리고 때로는 구성
론자로 불린다.
여하간 우리들은 이 양극으로부터 구성되는 인식론의 세계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다. ‘존재론적 차원’이란
인식론에서 떨어져나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것의 영역과 비인간적인 것의 영역의 힘의 조정이며,
본질적으로 앞서 주어지는 수직적인 현실성에 있다.
우리들은 이 양극 사이에 살고 있으면서 각각의 차원에 둘러싸여 ‘자연’, ‘언어’, ‘사회’, ‘존재’라는 항목의 네트
워크를 조직하고 또 이것을 풀어냄으로써 그 다음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실천에 참여한다.
이것이 라투르가 말하는 ‘가동적인 존재론’이다. 그는 이러한 네트워크를 성실하게 추적함으로써 사회와 자연을
연결하는 현실성의 밀도를 측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비베이로스 드 카스트로가 논한 것처럼, 이 절차를 통해 이를테면 레비-스트로스가 『신화이론』에서 그려낸
아메리카 선주민 신화의 변태관계를, 과학자가 다양한 방식으로 정보와 이미지를 연결해가는 ‘참조=기준의 순환’
의 네트워크와 비교가능하다.
이때 전근대적인 지식체계로서의 신화는 근대적인 지식체계로서의 과학 및 철학과 대치하지 않는다.
그것이 아니라, 신화에도, 과학과 철학에도 코드에서 다른 코드로 교환되는 ‘존재론’의 척도가 동일하게 존재하며
번역과 매개의 과정에 따라 이것들을 상호 관련짓는 현실성의 기준의 위치가 정해진다.
인류학자가 조사지에서 만나는 신화와 의례의 맥락에도, 자신의 출신지인 선진국의 과학과 산업기술의 맥락에도
동일하게 ‘비근대’의 차원이 존재하며,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하이브리트한 현실은 증식된다.
그리하여 인류학자는 사회와 자연 사이에 증식하는 하이브리트를 물(物)(미셀 세르가 말하는 ‘준-객체’)의 네트
워크를 통해 자신에게 친숙한 사회와 현지사회 사이에 다르게 축척된 동형의 문제군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재귀적인 지적 실천을 라투르는 ‘인류학의 대칭화’로 명명한다.
4. 포스트다원주의와 ‘존재론적 전회’
라투르, 데스콜라, 비베이로스 드 카스트로 등의 인류학자가 필드워크에 기반한 구체적인 고안에서 비교인류학적
고찰로 향했던 1980년대에는 일반적으로 민족지적 기술의 정당성(실재성)을 둘러싸고 다양한 각도에서 비판이
전개되어 ‘표상의 위기’가 표출되었다.
『문화를 쓴다』를 저술한 제임스 클리포드와 존 마커스 등의 인류학자는 조사자와 피조사자 간의 비대칭적 관계
를 자명한 전제로 삼았던 인류학의 현실성을 의심하고 전통적인 민족지적 기술의 권위를 비판적으로 넘어서려는
새로운 스타일을 모색한다.
이 시대는 근대주의적인 인류학의 민족지적 현실성이 뒤흔들리는 수난의 시대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 시대는 기존의 포맷에서 탈출하는 전위적인 민족지의 실험이 행해진 시대이기도
한다.
이러한 시대에서 정치적인 반성이나 이론적인 자숙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누구보다도 과감하게 조사
대상사회와 관찰자의 대칭화라는 과제를 받아 안은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메릴린 스트래선(Marilyn
Strathern, 영국의 경제인류학자), 알프레드 젤(alfred Gell, 영국의 사회인류학자), 루이 와그너 등의 멜라네
시아(특히 뉴기니아)와 폴리네시아를 현지조사한 인류학자들이다.
데스콜라와 비베이로스 드 카스트로의 초기 모노그라프가 아마존이라는 필드를 모태로 하여 성립했고 그 성과가
일반적인 문제계로 확장된 것처럼, 스트래선을 비롯한 영미의 인류학자들은 태평양제도에 관심을 갖고 자신의
조사지를 다룬 인류학자의 민족지 및 역사적 기록과 대조하면서 하나의 사회에 내재하는 복수의 현실의 기준을
정립했다. 나아가 그들은 이것을 타 지역의 다양한 기준과 비교함으로써 오늘날의 ‘포스트다원주의’라 불리는
논의의 토양을 구축했다.
예를 들어, 스트래선은 멜라네시아 사회의 젠더에 관한 획기적인 연구성과인 『증여의 젠더』<The Gender of
the Gift: Problems with Women and Problems with Society in Melanesia>(1988년)에서 성인남자가 결사체에
가입할 때 필요한 입사식 의례에 관한 기존의 인류학적인 논의를 재검토한다.
그녀는 '전사회적인 자연의 영역을 여성성으로서 배제하고 남성적인 사회성의 영역에 가입한다'는 서양 인류
학자의 설명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와 같은 자연/사회의 분할이 용해되는 지평에서 가입자들이 자기의 신체를
발견하고 성장력을 인식하는 기회로서 의례가 존재한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스트래선은 이 절차를 통해, 각각의 부족사회에 숨겨진 문화의 역사적 맥락과 가입자 개개의 신체에 숨겨진 성장
력을 다원적으로 매개하는 ‘멜라네시아적 사회성’을 상정하고, 이것을 만들어내는 다양한 현상들을 생생하게
그려내었다.
나아가 스트래선은 『부분적 연결』에서 멜라네시아 연구의 민족지를 종횡으로 참조하면서 각각의 사회에서
인공물이 어떠한 방식으로 멜라네시아 일대의 우주론에 접속되는가라는 문제를 탐구한다.
이를테면 ‘완토아트(Wantoat, 파푸아뉴기니의 일부지역) 의례의 인형조형물이 바다를 건너 카누로 변환하고
나아가 파푸아뉴기니 고지대로 확장되어 남성비밀결사의 피리로 이어진다’는 횡단적인 이론이 실연된다.
그러나 그녀는 이러한 사회에 내재하는 인공물의 현실성의 기준을 전근대적인 인류학적 용어의 범주로 남겨두는
대신, 도나 해러웨이(Donna Jeanne Haraway)가 기계와 생물의 혼합체로 그려내 ‘사이보그’라는 아날로지를
통해 설명한다.
스트라샌은 이른바 사이보그 개념을 멜라네시아 사회의 분석에 적용함으로써 비교민족지학이 직면한 ‘통문화적인
막다른 골목’을 돌파하고 유기체와 인공물의 접속에 의한 신체의 확장이라는 차원을 새롭게 조명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가치환원적인 ‘비교가능성’을 넘어 신체라는 개념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이론적인 실험을 감행한다.
인격과 사물과 자연을 현대의 서구사회는 일반적으로 동일한 척도로 측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존재의 제 계층을 멜라네시아의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경계를 넘나들고 횡단하고 부분적 연결의 연쇄
로서 파악할 수 있을까?
스트라샌이 묘사하는 ‘멜라네시아적 사회성’은 한편에서는 은유와 환유를 통한 현실이해에 의해 지지되며 다른
한편에서는 서로 다른 역사적 단계를 구축하는 인공물과 자연물의 상호작용의 맥락에 의해 지지된다.
‘구조인류학’의 제창자인 레비-스트로스가 평생을 걸쳐 보편성과 다양성의 공존을 모색한 것처럼, 스트라샌
역시 인류학적 실천 속에서 인류의 지적ㆍ심적 능력의 보편성과 민족지적 기술에 나타나는 문화의 다원적인
양태를 조정하고자 한다.
『부분적 연결』에서는 이른바 ‘이질성을 통문화적으로 환원하지 않은 채 타자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1980년대 후반의 시대정신이 카오스이론과 프랙탈기하학이라는 복잡계 과학에 대한 관심과 함께 깊게 침투되어
있다.
스트라샌은 그 후에도 출신지인 영국사회를 비롯한 서구사회의 인격, 소유, 젠더 등의 개념을 민족지에 기반하여
멜라네시아 사회의 다양한 현실구축의 기준과 예리하게 대치시키면서 부분으로도 전체로도 환원할 수 없는 무수한
절편으로서의 현실을 계속해서 가교한다.
스트라샌의 뒤를 이은 연구자들은 흥미롭게도 데스콜라와 비베이로스 드 카스트로와는 별개의 계통에서 ‘자연과
문화의 대단절’을 넘어섰는데, 1990년대 이후가 되면 이러한 조류를 횡단하는 논의가 활성화되어 비교인류학의
르네상스라고도 말하는 상황이 국제적으로 펼쳐진다.
이 흐름은 2000년대 이후 ‘존재론적 전회’(ontological turn)라 불리는데, 그 배경에서 프랑스와 남미를 연결하는
긴밀한 인류학 성과의 축척이 영미와 멜라네시아를 연결하는 별도의 정보망과 대담하게 접속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양자를 오가는 인류학자도 소수이지만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 흐름은 팀 잉골드(Tim Ingold, 1948~ 영국의 인류학자)를 중심으로 하는 ‘삶으로 향하는 인류학’의 연구조류
를 수반하며, 상호 본질적인 논의를 교류하면서 인류학의 논의와 표현양식을 풍성화해왔다.
특히 21세기에 진행되는 일련의 논의에서 중요한 매개의 역할을 맡은 인류학자들 중에서 덴마크에 거점을 두고
있는 북유럽의 연구자들의 활약이 눈에 띤다.
21세기의 여명을 알리는 최근 20년간 인터넷서비스의 확장과 영어사용의 글로벌화를 수반한 인류학의 온라인
저널이 활성화되고 있다.
이 시대는 에너지 문제와 지구온난화, 투기적인 경제학으로 인한 글로벌 금융위기 등 근대인의 존재를 뒤흔드는
리스크가 부상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 속에서 인류학은 과학인류학의 비근대적 차원의 발견과 포스트모던 인류학의 ‘재귀성의 질문’을 지나 큰 전환을
맞이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전환은 결코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닐 뿐더러, 과거와 미래를 단절시키는 변화도 아니다.
라투르가 말한 것처럼, 인류학자 또한 끊임없이 반복되는 혁신을 통해 타자성과 생명의 연속성/비연송성을 질문
하고 스스로의 전통에 귀속해가고 있다.
일찍이 헤나레(Amiria Henare), 홀브라드(Martin Holbraad), 와스텔(Sari Wastell) 등의 3인은 ‘존재론’을 둘러싼
질문이 인류학의 폐쇄성을 돌파하는 ‘조용한 혁명’을 일으키고 있다고 선언했다(『물(物)을 통해 사고한다』
<Thinking Through Things: Theorizing Artefacts Ethnographically>(2007년).
그 후 ‘조용한 혁명’의 당사자인 비베이로스 드 카스트로 자신은 소음으로 넘쳐나는 논의에서 재빨리 빠져나가
면서도, 문제의 중심에 있는 ‘존재론’이 원을 맴도는 것처럼 보이는 타자성의 근원적인 질문으로 발전하고 있음
을 강조한다.
여하간 인류학 연구 영역이 지난 20년간 크게 확장하여 ‘문화적 표상’에서 사상(事象)을 직조하는 현실의 깊은
곳까지, 인식론에서 존재론으로 키를 돌린 것은 확실하다.
이 변화는 문화를 어떤 종의 해석 가능한 텍스트와 자연에서 독립한 의미론의 체계로서 사고하는 관습에서, 자연
과 인공물과 인간신체를 하나의 가변적인 생성체의 네트워크(혹은 생명=사회적 실천의 편물)로 파악하는 큰 조
류와 연결된다.
물론 일련의 ‘전회’의 배경을 보면, 비베이로스 드 카스트로와 라투르에게서는 베르그송, 베이트슨, 깁슨의 계승이,
라투르와 피에르 레비에게서는 미셸 세르의 철학의 계승이라는 복수의 철학적 계보의 착종이 있다.
나아가 후술할 몰에 의한 퍼스의 기호론의 급진적인 다시 읽기에서도 커뮤니케이션의 영역을 인간만이 아니라
비인간의 세계로 확장하는 인류학의 새로운 흐름의 특징이 나타난다.
5. 복수의 전회와 ‘올 수밖에 없는 인류학’
‘존재론적 전회’ 이후의 인류학의 전개 속에서 특히 흥미로운 점은 에도아르도 콘의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는
인류학’이다.
그는 자연계를 채우는 생물차원의 기호과정에까지 사고작용을 확장하고, 그것을 전제로 성립하는 인간집단의
현실인식과 사고작용의 관계를 탐구한다. ‘인간 이상의 것(more than human)을 파악하려는 새로운 인류학은
에콰도르의 밀림에서의 숲과 동식물의 사고작용, 글로벌자본주의에 의해 개조된 후의 자연을 구축하는 송이버섯
과 인간의 관계에까지 다양한 영역을 다룬다.
나아가 생명과학자와 사회인류학의 협동을 모색하는 잉골드와 바르송의 『생명=사회적 생성』<Biological
Becoming: Integrating biological and social anthropology>(2013년) 또한 ‘존재론의 인류학’과 함께 크게 주
목받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자연과 문화의 경계를 넘어서는 이종의 창발적인 만남을 탐구했던 도나 해러웨이의 영향을
받은 인류학자들은 인간이라는 종을 넘어서는 민족지적인 기술을 개발하여 ‘복수종의 민족지학’(multispecies
ethnography)를 만들어내었다.
예를 들어, 에벤 커크시(Eben Kirksey)와 스테판 헬름라이크(Stefan Helmreich)는 ‘인류세(anthropocene)
(※일본번역어는 “人新世”)를 쓴다’는 종=횡단적인 주제를 인류학에 제기할 뿐만 아니라 해러웨이와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오스트렐리아의 현대미술가 파트리시아 피체니니 등과 연대하여 『복수종의 살롱』<The Multispecies
Salon>을 주제로 인포먼트 전람회를 2000년대부터 미국 각지에서 개최하여 그 성과를 2014년에 서적화했다.
이러한 이종협동의 실험적인 시도를 통해 인간이외의 생물종을 인류학에 가져오는 ‘종적전회’(種的轉回 animal turn)
의 복수의 ‘전회’가 포스트인문과학의 주변에서 생겨나고 있다.
보다 넓은 의미에서 물(物)과 인간의 관계를 둘러싼 인류학 연구에 눈을 돌리면, 행위주체성이라는 관점에서 미술
작품과 인공물 사이를 연결하는 상호작용론을 쇄신한 『예술과 에이전시』<Art and Agency: An Anthropological
Theory>(1998년)를 필두로 문자전승에 구애되지 않는 이미지의 계승술을 ‘기억의 인류학’으로 파악하는 카를로
세베리(Carlo Severi)의 연구가 있고, 그와 마찬가지로 미술사ㆍ인류학ㆍ표상이론의 제 연구를 연결하는 조르주
디디-위베르망(George Didi-Huberman), 한스 베르팅거(Hans Wertinger)의 『이미지 인류학』 등이 있다.
이들의 연구는 시각예술과의 관련영역에서 큰 성과를 올리고 있다.
또 잉골드의 ‘그래픽인류학’, 나카자와 신이치의 『예술인류학』 등 예술과 인류학의 실천이 근접하고 있다.
과학인류학에 가까운 관심영역에서는 캐스퍼 브루노 옌센(Casper Bruun Jensen)과 모리타 아츠로우(森田敦郎)의
사회적인 인프라스트럭쳐의 존재론적 연구, 네델란드의 대학병원에서 진단과 치료의 상호행위의 ‘실천적 존재론’
의 가능성을 보여준 아네마리 몰(Annemarie Mol)의 연구(『다(多)로서의 신체』<The Body Multiple: Ontology
in Method Practice>(2003년))가 있다.
인류학에서 ‘존재론적 전회’를 말하기 위해서는 북유럽과 남미와 더불어 일본을 빼놓을 수 없다.
현대 일본은 송이버섯의 생산과 소비를 둘러싼 글로벌한 네트워크와 ‘자본주의 이후의 자연’을 탐구하는 아나
츠인, 근대문명에 의해 해로운 짐승으로 간주된 야생동물의 민속생태학적 문헌을 탐구하는 존 나이트 등의 인류
학자들에게 중요한 필드로 자리한다.
또 라투르와 스트라샌 이후의 현대인류학의 동향은 일본에서는 카스가 나오키(春日直樹), 이시이 미호(石井美保),
모리타 아츠로우(森田敦郎), 오오무라 케이이치(大村敬一) 등의 인류학자들을 통해 적극적으로 소개되었고,
또 반대로 그들의 논고는 일본 인류학의 성과로서 해외에 소개되고 있다. 2012년에는 국제적인 인류학 잡지인
『HAU』에 카스가 나오키를 비롯한 일본의 인류학자들을 소개하는 「일본의 존재론적 전회」<Anthropology
as critique of reality: A Japanese turn>의 특집이 꾸며져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이러한 동향 속에서 오쿠노 카츠미(奥野克己) 등이 서술한 다섯 권의 <올 수밖에 없는 인류학> 시리즈(2009년~
2013년)는 인근학문의 연구자들과 함께 ‘인류학의 재구축’의 기치를 내걸었다.
또 스가와라 카즈코(菅原和子)(『狩り狩られる経験の現象学: ブッシュマンの感応と変身』[잡고 잡히는 경험의
현상학: 부시맨의 감응과 변신], 2015년), 야마구치 아키라(山口顯)(『レヴィ=ストロース まなざしの構造
人類学』[레비-스트로스 시선의 구조주의], 2012년)와 같이, 현상학과 구조주의의 내부에서 ‘존재론적 전회’의
이론적 전제를 재검토하고 이것을 비판적으로 넘어서고자 하는 제 연구가 나타나고 있다.
협의의 문화인류학의 아카데미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1990년대부터 라투르, 세르, 데스콜라와 학술적인 교류
를 이어온 나카자와 신이치가 있다.
그는 레비-스트로스가 일찍이 ‘야생의 사고’라고 한 마음의 메카니즘을 다차원적으로 발굴하였고, 이제 새로운
인류학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다.
이를테면 그는 스트라샌과 거의 동시기에 프랙탈기하학을 인류학의 이론적 차원에 도입했고, 인간과 자연의 분단
을 넘어서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해내었으며, 일본철학에서 레비-스트로스, 들뢰즈, 라투르를 통해 비근대적인
가능성을 찾아내는 등 198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현대인류학의 주요한 관심에 호응하는 다양한 사상을
논해왔다. 그는 『대칭성인류학』(2004년)을 이론적인 중핵으로 전개하면서 ‘대칭성 이론’에 의한 ‘복논리
’(bi-logic)의 구조로서 인류의 마음의 보편성을 탐구하고, 신화학, 고고학, 정신분석학, 예술이론, 자연철학,
인지과학 등을 총합하여 ‘올 수밖에 없는 인류학’의 궤적을 그려내었다.
‘존재론적 전회’는 이론적 유행의 하나로 소비될 것인가, 아니면 본질적인 전환의 계기로서 수용될 것인가? 혹은
철학과 인류학의 경계에서 고전적인 문제를 해명하는 중요한 활로를 찾아낼 것인가?
현대인류학자는 어떻게든 자신의 입장을 스스로 선택해야 할 시기에 직면해있다. 표면적으로는 큰 혁신으로
다가오는 이 조류는 어쩌면 인간상의 변신에 수반하는 ‘인간이상의 인류학’을 실현가능케 하는 과도적 상황에
불과한 것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변화에 직면하여 ‘조용한 태동’이 계속된다면, 인류학은 신시대를 위한 지(知)의 플랫폼을 구축하고 진보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인류학은 논의를 심화하고 예상을 실현하는 타성(他性)을 발견하며 타 분야와 연대하는 인문학 영역의
재편성을 필요로 한다.
이 조류는 더 큰 필드로 확장되어 복수의 실천과 실험에 접속되어야 한다.
올 수 밖에 없는 이종생성의 인류학은 그곳에서 도래할 것이다.
(사막여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