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지식 - 기록의 도구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1. 15.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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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지식
기록의 도구
최초의 알파벳
최초의 알파벳이 새겨진 점토판. 22개의 자음으로 이루어진 페니키아 문자가 새겨져 있는데, 대부분의 유럽 문자 체계의 원형이 되었다.
이집트인들은 파피루스라는 놀라운 기록 도구를 발명했을 뿐 아니라 놀라운 기록도 남겼는데, 기원전 1200년 무렵에 간행된 파피루스 가운데는 성교육서도 포함되어 있었다. |
인간이 자신의 지식이나 활동, 뜻과 이야기를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인류 발전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이러한 기록 활동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인류 문명은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기록이 시작된 때부터를 우리는 역사(歷史)시대, 그 이전 그러니까 자신의 활동을 기록으로 남기지 못한 시대를 선사(先史)시대라고 부른다.
선사 시대는 다만 몇몇 유적과 유물로만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그 시대 사람들의 삶과 그들이 추구하던 뜻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다만 추측할 뿐 알 수가 없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경구를 떠올려 보면 선사 시대 사람들은 호랑이 수준이었다.
처음 이름을 남기기 시작한 인간, 즉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살던 이들로 추정된다. 이때는 기원전 4000년~3500년 무렵이었는데, 그렇다면 이들은 어디에 기록을 남겼을까?
바로 점토판이었다. 점토로 만든 규격화된 판에 점토가 굳기 전 자신들이 고안한 쐐기문자를 이용해 기록한 후 햇볕에 말리거나 구워 보존했다. 현재 수메르인을 포함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거주하던 여러 민족이 남긴 점토판이 수없이 발굴되고 있으며, 문자 해독 또한 학자들에 의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점토판 이후에 발명된 기록 도구는 파피루스였다. 이집트인들이 발명한 파피루스는 처음 사용된 것이 기원전 3500년 무렵으로, 나일강 유역에서 재배하던 파피루스라는 식물을 이용해 만들었다. 《박물지》의 저자인 로마 출신 플리니우스(Plinius, 23~79)가 남긴 파피루스 제조법은 다음과 같다.
파피루스 줄기 속의 섬유층을 제거하고 세로로 길게 잘라 가지런히 놓은 다음 가로로 줄기를 놓는다. 이렇게 두 겹으로 만든 줄기를 말려 압축시킨다. 한편 파피루스가 마르면서 배출되는 수액이 두 겹의 줄기를 접착시키게 되며 마지막으로 이를 망치로 두들겨 얇게 편 다음 햇볕에 말린다. 완성된 파피루스는 순백색을 띠며 반점이나 얼룩이 없어야 좋은 것이다. 한편 낱장으로 만들어진 시트를 풀로 붙여 두루마리로 만드는데, 두루마리 하나는 약 20개 이내의 시트로 이루어졌다.
이집트인들은 파피루스라는 놀라운 기록 도구를 발명했을 뿐 아니라 놀라운 기록도 남겼다. 기원전 1200년 무렵에 간행된 파피루스 가운데는 성(性)교육서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여기에 성교의 다양한 체위가 기록되어 있으니 어찌 놀랍지 않을까.
이집트인들은 이 파피루스를 기록 도구뿐 아니라 돛, 천 등으로도 사용했다. 그리고 파피루스는 서양에서 다른 기록 도구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10세기 이후에도 간간이 사용될 정도로 주요한 문방구였다.
파피루스
‘사자의 서’의 일부분으로, 내세를 중시한 이집트인들이 믿은 사후의 심판에 대한 내용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기록을 위해 파피루스를 사용했다.
이제 동양을 살펴볼 차례다. 동양에서 필기를 처음 시작한 곳은 당연히 4대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인 중국이다. 중국에서는 이집트의 파피루스가 발명될 무렵부터 거북 껍질이나 동물의 뼈, 돌 등에 그들이 고안한 상형문자를 새겨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인류가 고안한 가장 오래된 문자 가운데 하나이자 현재도 사용되고 있는 한자를 처음 기록한 곳도 거북 껍질인데, 그런 까닭에 이를 갑골문자(甲骨文字)라고 부른다. 갑골문자와 관련해서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갑골문자를 새길 때 그냥 새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중국인들은 먼저 토끼털 등을 이용해 필기구를 만들어 갑골에 기록한 다음 이를 다시 새겼다.
그 후 중국에서는 죽간(竹簡)과 목독(木牘)을 기록 도구로 사용했는데, 알려진 바에 따르면 기원전 2000년 무렵이다.
죽간 가운데 큰 것은 폭이 20센티미터, 길이가 60센티미터에 이르며, 작은 것은 약 1센티미터 너비에 길이가 12센티미터 정도였다. 한편 같은 크기의 죽간을 세로로 나란히 세운 다음 가로 방향을 비단실로 묶어 책(策)으로 만들었으니 오늘날 전하는 중국의 고전은 모두 이러한 방식으로 전해진 것이다.
죽간은 단순히 대나무를 자른 것이 아니라 대나무를 불에 구운 다음 잘게 나누어 사용했는데, 이는 대나무에 들어 있는 기름 성분을 제거해 먹 글씨가 쉽게 스미도록 할 뿐만 아니라 병충해를 방지해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목독(木牘)은 나무 조각을 가리키는데 대개 30센티미터 정도의 정방형이 많지만 다른 모양도 있었다. 이는 관청 문서뿐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폭넓게 사용되었다.
운몽진간(蕓夢秦簡)
중국 호북성 운몽현 수호지(睡虎地)에서 발견된 죽간으로, 진나라의 법을 기록했다.
거연한간(居延漢簡)
만리장성 이북에 위치한 거연에서 발견된 목독으로, 한나라 때의 조서와 율령 등 공문서를 기록했다.
이들 외에도 중국에서 기록 도구로 사용한 것이 비단이었다. 비단이 기록하기도 쉽고 읽기도 쉬울 뿐 아니라 많은 내용을 담을 수도 있어 편리했지만 비용이 워낙 비싸 극히 일부 계층에서만 사용했다. 비단에 기록된 것을 백서(帛書)라고 하고, 비단에 그려진 그림을 백화(帛畵)라고 부른다.
기원전 2세기 무렵 고대 그리스에서는 양피지(羊皮紙), 즉 양의 가죽을 이용해 만든 문방구를 발명했다. 그 이전부터 동물의 가죽을 기록용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측하지만 가죽을 처리해 기록을 남기기에 완전한 형태로 만든 것이 이 무렵이었던 것 같다. 양피지 가운데 송아지나 염소 새끼의 가죽으로 만든 고급품을 특히 벨럼이라고 불렀는데, 워낙 부드러워 기록하고 책자로 만들기에 편리했다. 사실 양피지의 발전에는 이집트 왕의 역할이 컸다. 이집트 왕이 파피루스 수출을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이에 자극받은 소아시아의 페르가뭄 왕은 파피루스를 대신할 기록 도구를 만들라고 명을 내렸고, 그리하여 양피지를 대량생산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동양에서도 양을 많이 기르던 몽골 지방에서 양피지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렇다면 인간이 만든 가장 뛰어난 발명품 가운데 하나인 종이는 언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까? 105년 무렵 중국 후한의 채륜이 만든 것이 종이의 시초로 알려져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종이 제조법은 채륜이 발명한 기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니 그의 발명이 얼마나 놀랍고 뛰어난 것인지 알 수 있다.
종이 제조법이 서양으로 건너온 것은 1000년 무렵의 일로, 이때부터 비로소 서양에서도 기록이 시민들에게 쉽게 전파되기 시작했고, 이러한 움직임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술이 사용되면서 급속히 퍼졌다. 현재 세계를 움직이게 된 서양 문명은 이런 과정을 거쳐 세계 각지로 전파된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세계 최초로 발명된 우리나라의 금속활자가 문명의 대중화에 활용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만일 그런 용도로 활용되었다면 이후 한민족이 겪어야 했던 수많은 고통도 없었을지 모르는 일 아닐까!
[네이버 지식백과] 기록의 도구 (세상의 모든 지식, 2007. 6. 25., 김흥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