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초석: 교회신문 > 제 1229호 감사는 인생의 방부제요, 성장촉진제다 (살전5:15~18)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살펴보면 가히 놀라울 정도입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 되었음은 물론 군사, 방위산업까지 손가락을 꼽을 정도로 세계적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이뤄진 데까지 고작 70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대한민국 땅에 70년의 자유와 평화를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1950년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대한민국은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로 이름마저 낯선 나라들까지 참전하여 낙동강 오리알 될 뻔한 대한민국을 살려냈습니다. 낯선 나라에 와서 희생한 참전 군인들에게 그저 감사, 감사할 뿐입니다.
저는 ‘이 나라가 왜 이런 넘치는 복을 받았을까?’ 깊이 생각해봤습니다. 결론은 ‘감사했기에 복을 받았다.’입니다. 우리나라는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하며 미리 감사했습니다.
감사할 상황이 아니었지요. 일제 강점기가 끝나고 바로 동족 간의 전쟁이 일어났는데, 무슨 감사겠습니까? 먹을 것이 없어 소나무 껍질에 물을 부어 삶아 먹을 정도였다는데 감사가 나오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감사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걸 들으시고 이렇게 놀랍도록 축복하신 것입니다.
맞습니다. 감사는 인생의 항암제요, 방부제요, 성장촉진제입니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상황이 역대하 20장에 나옵니다. 유다의 4대 왕 여호사밧 때 모압과 암몬을 비롯한 연합군이 쳐들어왔습니다. 당연히 유다도 우리나라처럼 대적할 능력도, 힘도 없었습니다. 이때 여호사밧이 어찌했는지 아십니까?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대하20:21). 전쟁이 일어났는데 노래하는 자들에게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 서게 하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연합군이 쳐들어온 것은 감사할 일이 아니었습니다만 여호사밧은 감사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산 사람을 치게 하시므로 저희가 패하였으니 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산 거민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거민을 멸한 후에는 저희가 피차에 살육하였더라”(대하20:22~23). 생각지 못한 복병이 나타나 서로 싸우고 결국 유다는 어부지리(漁父之利)했습니다. 전쟁만 이겼나요? 아닙니다. 축복도 받았습니다.
“여호사밧과 그 백성이 가서 적군의 물건을 취할쌔 본즉 그 가운데에 재물과 의복과 보물이 많이 있는 고로 각기 취하는데 그 물건이 너무 많아 능히 가져갈 수 없을만큼 많으므로 사흘 동안에 취하고 제 사일에 무리가 브라가 골짜기에 모여서 거기서 여호와를 송축한지라” (대하20:25~26). 능히 가져갈 수 없을 만큼 대한민국처럼 복을 넘치게 받았습니다. 이것이 감사의 위력입니다.
감사의 위력에 대해 더 이야기를 나누자면 사도행전 16장도 봐야 합니다. 거기에 보면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점을 쳐서 생계를 유지하던 여자가 바울이 전하는 복음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타격을 입자 그들을 고소하여 바울과 실라가 매를 맞고 옥에 갇히게 된 상황입니다. 그런데 착고에 채워진 채로 깊은 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을 원망한 것이 아니라 되레 감사하며 찬양했습니다(행16:25). 그랬더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졌습니다(행16:26).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50:23).
감사할 상황에 감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 때문에’ 하고 원망을 할 것이 아니라 같은 상황이지만 ‘~덕분에’ 하고 감사하면 감사의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올해 유독 비가 많이 왔었습니다. 그래서 농사를 짓는 우리 성도의 과수원에도 피해가 컸나 봅니다. 비바람에 떨어진 많은 사과들을 바라보며 원망하려는 순간 성령님이 그러셨대요. “감사해라. 그리고 위를 봐라.” 그래서 위를 보니 땅에 떨어진 것보다 아직 나무에 매달려 있는 사과가 더 많았답니다. 그래서 감사했답니다. 그리고 수확한 사과를 사진 찍어 인터넷에 올렸답니다. ‘태풍에도 안 떨어진 사과, 배!’ 그랬더니 입시생들이 너도나도 주문을 해서 더 많은 수입을 얻었다고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8)는 말씀은 감사에 조건이 없다는 것입니다. ‘~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감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니엘이 그랬습니다. 다니엘은 그를 시기하는 간신배들에 의해 사자굴 속에 들어갈 운명에 처했습니다. 그러함에도 그는 감사했습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대로 하루 세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6:10).
지금 사자굴에 들어가 사자 밥이 될 판국인데, 다니엘은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역사하셨습니다. 사자의 입을 막으신 것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그가 더욱 높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면서도, 아들 압살롬을 피해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면서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라고 감사했고, 바울 역시 그가 주리고 헐벗고 매 맞으며 세상 만물의 찌꺼기처럼 취급을 받으면서도 늘 감사했습니다. 저 또한 교계로부터 제명이 되고, 가족에게 버림을 당하고도 감사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노래를 들어보세요.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 그러면 이런 것들 ‘때문에’가 아닌 이런 것들 ‘덕분에’ 감사할 일이 더욱 많아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감사하고 삽니까? 여러분을 태초부터 택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셨습니까? 부족하지만 여러분에게 직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셨습니까? 여러분에게 직장을 연결해주고 주신 분들께 감사했습니까? 나를 이렇게 키워주신 부모님께는요? 영적 부모인 목사님께 감사했습니까? 나를 도와주는 직장동료, 후배, 아랫사람들에게도 감사해보셨나요?
감사는 표현해야 합니다. 표현하지 않은 감사는 감사가 아닙니다. 입으로 시인할 때 구원에 이르듯 감사도 표현될 때 진정한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에 예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가시다가 한 촌에 들어가셔서 문둥병자 열 명을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그중에 한 명만이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있느냐?” 그리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17:19)라고 하셨습니다. 아홉도 감사한 줄은 알았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표현하지 않고 병 고침에 신이 나서 집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이방인 한 사람만이 감사하여 사례했더니 감동하신 예수님이 그를 육신의 병에서 구원하신 것뿐 아니라 영적인 구원까지 더하셨습니다.
시편 136편의 말씀처럼 아침에 해가 뜨고 밤에 달이 뜨는 것에도 감사합시다. 굶지 않고 먹을 수 있는 것도 감사하고, 일할 자리가 있는 것도 감사하고, 걸어 다닐 수 있는 건강에도 감사합시다. 돌아보면 당연한 것 같은 것들도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흐르는 물 한 컵을 떠줘도 감사해야 하는데 이렇게 큰 은혜를 입고 감사하지 않는다면 개돼지나 진배없지요.
하나님께 감사하고, 사람에게 감사하는 삶, 그것은 곧 내가 행복한 길이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4:2). 할렐루야!
행복은 감사의 문을 열고 들어온다
장미의 가시를 불평하지 말고 가시 중에도 핀 꽃에 감사하라
♣ 은혜로운 찬양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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