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에 좋다고 알려진 마가목은 지팡이를 만들어서 들고만 다녀도 관절염이 좋아진다고 한다.
●유람록에 등장하는 마가목
1. 1472년 김종직 유두류록
석문(石門)을 통해 내려와 중산(中山)에 올라가 보니 이곳도 토봉(土峯)이었다. 고을 사람들이 엄천(嚴川)을 경유하여 오르는 자들은 북쪽에 있는 제이봉(第二峯)을 중산이라 하는데, 마천(馬川)을 경유하여 오르는 자들은 증봉(甑峯)을 제일봉으로 삼고 이 봉우리를 제이봉으로 삼기 때문에 그들 또한 이것을 중산이라 일컫는다. 여기서부터는 모두 산등성이를 따라서 갔는데, 그 중간에 기이한 봉우리가 10여 개나 있어, 모두 올라서 사방 경치를 바라볼 만하기는 상봉(上峯)과 서로 비슷했으나, 아무런 명칭이 없었다. 그러자 유극기가 말하기를,
“선생께서 이름을 지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라고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고증할 수 없는 일은 믿어주지 않음에야 어찌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곳 숲에는 마가목(馬價木)이 많은데, 지팡이를 만들만 하였으므로, 종자를 시켜 매끄럽고 곧은 것을 골라서 가져오게 하였더니, 잠깐 사이에 한 다발을 가져왔다.
2. 1610년, 박여랑_두류산일록
소년대(少年臺)를 지나 행랑굴(行廊窟)에 도착했다. 각자 물을 마시고 밥을 먹었다. 천왕봉을 되돌아보니 이미 바람난 말이나 소일지라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까마득하였다. 한번 걸음을 옮긴 사이에 이렇게 멀리 내려왔으니, 이른바 “악(惡)을 따르는 것은 산에서 내려오는 것처럼 쉽다”는 말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천왕봉으로부터 이곳에 이르기까지 다른 나무는 없고 단지 회나무∙잣나무와 붉은 나무와 단풍나무만 보이고, 사이사이 마가목(馬檟木)이 섞여 있었다. 어떤 사람은 마가목을 취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돌 틈에서 작은 회 나무를 캐기도 했는데, 제대로 자라지 못한 수령이 꽤 오래된 것들이었다. 정덕옹과 혜보는 많이 캐었는데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이 두 종류의 나무는 모두 높은 봉우리나 깊은 골짜기에서 자유롭게 자라난 식물이다. 그 중 하나는 세상 사람들에 의해 반듯하다고 하여 베여졌고 또 다른 하나는 구부정하기 때문에 캐어지게 되었으니, 온전한 삶을 얻거나 잃게 된 것이 목안(木鴈)과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회나무가 캐어진 것은 온전한 생을 얻은 것인 듯하다.
3. 1902년, 송병순 <유방장록>
조반을 먹은 뒤에 동행한 사람 및 주지승 창각(滄覺)과 함께 벽계암(법계사) 서쪽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올랐다. 겨우 바윗길을 한 차례 오르는데, 마치 하늘로 난 사다리를 잡아당기며 오르는 듯하였다. 봉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울창한 숲은 모두 삼나무 ․ 노송나무 ․ 상수리나무 ․ 굴참나무였고, 계곡에 빽빽이 우거진 것은 모두 썩은 나무와 말라죽은 넝쿨들이었다. 바위 사이로 흐르는 물이 졸졸거렸고, 절벽에 얼어붙은 얼음은 단단하였다. 가파른 작은 길은 겨우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였다. 다섯 걸음을 가 한 번 쉬기도 하며, 열 걸음을 가 한 번 쉬기도 하면서 힘을 다해 전진하였다.
숲속에는 마가목(馬價木)이 많았다. 종자들로 하여금 지팡이로 쓸 수 있는 것을 가려 베어오게 하였다. 일행이 모두 마가목 지팡이를 나누어 갖고 굽이굽이 돌며 올라갔다. 꼭대기는 더욱 가팔라 몸을 구부리고 한 걸음씩 올랐다. 「봉선의기(封禪儀記)」에 이른바 ‘뒷사람은 앞사람의 신발 밑바닥만 보고, 앞사람은 뒷사람의 정수리만 본다.’고 한 경우였다. 바위 모서리를 잡기도 하고 나무뿌리를 잡아 당기도 하면서 천왕봉에 올랐다.
4. 1910년, 배성호(裵聖鎬)의 유두류록(遊頭流錄)
아침을 먹은 뒤 날이 잠깐 개어 길을 나섰다. 재장이 마가목(馬檟木)으로 된 지팡이 하나를 주면서 정을 표시하였다. 당흥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시를 한 수 지었다.
5.1924년_강계형 _두류록(頭流錄)
나는 본디 초목·금수의 계보에 어두워 아는 것이라곤 나무는 녹나무,떡갈나무, 박달나무,전나무, 마가목,청려목 등이고, 풀은 작약 당귀 도라지 고사리 등속일 뿐이다. 앞길은 극히 험하여 올라갈 때에는 허공으로 오르는 것 같고, 내려갈 때에는 깊은 연못으로 떨어지는 듯하여 결코 평탄한 곳이 없다. 종자들이 말하기를, “전에 산에 오른 자들은 관을 벗고 나무를 끌어안고 바위를 끼고 간신히 나아갔는데 지금은 보존사(保存社 *함양명승고적보존회)의 힘으로 산아래 사람을 시켜 벌목을 하고 험한 곳을 고르게 한 덕분에 이 앞까지는 평지라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