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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 이야기 / 이동훈
소싯적에는 라면을 좋아했고 지금도 라면을 좋아하지만, 밖에서 먹기엔 국수가 더 편하고 더 끌리기도 한다. 멸치 우린 냉수에 오이나 볶은 김치를 얹은 잔치국수도 좋고, 김이나 호박채에 다진 고기까지 곁들인 칼국수라면 더욱 좋을 것이다. 잡어에 고추장으로 맛을 낸 어탕 국수에도 입맛이 돈다. 국수와 함께 내놓은 풋고추와 된장, 보리밥 한 술이면 더없이 넉넉해지기도 한다.
국수에 관한 다큐를 제작한 바 있는 이욱정 피디는 국수가 동서양을 넘나들며 오래전부터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를, “어떤 식재료와도 잘 어울리는 적응성, 빨리 조리할 수 있고 먹을 수 있는 신속함, 보존과 휴대가 가능한 휴대성, 차별화된 디자인과 식감이 갖는 유니크한 감성”(『누들로드』에서 )때문이라고 정리한 바 있다. 여기에 국수의 매력을 더 꼽는다면, 국수는 집에서든 밖에서든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데다 대개 편안한 사람들과 머리 맞대고 먹게 마련이어서 뒷맛이 개운하다는 점을 들고 싶다. 국수에 일가견 있는 사람은 혼자 먹어도 좋은 게 국수라고,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말할 텐데 국수 마니아의 시편들을 통해서 이를 확인하게 되리라 믿는다.
맛있는 음식을 두고 빈 입으로 깔깔하게 서 있자면 그건 고문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경지에 이르면 남 먹는 것만 봐도 흐뭇하다고 하지 않는가. 내겐 국수 먹는 사람의 모습이 그렇다. 내가 먹어서 좋고 남이 먹는 것을 보아도 좋고, 이런 맛나는 국수에 대해서 진작 시 한 편 쓰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고 하더니 지나치게 좋아하면 또 시가 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를 쓰지 못할 바엔 국수에 관한 남의 시라도 열심히 읽어서 국수를 좋아하는 자의 최소한의 도리를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국수 이야기, 그 시작은 ‘국수가 먹고 싶다’다.
국수가 먹고 싶다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을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 이상국, <국수가 먹고 싶다> 전문, 『집은 아직 따뜻하다』, 창비, 1998.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 어제와 다른 기척이 있고, 새롭게 시작되는 사건의 전조가 있고, 그래서 설레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한 현재가 있다. 이런 현실을 견디듯 소화하듯 밥을 먹어야 하지만 시인은 한번쯤 국수가 먹고 싶단다. 국수가 가난하고 고달픈 삶과 결부되는 것은 매한가지이긴 하되, 국수에는 현실의 고단함을 감싸고 위로하는 따듯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국숫집은 “삶의 모서리에 마음을 다치고” 찾아가는 곳이다. 의욕적으로 열심히 산다는 것이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하고, 반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거나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여 비난과 눈총을 받기도 한다. 니편 내편 따지고 유·불리를 계산하고 서로의 속내를 감추고 저울질하는 세상살이는 그 자체로 모서리가 되기도 한다. 경계를 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모서리는 삶의 도처로 불쑥 들어와 생채기를 남기거나 무릎 꺾이게 만들 것인데 그럴 때 국숫집에 가고 싶은 것이다. 거기 마주앉은 사람들은 강파른 세상살이에 상처 입고, 그걸 세상에 되갚지도 못하고 스스로 감추지도 못해 투명한 자국 그대로 남은 상처를 갖고 있다. “뒷모습이 허전”하거나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먹는 국수야말로 자신의 속과 이웃의 속을 다 같이 따뜻하게 풀어줄 것이다. 때마침 국숫집 주인이 할매같이 엄마같이 정을 내어 맛을 돋운다면 마지막 국물 한 모금까지 달게 마시게 될 것이다.
국수가 조금 좋아지기 시작했다면, 국수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어졌다면 백석을 만나자. 그는 오래전 국수에 대한, 국수를 위한 시, 쫄깃한 면발처럼 감기는 기막힌 시 한 편을 빚은 바 있다.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 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 옆 은댕이 예데가리 밭에서
하룻밤 뽀오얀 흰 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연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옛날 한가하고 즐겁던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여름 볕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의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 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느 하룻밤
아배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배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러났다는 먼 옛적 큰 마니가
또 그 집등색이에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 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옛적 큰아버지가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치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의젓한 사람들과 살뜰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 백석, <국수> 전문,《문장》3권 4호 1941. 4.
시구절 어디에도 국수라는 단어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는 해도 시 전체가 국수에 대한 이야기이긴 하다. 시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것’, ‘반가운 것’의 정체는 국수다. 국수는 자신의 긴 면발처럼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과 깊게 관련되어 있으며, “아배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오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장소인 아르궅(아랫목)에서, 육친끼리 머리 맞대고 먹는 국수는 어느 성찬보다 귀한 음식일 게 분명하다.
백석의 국수엔 마을 공동체에 대한 추억이 담겨 있고, 가족에 대한 유대가 있어 더욱 맛이 난다. 게다가 현재형 문장으로 독자에게마저 국수 맛을 본 듯한 감칠맛을 돋우게 한다. 하지만 이 시를 현재의 풍경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이것은 무엇인가”, “친한 것은 무엇인가”,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라며 감탄조의 의문형으로 거듭 물어오는 데서 왠지 지금은 잃어버린 추억을 환기하는 느낌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마을의 과거와 현재, 정든 사람과 자연을 국수에 불러와 버무리는 솜씨는 근래의 <위대한 식사>(이재무, 2002) 에도 나타난다. “마당가 매캐한 모깃불이 피어오르는/ 다 늦은 저녁 멍석 위 둥근 밥상”에 식구와 밤새 울음과 풀벌레 울음과 달의 숨소리까지 불러오는 상상력이 그것이다. 이재무는 한 끼 식사에 지나지 않을 음식, 보잘것없는 밥상과 반찬을 지상 최고의 음식으로 바꾸어놓았는데 그 뿌리는 백석에 닿아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국수>는 백석이 실의에 빠져 고향에서도 서울에서도 정착하지 못하고 만주에서 혼자 객지 생활할 때 쓴 시가 아닐까 싶다. 어쩌면 매가리 없이 혼자 앉아 고무줄 같은 국수를 먹어 본 사람이야말로 거꾸로 국수의 융숭한 맛을 말할 자격이 생기는지 모른다. 아래 윤관영의 시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혼자 먹어도 좋은 게 국수다
상심한 사람들은 국숫집에 간다 불려, 국수를 먹는다 울기를 국수처럼 운다 한 가닥 국수의 무게를 다 울어야 먹는 게 끝난다 사랑할 땐 국수가 불어터져도 상관없지만 이별할 땐 불려서 먹는다 국수 대접에 대고 제 얼굴을 보는, 조심히 들어올려진 면발처럼 어깨가 흔들린다 목이 젓가락처럼 긴 사람들, 국수를 좋아한다 국수 같은 사랑을 한다 각각인 젓가락이 국수에 돌돌 말려 하나가 되듯 양념국수를 마는 입들은 입맞춤을 닮았다 멸치국수를 먹다가 애인이 먹는 비빔국수를 매지매지 말기도 하고, 섞어서 먹는다 불거나 말거나 할 말은 사리처럼 길고 바라보는 눈길은 면발처럼 엉켜 있다 막 시작한 사랑은 방금 삶은 면과 같아서 가위를 대야 할 정도의 탄력을 갖는다 국수는 그래서 잔치국수다 (라면을 먹는 사람들도 있다)
사람들은 사랑이 곱빼기인 사람들은 국숫집에 간다 손가락이 젓가락처럼 긴 사람들,
국수는 젓가락을 내려놓았을 때서야 그 빈 그릇이 빛난다
- 윤관영, <국숫집에 가는 사람들> 전문,『오후 세 시의 주방 편지』, 시로여는세상, 2015.
“상심한 사람들”은 국숫집에 앉아 “한 가닥 국수의 무게를 다 울어야” 한다. 아마 ‘무게’ 대신 ‘길이’가 사실에 가까운 표현이 되겠지만 상심한 사람들이 감당해야 할 슬픔의 크기를 생각하면 ‘무게’란 표현으로 갈 수밖에 없었겠다. “면발처럼 어깨가 흔들린” 그들은 또한 모딜리아니 그림처럼 “목이 젓가락처럼 긴 사람들이다”. 모딜리아니가 잔느를 생각하듯이, 잔느가 모딜리아니를 생각하듯이 길게 늘인 목에서 늘컹거리는 슬픔이 도사리고 있다.
오랜 기다림과 끝없는 외로움이 긴 목에서 풍겨져 나오는 듯하지만 시인은 국수의 이미지를 이렇게 못 박아 두긴 싫은 모양이다. 방금 시작한 사랑처럼 탄력을 갖는 것도 국수란다. 상심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사랑이 곱빼기인 사람들”도 잔치 같은 삶을 위하여 국숫집을 간다는 것이다.
더 큰 반전은 “국수는 젓가락을 내려놓았을 때서야 그 빈 그릇이 빛난다”는 결구에 있다. 국수 먹다가 도통하기라도 한 걸까. 사랑이든 결별이든 그로 인해 천장과 바닥을 오가는 마음이든 그걸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빈 그릇”의 맑고 빛나는 그윽한 경지를 꿈꿀 수 있다는 것이다. 절묘한 시 한 수를 뽑는 것도 국수사리에서 영혼의 사리를 건져 올리는 작업과 같지 않을까 싶다.
소문난 국숫집마다 사용하는 재료도 다르고 맛도 다르다. 어떤 집은 얼얼하거나 칼칼한가 하면 또 어떤 집은 담백하거나 개운하다. 끝 맛이 오래 남아 속을 알맞춤하게 데우는 느낌의 국수도 좋다 싶은데, 아래의 시에서 “사북 언저리에서 후춧가루를 듬뿍 치”고 먹었다는 칼국수가 꼭 그런 맛을 낼 것 같다.
영주에서 동해로 가다가
태백 작은 마을에서 국수를 먹었다
우뚝우뚝 산 아래 그늘진 마을
눈이 쓸쓸히 내리는 날
한겨울에 냉이를 넣은 칼국수
작은 가게 안에는 사람 하나 없고
연탄난로가 냉랭히 앉아 있었다
어린 날 사북으로 간다고 말하는 것은
내 모든 삶을 유폐시키고 싶다는 욕망이었음을 고백한다
신발을 방 안에 들여놓고 자야 하는 사북 여인숙
긴 형광등을 두 방이 함께 써야 하는 그곳에서
한 마디 말도 없이
검고 검은 세상의 그림자를 조금씩 깨물어 먹었다
그곳에서 추방되어
먼 나라를 떠돌다 이제 다시
사북 언저리에서 후춧가루를 듬뿍 친
칼국수를 먹으며
과연 내 삶은 옳은가
물어보는 것이다
눈송이는 점점 커져
오도 가도 못하는 산협 마을에서
내 멱살을 잡는 한 푼어치 평화와
또다시 싸움을 하였다
- 우대식, 『태백에서 칼국수를 먹다』, 실천문학사, 2008.
영동선이 지나고 태백선이 와 닿는 태백, 사북 지역은 탄광 지대로 이름이 높았다. 돈이 돌고 사람이 모여드는 호황기를 누렸지만 그곳 노동자들의 삶은 열악했다. 폭발 사고와 갱 붕괴로 인한 인명 피해도 잦은 데다 열심히 일한 대가로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당을 받았고 덤으로 진폐증으로 고통을 받아야 했다. 갱도의 막다른 곳을 일컫는 막장은, 인생의 가장 험하고 막돼먹은 상황을 비유하는 단어가 되어 지금도 그 힘을 잃지 않고 있다.
그래서일까. 시인은 “사북으로 간다고 말하는 것”이 “내 모든 삶을 유폐시키고 싶다는 욕망”과 같은 것이었음을 고백한다. 어떤 상념에 젖어 왔든지, 어떤 일에 떠밀려 왔든지 젊은 날에 찾은 사북은 <저당 잡힌 풍경>(황재형 그림)처럼 황량했으리라. 한겨울 언덕길은 눈가루와 탄가루와 흙가루가 섞여 희끗희끗했을 테고, “신발을 방 안에 들여놓”을 만큼 추위도 매서웠고 시인의 마음도 얼어붙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가난하고 불우한 한 시절의 풍경을 지나며 고민하고 방황했던 젊음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긴 하다. 이 점이 시인으로 하여금 그때를 그리는 이유가 된다.
이제 또 다시 찾은 사북 언저리, 칼국수 맛은 변하지 않았어도 시인의 상황은 예전과 달라졌으리라 짐작된다. “한 푼어치 평화”에 익숙해져 양심을 저버리기나 그런 위기에 직면해 있을 수도 있다. 그때와는 또 다른 이유로 “또다시 싸움”을 시작해야 할 이유가 생긴 것이다. 눈 내리는 날을 기다려 태백까지 갈 수 없다면, 한적한 동네 식당에 앉아 칼국수 한 그릇에 지난 삶을 돌이켜 보자. 약간의 후회 정도는 양념으로 버무려도 좋겠다.
국수 먹는 자리엔 바쁜 일상을 쉬어가는 여유와 농담이 있으면 더욱 좋을 텐데, 이를 충족시키면서도 동시에 속이 따뜻해지는 국수 이야기를 만나 보자.
신문 지국을 하는 그와 칼국수 한 그릇 할 요량으로 약속 시간 맞춰 국숫집 뒷방 조용한 곳에 자리 잡고 터억하니 두 그릇 든든하게 시켜놓고 기다렸는데 금방 온다던 사람은 오지 않고 국수는 퉁퉁 불어 떡이 되도록 제사만 지내고 있는 내 꼴을 때마침 배달 다녀온 그 집 아들이 보고는 혹 누구누구를 만나러 오지 않았냐고 은근히 물어오길래 고개를 끄덕였더니만 홀에 한 번 나가보라고는 묘한 미소를 흘리길래 무슨 일인가 싶어 마당을 지나 홀 안을 빼꼼 들여다보니 아연하게도 낯익은 화상이 또한 국수를 두 그릇 앞에 두고 자꾸만 시계를 힐끔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 안상학, <안동 숙맥 박종규> 전문, 『아배 생각』, 애지, 2012.
국숫집에서 생긴 짧은 일화 한 토막을 소개했을 뿐이지만 독자는 등장인물의 일면이 아니라 상당 부분을 눈치챘을 것이다. 몇 번의 크로키로 그 인물에 대해서 핍진하게 잘 그렸기 때문이다. 약속 시간에 대어 오지 못하는 것을 탓하지 않고 국수 면발이 붇는 것만 걱정하는 사람, 상대가 미안해할까 봐 전화도 하지 않았을 사람, 따지고 재고 가리는 일에 영 숙맥인 사람……. 그리고 그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은 화자의 모습이 선하게 또 善하게 다가온다.
국숫집 아들의 “묘한 미소”도 이 시의 재미를 더하는 요소다. 그 미소는 장난기가 묻어 있고 희극미를 유발하지만, 크게 웃거나 조롱하는 것이 아닌 두 사람의 선의를 감싸는 웃음이다. “퉁퉁 불어 떡이” 진 이 국수를 후루룩 달게 먹었다면, 각박한 세상에 어수룩하고 정다운 이웃들의 모습에서 위로받은 바 크기 때문일 테다.
비싼 요리에는 잘난 사람 옆의 불편한 자리가 따라오기 십상이다. 논밭이나 공사장에서 일하고 난 뒤 참으로 먹는 국수의 맛은 꿀꺽이는 소리만큼이나 맛날 것이다. 장터에서 주인인지 손님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스스럼없이 빗자루 깔고 앉아 먹는 국수도 그렇게 맛있어 보일 수 없다. 골방 안이든 사과궤짝 위든 어디든 가리지 않고 숙맥끼리 나누어 먹는 칼국수, 두말없이 내가 꼽는 최고의 음식이다.
끝으로 숙맥들이 함께 빚은 맛있는 국수 한 입만 더 하자. 숙맥들의 약점은 정에 약한 것이고 이 점이 숙맥들의 치명적 매력인 줄을 아는 사람은 안다.
담양 관방천변 ‘진우네 국수집’에
손님들 넘쳐 앉을 자리가 없다
‘옛날진미국수집’은 텅 비어 있는데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 사는 세상을 어쩌고 중얼거리며
우리가 앞장서 빈 국숫집으로 들어간다
강물에 봄 햇살 튀어 눈이 부시다
햇살 비추는 바깥 마루에 자리를 잡자
할 일 없어 진우네 가게를 힐끔거리던
총각이 서둘러 우리를 맞는다
반팔차림 총각의 팔에 새겨진 문신
‘Don`t stop dreaming'
멸치 국물국수, 열무 비빔국수
삶은 달걀 서너 개 오른 개다리소반에
둥그렇게 둘러앉아 막걸리 한 사발씩 돌린다
누구도 부럽지 않은 점심
왁자지껄 웃음소리에 은근하게
한낮 관방천의 공기가 달아오른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느닷없이 여름 같은 봄이 온다
- 김완, <여름 같은 봄이 온다> 전문, 『너덜겅 편지』, 푸른사상, 2014.
잘되는 국숫집과 텅 빈 국숫집 사이에서 시인 일행은 잠깐 고민했을 것이지만 잘되는 집보다 그렇지 않은 집에 마음을 쓰는 순간, 이미 선택은 이루어진 거다. 결과적으로 뱃속 편한 선택이 되었음을 “왁자지껄 웃음소리”로 듣는다.
함께 사는 삶을 입으로 떠들어대면서도 실제 선택은 그렇지 못할 때가 왕왕 있다. 물론, 가게를 찾아가거나 상품을 고르는 일은 맛, 품질, 서비스 등의 정보를 고려한 당연한 선택일 것이고, 자기 돈 내고 자기 쓰고 먹고 입는 것도 눈치 봐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도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잘 안 팔리는 가게를 한번쯤 걱정해 주는 마음과 어쩌다 들러서 안 팔리는 가게에도 기회를 주는 게 부의 독점과 폐해를 줄이면서 이웃과 더불어 사는 윤리라면 너무 거창한가. 시인은 숫제 더 거창하게 나간다. 잘 안 팔리는 국숫집을 찾은 일을 두고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고 선언해버린 것이다. 했다. 일방적으로 배부른 것을 경계하고 나누면서 커지는 경제학을 실천한 뿌듯함의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맛은 기본이면서 기분이다. 잘 안 나가는 것을 거들어주면서 기분 내러 국숫집으로 가자. 거기, 여름 같은 봄, 겨울 속의 봄, 봄 같은 봄, 봄봄봄 노래하는 즐거움이 있다.
지금까지 팔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시인이 빚은 국수 맛을 다문다문 맛보았다. 사진 한 장(최민식, <언양 장터>, 1965)의 국수 맛을 부록으로 걸면서 이야기를 맺을까 한다. 할매의 애처롭게 보는 눈빛을, 국수 한 가닥을 옮기는 쭈글쭈글한 손을 그림인 듯 생시인 듯 오래오래 보는 시간! 이윽고, 맛있는 국수엔 더운 김이 서려 있다고 방점을 적는다.
- 월간, 우리시 (2016.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