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신 79/200205]입춘방立春榜 이야기
입춘立春추위에 김칫독이 얼어터진다거나 장독이 깨진다는 속담이 무색하게 24절기가 새로이 시작되는 경자년 입춘, 어제의 날씨는 완전히 봄이었다. 우리 조상들은 ‘봄春이 선다立’는 입춘날 입춘시立春時(어제는 오후 6시 2분이었다 한다)에 대문, 현관, 중문, 곳간문, 기둥, 방문 등에 입춘방立春榜을 써 붙이며, 좋은 기운을 받아 1년내내 집안이나 국가에 길한 일이 생기기’를 기원하는 미풍양속을 물려주셨다. 우리가 흔히 아는 입춘방의 문구인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이 바로 그것. 요즘엔 보기 드문 풍경이긴 하지만 말이다. 명리학자命理學者들은 입춘을 기점으로 기해년己亥年이 경자년庚子年으로 바뀌어, 각각의 사주팔자四柱八字가 시작된다고 한다. 또한 입춘방을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어서 오기를 비는 ‘춘축春祝’이라고도 한다.
그제 오후, 노출상량上樑의 좋은 문구를 써준 남원 근봉槿峯 친구의 전화다. 입춘방을 써놓았으니 곧 다녀가라는 거다. 아니, 이렇게 고마울손이 있나? “알았어. 알았어. 고마워” 전화를 끊고 나니, 소싯적 이맘때쯤이면 아버지가 입춘방을 써 소슬대문에는 ‘소지황금출掃地黃金出 개문만복래開門萬福來’를, 본채 기둥에는 절이나 궁궐 기둥에 써놓는 주련柱聯처럼 ‘부모천년수父母千年壽 자손만세영子孫萬世榮’과 '수여산壽如山 부여해富如海' 그리고 도연명陶淵明의 ‘사시四詩’라던가 ‘춘수만사택春水滿四澤 하운다기봉夏雲多奇峰 추월양명휘秋月揚明輝 동령수고송冬嶺秀孤松’ 등을, 창고문에는 ‘입춘대길 건양다경’을 써붙여 놓으셨던,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풍경이 떠올랐다. 뜻들을 간단히 풀이해보자. 아주 멋드러진다. 마당을 빗자루로 쓰니 황금이 나온다는 말은 ‘마당 쓸고 돈 줍고’가 아닌가. 대문을 여니 만복이 들어온다는 말은 자기만 부지런하면 얼마든지 재산을 모을 수 있다는 뜻일 터(아버지는 그래서 깡촌에서 자수성가自手成家를 하신 것인가). 또한 부모가 장수長壽를 하고 자손이 만세토록 영화榮華를 누렸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은 것도 있다. ‘추구推句’라는 기초한자책에도 나오는 도연명의 한시를 보라. 농사에 대비해 봄물이 사방의 못을 가득 채우고, 여름구름이 하늘에 기기묘묘한 봉우리를 여기저기 만들고, 밝은 가을달이 온통 천지를 비추며, 겨울 고개마루에 빼어난 소나무가 홀로 외롭다는 압축된 계절 표현이 너무 좋아 큰소리로 외고 다녔었다.
글자와 뜻도 전혀 몰랐지만, 일년내내 사방에 붙어있던 입춘방의 문구는 하도 봐서 머리 속에 고대로 스캔이 되고 입력이 되어 있었기에, 나에게는 한자漢字와 한문漢文이 전혀 낯설지 않는 문자였었다. 고교시절 겨울방학에 서당書堂을 처음 가 천자문千字文과 사자소학四字小學, 추구, 명심보감明心寶鑑 등을 배우는데, 누구보다도 많이 알고 금방 배워 외울 수 있던 것은 순전히 우리 아버지 덕분이었으리라. ‘가르쳐주지 않아도 보고 배우고 큰다’는 말은 ‘가풍家風’ 즉, 집안분위기를 말하는 것이리라. 책이 많은 집에서 자란 아이들은 대부분 공부를 잘 하고, 학자가 되는 확률이 그렇지 않은 집안의 아이들보다 훨씬 높다는 외국의 연구결과를 언젠가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다. 당연히 그러지 않겠는가. 우리집의 장서藏書가 무엇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삼사천권이 쌓여 있는 서재書齋를 일상으로 보고 크는 우리 손자가 공부도 잘하고 교수敎授나 학자가 될는지 누가 알겠는가. 부디 그리되기를. 그래서 내가 읽지도 않는 책들을 잘 버리지 않는 까닭이다. 요리 잘 하는 엄마를 보며 큰 딸이 나중에 요리를 잘하는 것도 같은 이치리라(리틀 포레스트의 예쁜 처자를 보라).
어제도 친구로부터 들었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지구촌 이상기후. 휴화산인 백두산 화산이 터질 것을 염려하는 것처럼, 94세 아버지 의 말씀처럼 “내 평생 눈 한번 오지 않은 겨울은 처음”이라는 올 겨울, 입춘이 다 되도록 끝내 눈이 오지 않을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고향집을 잘 고쳐놓고, 싸목싸목 내려 들판에 쌓이는 눈을 거실에서 차분히 앉아 하루종일 즐겨볼 꿈에 부풀었던 이 작은 소망을 깡그리 개무시한 하늘의 조화造化를 어찌하랴. 앞으로는 더욱더 그럴 거라는 불길한 예감을 어찌 떨치겠는가. 멀리 호주에서는 남조선 면적만큼이 5개월동안 불에 탔다고 하는데, 이것도 이상기후 때문이라고 한다. 비가 올 때 비가 내려야 하고, 눈이 올 때 눈이 내려야 ‘정상’이거늘, 지금 지구촌은 원인이나 처방도 모르는 ‘21세기 전염병傳染病’에 대비상이 걸리고 극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는 무슨 개뼈다귀같은 병이던가? 유럽을 휩쓸었던 페스트(흑사병)가 연상되는 이 전염병은 또 어찌할 것인가? 거대한 중국과 ‘몬도가네’ 취향의 중국인 탓만 하고 있을 것도 아니고, 이것도 혹시 이상기후의 한 부산물일까?
불행히도 나는 이 모든 것에 대해 전혀 아지 못한다. 그냥 입춘방의 문구처럼 거창하게는 ‘국태민안國泰民安(진정한 통일을 앞당기는 남북관계의 호전과 우리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좋아져 경제가 안정되기)’과 작게는 ‘우리 가정의 안녕과 행복, 나 자신의 건강과 발전’을 두손 모아 빌 따름이다. 울울창창, 답답한 마음을 끌고, 오늘은 막역한 친구와 함께 지리산 바래봉을 오르리라. 그동안 쌓인 ‘말도 안되는’ 스트레스들이 불볕더위속 어느 여름날 비 개인 아침처럼 말끔히 가셔졌으면. 그리하여 또한 우리나라가, 아니 지구촌이 '우순풍조雨順風調 시화연풍時和年豊'의 한 해가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