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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새 (황제의 인장) 玉玺 (皇帝的印章)
출처:바이두백과 소스: 이페어케이
옥새는 임금의 옥인(玉印)을 가리키는 말로, 지극히 높다.권력의 상징. 고대 인새는 통칭하여 금이나 옥으로 불렀다.진시황제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시작은 주나라에서 시작하여, 진나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옥새가 나왔다.인의 구분이면 임금의 인은 새라고 하고, 신민의 인은 인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사기·진시황본기》영영재, 절에서 만나 옥새를 받는다.
이상은 《수궁》시 : "옥새는 인연이 없다.귀일 각, 금배는 하늘 끝까지 가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어명 옥새외문명 임퍼(영어) (일어), 궁중 ial Seal이 황제의 의 璽부터 기원전 221년 동안 인장을 1일이다. 음력 정월 마감시기인 1912년 1월 1일.
카테고리
1 고문 기록
2 전공 해석
3사 연혁
4새 밑의 인문
오야사 기록
6 보새 흐름
7보새제도
8개국 중기
고문서
시문소수회전국옥새
시문소수회전국옥새
[한] 채옹 '독단' 재중 "하늘님자새는 옥리호뉴로 한다.옛사람들은 공경하고…진 이래 천자는 새를 찍어내고, 독이옥을 찍어냈으니, 군신은 감히 쓸 수 없었습니다."
[송] 오증 《개재만록(斋 漫录)》2) 서령옥새기: 옥새자국보전.
진시황제는 남전옥을 따서 이사에게 명했다고 한다소전각지. 새문은 '하늘에서 명을 받은 자는 장수영창(壽永昌)'이라 한다. [1]
전문적 해석
전공칭은 보새.보새란 무엇인가? 천자가 지은 곳.임금은 새라고 하고 신하들은 인이라고 한다.무새서는 왕언무이해(王言無爲四海)이고, 도장이 없으면 사의 문맥이전(司文移)이 소속을 지키지 못하였는데, 이 진한 이래 진나라가 이에 해당하였다.그런 일입니다. (명청제 후보새는 주가溍을 변언함)
황후황후황태후의 패를 새라고 한다.인은 신하가 쓰는 것이다. 규칙이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목이 잘릴 것이다.
옥새는 어새의 속칭으로 정확하고 전문적이다이를 '보새(寶玺)'라고 한다. 명대의 정식 보새는 옥제(玉製)로, 심덕부(深德 沈)는 '만력야획편(萬力野获集)'에 "가정(嘉靖)까지 45년 겨울이면 세종은 이미 세종이 되었다.예의가 오래되지 아니하였으니, 조서를 내려 갑술에 먼저 재앙을 당하였으니 어보범육이 그 다섯을 이미 멸망하였다고 하였다.미옥이를 찾아다닐 것을 명한다"고 했다.어보는 여전히 옥으로 만들어져 애석함이 오늘날까지 전해지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연성화, 가정시에는 확실히 백석 등으로 제작하였다인새는 대부분 한장에 속하며, 일부 인문의 문자는 어보와 같이 현재 고궁을 소장하고 있다.명나라에는 24보새가 있는데, 이 중 임금 봉천지보는 당송지새('명사' 권칠십사), '명회요' 권24, '명관사목집'), 청나라의 보새는 재료가 더 많고, 옥 외에 단향목, 단향목, 금제, 수정, 마노, 골재 등이 있다.
25자 위변조 옥새
25자 위변조 옥새
시대별 새, 인, 장의 사용범위가 다르다. 《통전(通典)》에 의하면, "또 3대(代)의 제도에 따르면 인신(人臣)들은 모두 김옥을 인(印)으로 하고 용호단추(龍虎 钮)를 단 것으로 좋아하였는데…진(秦)은 인(印)을 새(鳥)라 칭하고,이옥, 불통신하 …제, … 그리고 진한의 제도를 따랐다.황태자 제왕의 금새는 모두 거북이 단추다.공작, 후작, 오작, 금장.광록대부, 경…. 4품 5품 장군, 모두 은장(銀章)이다.상서령(尙書令)과 복사(射射)…. 여러 주(州)의 자사(모두 동인(銅印)으로 볼 수 있듯이 '새'는 제후(帝後)와 제후(帝後) 왕에 의해 사용되었고, 신하들은 실제에 따라지위를 '章'으로, '印'으로 칭한다.무칙천은 '새'의 해음( 谐音)인 '죽음(死)' 대신 '보(寶)'로 바뀌었다고 전해지며, 이때부터 명대(明代)와 제왕(帝王)의 인장(印章)을 모두 '보(寶)'로 불렀는데, 예를 들면 명대(明代) '노왕지보', 청대(淸代), 석이(石伊親王寶)'와 같다.
역사 연혁
옥새
옥새
옥새는 진대 이후로 황제의 인장을 전문으로 하고 있다.'새'라는 명칭으로 옥질(玉質)만을 전용하여 '옥새'라고도 불리는데, 모두 6개 품으로 '황제의 새' '황제의 새' '황제 행새' '황제 신새'이다.'천자의 새' '천자의 새' '천자행새' '천자신새' 황제의 인새 중 어느 한쪽은 이 여섯 개가 아니다.'전국옥새(傳國玉玺)'다."전국옥새"는 "전국새"라고도 하며, 진나라 후력이다.대제왕상전(代帝王相傳)의 인새는 진시황제의 명을 받들어 새긴 것이다.그 방원은 4인치이고, 위의 단추는 5개이다.용, 정면에는 황권신수정합법(皇權神修正法)의 신물(信物)으로 황권신수영창(皇權神授)의 팔전(八 。)이라는 서명이 새겨져 있다.이후 역대 제왕들이 모두 이 새를 얻어 기진처럼 모셨고, 나라의 큰 인물들을 모셨다.이것을 얻으면 "하늘에 명령을 받았다"를 상징하지만, 놓치면 "기운이 다했다"를 나타낸다."다. 왕위에 올랐으나 그런 새가 없는 자는 피한다.'백판황제'라고 비아냥거리다• 배짱이 부족해 보이며세인의 경멸을 받다.이것이 바로 보물을 찾도록 재촉하였다.그 무리들은 서로 다툰다.그 전국의 옥새를 여러 번 용이하게 하였다.그 주인은 신주를 전전하였다.적현 범이 천여 년.그러나 결국 종적을 감추고지금까지 종적이 묘연하여, 걸핏하면 사람을 웃긴다.손목을 쥐고 탄식하다.
전설에 의하면 진시황은 6국을 통일한 후 화목하였다고 한다.씨벽이 전국의 옥새를 만들었다.전국의 옥새가 화씨벽탁으로 만든 것인지는 차치하고라도,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한 후, 확실히 옥공을 조각하도록 한 적이 있다.임금의 옥새는 '천자새(天子玺)'로 불린다.사서에 의하면, 이 새는 산시성 란톈의 백옥을 조각하여 만든 것으로, 리는 호랑이 단추라고 한다.용어봉 새단지의 옥새에 글을 새긴 것은 승상이 스님이 대전(大篆)으로 쓴 "명령을 받은 자는 하늘에 계시고, 기수영(紀壽永)이다.창'팔자. 국새가 나온 후부터 전설적인 경험을 했다.기원전 219년 진시황제가 동정호까지 남으로 순행하였을 때 풍랑이 거세게 일어나 타고 가던 배가 전복되었다고 전해진다.시황은 호수에 국새를 던져 신진의 파도를 제사지내고 비로소 무사히 호수를 건넜다.8년 후, 화음평서도에 행차하였을 때 옥새를 들고 도중에 서 있던 시황시종에게 "이걸 좀 해 달라.황새는 조룡(진시황대칭)에게 돌려준다"고 말했다.말이 끝나자 자취도 보이지 않았다.국옥새가 진나라에 귀속되다.
진말에 전란이 일어나자, 유방이 병사를 인솔하여 먼저 함양으로 들어갔다.진망국의 군자 영이 유방에 천자새(天子玺)를 바쳤다.한나라가 즉위한 유방은 이를 국새라 칭하며 '한전(漢傳) 국새(國鳥)'라 불렀다.이후 옥새는 장락궁에 보관돼 황권의 상징이 됐다.서한말 왕은 권력을 넘겼고, 황제 유영은 두 살이었고, 옥새는 효원 태후가 관리했다.왕망(王 王)은 안양 후왕 순(順)을 태후에게 핍박한 뒤 옥새를 내놓으라고 명했고, 태후(太後)는 호통을 맞았다.태후가 노하여 옥새를 땅에 던졌을 때,옥새의 한쪽이 떨어져 나간 뒤 금으로 보완해 흠집을 냈다.왕망이 패한 후, 옥새가 거의 되다.손을 거쳐 한광무제(漢光武帝) 유수(劉秀)의 손에 들어가 동한제(東漢帝)에게 전해졌다.동한말에 십상시작란(十常作亂)이 일어나자, 소제는 황황히 도망쳐 옥새를 가져갈 겨를이 없었고, 궁으로 돌아와 보니 옥새가 실종되었다.'18길 제후토양탁(帝後 讨董)'의 손견부(孫 孙部)는 낙양성 남견궁정(南 宫宮井)에서 한 궁녀의 시신을 수습하였다.그녀의 목 아래 금낭에서 "전국옥새"손견은 길하다고 여겼다.징조를 보이자, 그리하여 하기 시작했다황제가 되는 꿈. 아니오.예상손견군중유장군이 일은 원술에게 알리고, 원에게 고한다.술문을 듣고 즉시 구류하다손견의 처가, 손견의 아내를 핍박하다.옥새를 내어주다 원술 패사하고'전국옥새'가 한헌제로 복귀하다.어떤 사람은 동한 말년에 손견의 씨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전(傳) 국새는 이미 위조된 것이다(원인 하나는 궁녀가 전(傳) 국새를 패용보관할 수 없었기 때문이고, 원인의 둘째는 왕망이 한나라를 제적할 때 '한전신왕망(漢傳新王莽)'을 옥새에 새긴 것이다.글씨는 유수가 다시 등극한 후, 갈면 옥새가 파괴되고, 이 글씨가 지워지지 않는데, 손견은 이를 받았다.옥새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삼국이 정립할 때, 옥새는 위나라와 삼국지 중 하나이다.통, 옥새는 진나라로 돌아가고, 서진 말기, 북쪽은 세대교체가 빈번하고 요동치는 시대에 빠져들었다.'전국옥새(傳國玉鳥전국옥새)'를 쉴 새 없이 빼앗기고 있다.진회제 영가 5년(기원전 311년), 옥새는 조유총(趙有聪)에게 돌아갔다.동진함화사년(기원전 329년), 후기조석륵멸전 조는 옥새를 받고, 새를 얻어 오른쪽에 천명석씨를 새겼다.후조 대장이 장발민에게 돌을 던지다.스스로 정립하여 옥새를 탈취하다.후발장이 동진군의 구원을 구걸하며, 국새를 전하여 진나라 장수의 영이 되었다.가다가 삼백 정기로 밤새 수도 건강(난징)에 내려보내 국새를 전하여 진나라 사마가에 귀속시켰다.남조에서는 송, 제, 양, 진의 교체를 거쳤다.대수는 화하를 통일하고 국새를 전하여 수궁에 들어갔다.서기 618년에 수나라는 죽었다.소후는 황손정과 함께 국새를 전입하였다.막북 돌궐.
한나라 유하가 위조한 옥새
한나라 유하가 위조한 옥새
이 단계에서는 몇 개의 '사각'적인 것도 나타났다옥새는 동진 조정 자각인, 서연 모용 새, 야오진 옥새 등이다.남조 양무제에 이르렀을 때, 장수를 굴복시키고 반역하여 전국의 옥을 강탈하였다.새. 얼마 후 경패사망하여 반란이 진정되었다.그러나 후경이 임명한 시중 겸 평원 태수 조사현은 혼란한 틈을 타 옥새를 들고 잠적하였다광릉으로 도망쳐 곽원건이라는 사람에게 옥새를 빼앗겼다.곽장옥새는 북제의 행대에 바쳤다신술, 신술은 다시 북제 조정에 바친다.전국의 옥새가 황하 중하 하류의 북쪽에 할거하였다제고씨 소유입니다. 그 후 남량이 대신 남진을 했지만 국새는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할까요?하기 쉽습니다. 스스로 옥새를 하나 새깁니다.그래서 점점 더 많은 옥새를 새기고, 할거 정권마다 자기 손에 있는 옥새가 진짜 천자다.건덕 6년 정월에, 북주 무제우 문옹은 북제를 멸망시켰다.전국의 옥새가 북주에 들다.4년 후, 양견이 주나라를 대신하여 수나라를 건국하였다.황구년에 대수는 진을 멸망시켰다다시 전국을 통일한다.'사각의 전'국옥새도 다대 수 정부에 의해 몰수되었다。
당나라 정관 4년, 이정은 군대를 이끌고 돌궐을 토벌하였다.같은 해, 소후는 갑자기 황손정도와 함께 중원으로 돌아와 국새를 이당에 전하였다.당말, 천하의 대란, 서기 907년, 주전충폐당애제, 국새를 빼앗아 후량을 세우다.서기 923년에 이존욱이 후량을 멸망시키고 후당을 지으면서 국새도 후당에 전하였다.。
마지막으로 '전국옥새' 황제 파악5대 후당말제(後唐末帝) 리종가(李從珂)로, 서기 936년 진석경당(晋石敬瑭)이 낙양을 함락하기 전에 그와 후비가 궁에서 분신하면서 어용한 모든 물건도 함께 분신하였다.불 속에 뛰어들어 '전국옥새(傳國玉玺)'가 사라진 가운데 그 행방에 대한 설(說)이 분분했다
국새 밑의 인문.
전(傳) 국새문(國 既文)을 '천기수(天期壽) 영창(永昌)'이라 한다."한서"의 글을 "하오천의 생명 황제 수창"이라고 부른다.양자가 다르면 일반적으로 제1의 설을 가리킨다.또 북송 철종 때 받은 전(傳) 국새는 당시 장돈채경의 가짜라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또:명청 2대에도 가짜 새들이 나타났다.명효종(明孝宗)은 소위 전(傳)의 국새를 받았는데 효종황제는 당시 가짜라고 여겼고, 청초(淸初) 궁내에는 39방(方方)의 각종 어새(御鳥)가 숨겨져 있었는데, 그 중 한 쪽이 진(秦)의 전(傳) 국새로 여겨져 서기 1746년에 건륭(建隆)을 거쳐 황제흠(钦)되었다.모조품임이 판명되다.1924년 11월, 마지막 황제 부의가 궁궐에서 축출되었을 때에도, 장벽, 녹종린 등은 여전히 추적하고 있었다.
국새를 전수하다. 또 '요사'는 '대위수한전국지보(大偉水漢傳國之寶)'로 표기되어 있는데, 나는 '대위수한전국지새'로 알고 있었는데 당무(唐武)가 천시(天時)에 '새'를 '보(寶)'로 바꾸었는데, 그 시절이 바뀌었을 것이다.요사사기: "국보전, 진시황작, 푸른 옥으로이무뉴는 육면, 본문에 '하늘에서 명을 받고 장수영창(壽永昌)', 어조전(魚鳥篆篆)과 자영(子 。) 이상은 한나라에서 떠나왔다.왕망이 한나라를 찬탈하고, 평황후가 황제의 전계(殿殿)에 뛰어드는 등 이무각(李螭角)에 흠집이 조금 있다제자가 잃자 손견은 우물 속에서 손권에 전해져 위나라에 귀속되었다.위문제는 예각어깨에서 '대위수한전국지보'라고 일컬었다.당은 '수명보'로 이름을 바꾸었다.진나라는 멸망하고 요나라로 돌아가서, 삼국이래, 참위 제국은 종종 사제지간을 모의하고, 역대 부고들이 감추었던 것을 숨기지 않았다.하나. 진위를 구별할 수 없다. 성종 개태 10년, 역취석진소에서 옥새를 타고 중경에 갔다.흥종중희(興宗重熙) 7년, 《국보(國寶)가 있는 자를 정통부로》시진사로 삼았다.천조는 2년 동안 보대하고, 유전의 국새는 상간하에 있다.송사: 보.진나라는 천자에 육새가 있고, 또 국새가 전해진 것을 역대로 따랐다.당개보, 그 제도는 8이다.5대 난리, 다망함"이라고 했다.
또한, '위본기'에는 '하늘에서 명을 받고 장수영창(壽永昌)'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훼손된 진흙 상에서 옥새2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그 옆에는 '위수한전(威所漢傳) 국새(國새)'라고 불렀다.
야사 기록
전국의 옥새가 열여섯 나라에 전해지고 장발장이 멸망할 때 동진, 연, 후진이 각각 한 개씩 받았는데 모두 진짜라고 자칭했고, 이 중 동진이 한 조각은 후당 이종가(後唐李從珂)까지 분신되었다.나중에 송나라가 건국된 후, 한 농민이 이 종가의 폐허에서 이곳을 찾았다송나라에게 옥새를 바칩니다.
마지막으로 금, 그리고 원, 원 순제에게 북원으로 끌려갔다.
주원장은 북원을 멸망시키고 옥새를 받아 민국에 전파되었다.
민국 정부는 천대 후 타이베이 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
보새 흐름
시문 소수화전 국옥새 2
시문 소수화전 국옥새 2
역대 통치자들이 천명(天命)과 상서(祥瑞)의 징조라고 우기는 바람에 송(宋)대부터 가짜 국새의 전설이 심심찮게 발견된다.송소성 3년(기원전 1096년) 함양인단(艦陽人壇)이 집수리할 때 지하에서 캐낸 '색록여람(色 色如靑) 온(溫)'이라 한 것과 같다.'윤이택', '이무스터 5판'의 옥인(玉印)은 한림학사인 채경(蔡京) 등 13명의 관리가 '고증'한 결과 '진진제 전(傳) 국새'의 옥인(玉印)으로 판명됐다.그러나 채경 등이 황제들을 속이기 위해 벌인 술수였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명홍치(明弘治) 13년(기원전 1500년) 도현(戶縣) 모지학(毛志學)이 진리( 玉河)에서 옥새를 받고 산시( 。西)에서 곰을 순무하던 중 효종(孝宗) 황제로 봉헌되었다.원말 원순제(元順帝)가 사막으로 들여간 전국새(傳國玺)가 김태종 황태왕의 극방문을 거쳐 황태극이 국호(國號) '김'으로 개명되었다고 전해진다.청(淸). 그러나 청초(淸初) 고궁(古宮)에 보관된 옥새 39방 중 전(傳)국새(傳)국새(傳國 。)자(傳國玺者)로 불리며 건륭황제(建隆皇帝)가 위작으로 간주한 것을 보면, 전(傳)국새의 진위(眞爲)는 확실치 않다.
진짜 국새는 명멸원 때 원장에 의해 모북으로 끌려갔다고 한다.명청 양조의 '전국옥새(傳國玉鳥전국옥새)'에 대한 태도는 이전 시대와 다르다.《명사·여복지·황제 보새》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예부 상서는 지방에서 보내온 국새를 언급하면서"진시황으로부터는 남전옥을 새로 여겼고, 한나라 후엔 이를 물려받았다.스스로 교묘하게 힘을 써서, 이 족족으로 명함을 받았으나 덕으로 명함을 받았는지 새를 받지 않았는지라그러므로 구하지 못하면 거짓으로 사람을 속이고, 그것을 얻으면 임금님과 신하가 기뻐하여 세상에 자랑할 것이다.모두가 웃는 얼굴"이라고 했다.
청고종 어제인 '국조전보기(國朝傳寶記)'도 "회전소(會典所)에 실려 있지 않은 자는 '하늘에서 명령을 받은 자는 장수영창(壽永昌)'이라는 새를 갖고 있는데, 언제 장전(藏殿)에 붙여서 그 정중앙에 놓였는지 모르겠다"고 했다.그 표현에 의하면 비록 옛부터 전하여 온 진새이지만, 전서의 졸속은 이사충이 아닌 새의 옛 명성과 매우 ……약론보진새뿐 아니라 진새도 어찌 그리 비싸겠는가!건륭(建隆) 3년, 고빈독하(高賓河河) 때 속관 준보응하(河寶應河)에 들어가 옥새를 얻었는데, 고택(古澤)이 귀여웠고, 《중경록(中京錄)》에 실린 채중평본( 。中平本)짐은 이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새김을 따라 한 것이라 말하며, 별전에 보관하는 것은 좋은 낡은 물건으로 간주할 뿐이다.부진새는 불에 그을린 것으로 옛사람의 이론은 상세하다.비록 상존한다 하더라도 정치와 이 물건이 어찌 본조 전래의 보물과 함께 저장될 수 있겠는가?우의 미당.
보새 제도
역사적으로 각 왕조는 봉건독재의 상징물인 보새(寶 秦)를 유지하다가 진시황제가 새기기 시작한 이후 역조(逆朝)나 전승, 중각(重閣), 그리고 청망(淸死)까지 그랬다.진시황제가 세운 보새제도는 한고조 유방이 모두 계승하여 그 후 소위 말하는 것이 되었다.위와 진, 남북조, 수까지 아우르는 '진한팔새제'는 진한의 팔새제를 계승했을 뿐 아니라 규격과 명칭, 단추, 문자까지 거의 틀리지 않았다.당나라 무칙천이 제(皇天經命有德者昌)의 신새(神鳥)를 도입하고, 팔새(八새)제를 구새(九鳥)제로 바꾸면서 보(寶)로 바꾼 것이 유래다.이때부터 각 왕조는 모두 '보'라 불렸다.북송은 십이보로 늘었고, 남송은 십칠보였다.명나라는 24보로 급증하였고, 청나라는 교태전 25를 나누었다
보의 일상적인 사용 외에 '성경십보'를 모시고 있다.이로써 역대 왕조의 보새의 수량은 갈수록 많아지고 있으며, 또한 부피도 갈수록 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진한의 방 1촌 2장에서 4촌까지, 당나라의 방 2촌에서 4촌까지, 명·청의 방 2촌 9에서 5촌 9촌까지이다.가장 큰 것은 송나라 보명보(寶命寶) 범위천지, 유찬신명, 보합태화(保合太和), 만수천황(滿壽天皇)의 정명보(定命寶)의 인면(印面)이 무려 9촌이나 되는 반면, 명나라 건문제의 천명명명명명명명명덕(天命明德, 표정만방(表正萬方)정일집중영주영창(正一 。中)과 영주영창(永主永昌) 인면)은 무려 1척 6촌이다.
나라의 중기.
자금성, 명, 청 양조 황제가 살았던 곳 역시 세계에서 가장 큰 황궁이었다.이곳에는 각 역사 시기의 진귀한 보물이 백만 개 가까이 보관되어 있다.수많은 보물 중에서 황제의 무상의 권위와 지위를 가장 잘 대변하는 보물은 무엇일까.이것은 보새가 아니면 안 된다.
주역태연의 일수 이십유오에 따르면 건륭황제는 청 왕조가 25세에도 전해지길 바랐는데 청이십오보는 청대 건륭황제가 지정한 국가정권을 대표하는 25방어용 국보의 총칭이다.이때부터 이 25개의 보새는 가경(嘉慶)을 거쳤다.도광, 함풍, 동치, 광서년(光書年) 선통 말년까지 계속되었다.25방 보새는 각각 유용하게 쓰였으며, 대표자와 대표자는 황제의 국가 최고권력을 총망라했다.
이 25보새는 현존하는 유일한 완전한 황제어보이다.이 25보새는 교태전의 보물 상자에 보관돼 있다.보새는 내각이 관장하는 것으로 인은 황제의 승인을 받아야 나올 수 있다.
이십오방 옥새(玉玺)의 역할로 재질이 다양하고, 금은(銀)과 목제 옥새(玉 。)가 있다.
대청수명지보: 《교태전보보보》는 장황서(章皇書)로 백옥질(白玉質)과 판룽뉴( 。龍龙)로 천자의 즉위용 새임을 천하에 알린다.
후대에 위조한 옥새
후대에 위조한 옥새
임금 봉천지보: 《교태전보》는 장봉약, 벽옥질, 반룡뉴를 담고 있다.
대청사천자보 : 《교태전보》는 장계승, 금제, 교수룡뉴, 책립태자용이다.
보배: 황제는 일상용 새, 일옥제, 일목제, 옥질로는 교수룡뉴, 나무로 쪼그리고 앉는다.
천자의 보물: 《교태전보》는 백신의 용, 백옥질, 교룡뉴, 제사용 새를 제사지낸다.
임금님의 존귀지보: 《교태전보》용 보태후, 태황태후 및 상존시호, 묘호, 백옥질, 교룡뉴, 제사용새.
황제의 보배교태전보(交泰殿寶報)는 종맹(宗盟)용으로 백옥질(白玉質) 교룡뉴(交龍 纽) 제사용(祭祭用)인 새(鳥)를 전시하였다.
황제행보: 《교태전보》는 하사( 颁錫)가 하사하는 것으로 벽옥질(玉玉質)이며 교룡뉴(交龍 。)가 교유한다.
황제신보:교태전보는 군무(軍武)의 용도, 백옥질(白玉質), 교룡뉴(交龍 纽)를 상징한다.
천자행보: 《교태전보》는 책외만(玉外 ,)과 벽옥질( 碧玉質), 웅룽뉴( 蹲龍 纽)로 역외의 오랑캐들을 책봉한다.
천자신보:교태전보(交泰殿寶報)는 팔방미인으로 청옥질(靑玉質)과 교룡뉴(交龍 。)를 가리킨다.
경천근민의 보물: 《교태전보》는 상근리의 용, 백옥질, 교룡뉴, 가상의 관리로 쓰였다.
제고지보: 《교태전보》는 신하들의 용, 청옥질, 교룡뉴를 가리킨다.
칙명의 보물:《교태전보》는 관제고칙의 용으로 벽옥질, 교룡뉴.
수훈지보: 《교태전보》는 국헌(國憲)을 양양(揚 。)하고 벽옥질(质玉質)을 교룡뉴(交龍 。)하고 법령(法令)용 새를 반포하였다.
명덕지보(命德之寶) : 《교태전보(交泰殿寶報)》는 장충량의 용으로 청옥질(靑玉質)이며 교룡뉴(交龍 纽)이다
흠문지새: 《교태전보》는 중문교(重文敎)로 쓰이며, 묵옥질(墨玉質)이며 교룡뉴(交龍龙)이다.
표장경사지보: 《교태전보》는 숭고훈(崇古訓)으로 벽옥질(벽옥질)과 교룡뉴(交龍 纽)가 있다.
천하의 보배인 교태전보(交泰殿寶)는 성(省)에서 쓰는 것으로 청옥질(靑玉質)과 교룡뉴(交龍秋)
백성을 속이는 보배 : 《교태전보》는 장융벌(張戎伐)의 용도이며 청옥질(靑玉質)이며 교룡뉴(交龍 。)이다.
육사의 보배를 만들다: 교태전보는 군업을 바로잡는 데 쓰임. 청옥질, 교룡뉴.
칙정만방의 보배: 《교태전보》는 외국에게 고하는 것으로 청옥질, 교룡뉴.
칙정만민의 보배: 《교태전보》는 사방에 알려주는 용도로, 청옥질, 반룡뉴.
광운의 보물: 《교태전보》는 근봉식( 谨封食)의 용도, 묵옥질(墨玉質), 교룡뉴(交龍龙)의 교태전보(交龍殿
玉玺 (皇帝的印章)
玉玺,专指皇帝的玉印,是至高权力的象征。古代印、玺通称,以金或玉为之。据说始于秦始皇。
玺始出于周,到了秦朝才有玺和印之分,皇帝用的印叫玺,而臣民所用只能称为印。
出处 : 《史记·秦始皇本纪》:“令子婴斋,当庙见,受玉玺。”
李商隐《隋宫》诗:“玉玺不缘归日角,锦帆应是到天涯。”
中文名玉玺 外文名Imperial Seal(英语)、御璽(日语) 含 义皇帝的印章 开始时间公元前221年元月1日 结束时间1912年1月1日 拼 音yù xǐ
目录
1 古文记录
2 专业解释
3 历史沿革
4 玺底印文
5 野史记载
6 宝玺流向
7 宝玺制度
8 国之重器
古文记录
习文昭手绘传国玉玺
习文昭手绘传国玉玺
据[汉]蔡邕《独断》载:“天子玺以玉螭虎纽。古者尊卑共之…… 秦以来,天子独以印称玺,又独以玉,群臣莫敢用也。”
[宋]吴曾《能改斋漫录·辨误二》:“徐令《玉玺记》:‘玉玺者,传国宝也。
据说秦始皇帝取蓝田玉,命李斯用小篆刻之。玺文曰:“受命于天,既寿永昌”。 [1]
专业解释
专业称谓:宝玺。宝玺者何?天子所佩曰玺,臣下所佩曰印。无玺书则王言无以达四海,无印章则有司之文移不能行之于所属,此秦汉以来之事也。(《明清帝后宝玺》弁言朱家溍)
皇帝、皇后、皇太后所佩谓玺,印是大臣所用。是有规矩的,不然,是会砍头的。
玉玺是御玺的俗称,正确、专业的称谓:宝玺。明代正式宝玺亦为玉制,沈德符《万历野获编》即记载:“至嘉靖四十五年之冬,则世宗已不豫久矣,乃下诏曰:先朝甲戌遇灾,御宝凡六,其五已遭毁。命所司觅美玉补造。”可见御宝仍为玉制,惜未能流传至今。然成化、嘉靖时,确实用白石等制作一批印玺,多属闲章,部分印文的文字与御宝一样,现藏故宫。明朝有二十四宝玺,其中皇帝奉天之宝为唐宋之传玺(《明史》卷七十四;《明会要》卷二十四;《明官史·木集》); 清朝的宝玺用料更繁多,除玉外,还有栴檀香木、檀香木质、金质、水晶、玛瑙、骨质等等。
25方伪造的玉玺
25方伪造的玉玺
不同时代,对玺、印、章的使用范围不一。根据《通典》所载:“又三代之制,人臣皆以金玉为印,龙虎钮,唯所好也。……秦以印称玺,以玉,不通臣下……齐,……并依秦汉之制。皇太子诸王金玺,皆龟钮。公侯五等金章……光禄大夫、卿……四品五品将军,皆银章。尚书令、仆射……诸州刺史,皆铜印。”可见,“玺”是帝后以及诸侯王所用,臣下则根据实际地位称“章”、称“印”。传说武则天忌“玺”谐音“死”而改为“宝”,自此至明代帝后及诸王印章皆称“宝”,如明代“潞王之宝”,清代“和硕怡亲王宝”。
历史沿革
玉玺
玉玺
玉玺从秦代以后,皇帝的印章专用名称为“玺”,又专以玉质,称为“玉玺”,共有六方,为“皇帝之玺”、“皇帝行玺”、“皇帝信玺”、“天子之玺”、“天子行玺”、“天子信玺”,在皇帝的印玺中,有一方玉玺不在这六方之内,这就是“传国玉玺”。“传国玉玺”又称“传国玺”,为秦以后历代帝王相传之印玺,乃奉秦始皇之命所镌。其方圆四寸,上纽交五龙,正面刻有李斯所书“受命于天,既寿永昌”八篆字,以作为“皇权神授、正统合法”之信物。嗣后,历代帝王皆以得此玺为符应,奉若奇珍,国之重器也。得之则象征其“受命于天”,失之则表现其“气数已尽”。凡登大位而无此玺者,则被讥为“白版皇帝”,显得底气不足而为世人所轻蔑。由此便促使欲谋大宝之辈你争我夺,致使该传国玉玺屡易其主,辗转于神州赤县凡二千余年。然终于销声匿迹,至今杳无踪影,辄令人扼腕叹息。
传说中秦始皇统一六国后,将和氏璧制成了传国玉玺。姑且不论传国玉玺是否是用和氏璧琢制的,秦始皇统一中国后,确实曾令玉工雕琢过一枚皇帝玉玺,称之为“天子玺”。据史书记载,此玺用陕西蓝田白玉雕琢而成,螭虎钮,一说龙鱼凤鸟钮玉玺上刻文是丞相李斯以大篆书写的“受命于天,既寿永昌”八字。传国玺自问世后,就开始了富有传奇色彩的经历。传说公元前219年,秦始皇南巡行至洞庭湖时,风浪骤起,所乘之舟行将覆没。始皇抛传国玉玺于湖中,祀神镇浪,方得平安过湖。8年后,当他出行至华阴平舒道时,有人持玉玺站在道中,对始皇侍从说:“请将此玺还给祖龙(秦始皇代称)。”言毕不见踪影。传国玉玺复归于秦。
秦末战乱,刘邦率兵先入咸阳。秦亡国之君子婴将“天子玺”献给刘邦。刘邦建汉登基,佩此传国玉玺,号称“汉传国玺”。此后玉玺珍藏在长乐宫,成为皇权象征。西汉末王莽代权,皇帝刘婴年仅两岁,玉玺由孝元太后掌管。王莽命安阳侯王舜逼太后交出玉玺,遭太后怒斥。太后怒中掷玉玺于地时,玉玺被摔掉一角,后以金补之,从此留下瑕痕。王莽败后,玉玺几经转手,最终落到汉光武帝刘秀手里,并传于东汉诸帝。东汉末,十常侍作乱,少帝仓皇出逃,来不及带走玉玺,返宫后发现玉玺失踪。旋“十八路诸侯讨董卓”,孙坚部下在洛阳城南甄宫井中打捞出一宫女尸体,从她颈下锦囊中发现“传国玉玺”,孙坚视为吉祥之兆,于是做起了当皇帝的美梦。不料孙坚军中有人将此事告知袁术,袁术闻之,立即扣押孙坚之妻,逼孙坚交出玉玺。后来袁术败死,“传国玉玺”复归汉献帝。有人认为在东汉末年孙坚得到的传国玉玺就已经是伪造的了(原因一:宫女不可能佩带、保管传国玉玺;原因二:王莽篡汉时,在玉玺上雕刻“汉传新王莽”的字样,刘秀重新登基后,磨去的话会破坏玉玺,也就不磨灭此字样了,但孙坚得到的玉玺上却无此记录)
三国鼎立时,玉玺属魏,三国一统,玉玺归晋。西晋末年,北方陷入朝代更迭频繁、动荡不安的时代。“传国玉玺”被不停地争来夺去。晋怀帝永嘉五年(公元311年),玉玺归前赵刘聪。东晋咸和四年(公元329年),后赵石勒灭前赵,得玉玺;得玺,在右侧加刻“天命石氏”。后赵大将冉闵杀石鉴自立,复夺玉玺。后冉魏乞求东晋军救援,传国玺为晋将领骗走,并以三百精骑连夜送至首都建康(南京),这样,传国玺重归晋朝司马家。在南朝,传国玺历经了宋,齐,梁,陈的更迭。大隋一统华夏,传国玺遂入隋宫。公元618年,隋亡。萧后携皇孙政道携传国玺遁入漠北突厥。
汉朝刘贺伪造的玉玺
汉朝刘贺伪造的玉玺
此阶段还出现了几方“私刻”的玉玺,包括东晋朝廷自刻印、西燕慕容永刻玺、姚秦玉玺等。到南朝梁武帝时,降将侯景反叛,劫得传国玉玺。不久侯景败死,叛乱被平定。但侯景任命的侍中兼平原太守赵思贤却趁乱拿着玉玺潜逃到了广陵,被一个叫郭元建的人抢走了玉玺。郭将玉玺献给了北齐的行台辛术,辛术再转献给北齐朝廷。传国玉玺遂为割据黄河中下游的北齐高氏所有。后来南陈取代了南梁,但是没有传国玉玺,怎么办?好办,自己刻一个玉玺。于是玉玺越刻越多,每个割据政权都宣称玉玺在自己手中,自己才是真命天子。建德六年年正月,北周武帝宇文邕灭亡北齐。传国玉玺进入北周。四年后,杨坚代周建隋,开皇九年,大隋灭陈后,重新统一全国。那些私刻的“传国玉玺”也就统统被大隋政府没收了。
唐贞观四年,李靖率军讨伐突厥,同年,萧后突然与皇孙政道返归中原,传国玺归于李唐。唐末,天下大乱,公元907年,朱全忠废唐哀帝,夺传国玺,建后梁。公元923年,李存勗灭后梁,建后唐,传国玺也随着到了后唐。
最后一个掌握“传国玉玺”皇帝是五代后唐末帝李从珂,公元936年后晋石敬瑭攻陷洛阳前,他和后妃在宫里自焚,所有御用之物也同时投入火中。从此,“传国玉玺”神秘失踪,关于它的下落众说纷纭,莫衷一是。
玺底印文
传国玺文曰“受命于天既寿永昌”。“汉书”文曰“昊天之命皇帝寿昌”。两者不同,一般指第一种说法。另:北宋哲宗时所得的传国玺当时便有人怀疑是章惇、蔡京造假的。
又:明清两代也时有假玺出现。明孝宗曾获过所谓的传国玺,孝宗皇帝当时就认为是假的;清初时,宫内藏有三十九方各色御玺,其中一方被认为是秦制传国玺,公元1746年,经乾隆皇帝钦定,证实是仿刻赝品。1924年11月,末代皇帝溥仪被逐出宫时,张壁、鹿钟麟等人仍在追索
着传国玉玺。另:“辽史”记为“大魏受汉传国之宝”,我以为应该是“大魏受汉传国之玺”,唐武则天时改“玺”为“宝”,应该是那时代改的。“辽史”记:“传国宝,秦始皇作,用蓝玉,螭纽,六面,其正文“受命于天,既寿永昌”,鱼鸟篆,子婴以上汉离祖。王莽篡汉,平皇后投玺殿阶,螭角微玷。献帝失之,孙坚得于井中,传至孙权,以归于魏。魏文帝隶刻肩际曰“大魏受汉传国之宝”。唐更名“受命宝”。晋亡归辽。自三国以来,僭伪诸国往往模拟私制,历代府库所藏不一,莫辨真伪。圣宗开泰十年,驰驿取石晋所上玉玺于中京。兴宗重熙七年,以《有传国宝者为正统赋》试进士。天祚保大二年,遗传国玺于桑干河。“宋史”记:“宝。秦制,天子有六玺,又有传国玺,历代因之。唐改为宝,其制有八。五代乱离,或多亡失。”。
又:“魏本纪”中曾记录在一座毁坏的泥像中得玉玺二,其文皆曰:“受命于天,既寿永昌”。其一刻其旁曰“魏所受汉传国玺”。
野史记载
传国玉玺传到十六国时期,在冉魏灭亡的时候,东晋、燕、后秦各得到了一块,都自称是真的,其中东晋的这一块,一直传到后唐李从珂自焚。后来宋朝建立后,一农民在李从珂的废墟中找到这个玉玺,献给宋。
最后,到了金,然后到了元,被元顺帝带到北元。
朱元璋灭北元,得到了玉玺,传到民国。
民国政府迁台后,藏于台北故宫博物院。 [1]
宝玺流向
习文昭手绘传国玉玺2
习文昭手绘传国玉玺2
由于历代统治者极力宣扬获得传国玺是“天命所归”、“祥瑞之兆”,自宋代起,真假传国玺屡经发现。如宋绍圣三年(公元1096年),咸阳人段义称修房舍时从地下掘得的“色绿如蓝,温润而泽”、“背螭钮五盘”的玉印,经翰林学士蔡京等13名官员“考证”,认定是“真秦制传国玺”的玉印。然而,据后世人考证,这是蔡京等人为欺骗皇帝而玩的把戏。
明弘治十三年(公元1500年),户县毛志学在泥河里得玉玺,由陕西巡抚熊羽中呈献孝宗皇帝。相传元末由元顺帝带入沙漠的传国玺,曾被后金太宗皇太极访得,皇太极因而改国号“金”为“清”。但清初故宫藏玉玺39方,其中被称为传国玺者,却被乾隆皇帝看作赝品,可见传国玺的真真假假实难确定。
据说真正的传国玺是明灭元时,被元将带到漠北了。明清两朝人士对“传国玉玺”的态度,已经与以往时代有所不同。据《明史·舆服志·皇帝宝玺》载,礼部尚书傅瀚谈及地方送来的传国玺时评论道:“自秦始皇得蓝田玉以为玺,汉以后传用之。自是巧争力取,谓得此乃足已受命,而不知受命以德,不以玺也。故求之不得,则伪造以欺人;得之则君臣色喜,以夸示于天下。是皆贻笑千载。”
清高宗御制《国朝传宝记》也说:“会典所不载者,复有‘受命于天,既寿永昌’一玺,不知何时附藏殿内,反置之正中。按其词虽类古所传秦玺,而篆文拙俗,非李斯虫鸟之旧明甚……若论宝,无非秦玺,既真秦玺,亦何足贵!乾隆三年,高斌督河时奏进属员浚宝应河所得玉玺,古泽可爱,又与《辍耕录》载蔡仲平本颇合。朕谓此好事者仿刻所为,贮之别殿,视为玩好旧器而已。夫秦玺煨烬,古人论之详矣。即使尚存,政、斯之物,何得与本朝传宝同贮?于义未当。”
宝玺制度
历史上各王朝,维系其封建独裁统治的象征物“宝玺”,自秦始皇开始刻制后,历朝或是传承或是重刻,直至清亡都是如此。秦始皇创立的宝玺制度被汉高祖刘邦全部继承下来,形成了后来所谓的“秦汉八玺制”,这一制度也贯穿了整个“魏”、“晋”、“南北朝”和“隋”,他们不仅继承了秦汉的八玺制,而且连规格、名称、纽式、文字都基本不差。直到唐朝武则天称帝时,则独出心裁地增加了一方“皇天景命有德者昌”神玺,而将八玺制改为九玺制,同时又将“玺”改为“宝”,从此以后各朝都称“宝”了。北宋增至十二宝,南宋则是十七宝。明朝猛增至二十四宝,清朝除交泰殿二十五
宝日常使用外,还供奉着“盛京十宝”。由此可见历朝宝玺的数量是越来越多,而且体积也越来越大,从秦汉的方一寸二到四寸不等,唐朝的方二寸到四寸不等,直到明、清的方二寸九到五寸九不等,最大者有宋朝“宝命宝”“范围天地,幽赞神明,保合太和,万寿天皇”的“定命宝”印面竟有九寸见方,而明朝建文帝的“天命明德、表正万方、精一执中、永宙永昌”,“凝命神宝”印面却是一尺六寸九分见方,可谓是硕大无比。
国之重器
紫禁城,明、清两朝皇帝居住的地方,也是世界上最大的皇宫。这里存放着各个历史时期的珍宝近百万件。在众多宝物中,哪一种最能代表皇帝的无上权威和地位呢?这就非宝玺莫属了。
根据《周易太衍》“天数二十有五”的记载,乾隆皇帝希望清王朝也能传至二十五世,清二十五宝是清代乾隆皇帝指定的代表国家政权的二十五方御用国宝的总称。从此,这25方宝玺经嘉庆、道光、咸丰、同治、光绪年间,一直沿用至宣统末年。二十五方宝玺各有所用,集合在一起,代表和囊括了皇帝行使国家最高权力的各个方面。
这二十五宝玺也是现存唯一的一套完整的皇帝御宝。这25宝玺被储存于交泰殿的宝箱内。宝玺由内阁掌管,用印须经皇帝批准才可拿出。
二十五方玉玺作用,材制多样以玉制交龙纽为多,其它有金银还有一方木制玉玺。
大清受命之宝:《交泰殿宝谱》以章皇序之用,白玉质,盘龙纽,昭告天下天子登基用玺。
后世伪造的玉玺
后世伪造的玉玺
皇帝奉天之宝:《交泰殿宝谱》以章奉若,碧玉质,盘龙纽。
大清嗣天子宝:《交泰殿宝谱》以章继绳,金制,绞龙纽,册立太子用。
皇帝之宝二方:皇帝日常用玺,一玉制,一木制,玉质为绞龙纽,木质蹲龙纽。
天子之宝:《交泰殿宝谱》祭祀百神之用,白玉质,交龙纽,祭祀用玺。
皇帝尊亲之宝:《交泰殿宝谱》用宝太后,太皇太后及上尊谥、庙号之用,白玉质,交龙纽,祭祀用玺。
皇帝亲亲之宝:《交泰殿宝谱》以展宗盟之用,白玉质,交龙纽,祭祀用玺。
皇帝行宝:《交泰殿宝谱》以颁锡赉之用,碧玉质,交龙纽。
皇帝信宝:《交泰殿宝谱》以征戎武之用,白玉质,交龙纽。
天子行宝:《交泰殿宝谱》以册外蛮,碧玉质,蹲龙纽,册封藩国外夷之用。
天子信宝:《交泰殿宝谱》以命殊方之用,青玉质,交龙纽。
敬天勤民之宝:《交泰殿宝谱》以殇勤吏之用,白玉质,交龙纽,嘉赏官吏之用。
制诰之宝:《交泰殿宝谱》以谕臣僚之用,青玉质,交龙纽。
敕命之宝:《交泰殿宝谱》以钤诰敕之用,碧玉质,交龙纽。
垂训之宝:《交泰殿宝谱》以扬国宪之用,碧玉质,交龙纽,颁行法令用玺。
命德之宝:《交泰殿宝谱》以奖忠良之用,青玉质,交龙纽。
钦文之玺:《交泰殿宝谱》以重文教之用,墨玉质,交龙纽。
表章经史之宝:《交泰殿宝谱》以崇古训之用,碧玉质,交龙纽。
巡狩天下之宝:《交泰殿宝谱》以从省方之用,青玉质,交龙纽。
讨罪安民之宝:《交泰殿宝谱》以张戎伐之用,青玉质,交龙纽。
制驭六师之宝:《交泰殿宝谱》以整戎行之用,青玉质,交龙纽。
敕正万邦之宝:《交泰殿宝谱》以诰外国之用,青玉质,交龙纽。
敕正万民之宝:《交泰殿宝谱》以诰四方之用,青玉质,盘龙纽。
广运之宝:《交泰殿宝谱》以谨封识之用,墨玉质,交龙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