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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너무 길고,
내용도 쉽지 않습니다.
나의 수필 공부방에 이 글을 올렸더니 생각보다 조회수가 많이 나와서
'어, 이것봐라. 사람들이 읽네' 싶어서
여기에도 올려봅니다.
환자와 사람
이동민
환자와 사람을 말하려면, 먼저 의학은 과학에 앞서 인간학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의(醫-medicine)는 치료를 시행함에서 주체(主體)이다. 치료의 대상인 환자는 객체(客體)이다. 환자는 아픈 사람이다. 아픈 사람을 사람으로 다루느냐, 아니면 사람과는 구별하여 환자로 다루느냐의 문제를 역사적으로, 제도적으로, 또 윤리의 차원에서 짚어보기로 하자.
지난날에, 고향 학교 동기회 모임에서 그때 한참 유행하던 ‘신토불이’ 이야기에 불이 붙었다. 질병이라면 질병 이야기를 해야지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느냐가 내 생각이었다. 학교에서 교장의 직위였던 친구의 생각은 달랐다. 사람도 자연환경의 한 부분이니 내 몸이 자연의 질서에 조화를 이루면 질병이 함부로 범접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 몸이 자연과 한덩어리가 되자는 말은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론으로 수없이 말해왔다. 불교에서도 말해왔고, 노-장 사상이라는 것도 자연으로 ᅟᅩᆯ아가서 자연과 사람이 하나가 되자는 것이지만, 사실은 마음을 다스리자는 이야기이다. 이건 사람을 다스리는 이야기이지 질병을 다스리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친구의 주장이 너무 단호했다. 자연-사람-질병은 뗄레야 뗄 수 없는 하나라는 것이다. 사람을 잘 다스리면 질병은 저절로 다스려진다는 논리이다.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했다가. 내가 별나라에서라도 온 사람이듯 호되게 당했다. 따지고 보면 자연과 사람이 하나다, 라는 것은 사람을 대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지 질병이 이야기의 대상이 아니다. 질병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는 질병을 이야기해야지 왜 사람을 들먹이느냐는 것이 나의 주장이었다. 그 자리의 친구들이 내 말보다 친구의 말에 동조하는 분위기여서 입을 다물어버렸다. 질병과 사람이 하나라는 주장이 먹혀들어갔기 때문이다.
내가 숨 쉬고, 마시는 물은 내가 살고 있는 자연과 땅에서 생성된 것이고, 내가 먹는 음식도 내가 사는 땅에서 자란 것이다. 나도 그런 자연 속에서 살고 있으니, 내 몸은 내가 사는 땅의 생산물로 만들어졌으니 내 몸도 자연(땅)과 하나다. 내가 신봉하는 현대의학은 우리 몸은 외부에서 낯선 것이 들어오면 거부반응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거부 반응은 나를 아프게 한다.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이 병이다. 자연-나의 몸이 일체라면 자연에서 만들어진 물질이 나를 아프게 하는 이물질이 될 수 없다. 내 몸으로 들어와도 나를 아프게 하지 않는다. 신토불이를 말하는 이론적 근거이다.
소설 ‘동의보감’의 시작 부분은 이렇다.
“한 사람이라도 더.
신음하는 병자들을 실제로 다루면서 자기의 노력으로 눈앞 병자들의 고통을 하나하나 어루만지고 덜어주고 나을 수 있는 처방을 알려주면서 허준은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있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여기서 허준이 다루는 대상은 병이 아니고, 병을 앓는 사람이다. ‘나을 수 있는 처방’이라는 말도 사람이 병으로부터 낫는다 뜻이므로 대상은 사람이지 병이 아니다. ‘병이 낫다’는 문법이 맞지 않다. 병을 퇴치하여 사람의 고통으로부터 낫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현대의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은 민간의학이 치료를 주도했다. 민간의학 또는 민속의학이란 것은 근본적으로 병이 아닌, 사람이 치료의 대상 이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언어놀이를 조금 더 해보자. 우리는 흔히 ‘병에 걸렸다.’고 한다, 이때의 주어는 ‘인간’이 된다. 그러나 수동형임으로 행위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고 ‘병’이다. 병이 인간의 몸에 들어왔다는 뜻이다. 병은 인간의 몸에 들어왔으므로 병이 인간의 몸에 침범한 주체이고, 인간의 몸은 병이 들어와서 거주하는 매개물일 뿐이다.
‘병을 앓는다.’라고 할 때는 인간이 주체이다. 병이 몸 안으로 들어옴으로, 몸의 주인인 사람이 앓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앓는다.’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병은 매체인 사람이 없으면 독자적인 삶을 가질 수 없다. 매체인 사람은 무엇을 경험할까. ‘아픔’을 경험한다. 아픔은 ‘앓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앓음의 대상은 대부분이 신체이다. 배를 앓다. 허리 디스크를 앓다. 등등이다. 그러나 ‘가슴앓이’처럼 신체가 대상이 아닌 것도 있다. 그러하면 앓음의 대상은 육체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프다고 하면 으레 육체적인 아픔만을 생각하는 습관이 만들어져 있다. 이렇게 말하면 말장난처럼 느껴지지만, 말장난이더라도 이런 말이 우리의 의식세계를 지배한다.
오늘의 우리 의학이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은 미국 의힉이다. 나도 학교에서 미국의학을 공부한 사람이다. 미국 의학도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민간의학이 주도하였다. 허준식으로 치료를 하였다는 것이다. 의료시장은 아무런 규제도 받지 않고, 자유 경쟁이었다. 우리의 경험에 의하면 치료 효과를 따지기 전에 ‘용하다’라는 선전 효과가 의료시장을 점거했다. 왜냐면 그런 치료 방식으로는 효과를 따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고향에 약을 먹으면 아들은 낳는다고 소문이 난 ***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아무리 후하게 봐 주어도 치료 효과로 문전성시를 이룬 것은 아니다. 유럽의 과학적 의학이 미국에 도입되면서 큰 변화를 몰고 온다. 민속적 치료법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민속적 치료법을 몰아내는데는 사회제도도 큰 역할을 했다. . 의사상에 크나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의학교육 못지 않게 사회제도도 중요하다. 의사로서 생활하려면 사회제도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인정을 받지 못하면 돌팔이 의사가 된다. 치료의 관점에서 의사가 얼마나 실력이 있느냐 보다는 제도권의 의사이냐가 더 중요하다. 그러다보니 ‘용하다’의 광고 효과가 빛을 발하지 못하자 민속 의학자들도 서서히 사라져 갔다. 제도권에서 의사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국가가 제공하는 의학 교육을 받고 의사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보기가 레마르크의 소설 ‘개선문’이다. 독일에서 유능한 외과의사였던 리바크는 정치적인 이유로 파리로 망명한다. 독일에서는 유능한 외과 의사였으나, 망명지에서 의사의 자격을 인정받지 못하자 싼 값에 기술을 제공하는 돌팔이 의사로 살아간다.(의료 기술만 가진 의사로 야매 의사이고, 쟁이이다.)
1910년에 미국의 의학 교육 지침을 표준화하여 발표하였다 ‘플렉스너 보고서’이다. 미국의 모든 의과대학 교육은 기초과학을 중심으로 짜여졌다. 임상의학은 병태생리학을 한 분야로 여기게 되었다.(이 말은 인간의 몸이 정상일 때는 이렇게, 이렇게 움직이고, 작동하는데, 병이 걸리니까 인체 조직의 움직인 다른 방식으로 변질되어서 움직이더라(병태생리각-병리학이라고 한다.) 병을 찾기 위해서는 변화가 온 인체의 기능을 추적해나간다. 기능의 추적은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능 검사에 의존한다.
현대의학이라는 것을 보자. 인체에 병이 들면, 인체는 실험실의(병원에서는 검사실이라고 한다.) 대상이 되어서 인간의 몸뚱아리는 이것저것 찾아내려는 실험의 대상물이 되어버린다. 실험실에서는 지금까지의 의학 지식을 인체에 적용함으로, 아파서 병원을 찾아와서 어디가 어디가 어떻게 아프다고 하소를 하지만, 의사는 호소하는 아픔을 흘려듣는 경향이 있다. 아픔은 자리를 잃어버린 꼴이 되어 버렸다. 이때 현대의학을 공부한 일부 의사는 과학적 의학이 인간적인 요소를 무자비하게 희생시킨다고 보았다. 그러나 일부의 이러한 생각들은 거대한 홍수가 소용돌이치면서 흘러가는 현대의학 이론의 물길에, 주변에서 일어나는 작고 작은 물너울 정도일 뿐이다.
일반적으로 오늘의 의사는 질병상태와 신체적 가능(병리)에만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점차 환자를 인간으로 보지 않으려는 경향을 나타낸다. 병이 머무는 매개물로만 보려고 한다. 심지어는 환자의 고통 자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경향도 나타난다. 인간으로 보지 않으려 하기 보다는 사람은 아예 보이지 않는다가 맞는 말일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라면 과학과 기술을 너무 신봉하여, 의사에게 마치 종교처럼 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특징적인 사실은 모든 의과대학은 천편일률적으로 같은 교육과정을 이수한다. 이제는 의사라면 누구나 같은 의학 상식과 같은 치료 가법을 가지고 있다. 예전의 민속 의힉처럼 나 혼자만의 치료비법을 가지므로 들었던 ‘용하다’라는 말이 의료사회에서 사라지고 있다. 대신에 ‘유명하다’라는 말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용하다와 유명하다는 전혀 다른 말이다.
(지금은 의사가 의학 교과서에 실려있지 않는 자기만의 비법으로 치료하면 의료법 위반으로 처벌받는다.)
나는 60년 대에 의과대학을 다녔다. 플렉스너 보고서가 바탕이라는 미국식 의학 교육을 철저하게 지키는 공부를 했다.
가난에 절어있던 그때의 우리 나라는 미국이라면 부의 상징이고, 우리의 낡아빠진 유가 사상에 대비되는 과학의 상징이었다. 과학이라는 방법으로 공부하는 우리에게 미국식이라는 말만 붙으면 성경 구절보다도 더 위력이 있었다. 과학을 신봉하는 우리야말로, 아니 나야말로 지적으로 가장 앞선 사람이고, 깨인 사람이다. 왜냐면 나는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 세상은 과학적이라는 방법으로 움직인다고 배웠다. 과학적이지 않는 방법으로 세상을 사는 것은 미개인이라고 배웠다.
이런 이유로 미국식 의학 교과서는 나에게 성경이었다. 오류 하나 없는 진짜 성경이었다. 머리에 더 많은 먹물로 물들고 난 지금은 성경도 엉터리가 많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의학 교과서가 성경이라고 한 것도 옳은 신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난날, 내가 수련의 시절에 우리들의 눈에는 순전히 엉터리인 처방을 하신 노의사분이 있었다. 대구 근교의 시골에서 개원을 하시던 노의사분이 위궤양에 페니실린을 처방한다는 말을 듣고 어처구니 없어 하였다. 의학 교과서는 아예 모르시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무식한 의사라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수많은 치료법 중에 미국식 치료법을 몰랐다는 것만으로 우리에게 무식한 의사가 되었다. 그것이 옳은 평가인가는 따지지 않았다.
6.25 전쟁 중에 페니실린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난치병으로 치부했던 각종 질병들이 페니실린에게는 끽 소리도 못 하고 물러나게 했다. 민간에서는 페니실린은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져 있었다. 만병통치란 것이 바로 주술적인 민간요법 방식이다.(민간의료에서, 장터의 약장수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만병통치'이다. 바꾸어 말하면 '만병통치'는 대표적인 민속의학 용어이다.) 의사가 그런 처방을 하다니 -----. 그리고 수 십 년의 세월이 지났다. 위궤양의 원인이 세균이라고 알려지면서, 지금은 페니실린은 아니지만 강력한 항생제를 처방하는 것이 치료법이다. 우리가 험담을 퍼부었던 노의사분은 어쩌면 선견지면(?)을 가진 의사가 되었었다. 그 분은 미국서 나온 의학 교과서를 읽지 않은 덕분이었다고 할까. 그때 우리가 공부했던 의학 교과서에서는 위궤양의 원인으로 세균이라는 말은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시골의 노의사분이 옳은 치료법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우리의 지식이나, 신념이란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해주는 사건이다.
서양의학의 시작이라고 말하는 그리스 시대부터 훑어보기로 하자, 의사로서 신적 위치까지 올라간 히포크라테스는 어떤 생각을 하였는지도 알아보자. 우리 몸의 상당 부분이 물이라는 사실에 착안하여 액체가 우리 생명의 근원이다. 우리 몸에 있는 4종류의 액체가 서로 조화를 이루면 건강한 상태이다. 조화가 깨어지면 병적 상태가 된다. 자연의 질서는 물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져 있고, 나를 그 질서에 맞추자는 것이다. 자연의 질서에 적응하는 의미에서 ‘우리가 먹는 것이 우리의 몸이 된다. 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한 때 유행하엿던 신토불이에도 히포크라테스가 이론을 제공한 셈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이 곧 우리의 몸이 된다.”
바로 신토불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 아닌가.
병의 원인이 우리의 몸 안에 있다는 것을 알기는 한데, 이것을 콕 꼬집어 내지 못하니 질병을 이야기 하지 못하다가. 자연과 우리 몸의 조화로운 질서라는데서ㅜ답을 찾았다. 답이 맞느냐, 아니냐는 아예 따지지 않았다. 우리의 신토불이를 정당화하기 꼭 좋은 말이 되어버렸다. 액체 조화설은 질병 자체를 정확히 말하지 못하고 두리뭉실하게 말하는 것이다. 치료법도 몸의 기를 붇돋우는 것이라고 방법론을 제시하면서, 실제의 방법은 제시하지 못함으로 결국은 질병이 아닌 몸 이야기를 한다.
병이 왜 일어나는지를 요약해보면, 사람의 안과 밖의 힘이 불균형이 일어나면 병이 된다는 것이 히포크라테스의 주장이다.
히포크라스에 반대로는, 또 다른 주장이 있다. 질병의 원인은 스스로 실체가 있다는 주장이다. 이 실체가 몸의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 몸의 어느 부위에 달라붙어 있으면 병이다. 질병에 관한 두 가지 생각이 수 백 년 동안 지속하였다.
1800년 경이 되면 과학이 발달하여 모든 분야에 적용한다. 의학에도 과학을 도입하였다.
질병은 막연히 몸의 부조화라는 것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고, 몸의 어느 부위에 어떻게 붙어 있는지를 찾아 나서면서, 질병의 실체를 찾아내기 위해서 관찰하고, 연구하였다.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증상의 연구였다. 증상은 몸을 통해서 나타나지만, 증상을 연구한다 하여 사람을 연구하는 것은 아니다. 병의 실체를 찾아내는 연구를 하면서 진단학이 나타났다. 진단을 강조하다 보니 자연스레 질병 이론이 나타났다. 이것이 현대 의학으로 걸어온 자취이다. 사람이 아닌 진단이 의학의 중심이 되었다.
과학이라는 신이 지배하는 종교에서는 인간은 이론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된다고 한다. 이론은 순한 양을 이끄는 목자이시다. 그런 방식으로 질병 이론도 인간을 지배한다. 진단을 강조하면서 질병 이론이 기세등등 해진 것이 오늘의 의학이다. 전통 의학이 임상 증상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면 질병 이론은 임상 경험과 관계 없는 것들도 많다. 환자는 아프다고 하는데도 의사는 검사실에서 보내온 결과지만 들여다보면서 괜찮다고 한다.
나를 돌아보면 1960년 대에 대학에서 의학 교육을 받았다. 이제 보니 내가 받은 의사 제조 교육인 의학 교육은 미국에서 직수입한 제도였다. 전혀 가공하지 않는 미국식 기계로 한국 의사라는 제품이 만들어졌다. 내가 바로 그 기계로 만든 제품이다. 내가 살아온 생활이며, 사고방식이며, 생활태도가 미국식 그대로 이면서, 우리나라의 의료 제도, 우리나라의 의사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미국에서 의학 교육 제도는 어떻게 만들어서, 시행하는지를 아는 것이 나를 아는, 우리나라 의사상을 아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미국도 1910년 이전에는 전통적인 도제 교육과 비슷했다. 선배 의사에게 의료 기술을 배웠다. 이때는 사람에서 사람으로, 즉 의사가 되기 위해 배움을 받는 사람이 교육의 핵심이었다. 이때는 ’그 의사가 용하다‘라는 말이 떠돌았고, 의사는 ’용하다‘라는 말을 들으려 환자를 진료했다. 우리나라의 소설 ’금시조‘가 도제 교육제도를 잘 보여준다. 스승은 예술가가 되기 전에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미국 도제 제도에도 그런 말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스승의 기술을 습득하는 것이 교육이었다.
같은 질병이라 하더라도 배운 스승에 따라서 치료법이 달랐다. 그래서 용하다는 방법을 전수받는 것이 용한 의사가 되는 길이었다. 우리는 진시황이 복용하였다는 선약 이야기에서 그런 방법을 보았다. 진시황을 보면 지난 날의 용한 의사가 훌륭한 의사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다.
근세로 접어들면서 인간 중심의 도제 교육 제도는 의료 시스템 교육을 강조함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인간을 교육하는 것이 아니고 의학을 가르치는 제도가 나타났다. 여기서는 명분상으로는 환자가 교육의 중심이다. 환자는 그냥 환자일 뿐이냐, 아니면 사람으로서의 환자이냐 라는 문제가 나타났다. 그러나 의학 시스템 교육에서는 의료 현장에서 현실적으로 환자/사람이 소외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진료 과정에는 사람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의 의학은 사람보다는 사회의 여러 여건들, 의료보험이나 병원의 조직과 구조들이 질병치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함으로, 사람은 더더욱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의학 교육도 이런 의료 제도에 맞추어서 시행하고 있다. 아니, 의학교육 때문에 이런 제도가 나타났다고 하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 사람이 소외당하는 교육을 하면서 내세우는 이유를 보면 과학교육, 지식교육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의료 시술을 제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의료가 될 수 없고, 의료보험에서 돈을 지불하지 않는다. 예전에 성전환술이 의료 제도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자. 대학 병원은 환자를 외면했고, 환자들이 대학 병원에서 수술을 받지 못하자.병원의 밖에서 (정식 의사가 아닌 사람(돌팔이 의사)으로부터) 몰래 시술을 받았다.(속된 말로 ’야매‘라고 했는데, 정식 용어는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성전환술을 받았던 사람의 고통스러웠던 술전의 삶을 들어보면, 의료가 사람이 우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일 것이다. 의료와 사회제도와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왜 이런 현상이 우리에게 나타났을까. 미국에서 의학 교육 제도를 받아들이면서 이런 현상은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이다. 우리나라 의학 교육은 미국 방식을 그대로 따르기 때문이다.(미국 사회는 기독교로 무장된 사회라서 성전환술을 제도적으로 받아주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문화가 다르면서도 교육제도를 그대로 가져온 탓에 ---)
그렇다면 미국의 의학교육 제도가 나타난 역사부터 알아보자.
유럽에서 과학혁명이 일어나고, 과학은 모든 분야에 스며들었다. 의학도 과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미국인들은 특이하게도 프래그마티즘이라는 실용주의 사상에 아주 강하게 물든 사람들이다. 남북전쟁 이후에 나라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가시적 성과를 중요시하면서 나타난 것이 실용주의라고 하였다. 의학에서도 가시적 성과를 중요시 하였다. 민속적이고, 도제적인 교육에 의한 치료법보다 눈 앞에 치료효과가 나타나는 것을 좋아하였다. 미국의 의학교육은 가시적 성과를 강조하는 타일러라는 교육학자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교육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에 불과하다.”
수단과 방법을 정해버리면, 교육은 도식화 될 수 밖에 없다. 우리의 의학 교육이 그런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 말을 좀 어려운 말로 풀어보면 ’문제 해결을 위해서 상환적 효용성이 기계적인 효용성으로 변질되어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어떤 질환을 치료하려면 도제제도에서 공부를 하였다면, 의사에 따라 치료법이 다를 수 밖에 없지만 이제는 수학공식처럼 치료법이 정해져 버린다는 것이다. 의하교육이란 대학에서 바로 수학공식처럼 정해져 있는 치료법을 공부하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 치료법이 달랐으나, 이제는 기계처럼 같은 치료법을 적용한다는 뜻이다.)
1910년에 플렉스너가 카네기 제단의 지원을 받아서 플레스너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미국 의학 교육 위원회는 플렉스너 보고서를 바탕으로 미국의학 교육 제도를 만들었다. 의학 교육제도를 가장 실용적이라는 방법이라는 단일제도로 만들었다.) 여기에 맞지 않는 미국과 카나다의 의과대학은 폐교 조치를 하였다. 의학 교육이 지금까지의 경험주의 교육(도제제도)에서 실험실(검사실)의 실험(검사)를 중요시 하는 실험실 의학으로 바뀌었다. 존스 홉킨스 대학이 플렉스너 보고서에 이한 과학주의 교육을 처음으로 시행하였다. 이것은 미국의 플래그머티시즘(실용주의)과 의료의 과학화가 결합한 것이다. 이 제도는 전 미국과 카나다로 퍼져 나갔다. 이 제도를 한국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의사의 자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인문학적인 교양도 말하였다.
이들은 역사학, 어문학, 철학, 윤리학, 사회학, 법학, 경영학, 심리학, 예술 등의 모든 인문학이 해당되었다. 그러나 의학 교육 제도에서 인문학 강좌를 어떻게 시행할 것이가네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그래선지, 내가 의과대학에서 교육을 받았을 때는 예과 2년 동안은 이들 과목을 ‘~개론’이라는 이름의 과목으로 강의를 들었다. 예과 1주일의 수업시간표는 실험시간을 포함하여 40시간이었다. 지금 내가 인문학에 그나마 관심을 가진 것은 예과 때의 교육과정에서 맛이나마 보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 이후에 수련의 생활에서 내가 받아야 하는 의학교육이 너무 빡빡하여 여유 시간을 낼 수 없었다. 그나마 의예과에서 손톱만큼 받았던 인문학의 강의 내용도 거의 잊어버렸다. 동기들을 보아도 인문학 내용은 거의 까먹은 듯 하다.
더더윽이 우리가 학교를 졸업한 몇 년 뒤에는 의과대학 교육 분량이 너무 많다 하여 강의 시간을 줄인다고 하였다. 알고 보니 그나마 맛만 보여주던 인문학 강의가 교과에서 빠져 버렸다. 뿐만이 아니고 본과에서 공부해야 할 의학 교육과정도 예과에서 수업을 하였으니, 오늘의 의사들이 정서적으로 더욱 메말라졌는지 모르겠다. 지금의 의학 교육에서 과학주의를 부르짖으며 너무 오래 동안, 너무 멀리까지 달려왔다. 더더욱이 인문학 교육은 우리가 본받았던 미국보다 훨씬 더 뒤져 있다고 한다. 미국은 의과대학에서 인문학을 맛이나마 보여준다고 한다. 우리가 미국보다 더 실용적이고, 과학적인 교육을 좋아해서 인문학 강의를 뻬버렸는지 모르겠다. 결과적으로 내 주변의 의사들은 교양이 풍부한 인간이 아닌 공학 기술자로 만들어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의사는 사(師)가 아닌 쟁이(工人)로 되어간다는 생각이다.
어쨌거나, 몸이 아픈 사람은 의사를 찾아가야 하고, 의사는 아픈 사람을 마주하여 자기가 교육받은 방식으로 환자를 진료한다. 의사를 찾아온 사람은 자신의 고통을 호소한다. 병을 가진 사람이 고통을 겪는 것은 질병을 가지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고통이 질병을 따라온다는 것이다. 의사가 그들에게 베풀어야 하는 것은 인간적인 관심사도 보여주어야지 잘병 자체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의 진료에서 환자가 의사에게 불만을 토로하는 것은 의사가 환자인 자신에게는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자신보다 질병 찾기에 더 신경을 쓴다는 것이다. 환자가 의사를 찾아갈 때는 증상 때문이고, 의사는 증상은 징후로 본다는 것이다. 증상은 환자가 주관적으로 느끼는 고통이고, 징후는 환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객관적으로 느끼는 현상이다. 즉 징후란 의사가 교육받을 때의 교과서에 실려 있는 내용이 된다. 결과적으로 의사와 환자는 엇박자질을 한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라면 인문학 교육을 등한시 한 우리나라의 의과교육 과정이 믄제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나만 하더라도 의학은 과학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채우고 있다. 한국에서 의과대학을 다닌 내가 무슨 깨달은 자라도 된다는 듯이 의료에서 환자 대신에 사람을 내세운다는 것은 망상이 아닐까. 나 뿐만 아니라 한국의 의사들의 일반적인 생각이라고 믿는다. 그렇더라도 내 생각이 절대로 옳을까라는 의심은 더러더러 하고 있다.
의과대학의 교육과정이든, 과학으로 무장하여 인간을 소외시키는 첨단 진단 기기가 나타난 때문이든 의사와 사람의 관계는 점점 더 멀어지는 것이 현실이다. 내가 젊은 시절에는 청진기를 환아의 가슴에 대어보려면 허리를 굽혀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야 했다. 지금의 의사는 환자에게 가까이 가는 것이 아니고, 검사실에서 보내온 결과물을 읽으려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나도 노년이 된 탓으로 자주 진료를 받으러 간다. 의사가 환자를 보기나 할까 라는 생각까지 한다. 나를 보지 않고 모니터를 보면서 나에게 말을 한다. 의료사회에서 나타난 현상들은 희로애락과 생노병사의 생명현상을 가진 환자/사람을 대상으로 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환자와 사람은 자꾸 분리된다. 이런 이유로 환자들은 의사가 불친절하다고, 공공연하게 말한다. 의사도 자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의사와 사람의 거리를 점점 더 멀어지도록 하는 것이 과학적 진료라는 현실이다. 친절이라는 것에도 일부의 의사는 사람에 친절하기보다는 병에 친절해야 하는 것이 의사의 본분이라고까지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의 진료에서 환자/사람의 대상을 다루면서 과학만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 일이 자주 나타난다. 이럴 때는 질병에 대한 친절론이 무색해진다.
병든 사람의 또 다른 말인 아픈 사람을 보자. 사람에게 아픔이란 몸으로 겪는 격렬한 통증일 수도 있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 처럼 육체적 통증이 아닌 수도 있다. 지금은 마음이 아픈 것도 의사(정신과)가 다루지만, 지금까지는 통상적으로 의사가 다루는 통증은 몸이 아픈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아픔이라고 하여 모든 아픔이 의학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픔은, 마음의 아픔도 고려하면, 의사와 환자의 거리를 더 가깝게 할 수 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의사와 사람의 관계로 복원할 수 있다.
나 자신이기도 한 이야기를 해보자. 우리가 오래 동안 삶을 유지해 왔고, 어느 덧 노인이 되었다. 노인이 되면 정상의 몸인데도 여기저기 찌부둥해진다. 노인들은 행여나 병이 아닌가를 걱정한다. 건강 염려증이다. 더 심해지면 공포를 느낀다. ‘건강 공포증’이다. 최근에 와서 이처럼 질병이 아닌 질병을 앓는 사람이 증가하고 있다. 이들이 의사를 찾아오면 의사의 입장에서는 일단 환자이다. 이런 환자를 대하는 의사의 태도는 다양하다. ‘아무런 이상이 없다’면서 돌려보내는 의사도 있다. 질병이 없는 줄 알면서도 안도감을 주기 위해서 약을 처방하는 의사도 있다. 이런 환자를 많이 다루다 보면, 실제로 병을 가지고 찾아왔는데도 대수롭지 않게 다루는 의사도 있다. 환자를 대하는 태도에서 어떤 의사가 좋은 태도인가를 일률적으로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의사는 환자에게 병이 없다고 아무리 말하여도 믿지 않는 일도 많다. 의사가 ‘환자’를 대하면서 이런 경험을 틀림없이 하였을 것이다.
이 보다 더 심각한 경우도 있다. 의사 앞에 앉은 노인 환자는 인간의 몸에서 나타날 수 있는 모든 증상을 말한다. 이것은 실제로 병을 앓는다기 보다는 노년이 되도록 지금껏 살아오면서 경험하였던 모든 아픔인 수가 많다고 한다. 의사가 아무리 이상이 없다고 해도 본인은 아프다고 한다. 거짓말이 아니고 실제로 아프다고 한다. 이것은 건강 공포증보다 더 심각한 것으로 ’신체화 장애‘라고 하였다. 왜냐면 거의 틀림없이 이런 노인분은 인간적으로 고통을 받을만한 다른 문제를 지닌 수가 많기 때문이다.
노인 이야기를 왜 지루하게 하느냐 하면, 의사가 이런 환자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문제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검사실에서 보내준 결과지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하여, 한 마디로 이상이 없습니다. 하고, 간호사는 ’진료 끝났습니다‘ 면서 진료실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올바른 처치인가? 의사의 치료 대상을 환자/사람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 볼 여지가 많다.
요양병원에 근무하는 대학 동기가 말했다. 90세 노인이 밤에 몰래 병실을 빠져 나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하였다. 의사는 죽음과 싸우는 직업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노인을 사람으로 다루지 않고 단순히 환자로만 다루었기 때문이 아닐까.
좀 일찍 그 사람을 알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어떤 개인을 완전히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앞에서 보면 등의 모습은 보이지 않아서 알 수 없다. 이것은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과 같은 것이다. 인간은 각각 감성적, 사회적, 신체적, 개념적 측면이 있다. 이 모든 것을 아우러서 하나의 측면으로 통합한다는 것은 불가능이다. 이 말은, 사람을 완벽하게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사람의 삶을 구성하는 수많은 사건들은 이야기를 만든다. 반대로 그 사람이 하는 수많은 이야기에는 그 사람의 삶을 구성하는 내용들로 되어있다. 이야기에는 일상의 삶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줌으로 그 사람의 삶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다.
이것은 의사가 대하는 환자/사람의 관계에서 사람 쪽으로 조금이나마 치우치려면 환자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라는 것이다. 가능할까. 어렵더라도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노인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많은 의사들이 노인을 환자/사람의 관계에서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라는 문제를 거의 매일 막닥뜨릴 것이다. 우리나라의 의학교육 제도나, 진료의 방법을 지금의 방식으로 지속한다면 앞으로 발생할 문제가 없을까 하여, 의료계 일각에서는 의학교육의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실용주의에 늪에 빠져 있는 지금으로서 헤치고 나오기가 어려울 것이다.
노인은 건강한 상태라 하더라도 언제나 죽음이라는 최악의 상태와 함께 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들이 환자일까. 사람일까.
그렇다고 하여, 신토불이 식 의료나, 허준식 의료로 돌아가자는 것은 절대 아니다. 왜냐면 신토불이나, 허준식 의료가 환자/사람의 관계에서 반드시 사람은 종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현대 의학 제도에서 합당한 방법을 찾아보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