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일 성녀 비비아나 동정 순교자l오늘에 성인/축일
Altar Cross-BERNINI 1657-61.Gilt bronze corpus on bronze cross, height: corpus 43 cm, cross 185 cm Treasury of San Pietro, Vatican 축일:12월 2일 성녀 비비아나 동정 순교자 Santa Bibiana Martire ST. VIVIAN in 4th century in Rome - scourged to death c.361; her body was left to the dogs, but none would touch her, and she was buried two days later 5세기 때 로마(Roma)에 성녀 비비아나를 기념하는 성당이 세워졌고, 그녀의 어머니인 성녀 다프로사(Dafrosa, 1월 4일)에 대한 공경이 보편화되었지만 그녀의 생애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전설에 따르면 성녀 비비아나는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신앙 때문에 고문을 받고 아콰팡당트로 추방당한 로마의 전 지사인 성 플라비아누스(Flavianus, 12월 22일)의 딸이었다. 성 플라비아누스가 죽은 뒤에 그의 아내 성녀 다프로사도 참수를 당했고, 그들의 딸인 성녀 비비아나와 동생 성녀 데메트리아(Demetria, 6월 21일) 역시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다시 체포되었다. 성녀 데메트리아는 이때 바로 죽었고, 성녀 비비아나는 후에 매를 맞고 순교하였다. 성녀 비비아나는 간질병자들의 수호성인이다. 성녀 비비아나는 로마의 명문의 딸로 태어났고 양친은 모두 덕망이 높은 인물이었다. 율리아누스 황제의 교회 박해를 반대한 고관인 그녀의 아버지는 황제의 노여움을 받아 귀양을 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어머니 다프로사 역시 체포되어 자택에 감금되었고, 음식을 주지않아 거의 아사 상태에 놓인 무렵, 결말을 서둘고 있던 관졸들의 손에 목을 베여 순교의 꽃으로 하느님께 바쳤다. 그의 남은 재산은 황제가 전부 몰수했으니 가련하게도 비비아나 자매는 단 시일 내에 가난의 구렁에 빠지고 말았다. 율리아노 황제는 그것만으로 만족치 못하고 그들에게 배교를 강요하는 한편, 온갖 짓으로 괴롭히며 마침내 결박하여 감금시키고 여러 날 동안 아무런 음식도 주지 않았다. 그후 두 자매는 법관앞에 끌려 나갔으나 기이하게도 그들은 조금도 여읜 기색이 없이 도리어 얼굴빛이 꽃같이 아름다웠다 한다. 두 자매는 신앙을 버리도록 고문당했다. 신앙이 반석 같은 그들은 이를 즉시 거절하자, 그리스도교를 버리면 모든 재산을 반환하겠다는 감언이설로 꾀었다. 그것도 거절하니, 이번에는 무서운 사형에 처한다는 말로 위협했다. 비비아나자매는 순교한 부모를 따라 끝내 신앙을 지킬 것을 선언하고 죽음도 불사할 것을 단언했다. 이 심문이 끝나자 비비아나의 동생인 데메트리아는 기아로 인한 허약한 몸에 참혹한 고문을 못 이겨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말았다. 비비아나만이 남았다. 법관은 그녀를 루피나라는 추잡한 여자에게 보냈다. 그 여자의 유혹으로 동정인 비비아나의 정조를 깨뜨리게 하고 나중에 배교하도록 유인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비아나는 이같은 술책에 넘어가지 않고 한결같이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여기에 다시 더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한 법관은 마침내 사형을 선고하고 말았다. 처형 방법은 납덩어리가 달린 줄을 사용해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때리는 가혹한 형벌이었다. 비비아나는 그 선고를 받자 얼굴에 희색을 띄우고 끝가지 그 형벌을 잘 참아 훌륭한 최후를 마쳤다. (대구대교구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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