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을 통해 인생은 지나간다
어린 시절,
남자 아이들과 나는 꽃점을 잘 쳤습니다.
꽃잎을 하나씩 하나씩 딸 때면
마음에 두고 있는 아이가 자기를 좋아하나 안 하나를
꽃잎 한 잎 따면서 아니다 그렇다, 그렇다 아니다로 맞춰 보았죠.
어린 시절,
남자 아이들과 나는 소꿉놀이를 잘 했습니다.
꽃잎을 하나씩 하나씩 딸 때면
마음에 두고 있는 아이가 아빠가 되나 엄마가 되나를
꽃잎 한 잎 따면서 아니다 그렇다, 그렇다 아니다로 맞춰 보았죠.
아카시아 꽃이 피는 오월이 되면
순호와 나는 뒷동산에 올라 꽃점을 쳤습니다.
꽃잎을 하나씩 뜯으면서 우
리는 서로 그렇다 아니다, 아니다 그렇다로 맞춰보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죠.
꽃점 놀이가 지루해지면
솔바람 소리를 들으면서
순호와 나는 시와 소설 애기를 했습니다.
나는 소월의 시와 황순원의 「소나기」 같은
단편 소설 애기를 제일 많이 했고,
순호는 논어 얘기를 많이 했죠.
그 때
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고,
순호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나이는 한 살 차이였는데
순호는 나보다 훨씬 어른스러웠죠.
"추억을 통해 인생은 지나간다."는
구효서 작가의 말과
"옛날은 가는 게 아니라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다."라는
이문재 시인의 말을 참 좋아합니다.
절묘한 절창은 잊히지 않는 법입니다.
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구나 싶을 때
이 구절을 반복합니다.
‘추억'이나 옛날'은 돌아오지 않는 시간처럼
나에게 등을 돌리지 않기 때문이죠.
‘추억’이란 잠언 시는
그런 넋두리를 대변하는 듯한 시였습니다.
포도는 익으면 향기를 낸다
향기 속에 포도밭의 추억이 있다
벼는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
벼 잎 속에 들판의 추억이 있다
꽃은 만 발하면 꽃잎을 떨어뜨린다
꽃잎 속에 꽃밭의 추억이 있다
사람은 나이 들면 주름이 진다
주름 속에 사람의 추억이 있다.
추억이란 말만 들어도
생각이 깊어져서
마음은 돛단배의 돛처럼 불쑥 솟아오릅니다.
별이 동심원을 그리며 지구 주위를 돌 듯이,
시냇물이 바위 주변을 돌며 흐르듯이,
지난 날을 기억하는 일은
느린 거북이걸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그 시절로 돌아가게 합니다.
지나간 추억은
어떤 추억이라도 꼬리가 길어
내가 오랫동안 잡을 수 있는 소중한 끈입니다.
지금까지 순호와 나를 이어주는 것은
추억이라는 끈 뿐입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옛날은 추억처럼 자꾸 이렇게
내게로 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죠.
그때부터 지금까지
50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도,
잊히지 않는 한 순간이 한 순간의 존재를 만들어버리고,
존재의 한 순간을 잊히지 않는 순간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지금도 아카시아 꽃 피는 오월이 되면,
그렇다 아니다, 아니다 그렇다로
꽃점 치던 그 시절과 어깨동무하고 싶습니다.
(위 글의 저작권은 행복한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