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대한 독일 미술전>의 개막
1937년 7월 19일 〈위대한 독일 미술전〉이 개막됐다.
히틀러가 이끄는 나찌당(국가사회당을 가리키는 National Sozialist에서 Na와 zi를 결합한
일반적 약칭) 정부는 이 날을 ‘독일미술의 날’이라고 선포하고 거대한 개막식을 거행했다.
수십만 명의 관중이(기록에 의하면 40만에서 80만 사이) 운집한 가운데 히틀러는 연설했다.
“4년 전, 이 미술관 건축을 위한 첫 삽뜨기를 축하하면서 우리는 이 미술관이 단지 하나의
새 건물일 뿐만 아니라 정제된 독일미술의 새로운 전당이 될 것을 다짐했습니다.
드디어 이제 우리는 독일 문화 발전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입니다.”
식장 한가운데는 ‘독일 문화 2천 년’이란 글이 걸렸고, 관중들은 화려하게 정장한 3천 명 이상의
참석자들과, 음악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1천여 명의 군인들이 벌이는 퍼레이드를 구경할 수 있었다.
그리고 미술관에는 전국에서 공모한 1만5천 점의 작품 중에서 당국에 의해 선발된 6백여 점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선발된 후 전시된 회화작품들은 당시 미술계에서 주류를 이루던 평범한 풍속화들이었다.
전시는 명백히 당시 독일미술계의 주된 흐름인 ‘현대미술’을 철저히 거세하고,
이른바 ‘건전한 독일미술’을 육성·발전 시켜야 한다는 히틀러의 목적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따라서 1910년 이후 화단의 의식있는 작가들이 성취한 아방가르드 미술들,
즉 표현주의·다다·미래파·입체파 작품들은 남김없이 솎아냈다.
조각작품은 히틀러의 정통 아리안족의 신체적·정신적 우월성을 표현하는 것이어야 했다.
아르노 브레커의 작품 〈준비〉처럼 강건한 신체의 조상들만이 전시될 수 있었다.
이른바 “독일국민의 감정을 모욕하거나, 파괴하거나, 자연스런 형태를 혼란시키고,
예술가적 기능과 적합한 방법이 무시되었거나 없는 것”은 제외됐다.
그런 것들은 제외되어 한곳에 모아졌다.
나찌는 이러한 작품들을 모아 따로 전시회를 열었다.
그것을 이름하여 〈퇴폐미술전〉이라고 이름 붙였다.
<퇴폐미술(Entartete Kunst)전>의 초라한 개막
<위대한 독일 미술전>과 같은 날 열렸다. 장소는〈위대한 독일 미술전〉이 열리는 웅장하고
화려한 신축건물에서 공원을 가로질러 맞은편에 있는, 상대적으로 작고 오래된 건물이었다.
이전에 고고학연구소로 쓰던 곳에 그림을 걸기 위한 임시 칸막이가 세워졌다.
거기에 모두 650여 점에 달하는 회화·조각·판화, 그리고 책 등의 작품들이 혼잡하게 전시됐다.
작품을 감상하기 위한 작품 사이의 간격은커녕 마구잡이 벽보판처럼 위아래 할 것 없이 빽빽이
그림들이 붙여졌다.
단 2주만에 벽 세우기부터 작품 설치, 작품설명 써 붙이기까지를 끝마쳤다.
이 작품들은 모두 괴벨이 임명한 아돌프 지글러(Adolf Ziegler:당시 미술계 최고의 권력자로
부상된 인물) 외 5명의 위원에 의해 압수된 것으로 전국 28개 도시, 32곳의 미술관에서
옮겨온 것이었다.
이 작품들은 히틀러의 소위 ‘제3제국’이 허용할 수 없는 기준,
즉 ‘비-독일적’이며 ‘정신병적’이고 ‘불온’할 뿐만 아니라 ‘더러운’ 것이었다.
그래서 나찌는 “하루빨리 없어져야 할 찌꺼기들(dregs:실제로 괴벨이 그렇게 불렀다)”의
예로써 교육적 의미에서 그것들을 모아 전시회를 열어준 것이었다.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그 결과는..?
그런데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정작 나찌가 자랑스레 내놓은 〈위대한 독일 미술전〉보다
〈퇴폐미술전〉에 훨씬 많은 인파가 몰려든 것이다.
새 건축물에 엄청난 공력을 들인 그 전시는 한산한 반면 〈퇴폐미술전〉에는
매일 평균 2만 명의 관객이 몰려들었으며, 8월 2일(일요일)에는 하루만에 3만6천명이
관람하는 경이적인 기록을 남겼다.
결과적으로 〈퇴폐미술전〉을 관람한 사람의 숫자가 〈위대한 독일 미술전〉을 관람한
숫자의 5배가 넘었다. 당국에 의해 압수된 후 ‘퇴폐작가’로 찍혀 이 전시회에
작품이 내걸리게 된 작가들은 누구일까?
112명의 작가들. 이들은 이른바 ‘현대미술’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연 작가들이었다.
표현주의적 색채로 주목을 받던 ‘다리파(Die Brucke)’와 ‘청기사파(Der Blaue Reiter)’의 작가들,
즉 에밀 놀데, 막스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 칼 슈미트 로트러프 등과,
사회를 비평하는 그림으로 잘 알려진 막스 베크만, 오토 딕스, 게오르그 그로츠,
그리고 예술과 산업을 연결시키던 바우하우스 예술가들,
또한 파울 클레, 바실리 칸딘스키, 마르크 샤갈, 오스카 코코슈카, 케테 콜비츠, 막스 리베르만,
루드비히 미스 반데어 로에, 칼 호퍼, 아우구스트 마케, 쿠르트 슈비터스,
조각가로선 빌헬름 렘부르크, 에른스트 발라흐 등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을 정도다.
이러한 작가들의 작품들을 모은 전시였으니, 달리 말하면 ‘현대미술의 백미’를 한곳에서
감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던 셈이다.
결국 나찌는 기묘한 방식으로 현대미술을 세계에 전파하는 역할을 톡톡히 한 것이다.
- 출처 : 아트 인 컬쳐(Art in Culture) -
나찌의 퇴폐미술전의 엉뚱한 효과는
지금 우리의 예술과 문학에서도 이어지고 있을 것입니다.
초기 에세이스트 창간기념식장에서
<올해의 작품상> 심사평은
수필이라는 형식의 파괴가 매우 위험하다는 경고 같은 거였지요.
그때 저는 현대미술사에서 가장 혁명적인 분출구가 되었던
독일 <퇴폐미술전>을 떠올렸더랬습니다.
우리의 수필을 마치 저 <위대한 독일 미술전>을 여는 히틀러의
경건주의에 매장하고 있는 것을 아닐까 하고요.
그로부터 11년이 지났습니다.
그간 수필은 대폭발을 하며 형식과 내용이 자연발생적인 변화를 겪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적어도
수필은 12매 혹은 15매 라는 획일 적인 작은 그릇에 담아야만 하는
달달한 무엇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아마도 이번 주말 즈음엔 <올해의작품상>과 <정경문학상> 수상자를 발표하게 될 것입니다.
기대해도 실망시켜드리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거, 기대하가씁네다.^^ 반가워서 댓글을 쓰고 싶은데 머리가 단순하니 딱히 쓸 말이 마땅하지 않습니다. 그저 낙원상가 시장에서 막걸리 한잔 하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