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박군의 마음이라는 전도지가 있었습니다. 너무 오래돼서 그 전도지의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직도 기억에 선명한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은 박군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는데 박군의 마음 한 가운데에 의자가 있고, 그 의자의 주인이 박군으로부터 예수님으로 바뀌는 것이었습니다.
이 전도지가 아직도 사용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이 그림이 복음의 핵심을 잘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주인이 나일 때에는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유익보다는, 아니 최소한 자신을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공명 정대하게 평가하고 행동하기 보다는 주인공인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조연인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배후에는 영화와 드라마가 크게 한 몫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인공의 목숨은 중요하고 엑스트라들은 잠시 나와서 너무나 쉽고 아무렇지도 않게 죽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이 다치면 감정이입이 되어 마치 자신이 주인공이 된 것처럼 마음을 졸이면서 관람하지만 엑스트라들은 죽어도 전혀 아무런 감정조차도 느끼지 못하면서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미디어가 주는 병폐이고 마인드 콘트롤입니다 – 이 부분은 사단이 이 세상에서 대 성공을 거둔 분야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공동체의 소소한 부분에서부터 국가간의 전쟁까지 면밀히 살펴본다면 개인적인 이기주의와 집단적인 이기주의가 그 기본에 깔려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이기적인 시각으로 성경을 볼 때 성경을 자신의 유익에 맞춰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의 주인일 때에는 이 세상의 주인공이 바로 나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으로만 생각하면서도 전혀 거리끼는 마음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호리병 속의 지니를 연상케 해 줍니다 – 이런 관점에서 보면 디즈니의 알라딘이라는 만화는 번영신학의 기초가 되는 영화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이지만 우리는 우리의 판단력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이 구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정확히 가늠하기 조차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원망과 분노는 자신이 주인이기 때문에 생기는 마음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싶은데, 마음대로 안되니 하늘을 원망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분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의 주인이 하나님으로 바뀐 사람들은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주인이 되시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잔을 내가 기꺼이 받아 마시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모본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동안 하나님께 모든 주권을 내어 드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잔을 기쁘게 받아 마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주인이 하나님이 되면 우리는 성경을 이해하기가 쉬워집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한 번 설교했더니 삼천 명이 회심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한 번 설교했더니 삼천 개의 돌 (?)이 날라와 순교하게 됩니다.
이 모두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깊고 높은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마음의 주인 자리를 하나님께 내어드린 사람들을 통하여 그 깊고 높은 뜻을 실현해 나가고 계신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어느 목사님은 외출할 일이 있어 주차장에 갔는데 자신의 차가 다른 차에 막혀 있어 나갈 수 없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지금 자신이 외출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고 생각하여 조용히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와서 기도한다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또 실제로 저는 어떤 분이 자신의 차 앞에 다른 차를 세워 막아 놓은 것을 보고 막은 차의 앞 유리창에 “니 생각만 하니 이 XXX야”라는 글을 써 놓은 것을 본 적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우리 마음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우리 인생의 주인일 때에는 번영신학도 올바른 신학이 됩니다. 우리가 우리 인생의 주인일 때에는 우리에게 유익하기만 하다면 하나님과 알라가 같은 신이라고도 말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예수를 핍박하다가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으로 바뀐 후, 죽는 것도 유익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감사함으로 목이 잘리는 자리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 빌 1:21”
첫댓글 박군의 마음은 아마도 천로역정을 우리 말화하여 쉽게 다시 편집한 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 하시는 일은 우리 인간 상식이나 지식을 뛰어 넘습니다
같은 상황에서 돌에 맞아 죽울 수도 있고 칼에 목이 잘려 나갈 수도 있지만
하나님 계시의 필요에 따라서 세상에서 말하는 복으로 이끌 수도 있습니다
아멘입니다. 세상의 주인이신 분이 당연히 나의 주인도 되시는 것이죠.
이걸 모르면 아직도 어린애 신앙입니다.
어린애는 아빠도 회사 가지말고 저와 놀아달라고 울고, 누나 가방도 주지않죠. 학교가지 말고 저와 놀아달라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