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高句麗國 甘山寺의 覺緣師徒가 己酉年 三月三日에 敬造하다.]
이 금동불상에는 대고구려국(大高句麗國)이라는 국호가 보이므로 기유년은 고구려에서 고려(高麗)로 국호가 변경되기 전인 427년 이전으로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불상에 나온 기유년을 409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불교를 소수림왕이 372년에 받아들였고, 고려로 국호가 변경되었을 시기로 추정되는 평양천도가 427년에 이뤄졌기 때문에 이 사이의 기유년은 409년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의현(義縣)은 대능하 이서지역으로 409년 당시 이곳은 북연(北燕:大燕)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고구려국이라고 적힌 불상이 이곳에서 발견된 이유는 409년 당시의 고구려와 북연의 관계 때문이라고 생각되는데, 위의 불상이 만들어지기 1년 전인 408년에 광개토태왕은 고구려 왕족의 방계출신인 북연의 혜의황제(惠懿皇帝) 고운(高雲)을 종족의 예로 대접합니다. 서영수 교수는 이를 두고 고구려와 북연의 관계를 고구려가 주(周)나라식 봉건제도를 도입하여 북연을 제후로 삼았을 것이라고 한 바 있습니다.
이 금동불상은 고구려가 북연에게 준 선물이 아닐까 합니다.
첫댓글 여러각도에서 찍은 사진으로 볼 수 없을까요....서영수 교수님이 아닌 고미술사 교수님은 어떠한 생각을 하고 계신지 알고 싶어지네요..
사진은 저도 잘 모르겠네요.^^;;
대고구려국大高句麗國이라는 표현도 사용했다는 것은 처음 들었습니다. 자료 감사합니다. :-) / 그런데 읽고보니,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겨 여쭈어봅니다. 고구려가 그 지역에 진출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고구려의 물품이 그 지역으로 수입되었다고 본다면, 시기를 굳이 AD409로 한정할 필요가 없고 그 이전(예를 들어 AD349, AD289, ...)이라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만, AD409로 한정하는 것은 어떤 이유인지요? 혹시 소수림왕 때인 AD372에야 불교가 수입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아니면 서체라든지 하는, 시대를 구분짓는 다른 특징이 불상에서 관찰되었기 때문에? 어찌 생각하시는지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말씀하신 것처럼 372년에 불교가 수입된 것으로 여겨져서입니다. 또한 대고구려라는 표현이 들어간 불상도 전진, 후연, 북위라면 몰라도 북연이라면 교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입니다.
그런 이유였군요. 빠른 답변 감사합니다. :-)
다른 의견있으신지요? ^^;
그러한 이유라면 충분히 납득할만 하다고 생각하고, 다른 의견은 없습니다. 하한선은 불교 수입으로 AD372, 상한선은 평양천도시기로 AD427, AD372-427 사이에 기유년은? AD409 뿐. 이러하니 하한선이나 상한선을 이동시킬 이유가 없다면 반론의 여지가 없겠지요. 혹시 AD409라는 결론을 지지하는 다른 추가 이유는 없나 해서 확인차 여쭤본 것 뿐입니다. 아시다시피 세상에는 한 가지 이유로는, 주장이 아무리 명백하다고 해도 납득하지 못하는 - 질보다 양을 외치는 - 분들이 있는지라, 제가 본문의 주장을 근거로 하여 다른 주장을 전개하다가 그런 분들을 만날 때를 좀 대비해두려고요. :-)
그런 유물이 있었군요. '대고구려국'이라... 명치호태왕님 말씀에 동의하며, 유물 소개에 감사합니다.
저도 와카타케루님을 통해서 알게 됐는데, 사실 안 지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평양 천도 이후부터는 고구려가 고려라는 국호만 사용했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저도 409년이라는 명치호태왕님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이 불상과 고구려의 요서 방면 정책에 대한 공부는 나중으로 미루어두고, 그저 광개토왕 시기 활동했다고 볼 수 있는 인물이 한 명 더 확인된것이 기쁩니다. 무슨 이유에선지 광개토왕 시기 기록에는 태자 거련을 제외하고 어떤 다른 고구려인도 기록되어 있지 않더군요. 그나마 고고학적 발견으로 진,모두루 정도를 확인한게 끝이니...
저런 유물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네요. 좋은 것 하나 배워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