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 저동읍에서 석포리 가는 길 (미인과 바람과 향나무가 많은 섬)
“공기가 좋고 산천이 아름다운 곳에서 한 사나흘 걸으면 오십만원짜리 보약 한첩 먹는 것보다 낫다.” 내 오랜 지론이다. 이번 울릉도 여행이 그랬다. 울릉크루즈와 함께 한 여행, 고재덕 선생이 추천한 맛집과 나리분지에서 알벙을 지나 성불사로 가던 길, 천부리 가던 길, 숙소와 날씨 그 모든 것이 한 폭의 그림처러 어우러진 곳에서 긔한 약재를 다 넣고 조제한 보약을 먹으며 잘 쉬었다 온 느낌이다.
도둑과 거지 그리고 뱀이 없고, 바람과 향나무. 미인과 물․돌이 많다고 하여 삼무오다(三無五多)의 섬으로 불리는 섬이 울릉도다. 특히 바람 부는 날이 많아 한 해에 바람기가 잠잠한 날은 70일쯤 밖에 안 되고, 평균 풍속이 초속 4.5미터에 이르며, 폭풍이 이는 날이 179일이나 된다. 그래서 울릉도에는 풍향에 따라 바람을 가리키는 낱말이 풍부하다. 곧 동풍은 동새라 하고, 서풍은 청풍․하늘바람․갈바람이라 부르며, 남풍은 들바람․맛바람 또는 오방풍이라 한다. 북풍은 북새․샛바람․북청이라 하고, 동남풍은 울진․들진이라 한다. 이밖에 북동풍은 잉감풍, 남서풍은 댕갈바람․처지날․댕갈․댕갈청풍이라 하고, 북서풍은 북청바람 또는 북청이라고 부른다.
울릉도는 경상북도에 딸린 동해상의 섬으로 섬을 한 바퀴 돌 수 있는 일주도로가 완성 되었다.
도보답사 코스가 제대로 완성된다면 제주올레나 해파랑 길과 함께 한반도에서 매력적인 도보답사 처로 각광을 받을 것이다.
저동苧洞리는 봉래폭포의 못이 내를 이루었으므로 못개, 또는 모식이라고 불렀는데, 그 말이 변하여 저동이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울릉도 개척민들이 이곳에 있는 모시풀을 베어내고서 개척하였다고도 한다.
적은 모시개 뒤편에 있는 등성이를 깍껫등, 또는 깍셋등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사연이 안타깝다. 조선 후기인 고종 때 울릉도 개척민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궁여지책으로 밤마다 이곳에 와서 장작불을 피워 놓았다. 불을 보고 곽새 또는 깍새라고 부르는 새가 날아와서 돌다가 날개가 불에 타서 떨어지면 잡아서 구워먹고 나머지는 불에 그슬려서 저장해 놓고 양식처럼 먹었다. 그렇게 너무 많이 잡아먹어서 일제 강점기 중반에 이미 멸종위기로 접어들었고, 현재는 겨우 명맥만을 잇고 있을 뿐이다. 울릉도에서만 번식하는 여름철새인 곽새의 학명은 슴새로서 날개가 너무 길어 곧장 날아오르지 못하고 땅 위를 달리거나 절벽에서 껑충거리다가 보니 사람들에게 아주 쉽게 잡히게 되었다.
수협은행과 한국전력을 지나자 내수전內水田마을이다. 이 마을은 내수정이라고도 부르는데, 적은 모시개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이 만들어진 것은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고종 21년인 1884년에 제주도 대정大靜에 살고 있던 김내수金內水라는 사람이 이곳에 와서 화전火田을 일구고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고기를 잡거나 다른 일로해서 생계를 꾸려 가는 저동 사람들과 달리 오로지 비탈진 곳을 일구어 그곳에 나물을 재배해서 생계를 잇고 있다.
내수전 북쪽 바닷가에 있는 용굴은 굴이 매우 깊은데 용이 나와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곳이다.
내수전에서 내수전 전망대로 오르는 길은 제법 가파르다. 숨이 조금씩 가빠지는 시간에 전망대 가는 길과 천부동으로 가는 길이 나뉘고 여기서부터 천부리의 석포로 가기 위해선 모든 사람들이 공평하게 걷는 수밖에 없다.
울릉도 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 이 길이라면 과찬일까? 그러나 이 길이 언제까지나 그 명성을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듯싶다. 내수전 전망대에서 바로 아래 지점이 길을 넓게 내느라 중장비의 굉음이 하늘을 뚫을 듯하기 때문이다. 다음에 내가 이 길을 걸어갈 때에 이 길은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숲이 빼곡하도록 밀집되어 있는 천연림이 길 아래 위를 덮고 있기 때문에 안전한 길이라고 여겨지지만 이 길이 차마고도처럼 벌거벗은 산이라면 어떤 느낌이 들까? 길 아래는 새파란 동해바다고, 길은 겨우 두어 사람 지나갈 정도로 좁으니, 그보다 더 아찔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다 나와 같은 나그네만 지나는 이 길을 천부리에 사는 사람들은 그곳에서 채취한 해산물이나 나물 등을 이고 지고 수도 없이 오고 갔으리라.
이렇게 호젓하고 한적한 산길을 가는 나그네를 마가목, 해송, 동백을 비롯한 수많은 나무들이 벗해 주는데 이 삼 십 분 걸었을까? 물소리도 우렁찬 골짜기의 걸린 다리를 건너자 정매화라는 사람이 살았다는 정매화곡 쉼터에 이른다.
석포리까지는 2,100미터, 저동까지는 1,300미터, 와달리 위험이라고 쓰여진 이곳은 저동과 천부리의 중간쯤에 자리 잡고 있다. 정매화라는 사람이 울릉도 개척초기에 이곳에 살았기 때문에 정매화곡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그 뒤인 1962년에 이곳에 와서 1981년까지 이십 여 년 간 살았던 사람이 이호영씨 일가족이었다.
그들은 이곳에 집을 짓고서 뒷산 5천여 평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살았다가 도저히 산사태로 없자 결국 하산하고 말았다.
그들이 이곳에서 살면서 이 길을 가다가 조난당한 사람 300여명쯤을 구조했다고 적혀 있는 간판하나가 남아 그들의 지난했던 삶을 떠올릴 수 있다.
“열 걸음을 걸어가다 아홉 번쯤 뒤돌아보았다.”는 누군가의 글처럼 휘어 돌고 돌아가는 숲길을 얼마쯤 가자 쓰러져 가는 전봇대 뒷 편에 북면이라고 쓰인 입간판이 나온다.
조금 지나자 울릉읍과 북면경계라는 안내판이 보이고, 이곳에서 저동까지는 2,000미터, 석포는 1,400미터라고 표시되어 있다.
그곳에서 길은 오르막길이다. 동백나무가 빼곡하게 우거진 길을 천천히 가자고 다짐하며 오른다. 이 삼 십 분 올라갔을까 , 길은 다시 평지로 이어진다.
나무 숲 사이로 멀리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이는 섬이 죽도 또는 댓섬이라고 불리는 섬이다. 대섬은 와달리 동쪽 바다 가운데에 있는 큰 섬으로 사면이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위가 평평하다. 대나무가 많이 있어 대섬으로 부리는 이 섬은 예전에는 3세대가 살고 있었다. 그들은 주로 수박재배를 하거나 소를 키우며 살았다. 교통이 불편해서 절벽에 사닥다리를 놓고 오르내렸다. 육지에서 송아지를 사 가지고 배로 섬 밑에 이른 뒤에 송아지를 등에 업고 사닥다리를 올라가서 소를 키웠다. 그 소가 다 크게 되면 그 소를 잡아서 고기를 짊어지고 다시 사닥다리를 타고 내려와 배를 타고 육지로 갔다 팔아서 곡식을 구해다 먹었다. 만일 식량이나 물이 떨어지고 혹시 주민이 병이 들게 되면 봉화를 들어서 나리 분지의의 섬목과 연락을 취했다고 한다. 지금은 1세대에 부자父子가 더덕과 나물을 재배하며 살고 있다가 지금은 아들이 혼자 더덕을 키우며 살고 있다.
내수전에서 북면 천부리로 가는 길은 우산국 시대에 나 있는 길 그대로일 것 같이 옛 스럽고 소나무숲이 양옆에 우거진 길을 지나자 산길이 끝나고 천부리 석포로 가는 길이다.
천부리는 석포동 나리동 일부를 병합하여 천부동이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섬목 마을은 정들게 동쪽에 있는 목으로 섬매기 또는 도항이라고 부른다. 산이 동쪽 바다 속으로 뻗다가 중간이 끊어져 배가 드나들게 되고, 다시 일어서서 깍세섬이 되었다.
깍세섬은 천부리 섬목 동쪽에 잇는 섬으로 순 바위로 되어 있는데, 깍게새, 꽉새라고 부르는 곽새가 떼를 지어 살았다. 이 섬에는 굴이 있는데 관음보살이 살고 있다고 한며, 태양의 빛을 따라서 오색 또는 일곱 색으로 변화가 많다고 한다.
북면 천부리의 정들깨(일명 석포) 마을은 3면이 절벽으로 된 산 위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인데, 전라도 개척민 중 한 사람이 이곳 색시에게 정을 들여놓고 떠났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정들깨 남서쪽에 있는 백운동 마을은 늘 흰 구름이 끼어 있어서 부르는 이름이다.
정들깨 북동쪽 바닷가에 서 있는 세 개의 바위를 삼선암三仙岩이라고 부른다. 높이 16미터쯤 되는 세 개의 바위가 촛대처럼 서 있는데, 예전에 세 명의 신선이 그 위에서 놀았다고 하며, 삼선암 중 가장 끝에 있는 바위는 그 꼭대기가 가위처럼 벌어져 있어서 가새 바우리고 부른다.
선창 옆에 있는 마을은 앞에 삼선암이 있어서 마치 세 문이 있는 것 같이 보인다고 해서 삼문 다지라고 부르는데 천부리에서 가장 큰 마을은 선창 마을이다.
예선창, 왜선창, 또는 창동이라고 부르는 선창 마을은 조선 시대 왜선들이 이곳에 닿아서 배를 만들고 고기를 빼앗아 가므로 숙종 19년인 1693년에 안용복이 왜적을 무찌르고 이 섬을 수호했던 곳이다. 안용복은 그해에 참소를 입어 나라에 불려가 고문을 받기도 했으나 그 충의가 드러나서 마침내 울릉도 수포장搜捕將이 되어 이곳에 와 머물면서 완전히 왜적들을 범접하지 못하게 하였다.
1711년 5월에 삼척영장 박석창朴錫昌이 울릉도 수도관이 되어 이곳에 와 머물면서 이 섬을 순찰하고 그 일을 기념하기 위해서 작은 바위에 그 때의 일과 데리고 온 사람들의 이름을 낱낱이 새겼는데, 그 바위가 현재 울릉군청 국기 게양대에 옆에 옮겨져 있다.
천부리 서 남쪽에 있는 마을을 천년포라고 부르는데 그 앞에 천년방우라는 바위가 있다. 천년포 앞에 있는 홍문동은 홍살메기라고도 부르는데, 나리재에 큰 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윗가지가 서로 얽히어 홍예문처럼 되어서 행인들이 그 사이로 왕래했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삼선암을 바라보고 있는 산이 두루봉(120미터)인데 그 모양이 둥글게 생겼으며, 대방우 앞 바다 가운데 외 따로 서 있는 바위는 딴 방우라고 부르는데 대 나무가 많이 있었다.
북면 나리와 현포리 사이에서 가장 돋보이는 산이 바로 송곳산이다. 높이가 606미터인 이 산은 하늘이라도 뚫을 듯이 뾰족해서 어디서든지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산이다.
도동항에서 저동을 거쳐 천부리로 오던 길이 아스라하게 머리를 스치는 사이 나리분지로 가는 버스가 내 앞에 마법의 상자처럼 사뿐히 섰다.
오랜만에 다시 찾아갔어도 하나도 낯설지 않게 나를 맞아주고 나를 품어주었던 섬, 함께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내년 사월에 다시 찾아갈 것을 다짐한다.
2026년 10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