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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수경주(水經注) 14권의 패수는 낙랑군 누방현을 나와 임패현으로 들어간다(5)
○패수浿水
[수경]
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于海.
패수(浿水)는 낙랑군 루방현(鏤方縣)을 나와서 동남쪽으로 림패현(臨浿縣)을 지나 동쪽으로 海로 들어간다
***참고: 수경에서 “패수는 임패현을 지나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주]
許慎云..浿水出鏤方, 東入海, 一曰出浿水縣. 十三州志曰..浿水縣在樂浪東北, 鏤方縣在郡東, 盖出其縣南逕鏤方也 昔燕人衞滿 自浿水西 至朝鮮. 朝鮮故箕子國也. 箕子教民以義, 田織信厚, 約以八法, 而下知禁, 遂成禮俗. 戰國時, 滿乃王之, 都王險城, 地方數千里. 至其孫右渠, 漢武帝元封二年, 遣 樓船將軍楊僕 左將軍荀彘 討 右渠, 破渠于浿水, 遂滅之. 若浿水東流, 無渡浿之理. 其地今髙句麗之國治. 余訪蕃使, 言城在浿水之陽, 其水西流, 逕故樂浪朝鮮縣即樂浪郡治, 漢武帝置, 而西北流. 故地理志曰..浿水西至增地縣入海, 又漢興以朝鮮為逺, 循遼東故塞, 至浿水為界. 考之今古于事差謬, 盖經誤證也.
허신(許慎)은 말하기를 패수(浿水)는 루방현을 나와 동쪽으로 海로 들어가는데 혹은 패수현을 나온다고 하였다. 십삼주지(十三州志)에서 말하기를 패수현은 낙랑군 동북쪽에 있고 루방현은 낙랑군 동쪽에 있는데 모두 (패수현과 루방현) 그 현을 나와 [남쪽으로, 본문의 南을 而로 쓴 것도 있다] 루방현을 지난다고 하였다.
옛날 연나라 사람 위만이 패수 서쪽으로부터 조선에 이르렀는데 조선은 옛 기자의 나라이다. 기자는 백성에게 올바름을 가르치고 밭갈기와 옷감짜기를 믿음과 두터움으로 하였으며 8법으로 조약하여 금하는 것을 알게 하였으니 드디어 예절과 풍속을 이루었다.
전국시대에 위만이 이내 왕이 되어 왕험성에 도읍하였는데 방 수천리였다. 그 자손 우거에 이르러 한무제 원봉2년에 루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과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를 보내 우거(右渠)를 공격하였는데, 우거를 패수(浿水)에서 깨뜨려 드디어 우거를 멸하였다.
만약 패수가 동쪽으로 흘렀다면 동쪽으로 건너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그 땅은 지금 고구려가 다스리고 있는데 내가 고구려 사신에게 찾아가 물으니 말하기를 고구려의 성은 패수의 북쪽에 있고 패수는 서쪽으로 흘러 옛 낙랑군 조선현을 지난다고 하였는데, 즉 낙랑군 치소이다.
내가 고구려 사신에게 물어보니 대답하기를 평양성은 패수의 북쪽에 있는데 패수는 서쪽으로 흘러 옛 漢 무제가 설치한 낙랑군 치소인 낙랑군 조선현을 지나고 서북쪽으로 흐른다. 그래서 지리지에서 말하기를 패수는 서쪽으로 증지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한 것이다. 또한 漢이 흥하자 조선이 너무 멀어 요동의 옛 塞를 복원하여 패수를 경계로 한 것이다. 이것을 고찰하여 보면 옛 일에 대한 어긋남이 있는데 모두 수경의 어긋남을 증명하는 것이다.
***참고: 패수는 위만이 연나라에서 건너온 강이며, 연나라와 당시 조선의 경계에 있던 조선의 땅이다. 한(漢)나라에서 진장성(秦長城) 안쪽의 땅이 당시 수도인 장안에서 너무 멀어 상하장(上下雲鄣)의 땅을 버리고, 패수(浿水)를 경계로 하였다고 사기에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패수 동쪽을 조선에서 다시 수복(修復)한 것을 사기에서 왜곡한 것으로 보인다. 패수는 조백하(潮白河)로 보이며, 검토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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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수경주(水經注) 14권의 대요수는 안시현을 지난다.(6)
[수경]
又東過安市縣西南, 入于海.
(대료수는) 또한 동쪽으로 흘러 안시현 서남쪽을 지나고 바다로 들어간다.
[주]
十三州志曰..大遼水自塞外, 西南至安市, 入于海.
십삼주지에서 말하기를 대료수는 새(塞) 밖으로부터 서남쪽으로 흘러 안시에 도달하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참고: 안시현은 개평부 동북쪽 70리에 있는데, 지금의 탕지보이다.(안경전역 환단고기 607p)
***참고: 유성은 지금의 요령성 조양이다.
***참고: 창려(昌黎)는 험독현이 있고, 조선의 도읍인 왕검성이 있었던 곳이며, 낙랑군에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강은 탕지보, 조양, 창려를 지나는 강이었다.
○소요수小遼水
[수경]
又玄菟髙句麗縣有遼山小遼水所出
또한 현도군 고구려현에 료산이 있는데 소료수가 나오는 곳이다.
[주]
縣故髙句麗胡之國也. 漢武帝元封二年平右渠, 置玄菟郡于此. 王莽之下句麗. 水出遼山, 西南流逕遼陽縣, 與大梁水㑹. 水出北塞外, 西南流至遼陽, 入小遼水, 故地理志曰..大梁水西南至遼陽入遼, 郡國志曰..縣故屬遼東後, 入玄菟. 其水西南流, 故謂之為梁水也. 小遼水又西南, 逕襄平縣, 為淡淵. 晉永嘉三年, 涸. 小遼水又逕遼隊縣, 入大遼水. 司馬宣王之平遼東也, 斬公孫淵于斯水之上者也.
고구려현(縣)은 옛 고구려(髙句麗) 호(胡)의 나라이다. 한(漢) 무제(武帝) 원봉(元封) 2년에 우거(右渠)를 평정하고 현도군(玄菟郡)을 이곳에 두었는데 왕망이 하구려라고 하였다.
***참고: 고구려현은 한무제가 우거를 평정하고 현도군을 두었다고 했는데, 현도군은 지금의 난하(灤河)인 요수(遼水)에 접해 있었고, 요수와 요동성(遼東城)의 중간에 위치해 있던 땅이다. -가 말하는 압록강 중.상류가 현도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왜곡이다.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할 때 이세적이 요수를 건너 현도를 빼앗은 다음 요동성에서 싸움을 벌였는데, 현도는 압록강 중.상류가 될 수 없고, 요수와 요동성의 중간에 있었다. 소요수가 이곳을 지난다고 한 것은 지금의 난하가 이곳을 지나고 있음을 말한다.
소료수(水)는 료산(遼山)에서 나와서 서남쪽으로 흘러 료양현(遼陽縣)을 지나며 대량수(大梁水)와 모인다. 대량수(水)는 북쪽 새(塞) 밖에서 출발하여 서남쪽으로 흘러 료양(遼陽)에 이르러 소료수(小遼水)로 들어가는데 옛 지리지에서 말하기를 대량수(大梁水)는 서남쪽으로 흘러 료양(遼陽)에 이르러 료수(遼水)로 들어간다고 하였으며, 군국지(郡國志)에서는 고구려현(縣)은 옛날에 료동(遼東)에 속했는데 후에 현도(玄菟)에 속했다고 하였다.
***참고: 고구려현은 고구려의 땅임을 밝히고 있으며, 한무제가 현도군을 두었던 땅이었고, 하구려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소요수가 요양현을 지난다고 했는데, 요양현은 ...
그 물(其水, 대량수 소요수?)는 서남쪽으로 흐르는데 옛날에는 량수(梁水)라 하였다. 소료수(小遼水)는 또한 서남쪽으로 흘러 양평현(襄平縣)을 지나고 담연(淡淵)이 된다. 진(晉) 영가(永嘉) 3년에 물이 말라버렸다. 소료수(小遼水)는 또한 료대현(遼隊縣)을 지나서 대료수(大遼水)로 들어간다. 사마선왕(司馬宣王)이 요동을 평정하였는데 공손연(公孫淵)을 이 물 위에서 목을 베었다.
***참고: 소요수가 양평현을 지난다고 했는데, 양평현은,
”진개는 서쪽의 조양(朝陽)에서 동쪽의 양평(襄平)에 이르는 성을 쌓아 동호(고조선)을 방어했다“고 했는데, 양평은 요동의 속현으로 금 평주 노룡현 서남에 있다”(後漢書 李賢이 註)고 하였고,
사고전서(四庫全書) 권18을 보면
“평주노룡현에 갈석산이 있다(通典)고 하였고, 갈석산의 창려현 서남쪽 50리 떨어져 있고, 바다에서 30리 떨어져 있다(明通志)”고 하였는데, 이는 진황도시 창려현에서 서남쪽으로 50리 떨어져 있는 지역이고, 평주 노룡현에 속한 지역임을 나타낸 것이다.
[수경]
西南至遼隊縣入于大遼水也
(소요수는) 서남쪽으로 흘러 료대현(遼隊縣)에 이르러 대료수(大遼水)로 들어간다.
***참고: 소요수는 서남쪽으로 흘러 료대현에서 대요수로 들어간다고 했는데, 소요수는 대요수의 지류(支流)임을 나타내고 있다. 소요수가 난하이므로 이와 합쳐서 되는 대요수도 역시 난하일 것이다.
***참고: 고구려현은 한무제가 우거를 평정하고 현도군을 두었다고 했는데, 현도군은 지금의 난하(灤河)인 요수(遼水)에 접해 있었고, 요수와 요동성(遼東城)의 중간에 위치해 있던 땅이다.
***참고: 양평은 요동의 속현으로 금 평주 노룡현 서남에 있다”(後漢書 李賢이 註)고 하였으므로 이같은 기록을 중심으로 대요수의 지금 이름이 밝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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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수경주(水經注) 14권의 유수, 대요수, 소요수 및 패수의 위치(7)
-패수의 위치를 밝혀야 한다.
濡水又東南流, 逕令支縣故城東, 王莽之令氏亭也. 秦始皇二十二年, 分燕置遼西郡, 令支隸焉. 魏土地記曰..肥如城西十里 有濡水, 南流逕孤竹城西, 右合玄水, 世謂之小濡水, 非也. 水出肥如縣東北玄溪, 西南流逕其縣東, 東屈, 南轉, 西迴, 逕肥如縣故城南, 俗又謂之肥如水. 故城肥子國, 應劭曰..晉滅肥, 肥子奔燕, 燕封于此, 故曰肥如也. 漢髙帝六年, 封蔡寅為侯國. 西南流右㑹盧水, 水出縣東北沮溪, 南流, 謂之大沮水. 又南, 左合陽樂水, 水出東北陽樂縣溪. 地理風俗記曰..陽樂, 故燕地, 遼西郡治, 秦始皇二十二年置. 魏土地記曰..海陽城西南有陽樂城. 其水又西南, 入于沮水, 謂之陽口. 沮水又西南, 小沮水注之, 水發冷溪, 世謂之冷池. 又南得温泉水口, 水出東北温溪, 自溪西南流入于小沮水. 小沮水又南流, 與大沮水合而為盧水也. 桑欽説盧子之書, 言晉既滅肥, 遷其族于盧水. 盧水有二渠, 號小沮 大沮 合而入于玄水. 又南與温水合, 水出肥如城北, 西流注于玄水. 地理志曰..盧水南入玄. 玄水又西南逕孤竹城北, 西入濡水. 故地理志曰..玄水東入濡, 盖自東而注也. 地理志曰..令支有孤竹城, 故孤竹國也. 史記曰..孤竹君之二子 伯夷 叔齊 讓國于此, 而餓死于首陽. 漢靈帝時, 遼西太守亷翻 夢人謂已曰..余孤竹君之子, 伯夷之弟. 遼海漂吾棺槨, 聞君仁善, 願見藏覆. 明日視之, 水上有浮棺, 吏嗤笑者, 皆無疾而死. 于是改葬之. 晉書地道志曰..遼西人見遼水有浮棺, 欲破之. 語曰, 我孤竹君也, 汝破我何為? 因為立祠焉. 祠在山上, 城在山側. 肥如縣南十二里, 水之㑹也.
유수(濡水)는 동남쪽으로 흘러 령지현(令支縣) 옛 성의 동쪽을 지나는데 왕망이 령씨정(令氏亭)으로 바꾸었으며 진(秦) 시황(始皇) 22년 연(燕)을 나누어 료서군(遼西郡)을 두었는데 령지현이 료서군에 속한다. 위씨토지기에서 말하기를 비여성(肥如城) 서쪽 10리에 유수(濡水)가 있는데 남쪽으로 흘러 고죽성(孤竹城) 서쪽을 지나며 오른쪽으로 현수(玄水)와 합류한다. 세간에서 말하기를 현수를(之) 소유수(小濡水)라고 하는데 틀렸다.
***참고: 고죽성(孤竹城)은 예전의 고조선 후국(侯國)인 고죽국(孤竹國)이 있었던 곳이다. 영지는 요령성 영지이다.
현수(水)는 비여현(肥如縣) 동북쪽 현계(玄溪)를 나와서 서남쪽으로 흘러 비여현(其縣) 동쪽을 지나고 동쪽으로 굽고 남쪽으로 남쪽으로 구르고 서쪽으로 돌아 비여현(肥如縣) 옛 성 남쪽을 지나는데 세간에서는 (비여현 남쪽을 지나는 현수를) 비여수(肥如水)라고 한다. 옛 성은 비자국(肥子國)인데 응초(應劭)가 말하기를 ‘진(晉)이 비(肥)를 멸하고 비(肥)의 아들이 연(燕)으로 달아났는데 연(燕)이 그곳에 봉하였기에 비여(肥如)라 한다’고 하였다. 한(漢) 고제(髙帝) 6년에 채인(蔡寅)을 봉하여 후국(侯國)으로 하였다. (현수 즉 비여수는) 서남쪽으로 흘러 오른쪽으로 로수(盧水)와 모인다.
로수(水)는 (즉 로수의 발원을 설명하면 이러한데) 비여현(縣) 동북쪽의 저계(沮溪)를 나와서 남쪽으로 흐르는데 저계 남쪽을 나오는 강(之)을 대저수(大沮水)라고 한다. (대저수는) 남쪽으로 흘러 왼쪽으로 양락수(陽樂水)와 합하여진다. 양락수(水)는 동북쪽 양락현(陽樂縣) 계(溪)를 나온다. 지리풍속기(地理風俗記)에서 말하기를 ‘양락(陽樂)은 옛 연(燕)의 땅인데 요서군에서 다스렸다.
***참고: 비여현은 지금의 하북성 노룡현이다. 그러므로 이 강은 하북성 노룡현인 예전의 비여현을 흐르던 강이다.
진 시황 22년에 설치하였다.’고 하였다. 위씨토지기에서 말하기를 ‘해양성(海陽城) 서남쪽에 양악성(陽樂城)이 있다’고 하였다. 양락수(其水)는 또한 서남쪽으로 흘러 저수(沮水)로 들어가는데 그곳을(之) 양구(陽口)라고 한다. 저수(沮水)는 또한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소저수(小沮水)가 저수(之)로 들어간다. 소저수(水)는 랭계(冷溪)에서 발하는데 세간에서는 랭지(冷池)라 한다. (소저수는) 또한 남쪽으로 흘러 온천수(温泉水) 구(口)와 만나는데, 온천수(水)는 동북쪽 온계(温溪)에서 나와서 온계(溪)로부터 서남쪽으로 흘러 소저수(小沮水)로 들어간다. 소저수(小沮水)는 또한 남쪽으로 흘러 대저수(大沮水)와 합하여져서 로수(盧水)가 된다.
상흠설로자(桑欽説盧子)의 책에 말하기를 ‘진(晉)이 이미 비(肥)를 멸하고 그 족속들을 로수(盧水)로 옮겼다’고 한다. 로수(盧水)는 2개의 물줄기(渠)가 있는데 소저(小沮)와 대저(大沮)이며 합하여져서 (로수가 된 후) 현수(玄水)로 들어간다. 로수는 또한 남쪽으로 온수(温水)와 합하여지는데 온수(水)는 비여성(肥如城) 북쪽에서 나와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현수(玄水)로 들어간다.
지리지에서 말하기를 ‘로수(盧水)는 남쪽으로 흘러 현수(玄水)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현수(玄水)는 또한 서남쪽으로 흘러 고죽성(孤竹城) 북쪽을 지나서 서쪽으로 흘러 유수(濡水)로 들어간다. 옛 지리지에서 말하기를 현수(玄水)는 동쪽으로 흘러 유수로 들어간다고 하였는데 모두 동쪽으로부터 들어가는 것이다(盖自東而注也). 지리지에서 말하기를 ‘령지현(令支縣)에 고죽성이 있고 옛 고죽국이라’고 하였다.
사기에서 말하기를 ‘고죽의 군(君) 2 아들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인데 이곳은 나라를 양보하고 수양(首陽)에서 굶어 죽었다’고 하였다. 한(漢) 령제(靈帝) 때에 료서태수(遼西太守) 렴번(亷翻)이 꿈속에서 사람이 자기에게 말하기를 ‘나는 고죽(孤竹) 군(君)의 아들 백이(伯夷)의 아우라 하였다. 遼海漂吾棺槨, 聞君仁善, 願見藏覆. 明日視之, 水上有浮棺, 吏嗤笑者, 皆無疾而死. 于是改葬之.
진서(晉書) 지도지(地道志)에서 말하기를 료서(遼西) 사람이 료수(遼水)에 관(棺)이 떠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파괴하려고 했다. 말하기를 나는 고죽국의 임금인데 네가 어떻게 나를 깨뜨릴수 있는가? 그래서 사당을 지어줬는데 사당은 산위에 있고 성은 산의 옆 비여현 남쪽 20리 강물들이 모이는 곳이다.
[수경
又東南過海陽縣, 西南入于海
(유수는) 또한 동남쪽으로 흘러 해양현(海陽縣)을 지나서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주]
濡水自孤竹城東南, 逕西鄉北, 瓠溝水注之. 水出城東南, 東流注濡水.
유수(濡水)는 고죽성(孤竹城) 동남쪽으로부터 서향(西鄉) 북쪽을 지난 후에 호구수(瓠溝水)가 유수(之)로 들어간다. 호구수(水)는 고죽성(城) 동남쪽을 나와서 동쪽으로 흘러 유수(濡水)로 들어간다.
濡水又逕故城南, 分為二水. 北水枝出, 世謂之小濡水也. 東逕樂安亭北, 東南入海.
유수(濡水)는 또한 옛 성의 남쪽을 지나고 강 줄기가 2개로 갈라져서 (하나는) 북쪽으로 나가는데 세간에서는 소유수라고 한다. (이 강은) 동쪽으로 흘러 낙안정(樂安亭) 북쪽을 지나고 동남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濡水東南流, 逕樂安亭南, 東與新河故瀆合. 瀆自雍奴縣承鮑丘水, 東出, 謂之鹽闗口. 魏太祖征蹋頓, 與泃口俱導也, 世謂之新河矣. 陳夀魏志云..以通海也. 新河又東北, 絶庚水, 又東北出, 逕右北平, 絶泃渠之水, 又東北逕昌城縣故城北, 王莽之淑武也. 新河又東, 分為二水, 枝瀆東南入海. 新河自枝渠東出, 合封大水, 謂之交流口. 水出新安平縣, 西南流逕新安平縣故城西, 地理志遼西之屬縣也. 又東南流, 龍鮮水注之. 水出縣西北, 世謂之馬頭水, 二源俱導, 南合一川, 東流注封大水. 地理志曰..龍鮮水東入封大水者也. 亂流南㑹新河, 南注于海. 地理志曰..封大水于海陽縣南入海. 新河又東出海陽縣, 與緩虚水㑹. 水出新平縣東北, 世謂之大籠川, 東南流逕令支城西, 西南流與新河合, 南流注于海. 地理志曰..緩虚水與封大水皆南入海. 新河又東與素河㑹, 謂之白水口. 水出令支縣之藍山, 南合新河., 又東南入海. 新河又東至九過口, 枝分南注海. 新河又東逕海陽縣故城南, 漢髙祖六年, 封搖母餘為侯國. 魏土地記曰..令支城南六十里有海陽城者也. 新河又東, 與清水㑹, 水出海陽縣, 東南流逕海陽城東, 又南合新河, 又南流十許里, 西入九濄, 注海. 新河東絶清水, 又東, 木究水出焉, 南入海. 新河又東, 左迆為北陽孤淀, 淀水右絶新河, 南注海. 新河又東㑹于濡.
유수(濡水)는 또한 동남쪽으로 흘러 낙안정(樂安亭) 남쪽을 지나고, 동쪽으로 신하(新河) 옛 독(瀆)과 합하여진다. 독(瀆)은 옹노현(雍奴縣)으로부터 포구수(鮑丘水)를 잇고, 동쪽으로 나가는데 이를 염관구(鹽闗口)라고 한다. 위(魏) 태조(太祖)가 답돈(蹋頓)을 정벌하고 구구(泃口)와 함께 (물길을) 내었는데 세간에서는 이를 신하(新河)라 한다. 진수(陳夀)의 위지(魏志)에서 말하기를 ‘이로써 바다와 통했다’고 하였다.
신하(新河)는 또한 동북쪽으로 흘러 경수(庚水)를 끊고 또한 동북쪽으로 나가서 우북평(右北平)을 지나고 난 뒤에 구거수(泃渠之水)를 끊는다. 또한 동북쪽으로 흘러 창성현(昌城縣) 옛 성의 북쪽을 지나는데 왕망이 숙무(淑武)로 바꾸었다. 신하(新河)는 또한 동쪽으로 흐르다가 2개로 나뉘는데 지독(枝瀆)은 동남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신하(新河)는 지거(枝渠)로부터 동쪽으로 나가서 봉대수(封大水)와 합류하는데 이를 교류구(交流口)라고 한다.
***참고: 우북평(右北平)은 위나라의 조조 때 인물인 전주(田疇)가 살던 곳이다. 전주가 활동했던 곳이자 그의 연고지인 후한(後漢) 시기의 우북평군(右北平郡) 무종현(無終縣)은 지금의 하북성 천진(天津), 당산(唐山) 방면의 계주구(薊州區) 또는 옥전현(玉田縣) 지역에 있었다.
봉대수(水)는 신안평현(新安平縣)을 나와서 서남쪽으로 흘러 신안평현(新安平縣) 옛 성의 서쪽을 지나는데 지리지에서 말하기를 료서군에 속했다고 했다. (봉대수는) 또한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룡선수(龍鮮水)가 봉대수(之)로 들어간다. 룡선수(水)는 료서군(縣) 서북에서 나오는데, 세간에서는 마두수(馬頭水)라고 하며 2개의 발원지가 있어 남으로 하나의 하천이 되고 동쪽으로 흘러서 봉대수(封大水)로 들어간다. 지리지에서 말하기를 룡선수(龍鮮水)는 동쪽으로 흘러 봉대수(封大水)로 들어가는 것이라 했다. 난류가 일어나 남쪽으로 신하(新河)와 모여서 남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지리지에서 말하기를 봉대수(封大水)는 해양현(海陽縣)에서 남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고 했다. 신하(新河)는 또한 동쪽으로 해양현(海陽縣)을 나와서 완허수(緩虚水)와 모인다. 완허수(水)는 신평현(新平縣) 동북쪽을 나오는데 세간에서는 대롱천(大籠川)이라 하며 동남쪽으로 흘러 령지성(令支城) 서쪽을 지나고 서남쪽으로 흘러 신하(新河)와 합류하여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지리지에서 말하기를 완허수(緩虚水)는 봉대수(封大水)와 더불어 모두 남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고 했다.
신하(新河)는 또한 동쪽으로 소하(素河)와 모이는데 이곳을 백수구(白水口)라고 한다. 소하(水)는 령지현(令支縣)의 람산(藍山)을 나와서 남쪽으로 신하(新河)와 합류하고 동남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신하(新河)는 또한 동쪽으로 구과구(九過口)에 이르는데 작은 물줄기가 나뉘어 남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신하(新河)는 또한 동쪽으로 해양현(海陽縣) 옛 성의 남쪽을 지나는데 한(漢) 고조(髙祖) 6년에 요모여(搖母餘)를 봉하여 후국(侯國)이 되게 하였다.
위씨토지기에서 말하기를 령지성(令支城) 남쪽 60리에 해양성(海陽城)이라는 것이 있다고 하였다. 신하(新河)는 또한 동쪽으로 흘러 청수(清水)와 모인다. 청수(水)는 해양현(海陽縣)에서 나와서 동남쪽으로 흘러 해양성(海陽城) 동쪽을 지나고 또한 남쪽으로 흘러 신하(新河)와 합류하며, 또한 남쪽으로 10리정도를 흘러서 서쪽으로 구과(九濄)로 들어가 바다로 들어간다. 신하(新河)는 또한 동쪽으로 청수(清水)를 끊고 또한 동쪽으로 흘러 목구수(木究水)가 나오고 남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신하(新河)는 또한 동쪽으로 흘러 좌이(左迆)가 북양고정(北陽孤淀)이 되는데 정수(淀水)는 오른쪽으로 신하(新河를 끊고 남쪽으로 바다로 들어가낟. 신하(新河)는 또한 동쪽으로 유수(濡水)와 모인다.
濡水又東南至絫縣碣石山. 文穎曰..碣石在遼西絫縣. 王莽之選武也. 絫縣并屬臨渝, 王莽更臨渝為馮徳. 地理志曰..大碣石山在右北平驪成縣西南, 王莽改曰掲石也. 漢武帝亦嘗登之, 以望巨海, 而勒其石于此. 今枕海有石如甬道, 數十里, 當山頂, 有大石如柱形, 往往而見, 立于巨海之中, 潮水大至則隠, 及潮波退, 不動不沒, 不知深淺, 世名之天橋柱也. 狀若人造, 要亦非人力所就. 韋昭亦指此以為碣石也. 《三齊略記》曰..始皇于海中作石橋, 海神為之豎柱. 始皇求與相見. 神曰..我形醜, 莫圗我形, 當與帝相見. 乃入海四十里, 見海神, 左右莫動手, 工人潜以腳畫其狀. 神怒曰..帝負約速去. 始皇轉馬還, 前腳猶立, 後腳隨崩, 僅得登岸. 畫者溺死于海, 衆山之石皆傾注, 今猶岌岌東趣, 疑即是也. 濡水于此南入海, 而不逕海陽縣西也, 盖經誤證耳. 又按, 管子 齊桓公二十年, 征孤竹, 未至卑耳之溪十里, 闟然止, 瞠然視, 援弓將射, 引而未發, 謂左右曰..見前乎? 左右對曰..不見. 公曰..寡人見長尺而人物具焉, 冠, 右袪衣. 走馬前, 豈有人若此乎? 管仲對曰..臣聞豈山之神, 有偷兒, 長尺人物具. 霸王之君興, 則豈山之神見. 且走馬前, 走導也, 袪衣, 示前有水, 右袪衣, 示從右方涉也. 至卑耳之溪, 有賛水者, 從左方涉, 其深及冠, 右方涉, 其深至膝. 已涉, 大濟. 桓公拜曰..仲父之聖至此, 寡人之抵罪也久矣. 今自孤竹南出則巨海矣. 而滄海之中, 山望多矣, 然卑耳之川, 若賛溪者, 亦不知所在也. 昔在漢世, 海水波襄, 吞食地廣, 當同碣石, 苞淪洪波也.
유수(濡水)는 또한 동남쪽으로 류현(絫縣) 갈석산(碣石山)에 이른다. 문영(文穎)이 말하기를 갈석(碣石)은 료서군 류현(絫縣)에 있다고 하였는데 왕망이 선무(選武)로 바꾸었다. 류현(絫縣)는 아울러 림투(臨渝)에 속한다. 왕망(王莽)은 림투(臨渝)를 풍덕(馮徳)으로 바꾸었다. 지리지에서 말하기를 대갈석산(大碣石山)은 우북평(右北平) 려성현(驪成縣) 서남쪽에 있다으며 왕망이 게석(掲石)이라고 했다고 하였다.
***참고: 갈석산은 진황도시와 당산시 사이에 있는 산이다. 유수가 동남쪽으로 갈석산에 이른다고 했으므로, 유수는 갈석산의 남서쪽으로 추측이 된다.
한(漢) 무제(武帝)가 또한 일찍이 대갈석산에 올라가서 큰 바다를 바라보고 그 돌에다가 새겼다. 이제 바다에 임하여 솟은 길과 같은 돌이 있는데 수십리가 되고 큰 돌은 기둥 형상인데 종종 가서 보니 큰 바다 가운데에 서 있다. 밀물이 일면 숨어버리고 썰물이 되면 움직이지 않고 잠기지도 않으며 그 얕고 깊을 알지 못하니 세간에서는 이를 천교주(天橋柱)라 한다. 형상은 사람이 만든 것 같지만 중요한 것은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니 위소(韋昭)는 이것을 가리켜 갈석이라 하였다.
《삼제략기(三齊略記)》에서 말하기를 시황(始皇)이 바다 가운데에서 석교(石橋)를 짓고 해신(海神)이 기둥(豎柱)으로 되었다. 시황(始皇)이 서로 볼 것을 구하니 해신이 말하기를 ‘나는 형상이 추하고 나의 형상을 그릴 수도 없으니 마땅히 제(帝)가 보아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 이에 바다 40리를 들어가서 해신을 보았는데 좌우에 움직이지 않는 손이 있어 공인(工人)이 몰래 다리(腳)에 그 형상을 그렸다. 해신이 노하여 말하기를 ‘제(帝)는 빨리 가기를 약속하라’고 하였다.
시황(始皇)이 말을 굴려 돌아와 다리 앞에 오히려 서니 뒤쪽 다리가 차례로 무너져서 겨우 바위로 올랐다. 그림을 그린자는 바다에 빠져 죽고 여러 산들의 돌은 모두 기울어져 물이 흐르게 되었다. 이제 오히려 동쪽의 높은 산이 이것이 아닌가 한다.
유수(濡水)는 또한 이곳에서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해양현(海陽縣) 서쪽을 지나지 아니하며 모두 경(經)에서 그릇되이 증명한 것이다. 또한 생각해보니 관자(管子)에서 기록하기를 제(齊) 환공(桓公) 20년에 고죽(孤竹)을 정벌하는데 비이(卑耳)의 계(溪) 10리를 다 이르지 아니하여 멈추어 바라보고 화살을 들었으나 쏘지 아니하였다. 좌우 사람에게 말하기를 앞이 보이느냐고 하였다. 좌우 사람이 말하기를 보이지 아니한다고 하였다. 환공이 말하기를 ‘과인은 키가 아주 큰 인물을 갖춘 자가 갓을 쓰고 우거의(右袪衣)한 자가 앞으로 말을 타고 달려갔는데 어찌 사람이 이와 같은가?’라고 하였다.
관중(管仲)이 대답하기를 ‘신이 듣기로 기산(豈山)의 신에게 도둑질하는 아이가 있는데 키가 아주 크고 인물됨이 갖추어져 있고 패왕의 임금이 흥할 때 곧 기산(豈山)의 신이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달리는 말 앞에 달릴 수 있는 길을 인도하는데 우거의(右袪衣)가 가는 길 앞에 물이 있으며 우거의(右袪衣)는 오른쪽으로 건널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비이(卑耳)의 계(溪)에 이르니 찬수자(賛水者)가 왼쪽으로 건너니 그 깊이가 머리에 쓴 갓까지 올라오고 오른쪽으로 건너니 그 깊이가 무릎까지 오므로 다 건너게 되었다. 환공이 절하며 말하기를 ‘중부(仲父)의 성스러움이 여기에 이르었으니 과인의 죄가 오래되었구나’라고 하였다.
지금 고죽으로부터 남쪽으로 나가면 큰 바다이며 창해(滄海) 가운데에는 바라보이는 산이 많은데 비이천(卑耳川)과 찬수자의 계(溪)도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옛날 한(漢) 시대에 바닷물이 일어나 땅을 삼키운 곳이 넓으니 마땅히 갈석도 물결에 파해쳐졌을 것이다.
***참고: 비여현은 지금의 하북성 노룡현이다. 그러므로 이 강은 하북성 노룡현인 예전의 비여현을 흐르던 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