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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3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제1독서 : 1요한 3,22―4,6
복 음 : 마태 4,12-17.23-25
그때에
12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래아로 물러가셨다.
13 그리고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
14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5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16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17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23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24 그분의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
간질 병자들과 중풍 병자들을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25 그러자 갈릴래아, 데카폴리스, 예루살렘, 유다,
그리고 요르단 건너편에서 온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20세기 초, 미국 질레트사의 창업자 질레트는
세계 최초로 안전면도기를 개발했습니다.
당시의 면도기는 비싸기도 했지만,
사용 전에 칼날을 갈아야 했기에 매우 위험했습니다.
따라서 질레트는 자신의 발명품이
전 세계인의 선택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심각한 판매 부진이었습니다.
1년 동안 질레트사가 판 것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면도기 51개, 면도날 168개”
세계 제1차 대전이 시작되었고,
그는 곧바로 군수 물품 조달 부서에 연락해
면도기를 원가에 보급하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원가에 판매하면 남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까지의 적자 역시 당연히 메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커다란 손해를 보는 이 결정이
질레트사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켰습니다.
돈 한 푼 쓰지 않고 엄청난 광고 효과를 본 것입니다.
그래서 1917년, 한 해에만 1억 3천만 개의 면도기를 판매할 수 있었습니다.
손해 보는 것처럼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손해 너머를 바라본다면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세상의 관점이 무조건 진리의 길은 아닙니다.
그보다 주님의 관점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관점을 따르게 되면, 어리석고 현명하지 못한 것처럼 비춰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근시안적인 생각입니다.
조금만 더 멀리 바라보면 사랑의 삶을 사는 주님의 관점이
하늘 나라를 차지하게 되는 가장 올바른 결정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감옥에 갇히고 나서야 회개를 선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는 요한에 의해 옛 계약이 끝나고, 새 계약의 시작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의 가르침을 짓밟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확인하듯이 요한의 가르침을 이어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우리의 회개로 주님께서 얻으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세상의 관점으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말도 듣지 않고, 악으로 쉽게 기울어지는 우리를 보면
“꼴도 보기 싫다.”라고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세상의 관점을 따르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관점은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죄를 고백하여 죄의 얼룩을 모두 씻지 않는 한
아무도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은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드러났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죄의 얼룩을 모두 씻는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이 큰 빛을 보았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빛의 축제일인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입니다.
오늘도 어제 말씀의 연장선상에서 또 하나의 빛의 공현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빛을 받으며, 빛 속에서 첫걸음을 내딛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빛을 증언하러 왔던 요한은 물러가고,
참 빛이 세상에 왔습니다.’(요한 1,6-9)
오늘 복음은 이사야가 예언한 빛이 이미 도래했음을 선포합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6)
그 빛은
“즈불룬 땅과 납달리 땅,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에서부터 비추어왔습니다.
질곡의 땅 갈릴래아,
이곳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활동을 시작하신 장소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곳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는 당신 사명의 내용을 밝혀줍니다.
곧 하늘나라는 먼저 이방인의 압박,
곧 죽음의 그늘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먼저 선포되었음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당신은 어두움 속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생명을 주는 빛으로 오시는 분임을 밝혀줍니다.
그리고 빛 안에서 걸어야 하는 첫걸음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밝혀줍니다.
곧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라고 말씀하십니다.
‘회개’(슈브,שב)의 히브리어 원어의 뜻은
‘돌이키다’, ‘돌아오다’라는 뜻인데,
원래의 그림문자의 뜻은 ‘집을 무너뜨리는 것’을 뜻합니다.
곧 자신이 ‘이전에 살던 집’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집’에 거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전에 살던 집’이란
우리가 거하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더 넓은 의미로 우리가 이전에 행하던
행위나 지식까지도 포함합니다.
곧 우리의 행위와 앎으로부터 벗어나 새집으로 돌아와
하늘의 양식을 먹는 새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바오로 사도는
“옛사람의 행위와 지식(옛집)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는 것(새로운 성전을 건축하는 것)”(콜로 3,9-10)이라고 말합니다.
곧 ‘우상의 집’을 무너뜨리고 하느님의 집인 성전으로 돌아가
하느님의 양식인 말씀을 먹으며 하느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회개’는 죄악을 버리는 것보다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에덴의 동산’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에덴동산’은 하느님께서 사람과 함께 거하시기 위하여 만든
하느님의 처소(집)임과 동시에 마지막 때에 다시 회복될 ‘새 예루살렘’(묵시 21,2)입니다.
‘회개’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은 ‘말씀을 가지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호세아를 통하여 이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
~ 너희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주님께 돌아와 아뢰어라.”(호세 14,2-3)
하느님께서는 바빌론 유배에서 당신 백성을 돌이키실 때도
율법학자 겸 제사장인 에즈라를 보내시어 당신의 말씀을 가르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지켜 그 말씀이 우리 안에 있게 하고
그러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요한 14,23 참조)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거처를 함께 하시면 우리 안에 ‘하느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말씀 안으로의 전환이 곧 ‘회개’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건설되도록 수락하는 일입니다.
곧 우리의 말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으로 우리의 삶이 건설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하늘나라를 받아들이는 일,
곧 그분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거처가 되는 일이 벌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마태 4,15)
주님!
당신께서는 어둠이 덮인 곳에 큰 빛을 비추셨습니다.
질곡의 땅, 핍박받는 이들에게 의로움의 빛줄기를 뿌리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는 어둠의 속박을 풀고 묶인 이들을 해방시키셨습니다.
오늘, 저의 오류와 완고함을 뚫으소서.
무지와 어리석음을 밝혀 진리의 빛 속을 걷게 하소서.
아멘.
‘빛이 떠올랐다.’(마태 4, 16)
한상우 바오로 신부
어둠 속에
앉아 있던
우리가
떠오른 빛을 보았다.
회개와
하늘 나라
사이로
빛이 오셨다.
하늘 나라는
회개의 방식이며
또한
빛의 방식이다.
빛은
감출 수 없다.
우리를 비출 뿐이다.
빛이신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의 문을 여신다.
우리의 현실을
치유하신다.
빛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다.
우리의 일상을
이끌고 가시는
예수님의 사랑의 빛이다.
우리를 알아주시는
유일한
사랑의 빛이 뜨거워진다.
빛이 만들어내는
사랑이 복음이다.
사랑을
믿지 않는 것이
우리들 어둠이었다.
빛을 통하여
아름다워지는
우리들 삶이다.
떠오른 빛이
우리를 치유하신다.
빛이신 사랑이
사랑을 치유하신다.
처음으로
빛다운 빛을
본 사람들은
빛을 따라간다.
빛의 소명
빛의 역사가
구원의 역사이다.
세상을 살리는
빛이 떠올랐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지난 12월 8일에 서울대교구 교구장 착좌식이 있었습니다.
착좌식을 통해서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님은
서울대교구의 교구장직을 공적으로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님의 강론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정 대주교님은 강론을 통해서 전임 교구장님의 업적을 이야기하였고,
그 업적을 계속 이어가도록 노력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아울러 한국사회가 교회에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겠다고 하였습니다.
14대 서울대교구 교구장으로서 앞으로 이루고 싶은 사목의 방향을 나누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성서를 펼쳐 읽으면서 복음을 선포하셨던 모습과 같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수도자 출신인 자신에게 서울대교구장이라는 중책을 맡겨 주셨는데
그 이유는 서울대교구의 사제들을 잘 모르기 때문인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새로운 한 해를 선물로 주시듯이,
하느님께서는 자신에게 새로운 선물처럼 사제들을 보내 주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전임 교구장님의 업적을 전하였습니다.
2014년 124위 순교복자의 시성식이 광화문 광장에서 이루어진 것은
전임 교구장의 혜안이었다고 하였습니다.
200년 전 순교와 고통의 장소였던 광화문 광장은
순교자들의 시복을 통해서 하느님의 축복과 영광이 드러나는 장소로 변모하였습니다.
그 밖에도 북한 교회에 대한 관심과 지원, 생명 수호에 대한 열정,
서소문 순교 성지 조성,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의 교황청 인정대학 확정,
교구 홍보위원회 신설, 교구 행정의 전산화와 같은 업적을 전하였습니다.
정순택 대주교님은 14대 서울대교구 교구장으로서 앞으로 가야할 비전을 제시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영성’이었습니다.
영성이란 뿌리 깊은 나무와 같고, 영성이란 샘이 깊은 물과 같습니다.
교구의 영성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이겨내신 것은 깊은 영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순교자들이 목숨을 바치면서 신앙을 지켜온 것도 영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젊은이’였습니다.
젊은이들의 고뇌와 아픔을 경청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교회가 젊은이들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겠다고 하였습니다.
특히 젊은 사제들이 열정과 패기로 사목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젊은이들을 아끼고 사랑하시는 교구장님의 깊은 관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세 번째는 ‘시노드’였습니다.
보편교회에서 시작된 시노드가
서울대교구에서도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시노드는 단순히 회의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노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을 함께 가는 것입니다.
서울대교구의 사제들, 수도자들, 평신도들과 함께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며 주어진 길을 충실하게 가겠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비록 교구를 떠나서 멀리 뉴욕에 있지만
14대 서울대교구 교구장이신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님께서 가시는 길에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저 또한 서울대교구의 사제로서 교구장님께 순명을 서약하며
교구장님이 가지고 계신 비전에 함께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날 많은 분들이 정순택 베드로 주교님을 위해서 ‘축사’를 하였습니다.
오늘의 제1 독서를 통해서 저도 축하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분의 계명은 이렇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앞으로 서울대교구가 나가야 할 방향을 미리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의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 간질 병자들과 중풍 병자들을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14대 서울대교구 교구장이신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님과 교구민들이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간다면
서울대교구는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 큰 빛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 만나는 법: 별은 가장 어두운 곳에서 가장 밝게 빛난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갈릴래아 지역에서 첫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당시 성전이 있었던 예루살렘에서 멀어질수록
이방 민족에 가깝고 어둠과 오류 속에서 산다고 여겼습니다.
다시 말해 진리를 가졌건, 가지지 않았건
자신이 더 오류 속에 산다고 여기는 사람이 빛을 보는 것입니다.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예루살렘이 있는 유다 지방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른 지역 사람보다 더 선택받은 사람들이라 여겨 교만해져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빛이시기에 자신이 빛이라고 여기는 이들에게 다가가시지 않습니다.
어느 날, 원효대사가 외출했다가 분황사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갑자기 어떤 노스님이 길을 가로막더니 반갑게 아는 척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반갑구려, 원효대사. 대사께서 쓴 글을 읽어보았는데 깊이가 정말 대단하더군요!”
“보잘것없는 글인데 송구스럽습니다.”
“대사!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저랑 같이 식사라도 하시지요.”
나이가 많아 보이는 그 스님은 원효대사를 데리고 천민이 사는 동네로 향했습니다.
솔직히 원효대사는 그때까지 천민이 사는 동네에 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젊은 시절, 화랑이었을 때는 당연히 갈 이유가 없었고,
출가해 스님이 된 뒤로는 공부하느라 갈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노스님은 어느 주막집에 이르러 자리를 딱 잡고 앉더니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어이, 주모! 여기 귀한 손님 오셨으니 술상 하나 봐주게.”
그 순간 원효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수행하는 사람이 술상이라니!’
원효대사는 자리에 앉지도 않고 곧바로 뒤돌아 나와버렸습니다.
등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해버렸습니다.
이때 갑자기 그 스님이 이렇게 외쳤습니다.
“원효대사, 마땅히 구제해야 할 중생이 지금 여기 있거늘
어디 가서 별도의 중생을 구제한단 말이오!”
그 말을 듣는 순간 원효대사는 그 자리에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신은 빛이라고 생각하면서 빛은 더 밝은 빛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빛이 있을 곳은 어둠입니다. 그래야 참 빛이 됩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원효는 자신의 공부가 부족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 노스님은 이론에만 머물던 자신의 자가당착을 밝혀주는 작은 빛이었던 것입니다.
원효는 승려들을 가르치던 스승 역할을 그만두었습니다.
남을 가르치고 글을 쓰는 대신, 머리를 기르고 신분을 숨긴 채
어느 절에 들어가 부목(負木)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부목 생활이란 사찰에서 땔나무를 마련하는 일 등
온갖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입니다.
즉 젊은 승려들에게 무시당하며 땔나무를 구하고 아궁이에 불을 지폈던 것입니다.
그 절에 꼽추 스님이 있었는데 다들 그 스님을 ‘방울 스님’이라 불렀습니다.
걸식할 때 아무 말 없이 방울만 흔들었기 때문에 그런 별명이 붙은 것입니다.
방울 스님은 공양 때가 되면 다른 스님들처럼 제때 와서 밥을 먹지 않고
꼭 설거지가 다 끝난 뒤에 부엌을 찾아와 남은 누룽지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부목들은 그 스님을 귀찮아하고 무시하곤 했습니다.
하루는 원효 스님이 마루를 닦다가 학승(學僧)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보아하니 ‘대승기신론’을 공부하면서 논쟁을 펼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원효가 그 논쟁을 들어보니 학승들이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원효는 자신도 모르게 “그건 이런 뜻입니다”라고 말하며 일깨우려 했습니다.
그러자 난리가 났습니다.
“아니, 일개 부목 주제에 어디 스님들 공부하는 데 와서 이러니저러니 아는 체를 하는 게냐?”
그제야 원효는 고개 숙여 사과하고 다시 일자리로 돌아갔습니다.
공부 판이 깨진 스님들은 스승을 찾아가
‘대승기신론’이 너무 어려워 이해하기 힘들다며 하소연했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원효가 쓴 ‘대승기신론소’를 건네주며 공부해보라고 말했습니다.
학승들이 그 책을 읽어보니 깊이가 있음에도 이해하기 쉽게 설명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책에 나와 있는 똑같은 이야기를 한 원효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원효는 신분이 들통날 수 있다는 생각에 밤에 조용히 그 절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모든 스님이 잠든 시각 원효는 문을 살짝 열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습니다.
이때 문간방에 있던 방울 스님이 방문을 탁 열고는 이렇게 속삭이듯 말했습니다.
“원효, 잘 가시게.”
방울 스님의 이 한마디에 원효는 그 자리에서 확연히 깨달았습니다.
그는 천민들 가운데서 깨달음을 얻었고, 그들 가운데로 내려가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가장 핍박받는 스님만이 자신을 알아보는 것을 보았습니다.
빛은 어둠을 향해야 하고, 더 나아가 어둠만이 빛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을.
[출처: ‘인생을 바꾸는 유일한 방법’, 유튜브, ‘북올림’]
이태석 신부님이 가난한 톤즈라는 마을 한센인들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마더 데레사는 목마르다고 외치는 한 노숙인에게서,
그리고 김하종 신부는 한 냄새 나는 지하 방에 사는 사람을 끌어안을 때
“나다. 두려워 마라”라고 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저는 신학교에 들어오기 전 떠들며 술을 마시다 잠시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
그 고요함 가운데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문득 느껴
수도원에 있는 친구에게 “화장실에서 만난 하느님”이란 글을 편지로 보낸 적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빛이시다면 그분은 어둠 속에 계십니다.
별이 낮에 뜨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는 어둠이라고 여겨지던 갈릴래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어둠만이 빛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옳고, 내가 알고, 내가 잘살고 있다고 여기는 이들은
절대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습니다.
그 자체가 너무 밝기 때문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