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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동물보다 다른 것은 어떤 사물을 보고 연구하며 창조하는 영장물로 우리들보다 앞선 사람들이 연구한 것을 토대로 계속 끊임없이 추구하며 만들어가는 존재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인간의 역사와 함께 문명을 만들어 왔다. 이로 인해 인류의 문화가 달라졌으며 누리는 혜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끊임없이 더 나은 삶을 추구하며 과거보다 더 좋은 문명을 갈구 하고 있지만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누리는 것이 아니다. 다만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도전과 희망이 또 다른 목표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사람들이 행복해하며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목적이 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믿음으로 살아왔던 영웅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끝없는 목표를 추구하며 승리해왔던 것이 무엇일까? 단순히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것일까? 절대로 아니다. 예수와 함께 연합된 몸으로 하나가 된 것을 아는 순간 이미 천국의 삶이 시작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천국은 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존재가 오는 것이다.
부활절이 되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축하하는 내용만 강조되고 있고 예수님의 부활만 부각시키고 있다. 골로새서 3:1~3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에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니라.”라고 언급하고 있다.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내가 살리심을 받았다면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축하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내가 축하를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부활한 내가 없는 것이다. 물론 부활한 나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다는 말씀에 따른다면 세상과 나는 간 데 없고 구속한 주만 보여야 되는 것이 맞다.
이것이 창세기 5장에 등장하는 에녹(에노크)이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그를 데려가심으로 세상에 에녹이 없어졌다는 말씀이 바로 찬송가처럼 그리고 위에 언급된 말씀대로 에녹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다는 뜻이다. 따라서 위대한 하나님 안에 있는 에녹은 보이지 않고 하나님만이 드러내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다.
이를 위해 신앙의 영웅들은 끊임없는 추구를 해왔던 것이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만이 드러내고 나는 온데 간 데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사람은 그 어느 누구든지 살아가면 주변 사람들에게나 환경에 영향을 주게 되어 있으며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그 근처에 가게 되면 발산되게 되어 있다.
과연 내가 세상에 살아가면서 나의 영향력을 발휘하여 내 명성만 떨치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드러내는 것인지 분간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게 되어 있으며 사람을 통하지 않고는 자신의 의도와 계획을 전개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암 웨이에 아주 독보적인 영향력을 끼쳐 왔으며 미국 정계에서 소문이 나 있는 인물이 덱스터 예거 장로가 있다. 그는 중학교 중퇴 학력에 아무런 재능도 없고, 가난뱅이였으며 오히려 말더듬이라는 약점을 지녔던 사람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지금은 모든 사업가들의 선망의 대상이 될 정도로 크게 성공을 하였다. 그에게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한 나라의 선교를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커다란 꿈을 가진 그에게 하나님께서 그 꿈을 이루도록 놀라운 은혜와 복을 부어주신 것이다.
대의그룹에 채의숭 장로는 최근에 목사안수를 받은 것은 해외 오지 선교를 위해 교회를 세우려나갈 때 부득한 사정에 의해 세례를 주거나 목사의 신분으로 해야 될 일들이 갑자기 생길 때 당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 그 어려운 신학공부를 마친 뒤 안수를 받아 현재 87교회 올해까지 95교회, 내년에 100교회를 세우고자 계획하고 있다.
이렇게 자신의 생애에 백 교회를 세우는 것은 자신의 힘과 노력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었다면 즉 하나님 안에 자신의 생명을 감추지 않으면 그 일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앞으로 이를 기초하여 자신들의 자녀와 자손들이 만(10,000) 교회를 세웠으면 하는 거룩한 욕심을 가져본다고 한다.
덱스터 예거 장로나 채의숭 목사마저도 자신의 이름보다는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한다면 그들에게 부어주시는 재정과 명성이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우리들에게 친근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부어주신 물질의 복만이 아니라 그들의 명성마저도 주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만드는 동기부여가 되는 것이다.
그들만이 아니라 요셉도 증조할아버지 아브라함과 할아버지 이삭과 아버지 야곱의 신앙과 생명의 근원과 뿌리가 되는 주님을 드러내고자 하는 장면들이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여호수아와 갈렙, 사사들, 선지자들과 이스라엘 왕들, 주변 인물들, 신앙의 위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며 존재만 부각되도록 어떤 신앙생활을 했는가?
과거에는 필자에게 성경을 연구할 수 있는 개인적인 연구실이 필요했었다. 드디어 4월 19일 목요일 창골산 봉서방 성경공부 3주년 기념과 함께 연구원 개원식을 갖게 됐다. 그런데 본인의 개인 연구실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이용하는 연구원이라는 것을 이사정리를 하면서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연구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기 위해서 모이게 된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올바르게 배우고 익히며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하며 실천할 것인지 주어진 과제가 아담 이후로 계속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말씀의 본질에서 벗어나 변질되기 시작하여 이제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말씀 위에 전통과 문화, 철학과 사상 등이 아주 두껍게 덮여져 있다. 이것을 걷어내지 않고는 도저히 말씀의 본질과 원형을 찾아낼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중풍병자를 고치려고 네 사람들이 주님 앞에 데리고 왔지만 들어갈 수 없어 지붕을 뜯어내고 지붕 위에서 내려 주님께서 고쳐주시는 사건을 접하게 된다. (누가 5:17~ 25, 마 9:1~8, 막 2:1~12) 지붕에 올라가 기왓장을 벗기는 장면이 바로 인간들 머리에 지배하고 있는 고정적인 관념을 벗겨내는 것이다.
말씀으로 인해 생겨진 고정관념을 벗기지 않으면 주님 앞에 인도될 수 없다는 영원한 진리다. 사람들의 머리에 지배되고 있는 사상을 벗겨내지 않으면 주님 앞에 설 수 있을까? 중풍병자 자신 혼자는 주님 앞에 갈 수 없는 형편없는 환자로 같은 중풍 병에 시달렸다가 고침을 받은 네 사람이 그를 침대에 옮겨 주님 앞에 내려놓은 것이다.
과부나 홀아비 심정은 그런 처지를 당한 사람들이 너무나 잘 이해하며 도와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중풍병자를 데려준 사람들은 그런 병에 고침을 받은 사람이 아니면 그렇게 도와줄 수 없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주님 앞에 이런 고침을 받아야 하며 또 다른 중풍병자가 있으면 신속하게 주님 앞에 데려와야 할 것이다.
아무리 꿈과 비전이 있다고 할지라도 실천할 수 없다면 꿈이 깨지는 것이다. 본인이 갖고 있는 꿈과 비전을 목표로 잡았다면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결의와 다짐이 있어야 한다. 중풍병자처럼 생각만 있지 행동으로 옮기고 싶어도 몸이 말을 듣지 않는 상황이라면 환자나 다름없다.
성경에 나오는 부자와 세상의 부자와 무엇이 다를까? 부자라는 것은 돈이나 물질이 많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무슨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느냐? 에 따라 구분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상으로 생각이 가득 찬 사람은 성경에 언급하는 부자를 의미한다. 세상의 부자는 세상의 사상, 정보, 자신의 고정관념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세상의 부자다.
사람들은 죽어가지만 사람들이 남긴 생각이나 사상을 이어받은 가족이나 친척들, 친구들, 이웃들이 계속 이어져 가기 때문에 끝없는 추구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이 본인이 살아가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며 살아가고 있는지 자신을 되돌아보며 성찰의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매주 목요일에는 평신도 중심으로 성경공부도 이어지지만 배운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자리에서 어떻게 적용하며 실천할 것인지 연구할 계획이다. 또한 단순히 예수 믿게 하는 차원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허덕이며 어려움을 당하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자리를 창출하는 데 일조할 계획을 갖고 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은 무엇을 요구하고 있으며 사람들은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 살펴보면 서로 다른 차이점이 나타나게 된다. 대부분 사람들은 주어진 일을 하면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믿어 가는데 초점이 맞춰져야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것에 좇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일을 하면서 또 다른 행복이나 문화, 여건들을 만들어 가는데 주력하면서 자신들의 잣대로 법을 세워나가는 것이다. 이미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법은 성경 안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데도 그것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여기며 또 다른 해법을 찾아나서는 것이다.
끝없는 추구를 하는 사람은 법을 바꾸어가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법에 따라 끝까지 지키며 견디어나가는 차원을 의미하고 있다. 히 3:6 “소망의 담대함(확신, 개정)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라고 기록된 것처럼 우리 안에 이루어져야 할 것을 끝까지 채워나가야 한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히 3:14)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4)라는 말씀이 여러 곳에 언급하고 있듯이 끝까지 목표를 갖고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구원을 얻게 된다는 말씀이다.
단순히 예수 믿고 천당 가는 신앙으로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이미 천국은 갈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면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까지 이 땅에서 무엇을 하고 살아갈 것인지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난제라고 생각한다. 섹스피어가 햄릿이란 연극 중에 To be or not to be, That’s the question?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문장이 있었다.
과거 삼위일체 영어 책에 나왔던 첫 문장이었는데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 여길 내용으로 고민한 햄릿이 아닐 것이다.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을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 여겨야 한다.” 이 땅에 살아가면서 어떤 존재로 살아갈 것인지 그것이 문제를 삼고 끝없는 추구를 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의 반열에 들어서는 것이다.
매주 오후 7시 목요일마다 평신도 중심으로 성경공부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배우고 익혀서 삶의 자리에서 바르게 적용하고 실천하는 성경공부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대상 :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배우고자 하시는 분 삶의 현장에서 말씀을 바르게 적용하며 실천하기를 원하시는 분 일자리를 창출하며 함께 생활할 수 있는 분
장소 : 인천시 부평구 부평동 663번지 115호 가톨릭대학 성모병원 삼거리에서 미래약국과 꽃집이 있는 도로로 계속 올라오시면 윤성 아트 빌에서 두 번째 집으로 이층계단 집 (바이블 앤 빅터스 아카데미 간판이 있음) 근처에 공터가 많아 주차할 장소가 많이 있음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창골산 칼럼 제1806호 / 끝없는 추구를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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