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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이 가짜다!!!
아니~ 아니~ 실존인물이다...의 논란이...
7~8십년대에 한창였었을 때...
제가 주워 들은 얘기론...
원래 구한말의 마적단출신 1대 김일성장군이 있었고...
그의 사후...2대 김일성 장군이 1대 김일성장군의 호를 그대로 물려받아 2대 김일성이 되고...
독립군이 해체되어 소련 공산당 산하에 편입된 이후...
김일성부대에서 청년장교로 복무했던 북한주석 김성주에게 그 3대김일성 휘호를 물려줬단 얘기도 있었져...
현재의 남북 사학계는...
잘라빠진 이데올로기에 가려...
뻔한 일반상식의 진실들 마져...남쪽에선 모두 가짜고 사기다...그저 마적단일 뿐이었다...
북쪽에선...모두다 사실이며...모든 전설이 수령님이신 김성주의 전과다...
일반인들은...
뭔 대단한 비기나 찾은냥...
잘~들으셔요....ㅡ. .ㅡ...진짜...진짜... 김일성은 김광서 장군입니다...김.광.서...!!!
김성주가 이 김광서장군 가면을 뒤집어 쓴 겁니다....흠...ㅡ. .ㅡ
이러고들 있으신가 본데...
차라리 제가 어렸을 적 줒어 들은 소문이 더 진실에 근접해 보입니다.
김일성이라면 넌덜일 낸다는 조센일보 방상훈이 조차도 인정한 1대,2대의 김일성이 있었고...
당시 만주방면에선...진짜 1대 김일성장군 사후...또다른 김일성 휘호를 쓰는 인물들도 꾀 있었단 겁니다.
3대 김일성 격인 북한주석 김성주여...
제 보기엔 2대 김일성인 김광서 장군이 직접 임명한 김일성은 아닐겁니다.
그러나 ,보천보전투까지 거짓은 아닐거 같습니다.
그 휘하의 만주 독립군들 사이에서 활동하던 소조직 청년단으로...보천보에서 5명이 지키는 왜놈들 초소를 부수고
무기고를 턴게...최대 천명을 거느리던 2대 김일성(김광서)장군의 업적으로 선전되기 낯간지러울 전과이고 보면...
보천보 파출소 습격은 김성주(북한주석)의 거의 유일한 전과인데...선전은 않 할 순 없고...
그러기에..1대 2대 김일성 장군들의 수많은 큰 전과들은 다 제끼고...보천보 보천보 할 수 밖에 없는게 현 북쪽 사가들의 딜레마일까 합니다.
당대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들 대다수는...김일성이란 휘호를 쓴 1대 2대 김일성 장군에대한 전설적 신화들이 있기에...
이를 소련 공산당들이 이용해 자신들이 한반도에 내 밀려는 조선인들 대표로...
해체된 김일성 부대 휘하의 잔류병력 중 유망해 뵈는 김성주를 3대 김일성으로 내세운 것이...
북조선에선...
권력의 구조상 1대 2대 김일성 장군들의 업적마져도 무조건 다 3대 김일성격인 김성주에게 진상해 드리는 식의 역사가 진행된 것이고...
남조선에선...
무조건 공산계열과 북한 김성주를 까기 위해...
북방에서 가장 대표적이던 무장독립군 1,2대 김일성 장군님들의 위대하고 처절했던 업적 마져도...
그저 양민들 상대로 마적질이나 자행하던 단체로 폄하하는 역사적 죄악을 처질러대는 항간의 모습이 안타깝다 하겠습니다.
친일,극우, 수구 꼴통지란 수식어가 붙는 조선일보의 보도를 보더라도...
그 진실에 90% 이미 다가갔었더구만...
뭐이 그리 찾기가 어렵단 건지 전 이해가 않 가는군여...^. .^
또한 유추해 보건데...
당대의 만주는 현재의 내,외몽골인것이...
북만주 부대들의 대표적 별칭이 이루츠쿠츠(?)파라나 그런다는데...몽골북부 바이칼이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주 활동지였단 연해주파니 블라디보스톡파라 해야 하는데...
중원 남부에서 온 자들은 상해파...함경도 일대의 파벌은 이루츠쿠츠파 라 한건...
그들의 본국강역이 거기였단 얘기같고...
동남중국이나 한반도의 조선 독립군들이 섬원숭이들을 피해 자기땅인 함경도와 소비에트 국경일대로 가서
국경을 넘나들며 섬 원숭이들을 피하며 투쟁한 것이지...
남에나라 땅가서 남의다릴 긁을일은 없었다 예상합니다.
만일,현 만주가 그 만주라면...
친일군벌인 장작림 영역인데...초기라면 몰라도... 지구적인 대규모 활약은 거의 어려웠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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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짜에 가려 빛을 잃은 진짜 김일성 김광서 장군 *
이명영 성균관대 명예교수.정치학
주석궁비사.1994.9.20 발행.조선일보사 출판국.방상훈.P.87-96
일제가 우리 국권을 강탈할 무렵부터 김일성 장군이란 용맹한 항일 무장이 백전백승으로 일제 군경을 격파한다는 소문이 파다했었다.축지법을 쓴다느니,혹은 백마를 타고 동에 번쩍 서에 뻔쩍 날아다닌다느니,혹은 백두산에 진을 치고 있다느니 하는 식의 이야기들이 전설로 내려왔다.적어도 90이 넘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 전설을 외고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나는 전설의 주인공 김일성 장군의 정체를 규명하기 위한 연구를 1960년대에 해 두었던 것을 참으로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그때는 그래도 생생한 증언을 제공해 주는 고노들이 많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증언을 토대로 관계 자료들을 탐색 발굴하는 작업은 마치 밀림 속에서 대로를 찿아 나서는 작업과도 같이 가슴 두근거리는 긴장의 연속이었다.전설의 내용을 뒷받침해 주는 자료와 만났을 때의 성취감은 연구자만이 맛볼 수 있는 희열이었다.
김일성이란 투사의 전설이 처음으로 등장한 곳은 함경남도 단천이란 곳이다.항일의병전쟁시기(1907-1910)에 단천에서 궐기한 김일성이란 젊은 의병장에서부터 전설은 발단한다.
헤이그밀사 사건으로 고종 황제를 퇴위시킨 일제는 내친 걸음에 한국 군대를 모두 해산시켜 버렸다.1907년8월의 일이다.수원 청주 대구 광주 원주 해주 평양 북청 등지에 있는 지방진위대 8개 대대가 모두 해산되었는데 북청진위대가 제일 늦게 9월에 해산되었다.
군대 해산과 함께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궐기했는데 북청 갑산 삼수 단천 등지의 의병장으로서 유명했던 사람은 홍범도 차도선 송상봉 김호 김일성 등이었다.
의병이란 10여명에서부터 30여명,혹은 70-80명,때론 5백-6백 명으로 구성되는 부대도 있었다.의병장은 직업군인 출신으로부터 유생,상인,농민,포수,관리 출신 등 가지각색이었다.무기도 장총 엽총 도끼 낫 등이었으므로 최신 무기로 무장한 일제의 정규군대와는 도저히 맞상대가 될 수 있는 행색이 아니었다.
그래도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벌였던 것이었다.이 의병투쟁은 실질적으로는 하나의 전쟁이었으며,비록 선전포고도 없이 이름도 붙여지진 않았으나 숨겨진 한일전쟁 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항일 투사들의 무용담,구전으로 떠돌아
전쟁에서 패한 1910년에 이르러 우리 민족은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기고 만 것이다.
패배한 전쟁이기는 했어도 이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 숱한 의병과 의병장들의 무용담과 일화와 비화가 생겨 났었다.이 이야기들은 10년이 지난 3.1운동 후의 간도와 연해주에서의 독립군들의 무용담과 어우러져 일제 치하의 암흑기를 통해 내내 우리 국민들에게 승리에 대한 불굴의 신념과 용기의 원천이 되었다.
김일성 장군 전설도 이 의병전쟁 때 단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김일성이란 의병장에 관한 무용담이 1920년대에 연해주에서 독립군 대장으로 활약했던 김일성이란 항일투사의 무용담과 겹쳐지고,구전으로 전파되는 사이에 신비스런 이야기까지 붙여져 후세로 전달되어 왔던 것이다.
김일성의 본명은 김창희다.단천군 수하면 황곡리에서 1888년에 나서 1907년,그의 나이 20세 때 고향에서 의병장으로 나섰다.그의 부친 김두천은 함경북도 온성에서 군수로 있었다.
김일성은 처음엔 단천 뒷산인 오봉산에 근거지를 두었다가 더 험준한 검덕산으로 옮겼다.그 능선을 타고 올라가면 백두산이다.
의병전쟁의 열기가 가실 무렵 김일성 부대는 백두산 쪽으로 깊숙히 올라가 밀영을 구축하고 지구전으로 들어갔다.
3.1운동 후 한만 국경에서 각종의 독립군 활동이 벌어졌을 때에 김일성 부대의 활동 소식이 제일 자자했다.그 무렵부터 그는 김일성 장군으로 불리었다.독립군 대장 홍범도 김좌진 김호 등이 모두 장군으로 불리울 때다.
김일성 장군이 백두산으로 오르는 장군봉의 굴 속에 산채를 틀고 있다는 소문이었다.그 김일성 장군이 1922년의 추석 전날에 공작차 단천에 내려와 붙잡혔다가 경찰서 유치장을 탈출했던 사건은 그에 관한 전설을 더욱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로 만들기도 했다.
백두산 일대에서 신출 귀몰하며 일제 군경을 괴롭히고 있다던 김일성 장군의 소문은 독립군 활동이 퇴조해지자 차츰 뜸해졌다가 1926년에 이르러서는 세상을 떴다는 소문이었다.전설의 주인공답게 별세의 정확한 상황을 알려주지 못하는 죽음이었다.
3.1운동 후 독립군 투쟁이 개시되자 의병장 김일성 장군과 같은 발음의 김일성 장군이란 용맹한 항일 무장의 소문이 국경 밖으로부터 자주 국내로 전해져 왔다.한만 국경에서 싸운다느니 혹은 시베리아 벌판을 종횡무진으로 날아다닌다느니 하는 소식이었는데,이 사람에 관한 소문 중 가장 중요한 점은 그가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서 백마를 타고 번개같이 날아다니며 영락없이 왜군을 족친다는 것이었다.
일본 육사 출신의 김광서 장군
이 소문의 주인공, 김일성 장군의 본명은 김광서였다.그는 김일성이란 별명 외에도 김경천 윤경천 등 다른 별명도 썼다.
구한말 포병 부령(지금의 중령)으로서 군병창장의 요직에 있었던 김연우가 그의 부친이다.김정우는 1857년 함경남도 단천군 해안사 승평리(후일의 신창읍 승평리)에서 태어났다.동향인 이준보다는 두 살 위이다.
갑오경장(1894년) 때 37세의 나이로 서울에서 비로서 하위관직에 올랐던 그는 이듬해 20세나 연하인 젊은이들 틈에 끼어 일본 유학생으로 파견되었다.윤치성 노백린 김형섭 등 21명의 일본 육군사관학교 유학생들이 동행이었다.
김정우는 이들과 함께 경응의숙 보통과를 마치고 동경공업고등학교 기계학과로 진학했고 윤치영 등은 모두 육군사관학교로 진학하여 1899년11월에 일본 육사를 제11기로 졸업했다.김정우도 포병공작창에서 총탄 제조법을 배우고 1900년 10월에 귀국했다.귀국해서는 군 포병에 투신하여 1906년 10월엔 기병과의 윤치성과 같은 날짜에 부령으로 승진했다.김정우는 아들 김광서를 일본 육사로 유학 보냈다.1888년생인 김광서가 일본 육사를 졸업한 것이 1911년이다.제23기 기병과 졸업인데,그때는 이미 나라가 망했으므로 동경기병 제1연대에 배속되어 일본군 장교로서 생활을 시작했다.
1915년에 기병 중위가 되고 1917년에는 9개월 동안 육군기병학교에서 완벽한 기병 기술 과정을 마쳤다.당시 일본 육사 출신 한인 장교로는 제23기의 김광서를 비롯하여 제26기(1914년 졸업)의 지대형 홍사익 이응준 김준원 등 13명과 그 다음에 제27기 김석용 김인욱 등 20명,도합 34명이 있었다.
1916년에 이들을 묶어서 전의회란 조직을 만들어 김광서가 회장을 맡았고,일 년에 몇 차례씩 회보도 냈다.또 1917년엔 사막천이란 앨범도 만들었다.이들은 모두 이심전심으로 장차 민족의 동량이 될 것을 기약했다.
전의회 회보는 고 홍사익씨의 아들 홍국선씨가 잘 보관하고 있었고(10년전까지만 하더라도) 사막천 앨범은 고 김준원씨의 아들 김정렬씨(전 국무총리)댁에 유품으로 남아 있다.
3.1운동 후 해외 무장투쟁 결심
김광서의 호적등본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호적계의 재적부 서고에 종로구 사직동 166번지를 본적으로 한 것이 남아 있다.1912년12월 그의 출원에 의해 만들어진 본적이다.
그는 1916년10월10일엔 본관 김해를 시흥으로 정정했다.김씨 성이든 타성이든 시흥을 본으로 하는 성은 없다.그러니까 그는 완전히 새로운 본을 하나 창작해 낸 것이다. 그의 집안이 경기도 시흥이란 곳과 아무런 연고도 없다는 것까지 감안한다면 그야말로 (비로소 일으킨다)는 결심하나만으로 시흥이란 본을 만들었던 사람이다.
본을 정정한 날짜 1916년10월10일은 5년 전인 1911년에 만주족의 청나라를 타도하기위한 중국 혁명이 일어났던 날이므로 뜻있는 택일인 것 같다.
김광서는 동경의 기병연대 장교로 있으면서 1919년2월8일 동경 유학생들의 독립 선언 소식을 들었다.그는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군에 병가게를 내고 서울 집으로 돌아왔다.3.1봉기를 사직동 집에서 맞이한 것이다.
해외로 탈출하여 무장 투쟁을 조직코자 마음먹었던 그해 6월에 일본 육사 3년 후배인 지대형(이청천 장군)과 함께 만주를 향해 서울을 더났다.떠날때 그는 오직 한 분,작별 인사차 찿아간 사람이 있엇는데,일본 육사 기병과 12년 선배이며 동시에 부친과 친교가 있었던 윤치성이다.윤치성의 동생 윤치영옹이 그 자리를 지켜봤다.
김광서와 지대형은 남만의 유가현 고산자에 있는 독립군 양성소,신흥무관학교로 찿아갔다.이 학교는 1911년4월에 신흥강습소로시작한 망국 후 최초의 독립군 양성소였는데,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 네 형제분들이 가산을 경주하여 세웠다.
1913년 봄 신흥학교로 개명됐다가 1919년 4월에 신흥무관학교로 다시 개명됐는데 1920년 8월 폐교될 때가지 약 3천명의 독립 투사를 배출했던 곳이다.
일본 육사에서 정구 교육을 받은 두 사람의 일본군 출신이 용약 항일전선으로 뛰어들었다는 소식은 만주의 한인사회를 무한한 고무로 들끓게 했다.그해 여름,앞을 다투어 신흥무관학교로 몰려드는 열혈 청년들이 6백여명을 넘었다.
이때 이 학교에는 구 한국군 정위(지금의 대위) 출신의 신팔균이 교관으로 있었다.장교 출신 교관이 셋으로 늘어났다.
세 사람은 합심단결하여 무장투쟁으로 나라를 찿자고 하늘에 맹약하고 다같이 천자 돌림의 별호를 쓰기로 하여 신동천 김경천(또는 윤경천,어머니의 성이 윤씨였다) 지청천(도는 이청천,어머니의 성이 이씨였다)으로 별호를 지었다.
한인사회에서는 이들에 대해 큰 기대를 품고 남만삼천이라 부르며 이들을 지지 성원했다.여기에 그해 중국 본토에서 운남군관학교를 나온 이범석(초대 국무총리)도 와서 끼게 되었다.
그가 당도햇을 때는 학교가 유가현 고산자로부터 1백60리 가량 떨어진 통화현 합미하로 옮긴 바로 뒤였다.
이 무렵 학교에는 경사가 겹쳤다.국내로부터 장길산이란 사람이 배천척이란 사람을 시켜 거금 5만원이란 돈을 군자금으로 보내 온 것이다.이 돈은 군관들의 공동 관리하에 놓였다.
군관들은 이 군자금으로 커다란 계획을 세웠다.1920년3월1일을 기해 평북의 자성 후창 또는 함남의 혜산진 등 어딘가를 점령해서 국내에 3.1운동을 다시 일으킬 일대 선도 작전을 하자는 것이었다.
무장투쟁으로 연해주 일대 누벼
이에 따라 신동천은 남만의 한인사회로부터 지원 확보를 위해 떠났고,김경천은 러시아 땅 연해주로 무기 입수를 위해 떠났으며,이청천은 상해 임시정부와의 연락을 위해,최동오와 박남파는 동북정권의 수령 장작림과의 협력 모색을 위해 떠났으며 가장 연소한 이범석은 결사대 조직을 맡았다.그 해 초겨울의 일이다.
러시아 땅 연해주에 당도한 김경천은 그곳 교포 사회가 볼세비키 혁명의 파급을 막기 위해 출병한 일본 군대에 의해 무참하게 탄압 학살당하고 있는 현실에 직면했다.그는 독립군으로 일군과의 전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블라디보스토크에 은거중이던 원 평양진위대 하사 김찬오,원 북청진위대 하사 최원길,그리고 이준 열사의 아들인 이용(중국 무관학교 출신) 등 12명의 군 경력자들에게 각자 2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1920년2월4일까지 집합하라는 통첩을 보내는 것으로써 그의 무장 활동은 시작되었다.
당시 그곳의 한인들은 (적의 적은 동지)라는 이치에 따라 일본의 적인 적군(볼세비키 혁명군)과 연합하여 일군 및 일군이 지원하는 백군(반혁명군)과 싸워 그들을 쫓아내고 적군의 후원으로 국내로 진격하자는 것이 꿈이었다.
이 기록은 일제의 비밀 정보문서 속에서 으뜸을 차지한다.1920년대 전반기에 그는 연해주 일대를 누빈 무장 투쟁의 거장이었는데,약 6백 명에서 1천명의 병력을 거느렸다.
일제하에서 그 어떤 항일무장단에서도 이렇듯 많은 병력을 거느린 무장은 없었다.한 보고서는 그의 세력은 문창범 이동휘의 세력을 능가하고 있으며,서.북간도 지방으로부터 많은 청년들을 모병하여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김경천은 이때에 김일성이란 또 하나의 별호를 썼다.
당시 일제의 정보문서나 국내 신문에는 일본 육사 출신의 김광서 또는 김경천으로 나오지만 민중의 입과 귀를 통한 소문의 세계에서는 (일본 육사 출신의 김일성 장군)으로 통했다.그의 일본 육사 3년 후배인 김준원이 일군 중위로서 시베리아에 파병된 제11사단 제43연대 장교였는데,그가 현지에서 김일성 장군으로 맹활약 중인 사람이 선배인 김광서임을 확인했었다.
또 김광서가 작별 인사를 나누었던 육사 선배 윤치성의 주위에서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당시 시베리아와 서울은 지리상의 원격,교통 상의 험난에도 불구하고 꼭 필요한 연락 루트는 확보되어 있었다.
김광서가 서울에 있는 부인에게 일본 육사의 병서들을 보내라고 해서 정확히 전달되었던 사실,또 가족들(부인과 세 딸)에게 서울을 탈출하여 시베리아로 오도록 했던 사실(1925년6월) 등에서 저간의 사정을 잘 알 수 있다.
시베리아의 별
시베리아에서의 김일성 장군은 백마를 타고 전투를 지휘했다.1922년1월2일의 이만에 대한 총 공격전에서는 적군 사령관이 백군에게 항복했음으로 그가 적군까지 총지휘하여 6시간의 공방전 끝에 이만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이 싸움 이래 백군들은 꺼리에츠(고려 사람)라 하면 무서워서 싸움을 피했으며,적군 속에 포함된 1차대전 때의 구라파 각국 포로 출신들도 우리 독립군의 용맹함에 모두 경탄했다.
이러저러한 소식들이 국내로 전파되자 동아일보는 기자를 특파하여 그와의 대담을 시도했다.그래서 나온 것이 1923년7월29일자의 (빙설 쌓인 서백이아에서 홍백전쟁한 실지경험담-아령 조선군인 김경천)이란 장문의 기사이다.
한 면을 메운 이 기사는 해외의 독립운동 투사와의 인터뷰 기사로서는 일제하 35년을 두고 유일한 케이스이다.그의 국내 탈출 동기로부터 시작하여 적군과 연합하여 일군 및 백군과 전투하던 일,각 지방의 마적들을 소탕하여 동포 사회를 보호했던 일,사랑하던 부하의 전사로 단장의 슬픔을 달랬던일,눈 깊은 산 속에서 의식을 결하던 일 등등 그의 투쟁기는 눔물 없이 읽을 수가 없다.
(...미국이 독립전쟁을 할 때에 겨울에 맨발을 벗고 얼음 위를 지나가니 얼음에 발이 베어져 발자국마다 피가 흘렀다더니 우리 군사도 이때 발자국마다 피가 괴었소.그러나 사람없는 산천에 보이는 것은 망망한 백설과 하늘 뿐인데 깎아지른 듯한 산을 지날 때에 우리는 불란서의 명장 나폴레옹의 알프스산 넘던 행군을 연상하였소.달 밝은 밤에 눈 위로 행군하는 우리 모양은 완연한 한 예술이요,그림이었소...) 필설로 다 형용할 수 없는 극악의 고난 속에서도 미국의 독립전쟁을 연상하고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을 상기하는 여유로운 정서,그 고난을 예술적 정경으로 술회할 줄 아는 유연한 심정.
용맹한 무장일수록 섬세한 문인적 기질을 갖는다더니 그도 예외는 아닌듯,어떻게든지 시기를 기다려 독립전쟁을 일으키려고 했다는 그의 회견기를 (시베리아의 별)이란 시로 맺고 있다.
뜬 구름도 방황하는 시베리아 별
칼을 짚고 홀로 서서
흰 뫼 저편을 바라보니
사랑하던 ...... 화는 희미하고
.....에 목마른 사람이
이천만 아처롭도
뜻이 열 곳이 없으므로
흑룡수에 눈물 뿌려
다시 맹세하노라
김경천 작
힌 말을 타고 날아다녔다는 김일성 장군,전설의 주인공 김광서는 실제로 기마술에 뛰어난 기병장교 출신이었으며 실제로 그는 힌 말을 타고 전투를 지휘했다.
레닌이 한인 무장부대 해체시켜
당시 시베리아엔 여러 개의 한인 무장부대가 있어서 제각기 적군과 연합하여 싸웠으나 김일성 장군의 활약이 가장 컸다.그러나 이 모든 투쟁은 1922년 가을에 허망한 종말을 맞았다.시베리아에 출병했던 일본 군대가 그 가을에 철수하자 전 시베리아를 틀어 쥔 레닌 정부는 한인들의 대일 투쟁을 금지시켜 버린 것이다.이유는 일본의 재차 개입 구실을 막기 위한다는 것이었다.
한인 무장부대는 정식으로 적군에 편입하든지,아니면 무장해제를 하든지 아니면 영외로 퇴거해야 했다.뿐만 아니라 레닌 정부는 한인들의 공산당마저도 해체시켰다.
당시에 러시아에는 이동휘가 이끄는 고려공산당(이른바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2세 한인들 중심의 전러고려공산당(이른바 이르츠크파 고려공산당)의 두 개가 있었는데 레닌 정부는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의 이름으로 1922년12월에 이 두개의 한인 공산당을 해체시키고 만 것이다.구실은 한인들끼리의 파쟁 때문이라 했으나,실은 일제 타도를 내건 한인 공산당의 존재가 일제의 비위를 건드릴 것을 두려워해서였던 것이다.
그러나 세계혁명을 주창하며 약소민족의 해방을 고창하던 레닌 정부와 코민테른이었으니 체면차림은 아니할 수 없으므로 한인 공산당을 해체시킨 대신 코민테른 민족부의 극동총국에 꼬르뷰로란 것을 설치하여 불라디보스토크에 위치케 하고,한인 공산주의자들을 여기에 속하게 했다.
그리고 꼬르뷰로의 간부 구성에서 민족주의적 경향의 사람들을 탈락시켰다.이 조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 노선을 배제하고 공산주의 혁명에 몰두하는 자만을 포섭 지원하겠다는 의도의 표시였다.
이때에 김일성 장군이 택한 진로는 1천여 대원을 이끌고 로만국경으로 이동,둔전제를 실시하는 일이었다.그는 적군에의 편입을 거부했으니 무장해제를 당하든 영외로 내쫓기든지 해여 할 처지였다.이 상황에서 병력을 계속 확보하여 독립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부대를 만주 접경으로 옮기고 농사를 지으며 군사 훈련을 계속하는 둔전제를 실시하여 지구전 태세로 들어간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서.북간도로부터 장정들을 모집했고 지휘관 양성을 위해 무관학교 설립을 서둘렀다.이때 서울에 연락하여 일본 육사의 병서와 교과서들을 가져다 손수 우리말로 번역하기도 했다.
* 미국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라 *
레닌 정부의 대 한인 정책은 1924년 2월에 꼬르뷰로가 해체되고 오르그뷰로(조직국)가 설치되는 것을 고비로 공산주의자 아닌 한인들에 대한 홀대가 더욱 심해졌다.
특히 1925년에 들어서자 러시아의 한인들에게는 소련 공산주의 건설에의 헌신만이 허용되고 조국 독립을 위한 운동이나 투쟁은 할 수 없게 되었다.그해 1월 소련과 일본 사이에는 수교조약이 체결되었다.두 나라는 자국 네에서의 상대국 치안에 대한 유해 행동의 금지를 조약 속에 규정했던 것이다.
소련을 믿고 그 지원으로 독립을 쟁취하려던 한인들의 좌절과 실망은 컸다.수교조약과 함께 소련은 오르그뷰로마져 해체해 버렸다.
이 무렵에 (미국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라)라는 속담이 생겨난 것이다.미국의 민족자결주의를 믿고 3.1운동을 일으켰으나 허사였고,소련의 약소민족 해방 구호를 믿고 적군과 동맹군이 되어 혈전했는데도 결국은 토사구팽이니 (미국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라)는 속담이 생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소련의 배신 앞에 한인들은 가슴을 쳤다.그러나 별 도리 없이 대부분의 한인들은 소련의 방침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가장 어려운 역경에 처해서도 김일성 장군의 노선은 (독립운동 노선의 고수)였다.
1925년 여름 서울에 전해지기로는 그가 공산주의 노선으로 가는 한인들과 단연 손을 끊고 독자적인 길을 모색하여 대운동을 일으킬 것이라는 소식이있다.이것이 일제하에서의 그에 관한 마지막 소식이다.
1980년대에 와서 소련 교포들이 전해주는 바에 의하면 김일성 장군은 스탈린 치하에서 감옥생활을 했다는 것이다.일당독재의 나라에서 당의 방침을 따르지 않았다면 그럴 법한 일이다.
그는 2차대전의 가열한 고비였던 1945년 봄에 동독전선에서 소군사단 지휘관으로서 훌륭하게 싸웠으나 전사하고 말았다고도 한다.
아마도 옥중에서 지원 입대하여 죄수부대를 지휘햇을 것이다.
그의 딸들이 수년 전까지만 해도 알마아타에 살았다고 한다.러시아가 좀더 개방되어 군관계 문서들이 공개될 때까지 진상규명은 한참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전설의 도용
전설의 김일성 장군은 전설의 주인공답게 아직도 미해명의 부분을 많이 남기고 있다.그 틈새를 타고 (전설의 김일성 장군은 바로 나)라고 나선 자가 있다.죽은 북한 주석 김일성이다.
1974년4월21일자 노동신문은 (김일성 장군님께서는 축지법을 쓰시며 일제를 무찌르신 전설적 영웅이시다)란 기사로 북한 김일성을 전설의 김일성 장군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때는 바로 필자가 중앙일보에다 (진위김일성열전-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를 연재하면서 진실의 김일성 장군의 실존을 밝히고 있을 때였다.이후 북한은 김일성 장군에 관한 전설은 모두 북한 김일성에 연유한 것이지 그 밖에 김일성 장군이란 사람은 없었다는 주장이다.
북한은 이 주장을 그럴 듯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 갖은 기교를 부려왔다.단천 출신 김일성 장군이 백두산 장군봉에 근거지를 두었던 소문을 자기 것으로 바꿔 놓기 위해서는 자기의 항일 근거지가 장군봉이며,아들 정일이가 그곳에서 태어났다는 거짓말을 만들어 냈다.
또 김일성 장군(김광서)이 힌 말을 타고 전투 지휘를 했다는 사실을 자기것으로 바꿔 놓기 위해서는 자기가 힌 말을 타고 유격대를 지휘했다는 그림을 만들어 선전 책자와 혁명 박물관에다 전시해 놓고 있다.백 번 그래 봤자 전설의 김일성 장군과 북한 김일성은 동명이인일 뿐이다.
동명이인은 따로 두 사람 더 있었다.월간조선 1994년 8월호에서도 밝혔듯이 1930년대 후반기에 만주의 중공당 유격대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에서 제6사장으로 있었던 김일성,그 사후에 제2방면군장으로 있었던 김일성이 그들이다.
이들 중 누구도 장군이라 불리운 일은 없고 백마를 타고 다닌 일도 없으며 둘 다 그 시절에 전사했다.그 두 사람 아래서 부하로 있던 것을 기화로 그들의 경력과 심지어 전설마저 도용해서 자기 경력화한 북한 김일성도 죽었다.
그는 김정일 정권이 무너지는 날 역사 위조의 죄과 때문에 두벌주검을 당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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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직도 러시아의 주요 세력은 모스크바와 세인트페테스부르크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것 같은데, 향후 별의 낙하 지점에 맞추어 동쪽으로 좀 이동을 해도 괜찮을 듯 싶습니다. 이르츠쿠츠, 하바로프스크, 그리고 블라디보스톡 등이 될 것 같습니다만... 상대적으로 해당라인은 알래스카와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구요... 알래스카가 많이 녹았다는 이야기를 수년 전 부터 보고 듣고 있습니다만... 아마 일성(one star)의 전설도 퉁구스카에 떨어진 별의 전설과 일맥상통하는 concept으로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만...
그네들이 일성을 어버이로부르는 것은 배고픈 아이들을 많이 거두어 많이 양육을 시켰다라는 것에서 시작됬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일종의 양아버지인 셈이죠... 그래서 정일보다는 일성으로 아직도 one star의 파워와 영향력이 상당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북이라는 것 자체의 정체성이 아마도 해방후의 고아원의 이미지와 유사한 부분이 많습니다. 일종의 전쟁고아와 노동자 계층들이 아니었는지?... 그리고, 일본어가 잘 안되어 친일을 할 수도 없었던 그러한 집단이 아니었는지?
일제시대에 공산당이 발전한 계기가 주체적으로 자신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기반으로 스스로 일본을 배격하여 그렇게 된 케이스가 있고, 일본화되어 엘리트로 성장하고 싶었지만, 문화적 차이와 언어의 장벽으로 그것이 안되었던 집단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로므로, 일본에서는 상대적으로 낙오자 또는 조센진으로 폄하하는 계기가 됬고, 1940년대 이후에는 그로인해 탄압의 대상이 되었죠. 즉, 수십년간 일본화의 기회가 주어졌지만, 무능하여 따라오지 못하였다라고 판단을 내렸었던 것 같습니다. 자연스럽게 일본인하면 엘리트가 되는 것이고, 조센진하면 무능력자를 이야기하는 것이니까, 조선인들에서도 서로 배격하는 아이러니가 생기죠.
그때를 맞춰 아마도 '일성'이 나타난 것이 아닌지? 일종의 '메시아'의 개념이죠... 그들로서는...
이렇게 보면, Korean-Japanese와 North Korean은 처음에는 같은 길을 함께 가기 시작했던 것 같으나, 시간이 가면서 격차가 벌어졌고, 그 자손들이 또 다른 문화권으로 들어가 버리니, 사이가 벌어졌다고 생각되는 군요. 아직도, 일본에는 조총련이라는 조직 있고, North Korea하고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구요... 이렇게 보면, 사실, South Korea보다도 North Korea가 Korean-Japanese와 초기 거의 동일한 철학을 가지고 있었지 않는가? 이렇게 접근도 해 봅니다.
그래도 과거에는 악덕 지주들이 많아서 그렇지 조선말은 쓸 수는 있었는데, 일제시대에는 처지가 낳아 진것도 아니고, 우리 말도 못쓰게 하니, 더욱 곤욕이 되죠... 그러므로, 이렇게 접근해 보면, 완벽히 소외받은 그룹이 되죠... 아마도..
그러니, 그들은 독립운동을 열심히 할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독립이 안되 나라가 없어지면, 존재할 수가 없는데... 그러니, 독립운동계열은 2개로 나뉘어 지는 것이죠. 처음부터 그길이 내가 갈 길이 아니라고 보았던 Leader집단과, 어쩔 수 없이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선 집단이되죠... 전자를 최상으로보면, 후자는 최하가되는데, 일종의 왕과 도적의 만남이라?... 이렇게 해석하면 될런지요? 최고로 고귀함과, 최고로 저급함은 고로, 함께 가는 구석이 꽤 많이 있는 셈이죠...
위키를 보면, 바로 상해 독립운동계파(임시정부파)에서 다시 조선공산당이 나뉘어 갈라지게 됩니다... 그것을 또 쫒아가서 죽이라고 한 사람도 있었고, 하이튼 복잡합니다....
원래 가짜들이 조작을 잘 합니다 들통 나면 밥줄 끊어지니 고정간첩의 주장에 속는 시민이 문제조 ,,,,,,,,
홍진영 선생님 글을 너무 길어서 읽기가 참 힘들군요. 김창희, 김광서 각기 서로 다른 인물이 김일성이라는 인물로 불렸다는 얘기인가요?
원조 1대 김일성 장군이 김창희...
그가 사망한 후...그 위명을 계승한 군벌들이 좀 있었는데...개 중 단연 위대해 2대 김일성으로 자타 공인되던 사람이 일본장교 출신 김광서...
대대적 만주 독립군 토벌과 상해파와 이르츠쿠츠파의 분란을 핑계로...일제와의 거래에 의한 소련군의 토사구팽으로 자유시 참변이 난 훈...
북로지역 만주 독립군들은 거의다 궤멸되어 소련 적군에 배치되게나 각자 떠돈 것인데...
개 중 폼도나고 리더쉽도 있던 젊은 김성주가 꾀 이용가치 있어 보이는 소련의 막대한 지원에 의해...
그 유명한 북로지역의 조선 독립군 영웅의 대명사인 김일성장군이란 휘호가...당시 가장 강력한 조직을 갖추게 된 김성주에게 붙는 것이고...
보천보 파출소 습격등의 자잘한 전과밖엔 없던 김성주...특히 그를 받쳐주던 부관들에 의해...
너무 무리수인 1,2대 김일성 장군들의 업적까지도 대충 김성주에게 엎어주는게 북조선 사학계의 터무니 없는 무리수인건 일반 상식였는데...
친일 숭미 수구 꼴통인 리승만이 정권과 역대 남조선 기득권들이...
1,2대 김일성 장군이...공산 소비에트 군들과 친하게 지낸게 무조건 싫어서...
무조건 김일성이는 가짜고...양민들 털던 마적단이였다 게거품만 물었기에...뭔 비기도 아닌게 비기가 된 작금의 코메디라 하겠습니다.
조선후기~일제시대를 지나면서 미스테리하게 사라져 버린 서로 다른 성격의 두 거금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고종의 내탕금이며 또 하나는 레닌이 사회주의 혁명을 하라고 조선공산당에게 내려준 혁명자금이 됩니다.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고 합니다. 즉, 황제의 전통을 유지하지도 못하였고, 사회주의 혁명의 목적에 완벽히 그 금액이 모두 사용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이것을 대륙조선사적 관점과 상해 임정의 관점에서 위치추적해 보면, '분실된 위치'는 한반도가 아니라 대륙이라는 점이 신기한 것이죠...
홍진영님 보천파출소 습격도 약탈에 불과한겁니다. 내가 쓴 게시물 김일성의 정체에 대해 글좀 읽어보세요
김광서 의 부친이 친일이고 김광서 가 공산당이고 그들이 메이지일본으로 부터 회복코자 한 영역이 한반도 와 북간도 그리고연해주 이기에 ' 한반도 에다 이조의 역사를 국한시키려는 현정부는 그래서 진짜 김일성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겁니다 진짜 김일성을 드러내면 친일 아닌 사람이 없고 공산당 아닌 사람이 없었다는게 밝혀지므로 덮어 두는게 체제유지에 좋은 겁니다
그렇군요...
헉 위에 분들 소설쓰지마세요^^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읽어보면 압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왜 세기와 더불어를 그토록 못 읽게 하는지도.
그러나 머지않아 읽게 될겁니다.
그때 제가 왜 웃었는지 알게 될거예요^^
그런가요?
이남원님야말로 북한노동당에서 발간한 회고록으로 김성주를 미화시키지마세요.
김일성의 아명이 김성주입니다.김성주는 김형직의 맏아들로 망국 이태후인 임자년(1912년) 4월 15일에 만경대에서 태여났습니다. 아버지 김형직은 조선국민회를 조직하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활동하다 병을얻어1926년 망국한을 품고 타국에서 세상을 떠나고 김성주는 15살에 아버지의 친구들이 세운 만주의 화성의숙의 무관학교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반년만에 독립운동의 낙후성에 실망하고...
예를들어 일본은 그당시 세계5대군사강국이라 불리우는데 독립운동가들은 소총몇자루갖고 무조건 독립운동하자는 식,
독립은 어떻게 할것인가? 하는 체계적인 논리나 사상 이념이 안되있고
독립군 지휘부들의 정치도덕적인 타락등...
독립후 어떠한 나라를 세울것인가?하는등...
그저 책에 써있는대로(교조주의) 가르치는 등...
김성주는 화성의숙에 실망하고 화성의숙에서 나옵니다.
나오기전 "ㅌㄷ(타도)" 를 결성하고 길림의 중학교에 들어가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합니다.
이때가 15살입니다.
이보세요 소설좀 쓰지마세요 15살짜리가 뭘 안다고 독립군의 정치도덕 타락 운운했다는 헛소리를 믿으라는 겁니까. 보아하니 학생같은데 운동권 애들이 지껄이는 소리를 듣고와서 떠들어대는것 같은데 자중좀하시죠 15살짜리가 독립후 어떠한 나라를 세울것인가 고민을 했다라는 이딴 개소리를 단순하게 믿는 댁의 순진함에 웃었습니다. (하하!)
후에 빨치산 활동시절 동료들이 "하나의 별" 이라는 의미로 김일성이라고 부릅니다.
아버지도 독립운동의 중심에 있었고 김일성도 항상 중심에 있었습니다.
1948년 독립했을때 나이가 36살..
글제주가 없어 더는 못쓰겠네요.
사이트의 취지에도 맞지 않는거 같고 또 어짜피
곧 읽게 될 것인데 더는 쓰지 않겠습니다.
요즘 북이 전에없이 전방위적인 대화를 제의하고 있죠?
머지않아 한반도에 지각변동이 일어날 겁니다.
한반도엔 결코 오지 않을거 같던 봄이 오긴오는가 봅니다.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북한인민들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으로 되어있습니다.
한민족인 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에요
놀고있네! 어디서 한민족을 들먹거리나! 노동당이 발간한 김성주 미화,독립군 폄하한 책을 읽고와서 독립군 비하하고 한민족을 운운하다니 정말 가증스럽네..또다시 알바들이 설치나..
노동당이 발간한거 맞아요? 난 모르는데.어떻게 알았어요?
김성주 미화한거 어떻게 알아요? 김성주를 잘 아나봐요?
독립군 비하한거 어떻게 알았어요?
책 읽어보지 않고는 말할수 없는 부분인데...
전 님이 학생같은데요.
제가 쓴 댓글보구 김성주를 미화해ㅆ다는걸 알았다 이딴거 말구(그러면 초딩으로 판단하게ㅆ슴)
님이 제 질문에 진지하게 답하신다면 저또한 진지하게 답하겠습니다.
그 책이 어디서 발간했는지도 모르면서 지금까지 댓글 단거요? 그런 선동찌라시 같은 책 읽고 마치 그걸 사실이라고 믿고 성급히 댓글 다는 님이야말로 초등학생같은 정신세계를 못벗어났군요.
..ㅉㅉ 황장엽도 그 책이 김씨 왕조 우상화를 만들기위한 김정일 작품이라고 했건만 인물을 평가한 책이 어디서 무슨 의도로 발간됐는지도 파악도 안하고 책 하나 읽고 김일성을 미화시키는 님도 우습네요.
상식을 가지고 생각해보시오. 15살이면 겨우 중학생의 수준일텐데 그 나이에 뭘 안다고 독립군의 정치적 타락을 지껄입니까? 그리고 독립군이 타락했다는 그런소리를 누가 믿으라고?? 황장엽씨 책을 읽어보고 생각좀 하고 댓글 다시오
김일성이 원래 본명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꽤 들어 봤는데, 그것이 김성주가 있었고, 김광서가 있었는데, 이 번에 제시된 의견은 김창희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김일성의 본명자체도 너무 알 수 것이죠. 어느 것이 진짜 이름인지? 시간이 갈수록 김일성은 점점더 신비한 인물로 여러사람들의 뇌리에 남을 것 같습니다.
이상하게 남쪽에서는 이미 사라진 조선왕조를 재건해야 된다라는 일련의 그룹이 존재하는데, 이와 동시에 이미 고인이 된 김일성을 찾아가는 또 하나의 그룹이 북이아니라 남에서 출현하고 있다는 것이 재미 있습니다. 하나는 부르주아의 최상이며, 또 하나는 프롤레타리아 그룹의 최상이겠죠. 둘의 공통점은 모두 왕조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고, 그것이 남에서 유독 자주 언급되는 것은, 나도 왕이 한 번 되보고 싶다... 이것이 아닐런지요?
만약, 이조도 우리 역사의 정통성을 이어갔던 진정한 그룹이 아니고, 김일성도 알고 보니 가짜 였다면, 기회를 잘 잡고 정통성을 계승한다면, 나 또는 우리도 왕이 될 수 있는 것이니까...
사람들은 지나간 왕조의 자취를 엄청나게 그리고 실랄하게 비판하면서도 가슴속 내면에는 나도 한 번쯤 해보았으면 하는 기대 심리가 있는 것이 아닐런지요? 그런데, 그네들이 이야기 하는 것과 같이 이조와 김일성이 모두 진정한 정통성이 없었다면, 그 사람들을 모델로 하지도 말아야 하는 것이죠.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진짜 왕이라고 여겨볼 만한 인물도 꽤 나타납니다. 아마 그네들도 그 자리의 어려움을 알고 최선의 노력으로 업무를 수행하려고 노력한 듯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인물이 모델이 되지는 않는 것 같애요... 사실, 그런 인물이 모델이 된다면, 왕이 되는 것이나 되지 않는 것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고, 왕이 되는 것이 더 스트레스가 많이 쌓이게 되는 형태인데, 만인이 바라는 꿈의 모델이 아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