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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계십니다. 진통제일이라 불린 목걸연 존자께서는 전생에 분노의 업이 깊었다고 전해집니다. 그 과보로 이번 생에서 외도들에게 심한 폭행을 당하셨습니다.
몸이 만신찬이가 되어 부처님 앞에 이르렀을 때
부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목걸연이여 고통스러우냐?
목 걸린 존재가 답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몸은 고통스럽지만 마음은 평화롭습니다.
이 대화 속에서 우리는 수행에 깊은 경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분노를 다스리는 수행이 깊어지면 외부의 어떤 자극에도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는 경지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고통은 느끼돼. 그 고통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분노가 일어나되 그 분노에 끌려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선불교에서는 이것을 불에 들어가듯 타지 않는다라고 표현합니다.
불 속에 있지만 타지 않는 연꽃처럼
분노가 일어나는 상황 속에 있되 분노에 물들지 않는 것
이것이 수행의 목표이며
알아차림과 자비가
우리를 데려다 주는 곳입니다.
다시 한번 증아함경의 비유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맑은 물에 진흙이 섞이면 바닥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진흙이 가라앉으면 물은 본래의 맑음을 되찾습니다.
알아차림은 물을 가만히 두는 것이고 자비는 물 본래의 맑음을 회복시키는 힘입니다.
분노라는 진흙은 마음의 본질이 아닙니다. 마음의 본질은 맑은 물입니다.
아무리 많은 진흙이 섞여도 물의 본성 자체가 변하지는 않습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강렬한 분노가 일어나도 마음의 본성은 여전히 맑고 밝습니다.
다만 그것이 분노라는 진흙에 의해 잠시 가려져 있을 뿐입니다.
수행은 이 가려진 본성을 다시 드러내는 과정입니다.
새로운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니라
본래 있던 맑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분노가 일어날 때
아 지금 진흙이 일어나고 있구나라고 알아차리십시오.
그리고 가만히 기다리십시오.
그 진흙은 반드시 가라앉습니다.
물은 반드시 다시 맑아집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수행이고
이것을 경험하는 것이
깨달음의 시작입니다.
분노의 본질을 이해하고
알아차림과 자비로
분노를 바라보는 법을 배웠다면
이제 남은 것은 하나입니다.
그것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몸으로 행하고 일상 속에서 살아 숨쉬는 수행이 될 때
비로소 그 가르침은 진정한 힘을 발휘합니다.
금강경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여래가 말한 인욕바라밀은
곧 인욕바라밀이 아니니
이것을 인욕 바라밀이라 이름한다.
이 말씀은 처음 들으면 매우 난해하게 느껴집니다.
인욕바라밀이 인욕바라밀이 아니라니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부처님께서 금강경 전체를 관통하여 전달하시려는 메시지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참된 인욕은 이를 악물고 참는 것이 아닙니다.
참는다는 생각조차 없는 것
참아야 할 대상 자체가 실체가 없음을 꿰뚫어 보는 것
그것이 참된 인욕입니다.
금강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전생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깔이 왕이라는 폭군이 있었는데
이 왕이 부처님의 전생인 인욕선인의 몸을 칼로 베었습니다.
사지를 하나하나 잘라내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이 인욕선인은 분노를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전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나에게는 아상도 없었고 인상도 없었으며 중생상도 없었고 수자상도 없었다.
만약 내게 아상이 있었다면 반드시 분노가 일어났을 것이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인욕선인이 초인적인 인내력을 가졌다는 것이 아닙니다.
핵심은 분노가 일어나지 않은 이유가 바로 나라는 집착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나라는 것이 없는데 누가 고통을 받겠습니까?
나라는 것이 없는데 누가 분노를 일으키겠습니까?
이것이 금강경이 가르치는 인욕의 궁극적 경지입니다.
물론 이 경지는 하루 아침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도 수많은 전생에 걸쳐 수행을 쌓으신 끝에 이 경지에 이르셨습니다.
그러나 방향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가 지금 당장 이욕선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분노가 나라는 집착에서 온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수행의 방향이 잡힙니다.
그리고 그 방향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 바로 일상의 수행입니다.
일상에서 분노를 지혜로 바꾸는 실천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아침에 출근길 지하철에서 누군가 발을 밟았을 때 그 순간 올라오는 짜증을 알아차리는 것 회의 중에 동료가 내 의견을 무시하는 듯한 말을 했을 때 속에서 뜨거워지는 감정을 인식하는 것 가족과 대화하다가 사소한 말다툼이 시작되려 할 때 한 호흡 쉬고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 음 이런 작은 실천들이 모여 큰 변화를 만듭니다. 부처님께서는 팔정도 가운데 바른말 즉 정어를 가르치셨습니다. 분노가 일어났을 때 가장 먼저 주의해야 할 것이 바로 말입니다. 분노의 순간에 내뱉는 말은 칼보다 날카롭습니다. 한 번 입 밖으로 나간 말은 다시 주어 담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벚구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거친 말을 하지 말라. 그 말은 그대에게 되돌아온다. 분노의 찬 말은 고통을 부르고 메맞는 것처럼 그대를 헤친다. 이 가르침은 참으로 정확합니다. 분노 속에서 내뱉은 말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 말로 인해 가장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결국 말을 한 자기 자신입니다. 왜 그때 그런 말을 했을까라는 후회가 밤잠을 설치게 만들고 한번 금이 간 관계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습니다. 분노의 순간에 말을 멈추는 것 이것이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강력한 수행입니다. 화가 올라올 때 말하기 전에 세 번의 호흡을 하는 것 이 단순한 행위 하나가 수많은 관계를 살리고 수많은 후회를 막아 줍니다. 세 번의 호흡은 길지 않습니다. 고작 10 여 초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10여 초가 분노에 사로잡힌 말과 지혜로운 침묵 사이의 간격을 만들어줍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바른 행위 즉 정업도 분노의 실천과 깊이 연결됩니다. 분노가 일어났을 때 어떤 행동을 선택하느냐가 그 이후의 삶을 결정짓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업의 법칙을 가르치셨습니다. 모든 행위에는 그의 상응하는 결과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분노에 따라 행동하면 분노의 업이 쌓입니다. 그 업은 씨앗이 되어 미래에 다시 분노의 상황을 만들어냅니다. 반대로 분노가 일어나는 순간에 자비로운 행동을 선택하면 자비의 업이 쌓입니다. 그 업은 미래에 자비로운 상황을 만들어내는 씨앗이 됩니다. 매 순간의 선택이 미래의 나를 만들어 간다는 것 이것이 업의 가르침이 전하는 핵심입니다. 다음 경에는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마음이 곧 화가이니 온갖 세간을 그려낸다. 이 말씀은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결국 우리 마음이 그려낸 것이라는 뜻입니다. 분노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온통 분노할 일로 가득 차 보입니다. 어디를 가나 나를 환하게 하는 사람이 있고 무엇을 해도 불만스러운 일이 생깁니다. 그러나 자비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같은 세상이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바뀐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이 바뀐 것입니다. 마음경의 가르침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경에서 말하는 인다라망의 비율을 들어보겠습니다. 하늘의 제석천 궁전에는 무한한 구슬이 그물처럼 엮여 있는데 하나의 구슬에 다른 모든 구슬이 비치고 다른 모든 구슬에도 그 하나의 구슬이 비칩니다. 이것은 모든 존재가 서로를 비추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뜻입니다. 내가 분노하면 그 분노가 주변으로 퍼져나갑니다. 내가 평화로우면 그 평화도 주변으로 퍼져나갑니다. 한 사람의 마음이 달라지면 그 사람이 속한 가정이 달라지고 가정이 달라지면 사회가 달라지며 사회가 달라지면 세상이 달라집니다. 이것은 추상적인 이상론이 아니라 망원경이 밝히는 존재의 실상입니다. 분노를 지혜로 바꾸는 수행에서 용서의 문제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용서를 어려워합니다. 용서하면 상대방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 같고 나의 고통을 무시하는 것 같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용서는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자기 자신을 분노의 감옥에서 해방시키는 행위입니다. 분노를 품고 사는 것은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는 것과 같습니다. 그 감옥의 벽은 내가 쌓은 것이고 그 감옥에 문을 잠근 것도 나 자신입니다. 용서는 그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그림 그 열쇠는 항상 내 손 안에 있습니다. 정토불교의 전통에서는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는 염불수행이 분노를 다스리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가르칩니다. 분노가 올라오는 순간 나무아미타불을 열 번만 외워보라고 합니다. 열 번의 연불 동안 분노의 에너지가 염불의 에너지로 전환됩니다. 이것은 미신이 아니라 마음의 에너지를 전환하는 실질적인 수행 방법입니다. 분노에 쏠려 있던 주의력이 염불 소리에 옮겨가면서 분노의 불길이 자연스럽게 약해지는 것입니다. TV트 불교의 전통에서는 분노를 다루는 독특한 방법이 있습니다. 분노를 억누르거나 없애려 하지 않고 분노의 에너지를 직접 바라보라고 가르칩니다. 분노의 에너지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순수한 에너지입니다. 그 에너지가 집착과 만나면 파괴적인 분노가 되지만 지혜와 만나면 명경지수처럼 밝은 거울의 지혜로 변환된다고 합니다. 이것을 오지의 가르침이라 하는데 분노의 에너지가 대원경지라는 지혜로 변환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원경 지란 모든 것을 잇는 그대로 비추는 거대한 거울과 같은 지혜입니다. 분노가 가진 날카로운 에너지 대상을 명확하게 파악하는 힘 불의를 감지하는 이런 것들이 지혜와 결합하면 세상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보는 힘이 됩니다. 그러므로 분노는 단순히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지혜로 변환해야 할 원재료이기도 합니다. 역사 속에서 위대한 선사들의 이야기를 보면 분노를 지혜로 승화시킨 사례를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남 선사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날 때 성내는 그놈이 누군지 돌이켜 보라. 이 한마디가 분노를 수행으로 바꾸는 전환점이 됩니다. 분노가 일어나는 순간 이 분노를 느끼는 자는 누구인가라고 자기 자신에게 묻는 것 이 물음은 분노의 에너지를 자기 성찰의 에너지로 전환시킵니다. 화를 내고 있는 그 주체를 찾아 들어가면 결국 고정된 주체는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분노하는 나라는 것은 조건에 의해 순간적으로 만들어진 허상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선불교에서 말하는 화두 참고이며 분노 속에서도 깨달음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일상 속에서 분노를 지혜로 바꾸는 구체적인 실천법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분노 일기를 쓰는 것입니다. 하루를 마치며 오늘 분노가 일어났던 순간을 돌아봅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 분노가 일어났는지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분노 아래 어떤 기대가 있었는지 어떤 집착이 있었는지를 적어봅니다. 이 과정을 꾸준히 반복하면 자기 분노의 패턴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어떤 상황에서 특히 화가 나는지 어떤 사람에게 특히 예민하지? 어떤 집착이 반복적으로 분노를 일으키는지가 드러납니다. 이 패턴을 아는 것만으로도 분노에 대한 대응력이 크게 높아집니다. 둘째 분노가 일어났을 때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처님께서는 자타불이 즉 나와 남이 다르지 않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내가 고통을 싫어하듯 상대방도 고통을 싫어하고 내가 행복을 원하듯 상대방도 행복을 원합니다. 나를 환하게 한 그 사람도 나와 마찬가지로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는 존재입니다. 이 관점의 전환이 분노를 연민으로 적대감을 이해로 바꾸어 줍니다. 셋째 메일 자비 명상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잠들기 전 5분이면 충분합니다. 눈을 감고 조용히 자기 자신에게 내가 평화롭기를이라고 마음속으로 말합니다. 그다음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다음 중립적인 사람에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려운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같은 마음을 보냅니다. 이 수행을 한 달만 꾸준히 저는 분노가 일어나는 빈도와 강도가 눈에 띄게 줄어드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넷째 분노가 일어나는 순간에 신체적 반응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화가 올라올 때 의식적으로 호흡을 깊고 길게 합니다. 이 승리에 네 박자를 세고 달숨에 6 박자를 세는 것입니다. 들숨보다 길게 하면 부교감. 신경이 활성화되어 몸의 긴장이 풀립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암반수의경의 호흡 수행과도 맥이 닿아 있습니다. 호흡을 통해 몸을 안정시키면 마음도 따라서 안정됩니다. 다섯째 감사의 마음을 키우는 것입니다. 분노와 감사는 동시에 존재하기 어려운 감정입니다. 매일 자기 전에 오늘 하루 감사한 1세 가지를 떠올려 보는 것 이 단순한 습관이 마음의 기본 설정을 분노해서 감사로 바꾸어 줍니다. 감사의 마음이 커지면 분노가 들어설 자리가 줄어듭니다.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시기 전 마지막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모든 형성된 것은 무너지기 마련이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수행하라. 이 마지막 말씀 속에 분노를 다스리는 수행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모든 형성된 것은 무너진다는 것 이것은 분노 역시 형성된 것이므로 반드시 무너진다는 뜻입니다. 영원한 분노란 없습니다. 그러나 게으르지 말고 수행하라는 것은 분노가 저절로 사라지기만을 기다리지 말고 적극적으로 수행하라는 뜻입니다. 분노를 이해하고 알아차리고 자비로 감싸안고 지혜로 전환하는 이 모든 과정이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수행의 길입니다. 이 길이에서 중요한 것은 완벽함이 아닙니다. 수행자라에서 화를 전혀 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제자들 가운데서도 화를 내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분노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분노가 일어났을 때 그것을 어떻게 대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분노에 사로잡혀 끌려가는 것과 분노를 알아차리고 지혜롭게 대응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한번 실패하더라도 괜찮습니다. 화를 내고 후회했다면 그 후회 자체가 이미 알아차림의 시작입니다. 다음에는 조금 더 빨리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고 그 다음에는 더 빨리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며 언젠가는 분노가 일어나는 바로 그 찰나에 알아차리는 순간이 올 것입니다. 그 순간이 올 때 분노는 더 이상 고통이 아니라 깨달음의 기회가 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2500여 년의 세월을 넘어 지금 이 순간에도 유효합니다. 분노가 일어날 때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화가 나는 바로 그 순간이 수행의 순간이고 분노가 일어나는 바로 그 자리가 도량입니다. 절에 앉아 있을 때만 화가 치밀어 오르는 바로 그 순간에 알아차림을 놓지 않는 것 그것이 참된 수행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유는 참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대로를 꿰뚫어 보는 지혜입니다. 분노가 실체 없는 것임을 보는 것이며 분노의 대상도 실체 없는 것임을 보는 것이며 분노와는 나 역시 실체 없는 것임을 보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모두 실체 없음을 볼 때 너는 저절로 쉬어집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자비가 피어납니다. 분노가 쉬워진 자리에 자비가 피어나는 것 이것이 부처님께서 2500년 전에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으신 진리의 한 조각입니다. 오늘 이 이야기가 여러분의 마음에 작은 씨앗 하나를 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분노가 일어날 때 이 이야기를 떠올려 주십시오. 그리고 한 번의 호흡 한 번의 알아차림 한 번의 자비로 분노를 맞이해 주십시오. 그 작은 실천이 쌓이고 쌓이면 어느 날 문득 자신도 모르게 분노 앞에서 미소 짓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날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여러분의 삶이 되는 날입니다. 나무와 미탑을 관세음보살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무와 미탑을 관세음. 보살은 워치에 아미타불과 자비의 관세 음보살게 귀의한다는 뜻입니다. 이 염송 한마디가 마음을 맑히고 삶을 부드럽게 합니다. 댓글에 나무아미탑을 관세음보살을 한번 남겨보세요. 당신의 그 한마디가 복덕의 씨앗이 되어 바라던 일이 이뤄지기를 기도드립니다. 국가의 말 한마디에 가슴이 뜨거워진 적이 있으십니까?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했지만 속에서 끌어오르는 무언가를 도저히 누를 수 없었던 그런 순간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2500여 년 전 이미 이 마음에 불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분노를 버린 자는 편안히 잠들고 분노를 버린 자는 슬퍼하지 않는다. 구경에 기록된 이 짧은 한 구절 속에 우리가 평생을 두고 풀어야 할 마음의 숙제가 담겨 있습니다. 오늘 이 이야기는 분노라는 감정에 가장 깊은 뿌리를 들여다보는 시간입니다. 왜 우리는 화를 내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 화는 정말로 상대방 때문에 일어나는 것일까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지금부터 함께 그 물음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보겠습니다. 사람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크고 작은 감정의 파도를 만납니다. 기후 슬픔도 있으며 때로는 이유 없는 불안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분노는 유독 강렬하고 빠르며 파괴적입니다. 다른 감정들은 천천히 스며들지만 분노는 순식간에 온몸을 장악합니다. 심장이 빨라지고 목소리가 높아지며 눈앞이 흐려지는 것 같은 경험을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토록 강렬했던 분노가 시간이 지나고 나면 허무하게 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어젯밤 잠을 설치게 만들었던 그 분노가 일주일 뒤에는 무엇 때문이었는지조차 희미해집니다. 한 달이 지나면 그때 왜 그렇게까지 화를 냈는지 스스로는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분노의 첫 번째 목적입니다. 분노는 영혼처럼 타오르지만 실제로는 무상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무상의 이치가 분노라는 감정 안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모든 것은 변하고 머무르지 않으며 고정된 실체가 없습니다. 분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조건에 의해 일어났다가 조건이 사라지면 함께 사라지는 하나의 현상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데 우리는 그 무상한 감정에 이토록 휘둘리는 것일까요? 부처님께서는 그 원인을 명확하게 짚어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집착입니다. 우리가 화를 내는 이유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반드시 나라는 존재가 있습니다. 내가 무시당했다. 내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내 기대가 어긋났다. 내 자존심이 상했다. 이 모든 분노의 문장 앞에는 항상 나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아상이라 하셨습니다. 나라는 것에 대한 견고한 집착 나라는 것이 실제한다는 강한 믿음. 이것이 분노의 가장 깊은 뿌리입니다. 금강경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바상이 있고 인상이 있고 중생상이 있고 수자상이 있으면 이는 보살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수행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선택적인 진리입니다. 나라는 것에 대한 집착이 강할수록 분노는 더 쉽게 더 자주 더 격렬하게 일어납니다. 한 가지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거리를 걷고 있는데 누군가 어깨를 세게 부딪히고 지나갔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승리가 치밀어 오릅니다. 저 사람이 왜 나한테 이러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돌아보니 그 사람 습장애인이었다면 어떨까요? 순간 분노가 사라지고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올라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딪힌 충격은 똑같았다는 점입니다. 어깨에 통증도 동일합니다. 달라진 것은 오직 하나 상황에 대한 해석입니다. 스페인어 씨 부처님께서 가르치실 핵심입니다. 분노는 외부의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을 바라보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이루어진 사건이라도 마음이 어떻게 바뀔 수 있느냐에 따라 분노가 될 수도 있고 연민이 될 수도 있으며 아무런 감정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연기법으로 설명하셨습니다.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일어나고 인연이 다하면 사라진다는 가르침입니다. 분노 역시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정한 상황 특정한 기억 특정한 기대 특정한 판단 이 모든 조건들이 만났을 때 비로소 분노는 감정이 피어오르는 것입니다. 마치 불이 붙기 위해서는 연료와 산소와 점화원이 모두 필요하듯이 분노가 일어나기 위해서도 여러 조건이 함께 모여야 합니다. 그 조건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면 분노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깊이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분노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사립을 존자가 계십니다. 지의 제일이라 불리던 사립은 존자에게도 분노의 시험을 찾아왔습니다. 어느 날 밤바람 문이 사립을 존자에게 다가와 아무런 이유 없이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주변의 다른 수행자들은 놀라고 붕괴했지만 사립을 존자는 조용히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바람우늬 욕설을 멈추자 사립을 존자가 조용히 멈췄습니다. 그대가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었는데 그 사람이 받지 않는다면 그 선물은 누구의 것입니까? 바람 문이 대답했습니다. 당연히 선물을 가져온 사람일 것이지요. 사립을 존자가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대의 욕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대가 건넨 분노를 내가 받지 않았으니 그것은 여전히 그대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이론이다. 분노의 V는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분노는 누군가가 나에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의 말과 행동은 자꾸 그 자극을 받아서 분노로 만드는 것은 바로 내 마음의 작용입니다. 즉 분노의 진짜 주인은 화를 낸 상대가 아니라 화를 일으킨 나 자신입니다. 이 말이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내가 왜 잘못이야? 상대방이 먼저 나쁘게 굴었는데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올라올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누가 옳고 그른지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관심을 두신 것은 오직 하나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증명하는 것이 나의 고통을 줄여주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상대방의 잘못에 집착할수록 내 안에 분노는 더 커지고 그 분노가 나를 더 깊은 괴로움으로 끌고 갑니다. 부처님께서는 사성제를 통해 이 구조를 명확하게 밝히셨습니다. 첫 번째는 고제 삶에는 괴로움이 있다는 진리입니다. 분노 역시 괴로움의 한 형태입니다. 화를 내는 순간 가장 먼저 고통받는 사람은 화를 내는 자기 자신입니다.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이 뛰며 온몸이 긴장합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밥맛을 이루며 하루 종일 그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분노는 상대를 벌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태우는 불입니다. 부처님께서 법구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분노를 품는 것은 뜨거운 솥을 손에 쥐고 남에게 던지려는 것과 같다. 먼저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이 비유는 분노의 본질을 이보다 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합니다. 우리는 분노가 상대방을 향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불은 내 손 안에서 타오르고 있습니다. 상대방은 아무런 상처도 받지 않은 채 잘 지내고 있는데 나 혼자 큰 속에서 타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집제 괴로움에는 원인이 있다는 진리입니다. 분노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것은 집착입니다. 내가 옳다는 집착 내가 존중받아야 한다는 집착 세상이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는 집착 이 집착들이 현실과 부딪힐 때 그 충돌의 에너지가 폭발하는 것입니다. 얼음 더욱 깊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불교의 유식 사상에서는 마음의 구조를 여덟 가지식으로 분석합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의식 아래 말라식이라 불리는 의식이 있습니다. 이 말라식의 가장 큰 특징은 끊임없이 나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잠을 자는 동안에도 의식이 작동하지 않는 순간에도 이 말라식은 쉬지 않고 나라는 감각을 유지합니다. 분노가 왜 그토록 빠르고 강렬하게 일어나는지 유식 사상을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나를 비난하는 순간 말라식이 즉각적으로 반응합니다. 나가 공격받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고 이 신호에 따라 분노라는 방어 기재가 작동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은 의식적인 판단보다 훨씬 빠르게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화를 내고 나서야 내가 왜 그랬지라고 후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말라식의 자동 반응이 끝난 뒤에야 의식이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멸제 괴로움은 소멸될 수 있다는 진리입니다. 이것은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분노가 아무리 강렬하더라도 그것은 소멸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분노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조건에 의해 일어난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조건이 바뀌면 분노도 바뀝니다. 조건을 알아차리면 분노의 힘은 약해집니다. 조건 자체를 내려놓으면 분노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습니다. 네 번째는 도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 있다는 진리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길을 팔 정도로 제시하셨습니다.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말 바른 행동 바른 생활 바른 정진 바른 알아차림 바른 집중 이 8 가지 길은 분노를 다스리는 구체적인 수행의 길이기도 합니다. 특히 바른 견해는 분노를 대하는 첫 번째 열쇠입니다. 분노가 일어날 때 이 분노는 상대방 때문이 아니라 내 마음의 조건에 의해 일어난 것이라는 바른 견해를 갖는 것 이것만으로도 분노의 절반은 힘을 잃습니다. 왜냐하면 분노는 내가 옳고 상대가 틀렸다는 확신 위에서 가장 강력하게 타오르기 때문입니다. 그 확신이 흔들리는 순간 분노의 불꽃은 연료를 잃고 약해집니다. 부처님 당시에 코살라국의 파세나디 왕이 계셨습니다. 파세나디 왕은 분노가 잦은 사람이었습니다. 왕으로서의 권위에 조금이라도 흠이 가면 참지 못하고 화를 내곤 했습니다. 어느 날 파세나디 왕이 부처님을 찾아와 엿주었습니다. 세존이시여 분노가 일어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가? 왕의 자리에 앉아 있으면 하루에도 수십 번씩 화가 납니다. 부처님께서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대왕이요. 분노가 일어나는 순간 그대는 분노의 왕이 아니라 분노의 노예가 됩니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자기 마음 하나를 다스리지 못한다면 진정한 왕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씀에 파세나디 왕은 깊은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왕조차도 분노 앞에서는 무력한 존재가 된다는 사실 이것은 2500년 전의 왕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어도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분노가 일어나는 순간에는 그 모든 것이 무의미해집니다. 분노의 순간 우리는 지위도 학벌도 재산도 아닌 그저 고통받는 한 존재가 됩니다. 이것이 분노의 무서운 점입니다. 분노는 우리가 평생 쌓아 올린 모든 것을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마디의 분노가 수십 년의 관계를 끊어 놓기도 하고 한 번의 폭발이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만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분노를 삼독 가운데 하나로 꼽으신 것입니다. 탐욕과 어리석음과 함께 분노는 중생을 괴로움에 묶어두는 세 가지 독이라 하셨습니다. 어 그 가운데서도 분노는 가장 빠르고 직접적인 해를 끼칩니다. 탐욕은 서서히 사람을 무너뜨리고 어리석음은 모르는 사이의 방향을 잃게 만들지만 분노는 단 한 순간의 모든 것을 불태웁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분노가 나쁜 것이니 억누르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분노를 억압하라고 가르치신 적이 없습니다. 억압된 분노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더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언젠가 더 큰 폭발로 되돌아옵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것은 억압이 아니라 이해입니다. 분노가 일어나는 조건을 이해하고 분노의 무상한 본질을 이해하며 분노 속에 숨어 있는 나라는 집착을 이해하는 것 이 이해가 깊어질 때 분노는 저절로 힘을 잃습니다. 마치 어둠 속에서 무서운 형체가 보였는데 불을 켜 보니 그것이 걸어둔 옷이었을 때의 안도감처럼 분노의 본질을 밝게 비추어 보면 그것이 실체 없는 그림자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분노 속에는 또 하나의 감정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두려움입니다. 대부분의 분노를 깊이 들여다보면 그 밑바닥에는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무시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사랑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내가 무가치한 존재라는 것이 드러날까 봐 느끼는 두려움 이 두려움이 방어 기재로 변환된 것이 바로 분노입니다. 화를 내는 것은 사실 자신을 보호하려는 마음의 몸부림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두려움에 뿌리 역시 아상에 있다고 보셨습니다. 나라는 것이 실제한다고 믿기 때문에 그나마 위협받는 것이 두렵고 그 두려움이 분노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노를 근본적으로 다스리기 위해서는 나라는 것에 대한 집착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무아의 지혜입니다. 나라는 것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수많은 조건들이 모여 잠시 만들어낸 하나의 현상입니다. 몸도 변하고 마음도 변하고 생각도 변하고 감정도 변합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은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세포가 바뀌고 수많은 생각이 바뀌고 수많은 경험이 더해진 전혀 다른 존재입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변하는 것 속에서 변하지 않는 나를 찾으려 하니 괴로움이 생기고 그 괴로움이 분노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분노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 이것이 분노를 다스리는 첫 번째 걸음입니다. 화가 날 때 무작정 참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분노는 어디에서 왔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 이 분노 속에서 내가 지키려는 것은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 이 분노가 영원할 것인가 아니면 지나갈 것인가를 관찰하는 것 이러한 물음 자체가 이미 수행의 시작입니다. 부처님께서 법구경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분노를 버린 자가 편안히 잠들 수 있다면 분노를 이해한 자 혹시 편안함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선 것입니다. 분노는 적이 아닙니다. 분노는 내 마음이 보내는 신호입니다. 지금 내 안에 집착이 있다는 것을 지금 내 안에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지금 내가 무언가를 놓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마음의 경보입니다. 그 경보를 무시하거나 억누르는 대신 그 경보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분노를 대하는 첫 번째 자세입니다. 분노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첫 번째 걸음이었다면 이제 그 분노를 실제로 마주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단순히 화를 내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분노가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중앙경에 이런 비유가 나옵니다. 맑은 물에 진흙이 섞이면 바닥을 볼 수 없듯이 분노에 사로잡힌 마음은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한다. 이 비유 속에 수행의 핵심이 들어 있습니다. 분노가 문제인 이유는 화를 내기 때문이 아니라 화에 사로잡혀 현실을 잇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진흙이 섞인 물은 탁합니다. 아무것도 비추지 못하고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물을 가만히 두면 어떻게 됩니까? 진흙은 서서히 가라앉고 물은 다시 맑아집니다. 누군가 억지로 진흙을 걷어낸 것이 아닙니다. 물을 가만히 두었을 뿐인데 뭘 스스로가 본래의 맑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마음도 이와 같습니다. 분노라는 진흙이 마음의 물을 흐려놓았을 때 그것을 억지로 걷어내려 하면 오히려 물은 더 탁해집니다. 발을 참으려고 일을 악물고 생각을 억누르려고 안간힘을 쓰면 마음은 더 뒤틀리고 더 혼란스러워집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방법은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바로 알아차림입니다. 바이어로 사띠라고 하는 이 수행은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 중에 핵심입니다. 알아차림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판단 없이 바라보는 것입니다. 분노가 일어나는 순간 아 지금 내 안에 분노가 일어나고 있구나라고 조용히 인식하는 것입니다. 화를 내면 안되는데라고 자책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 또 화가 나는 거야라고 짜증내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분노가 있구나라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단순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깊은 수행입니다. 왜냐하면 분노가 일어나는 순간 대부분의 사람은 분노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입니다. 화가 난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자신이 곧 분노라고 느낍니다. 나와 분노 사이에 아무런 거리가 없습니다. 분노가 곧 나이고 내가 곧 분노입니다. 그래서 분노가 시키는 대로 말을 하고 분노가 시키는 대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알아차림은 바로 이 지점에서 작은 간격을 만들어 줍니다. 분노가 일어나고 있다라고 알아차리는 순간 나와 분노 사이에 미세한 공간이 생깁니다. 나는 분노
관찰하는 자가 되고 분노는 관찰되는 대상이 됩니다. 2. 작은 감격이 모든 것을 바꿉니다.
간격 속에서 우리는 선택할 수 있게 됩니다. 분노에. 따라 말할 것인가 잠시 멈출
분노에? 따라 행동할 것인가 한 발 물러설 것인가 알아차림이 없을 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자극이 오면. 자동으로 반응이 나갑니다. 누군가 나를. 비난하면 자동으로 방어하거나 역공격합니다. 이것은 자유로운. 행동이 아니라 조건에 의한 기
열심히 분명하게. 관찰합니다. 분노가 일어나면 몸에 반드
자유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개념 처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몸에서. 호흡이 거칠어졌구나. 지금 내.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구나.
법에서 법을 관찰하라. 조금씩 줄어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비로운 현상이
근심을 버려야 한다. 분노가 일어났을 때. 이 가르침을 적용하면 이렇게 됩니다. 오 먼저 몸을 관찰합니다. 분노가 일어나면 몸에 반드시 변화가 옵니다. 가슴이 답답해지거나. 어깨가 경직되거나 주먹이 쥐어지거나. 턱이 굳어지거나 호흡이. 빨라지거나 이 신체적 변화를. 조용히 관찰하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지금. 내 가슴이 뜨겁구나. 지금 내 호흡이 거칠어졌구나. 지금 내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구나. 있음을 확인합니다. 지금 내 마음이 상대방을 향해 적대감을 품고 있구나. 지금
하나하나 알아차리다 보면 신기한 일이 일어납니다. 분노의. 강도가 조금씩 줄어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비로운 현상이 아닙니다. 하나하나 알아차리다 보면 신기한 일이 일어납니다. 분노의 강도가. 조금씩 줄어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비로운 현상이 아닙니다. 분노에 쏠려. 있던 에너지가 관찰하는 쪽으로 옮겨가면서. 분노 자체의 힘이 약해지는.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다음으로 느낌을 관찰합니다. 분노에 쏠려 있던 에너지가 관찰하는 쪽으로 옮겨가면서 분노 자체의 힘이 약해지는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다음으로 느낌을 관찰합니다 금노 안에는 반드시 불쾌한 느낌이 있습니다 그 불쾌한 느낌을 불쾌하구나라고 있는 그대로 인식합니다 좋다 나쁘다 판단하지 않고 그저 불쾌한 느낌이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합니다 그다음으로 마음을 관찰합니다 지금 내 마음에 분노가 있구나 지금 내 마음이 상대방을 향해 적대감을 품고 있구나 지금 내 마음이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려 하고 있구나 이렇게 마음의 상태를 조용히 목격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법을 관찰합니다 이 분노가 어떤 조건에서 일어났는지 이 분노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 이 분노의 무상한 성질을 관찰합니다
처음에 격렬했던 분노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하고 있음을 봅니다 강렬한 불꽃이 타오르다가 점점 잦아드는 것을 마치 하늘의 구름이 모양을 바꾸다가 흩어지는 것을 가만히 지켜
봅니다 네 가지 관찰을 부처님께서는 사념처 수행이라 하셨습니다 이 수행은 앉아서 명상할 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의 매 순간 특히 분노가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에 적용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수행입니다 선불교의 전통에서는 이 알아차림을 더욱 직접적으로 가르칩니다 중국 당나라 시대에 선사 임재의현 선사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
면 조사를 죽여라 이 충격적인 말씀은 물론 실제로 누군가를 해치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고정된 관념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분노에 대한 수행에 적용하면 분노를 나쁜 것이라고 고정시키는 관념조차도 내려놓으라는 뜻입니다
분노는 나쁜 것이다 화를 내면 안 된다 수행자는 화를 내지 않아야 한다 이런 고정관념 역시 하나의 집착입니다 분노가 일어났을 때 수행자
인 내가 화를 내다니라며 자책하는 것은 분노 위에 또 하나의 분노를 싸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분노를 없애라는 것이 아니라 분노를 잇는 그대로 보라는 것입니다. 어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분노에 좋다. 나쁘다라는 꼬리표를 붙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저 하나의 현상으로서 관찰하는 것입니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구나 하고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구나 하듯이 분노가 일어나면 분노가 일어나는구나 하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태도가 깊어지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분노가 일어나는 순간에도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여름에는 파도가 일어나되 그 파도 아래 바다는 여전히 고요한 것입니다. 파돌은 바다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현상일 뿐 바다 자체를 흔들지는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분노는 마음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현상일 뿐 마음의 본질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난다 존자가 계셨습니다. 난다 존자는 부처님의 이복 동생으로 출가 전에는 세속적 욕망이 매우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출가 후에도 마음이 쉽게 안정되지 않아 사소한 일에도 짜증을 내고 분노하곤 했습니다. 어느 날 낫다 조자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무리 노력해도 분노가 다스려지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난다요. 분노를 다스리려 하지 말아라. 다스리려는 마음 자체가 또 하나의 집착이다. 그저 분노가 일어나는 것을 보아라. 분노가 머무는 것을 보아라. 분노가 사라지는 것을 보아라.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 가르침은 간결하지만 수행의 정수를 담고 있습니다. 일어남을 보고 머무름을 보고 사라짐을 보는 것 이것이 윗바사나 수행의 핵심이며 분노를 대하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분노는 일어나고 머물다가 반드시 사라집니다. 이것은 예외가 없는 법칙입니다. 아무리 극심한 분노라 하더라도 영원히 지속되는 분노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진리를 체험적으로 아는 것이 곧 수행입니다. 알아차림과 함께 분노를 다스리는 또 하나의 강력한 수행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비 명상입니다. 바알리어로 맨따 바와나라고 하는 이 수행은 자신과 타인에 대한 한없는 사랑과 연민을 키우는 수행입니다. 자비 명상은 분노의 정반대 에너지를 키우는 것입니다. 물리학에서 차가운 것과 뜨거운 것이 만나면 중화되듯이 자비의 마음은 분노의 열기를 식혀줍니다. 부처님께서는 자비경에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안전하기를 마음이 편안하기를 바라라. 이 가르침은 분노의 대상에게까지 적용됩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매우 어렵게 느껴집니다. 나를 화나게 한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라다니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비 명상의 구조를 이해하면 이것이 왜 가능하고 또 필요한지 알게 됩니다. 자비 명상은 단계적으로 진행됩니다. 먼저 자기 자신에게 자비를 보냅니다. 내가 행복하기를 내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내가 평화롭기를 많은 사람들이 이 첫 번째 단계에서부터 어려움을 느낍니다. 자기 자신에게 따뜻한 마음을 보내는 것이 낯설고 때로는 눈물이 나기도 합니다. 이것은 평소에 자기 자신을 얼마나 혹독하게 대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자비를 보낸 후에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비를 보냅니다. 그다음에는 중립적인 사람에게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어려운 사람 즉 나에게 분노를 일으킨 사람에게 자비를 보냅니다. 그 사람도 행복하기를 그 사람도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이 수행을 처음 할 때는 입으로만 하게 됩니다. 마음은 전혀 따라가지 않고 그 사람이 왜 행복해야 하는데라는 저항이 강하게 올라옵니다. 그러나 이 저항 자체를 관찰하면서 꾸준히 수행을 이어가면 마음의 점진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분노의 대상을 향한 마음이 조금씩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억지로 만들어내는 감정이 아니라 자비의 수행이 마음의 습관을 바꾸어 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깊이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나에게 분노를 일으킨 그 사람도 사실은 자기 나름의 고통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이 괴로움 속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나를 환하게 한 그 사람도 자기만의 두려움이 있고 자기만의 상처가 있으며 자기만의 집착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준 행동조차도 알고 보면 그 사람 내면의 고통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습니다. 상처받은 사람이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분노한 사람이 타인에게 분노를 퍼뜨립니다. 이것은 분노의 연쇄입니다. 누군가 나에게 화를 내면 나도 그 화를 받아 다른 누군가에게 전달합니다. 직장에서 상사에게 질책을 당한 사람이 집에 와서 가족에게 화를 내고 부모에게 화를 받은 아이가 학교에서 친구에게 짜증을 내는 것 이 연쇄 고리를 끊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알아차림과 자비입니다. 분노의 연쇄 속에서 한 사람이라도 멈추어 서서 이 분노를 여기서 그치겠다라고 결심할 때 그 순간 하나의 연쇄가 끊어집니다. 이것은 작은 일 같지만 실은 세상을 바꾸는 일입니다.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목걸이는 존자가 계십니다. 진통제일이라 불린 목걸연 존자께서는 전생에 분노의 업이 깊었다고 전해집니다. 그 과보로 이번 생에서 외도들에게 심한 폭행을 당하셨습니다.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부처님 앞에 이르렀을 때 부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목걸이어 고통스러우냐 목 관련 존자가 답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몸은 고통스럽지만 마음은 평화롭습니다. 이 대화 속에서 우리는 수행에 깊은 경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분노를 다스리는 수행이 깊어지면 외부의 어떤 자극에도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는 경지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고통은 느끼돼. 그 고통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분노가 일어나되 그 분노에 끌려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선불교에서는 이것을 불에 들어가듯 타지 않는다라고 표현합니다. 불속에 있지만 타지 않는 연꽃처럼 분노가 일어나는 상황 속에 있되 분노에 물들지 않는 것 이것이 수행의 목표이며 알아차림과 자비가 우리를 데려다주는 곳입니다. 다시 한번 중화함경의 비유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맑은 물에 진흙이 섞이면 바닥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치맥이 가라앉으면 물은 본래의 맑음을 되찾습니다. 알아차림은 물을 가만히 두는 것이고 자민은 물 본래의 맑음을 회복시키는 힘입니다. 분노라는 진흙은 마음의 본질이 아닙니다. 마음의 본질은 맑은 물입니다. 아무리 많은 진흙이 섞여도 물에 본성 자체가 변하지는 않습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강렬한 분노가 일어나도 마음의 본성은 여전히 맑고 밝습니다. 다만 그것이 분노라는 진흙에 의해 잠시 가려져 있을 뿐입니다. 수행은 이 가려진 본성을 다시 드러내는 과정입니다. 새로운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니라 본래 있던 맑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분노가 일어날 때 아 지금 진흙이 일어나고 있구나라고 알아차리십시오. 그리고 가만히 기다리십시오. 그 진흙은 반드시 가라앉습니다. 물은 반드시 다시 맑아집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수행이고 이것을 경험하는 것이 깨달음의 시작입니다. 분노의 본질을 이해하고 알아차림과 자비로 분노를 바라보는 법을 배웠다면 이제 남은 것은 하나입니다. 그것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몸으로 행하고 일상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수행이 될 때 비로소 그 가르침은 진정한 힘을 발휘합니다. 금강경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열애가 말한 인욕 바람일은 곧 인육 바람일이 아니니 이것을 인육 바람일이라 이름한다. 이 말씀은 처음 들으면 매우 난해하게 느껴집니다. 이뇭 바람일이 인육 바람일이 아니라니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부처님께서 금강경 전체를 관통하여 전달하시려는 메시지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참된 인욕은 이를 악물고 참는 것이 아닙니다. 참는다는 생각조차 없는 것 참아야 할 대상 자체가 실체가 없음을 꿰뚫어 보는 것 그것이 참된 인욕입니다. 금강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전생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깔이 왕이라는 폭군이 있었는데 이 왕이 부처님의 전생인 인육선인의 몸을 칼로 베었습니다. 사지를 하나하나 잘라내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이육선이는 분노를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전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나에게는 아상도 없었고 인상도 없었으며 중생상도 없었고 수자상도 없었다. 만약 내게 아상이 있었다면 반드시 분노가 일어났을 것이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이륙선이니 초인적인 인내력을 가졌다는 것이 아닙니다. 핵심은 분노가 일어나지 않은 이유가 바로 나라는 집착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나라는 것이 없는데 누가 고통을 받겠습니까? 나라는 것이 없는데 누가 분노를 일으키겠습니까? 음 이것이 금강경이 가르치는 인욕의 궁극적 경지입니다. 물론 이 경지는 하루 아침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도 수많은 전생에 걸쳐 수행을 쌓으신 끝에 이 경지에 이르셨습니다. 그러나 방향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가 지금 당장 이륙선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분노가 나라는 집착해서 온다. 된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수행의 방향이 잡힙니다. 그리고 그 방향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 바로 일상의 수행입니다. 일상에서 분노를 지혜로 바꾸는 실천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아침에 출근길 지하철에서 누군가 발을 밟았을 때 그 순간 올라오는 짜증을 알아차리는 것 회의 중에 동료가 내 의견을 무시하는 듯한 말을 했을 때 속에서 뜨거워지는 감정을 인식하는 것 가족과 대화하다가 사소한 말다툼이 시작되려 할 때 한 호흡 쉬고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 이런 작은 실천들이 모여 큰 변화를 만듭니다. 부처님께서는 팔 정도 가운데에 바른 말 즉 정월을 가르치셨습니다. 분노가 일어났을 때 가장 먼저 주의해야 할 것이 바로 말입니다. 분노의 순간에 내뱉는 말은 칼보다 날카롭습니다. 한번 입 밖으로 나간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벚구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거친 말을 하지 말라. 그 말은 그대에게 되돌아온다. 분노의 찬말은 고통을 부르고 메맞는 것처럼 그대를 헤친다. 이 가르침은 참으로 정확합니다. 분노 속에서 내뱉은 말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 말로 인해 가장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결국 말을 한 자기 자신입니다. 왜 그때 그런 말을 했을까라는 후회가 밤잠을 설치게 만들고 한번 금이 간 관계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습니다. 분노의 순간에 말을 멈추는 것 이것이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강력한 수행입니다. 화가 올라올 때 말하기 전에 세 번의 호흡을 하는 것 이 단순한 행위 하나가 수많은 관계를 살리고 수많은 후회를 막아 줍니다. 세 번의 호흡은 길지 않습니다. 고작 10 여 초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10여 초가 분노에 사로잡힌 말과 지혜로운 침묵 사이의 간격을 만들어 줍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바른 행위 즉 정업도 분노의 실천과 깊이 연결됩니다. 분노가 일어났을 때 어떤 행동을 선택하느냐가 그 이후의 삶을 결정짓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업의 법칙을 가르치셨습니다. 모든 행위에는 그의 상응하는 결과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분노에 따라 행동하면 분노의 업이 쌓입니다. 그 업은 씨앗이 되어 미래에 다시 분노의 상황을 만들어 냅니다. 반대로 분노가 일어나는 순간에 자비로운 행동을 선택하면 자비의 업이 쌓입니다. 그 업은 미래의 자비로운 상황을 만들어내는 씨앗이 됩니다. 매 순간의 선택이 미래의 나를 만들어 간다는 것 이것이 업의 가르침이 전하는 핵심입니다. 함경에는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마음이 곧 화가이니 온갖 세간을 그려낸다. 이 말씀은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결국 우리 마음이 그려낸 것이라는 뜻입니다. 분노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온통 분노할 일로 가득 차 보입니다. 어디를 가나 나를 환하게 하는 사람이 있고 무엇을 해도 불만스러운 일이 생깁니다. 그러나 자비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같은 세상이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바뀐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이 바뀐 것입니다. 마음경의 가르침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 경에서 말하는 인다라망의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하늘의 제석천 궁전에는 무한한 구슬이 그물처럼 엮여 있는데 하나의 구슬에 다른 모든 구슬이 비치고 다른 모든 구슬에도 그 하나의 구슬이 비칩니다. 이것은 모든 존재가 서로를 비추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뜻입니다. 내가 분노하면 그 분노가 주변으로 퍼져나갑니다. 내가 평화로우면 그 평화도 주변으로 퍼져나갑니다. 한 사람의 마음이 달라지면 그 사람이 속한 가정이 달라지고 가정이 달라지면 사회가 달라지며 사회가 달라지면 세상이 달라집니다. 이것은 추상적인 이상론이 아니라 화원경이 밝히는 존재의 실상입니다. 분노를 지혜로 바꾸는 수행에서 용서의 문제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용서를 어려워합니다. 용서하면 상대방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 같고 나의 고통을 무시하는 것 같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용서는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자기 자신의 분노의 감옥에서 해방시키는 행위입니다. 분노를 품고 사는 것은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는 것과 같습니다. 그 감옥의 벽은 내가 쌓은 것이고 그 감옥에 문을 잠근 것도 나 자신입니다. 용서는 그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그리고 그 열쇠는 항상 내 손 안에 있습니다. 정토불교의 전통에서는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는 염불수행이 분노를 다스리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가르칩니다. 분노가 올라오는 순간 나무아미타불을 열 번만 외워보라고 합니다. 10번의 연불 동안 분노의 에너지가 염불의 에너지로 전환됩니다. 이것은 미신이 아니라 마음의 에너지를 전환하는 실질적인 수행 방법입니다. 분노에 쏠려 있던 주의력이 염불 소리에 옮겨가면서 분노의 불길이 자연스럽게 약해지는 것입니다. 스티베트 불교의 전통에서는 분노를 다루는 독특한 방법이 있습니다. 분노를 억누르거나 없애려 하지 않고 분노의 에너지를 직접 바라보라고 가르칩니다. 분노의 에너지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순수한 에너지입니다. 그 에너지가 집착과 만나면 파괴적인 분노가 되지만 지혜와 만나면 명경지수처럼 맑은 거울의 지혜로 변환된다고 합니다. 이것을 오지의 가르침이라 하는데 분노의 에너지가 대원경지라는 지혜로 변환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원경지란 모든 것을 잇는 그대로 비추는 거대한 거울과 같은 지혜입니다. 분노가 가진 날카로운 에너지 대상을 명확하게 파악하는 힘 불의를 감지하는 예민함. 이런 것들이 지혜와 결합하면 세상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보는 힘이 됩니다. 그러므로 분노는 단순히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지혜로 변환해야 할 원재료이기도 합니다. 역사 속에서 위대한 선사들의 이야기를 보면 분노를 지혜로 승화시킨 사례를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남 선사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날 때 성내는 그놈이 누군지 돌이켜 보라 이 한마디가 분노를 수행으로 바꾸는 전환점이 됩니다. 분노가 일어나는 순간 이 분노를 느끼는 자는 누구인가라고 자기 자신에게 묻는 것 이 물음은 분노의 에너지를 자기 성찰의 에너지로 전환시킵니다. 화를 내고 있는 그 주체를 찾아 들어가면 결국 고정된 주체는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분노하는 나라는 것은 조건에 의해 순간적으로 만들어진 허상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선불교에서 말하는 화두 참고이며 분노 속에서도 깨달음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일상 속에서 분노를 지혜로 바꾸는 구체적인 실천법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분노 얘기를 쓰는 것입니다. 하루를 마치며 오늘 분노가 일어났던 순간을 돌아봅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 분노가 일어났는지를 기록합니다. 그리고 그 분노 아래 어떤 기대가 있었는지 어떤 집착이 있었는지를 적어 봅니다. 이 과정을 꾸준히 반복하면 자기 분노의 패턴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어떤 상황에서 특히 화가 나는지 어떤 사람에게 특히 예민한지 어떤 집착이 반복적으로 분노를 일으키는지가 드러납니다. 이 패턴을 아는 것만으로도 분노에 대한 대응력이 크게 높아집니다. 둘째 분노가 일어났을 때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자타불이 즉 나와 남이 다르지 않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내가 고통을 싫어하듯 상대방도 고통을 싫어하고 내가 행복을 원하듯 상대방도 행복을 원합니다. 나를 환하게 한 그 사람도 나와 마찬가지로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는 존재입니다. 이 관점의 전환이 분노를 연민으로 적대감을 이해로 바꾸어 줍니다. 셋째 메일 자비 명상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잠들기 전 5분이면 충분합니다. 눈을 감고 조용히 자기 자신에게 내가 평화롭기를이라고 마음속으로 말합니다. 그다음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다음 중립적인 사람에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려운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같은 마음을 보냅니다. 이 수행을 한 달만 꾸준히 해보면 분노가 일어나는 빈도와 강도가 눈에 띄게 줄어드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넷째 분노가 일어나는 순간에 신체적 반응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화가 올라올 때 의식적으로 호흡을 깊고 길게 합니다. 들숨에 네 박자를 세고 날숨에 6 박자를 새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쑥보다 길게 하면 부교감 신경이 활성화되어 몸의 긴장이 풀립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가르치실 암반수의경의 호흡 수행과도 맥이 닿아 있습니다. 호흡을 통해 몸을 안정시키면 마음도 따라서 안정됩니다. 음 다섯째 감사의 마음을 키우는 것입니다. 분노와 감사는 동시에 존재하기 어려운 감정입니다. 매일 자기 전에 오늘 하루 감사한 1세 가지를 떠올려 보는 것 이 단순한 습관이 마음의 기본 설정을 분노해서 감사로 바꾸어 줍니다. 감사의 마음이 커지면 분노가 들어설 자리가 줄어듭니다.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시기 전 마지막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모든 형성된 것은 무너지게 마련이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수행하라. 이 마지막 말씀 속에 분노를 다스리는 수행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모든 형성된 것은 무너진다는 것 이것은 분노 역시 형성된 것이므로 반드시 무너진다는 뜻입니다. 영원한 분노란 없습니다. 그러나 게으르지 말고 수행하라는 것은 분노가 저절로 사라지기만을 기다리지 말고 적극적으로 수행하라는 뜻입니다. 분노를 이해하고 알아차리고 자비로 감싸안고 지혜로 전환하는 이 모든 과정이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수행의 길입니다. 이 기류에서 중요한 것은 완벽함이 아닙니다. 수인자라서 화를 전혀 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제자들 가운데서도 화를 내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분노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분노가 일어났을 때 그것을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분노에 사로잡혀 끌려가는 것과 분노를 알아차리고 지혜롭게 대응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한번 실패하더라도 괜찮습니다. 화를 내고 후회했다면 그 후회 자체가 이미 알아차림의 시작입니다. 다음에는 조금 더 빨리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고 그 다음에는 더 빨리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며 언젠가는 분노가 일어나는 바로 그 찰나의 알아차리는 순간이 올 것입니다. 그 순간이 올 때 분노는 더 이상 고통이 아니라 깨달음의 기회가 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2500여. 년의 세월을 넘어 지금 이 순간에도 유효합니다. 분노가 일어날 때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화가 나는 바로 그 순간이 수행의 순간이고 분노가 일어나는 바로 그 자리가 도량입니다. 절에 앉아 있을 때만 수행이 아니라 화가 치밀어 오르는 바로 그 순간에 알아차림을 놓지 않는 것 그것이 참된 수행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인육 바람일은 참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그대로를 꿰뚫어 보는 지혜입니다. 분노가 실체 없는 것임을 보는 것이며 분노의 대상도 실체 없는 것임을 보는 것이며 분노하는 나 역시 실체 없는 것임을 보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모두 실체 없음을 볼 때 분노는 저절로 쉬어집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자비가 피어납니다. 분노가 쉬워진 자리에 자비가 피어나는 것 이것이 부처님께서 2500년 전에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으신 진리의 한 조각입니다. 오늘 이 이야기가 여러분의 마음에 작은 씨앗 하나를 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분노가 일어날 때 이 이야기를 떠올려 주십시오. 그리고 한 번의 호흡 한 번의 알아차림 한 번의 자비로 그 분노를 마주해 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