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訓民正音)
매년 10월 9일은 한글날 이다.
훈민정음 곧 오늘의 한글을 창제해서 세상에 펴낸 것을 기념하고, 우리 글자
한글의 우수성을 기리기 위한 국경일 이다.
우리 고장 청주시 내수읍 초정리에는 세계 3대 광천수로 꼽히는 약수터가 있다.
세종 대왕께서 병을 핑계 삼아 이 약수터로 요양을 오셨다.
거기서 비밀리에 한 가지 프로젝트를 진행하셨는데, 이름 하여 ‘훈민정음’
창제다.
왜 세종대왕은 남의 눈을 피해 약수터까지 가서 한글을 개발하였을까?
1,443년(세종 25년) 창제된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의 독자적 창작물이다.
집현전 학자들의 도움이 있었다는 것 은 사실과 다르다.
임금이 손수 문자를 창작한 것 도 기이한 일이지만,
그 창작 과정이 매우 비밀스러웠다는 점도 흥미로운 일이다.
1,446년 세종은 번잡한 정무를 의정부에 맡기고 본격적으로 한글 창제에 착수 하였다.
세종 26년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상소문을 올려 언문을 반대하였다.
대국인 중국의 문물을 흠모하고 섬기며 따르려는 모화사상(慕華思想)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사대부 이상의 양반들은 문자가 대중화 되는 걸 싫어했다.
글을 몰라 사회적 약자 지위에 있는 서민들에게 답답함을 풀어 주려는,
세종대왕의 뜻과는 배치되는 분위기였다.
이에 따라 세종은 비밀리에 훈민정음 창제 작업에 들어갔다.
궁궐에 있으면 늘 신하들의 눈에 뜨인다.
밤에 몰래 일어나 불을 켜도 상궁들이 보고, 다음 날이면 영의정에게 고자질을 한다.
세종은 30대 후반부터 풍병(風病)과 당료 등 질병에 시달렸다. 밤늦도록 공부하느라 안질도 앓고 있었다.
그래서 온천으로 요양 간다는 명분으로 보름 동안 신하들의 눈을 피하기도 했다. 세종은 온천을 찾아다니는 동안 한글을 연구한 것이다.
1,443년(세종 25년) 한글을 창제하여 1,446년 훈민정음을 반포하였다.
한글은 지구촌 모든 문자 중에서 문자의 창제자, 창제일, 창제 목적이 분명한 유일한 문자다.
누구나 알기 쉽게 사용하여, 백성의 삶을 편안하게 하려는목적의식을 갖고 만들어졌다.
한글은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문자다.
인류가 발명한 가장 위대한 소리 문자이며, 유네스코가 인정한 유일한 문자다.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변하고, 정보 기술 시대를 지나 인공지능(AI)시대로 진입하면서, 문자 작성, 문자 전달 능력은 글자의 우수성이 판별된다.
한글은 영어 보다 3배 빠른 문자 작성, 문자 전달 능력이 입증되고 있다.
일본어 보다 5배, 중국 보다는 8배가 빠르다고 한다.
21세기 말 경이면 한글이 오늘날 영어의 위상을 차지할 것이라고 한다.
‘한강의 기적’을 이뤄 낸 한국인은 이제 ‘한글의 기적’을 위해 뛰고 있다.
지구촌 방방곡곡에서 한글을 공식 외국어로 지정하여 열심히 공부하는 사례가 많다.
우리 무역 영토의 확대, K팝과 한류 드라마 등 문화 스포츠 열풍으로 한글의 위상은 지구촌에서
크게 높아지고 있다.
민족마다 말이나 글이 따로 있다.
세계에는 3,000개가 넘는 언어가 있다고 한다.
민족의 언어는 그 민족의 역사를 기록하고 보관해 온 문화의 보고(寶庫)다.
전 세계에서 문맹률 0%를 기록하는 나라는 대한민국뿐이다.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 반포하기 전까지, 우리 민족은 말은 있었으나그것을 적을 글자는 없었다.
말은 시간적 공간적 제약을 받는다.
말을 하는 그 시간,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그것들을 들을 수가 없다.
말을 글자로 적으면 먼 곳에 있는 사람이나, 다른 시대에 사는 사람에게도 지식과 정보, 자기의 생각을 전달할 수가 있다.
글자가 없으면 지식의 축적, 문화의 발전은 기대할 수가 없다.
우리는 우리말을 적을 수 있는 글자가 없어, 중국의 한자를 빌어다가 썼다.
이러한 장애를 걷어 내기 위해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하셨다.
한 성군(聖君)은 우리 민족에 헤아릴 수 없는 큰 복을 주셨다.
우리는 한글의 창제와 그 우수성을 기리고, 고마움을 마음에 새기며, 한글과 국어의 발전을 다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