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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지인지감 〈40〉 君子가 처신하는 도리, 小人이 처신하는 행태
君子가 처신하는 도리, 小人이 처신하는 행태
조선 중종 때의 名재상 정광필.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변별(辨別)하는 잣대 중 하나는 그 사람의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남[進退]을 살피는 것이다. 우선 이와 관련된 《논어(論語)》의 구절들을 살펴보자. 술이(述而)편에 나오는 공자(孔子)의 말이다.
“(임금이) 써주면 (나아가 도리를) 행하고 (임금이) 버리면 (도리를 담아두고서) 숨어 지낼 줄 아는 것을 오직 너하고 나만이 갖고 있구나!”
이는 공자가 수제자 안회(顔回)를 향해서 한 말이다. 이는 원래 군자의 즐거움[說]에 속하는 것이다. 소인은 자신의 편안함만을 즐거워하지만 군자는 평소에는 도리를 닦다가 기회가 되면 벼슬에 나아가 백성[小人]들의 즐거움을 더해주는 일을 자신의 도리로 삼는 사람들이다. 이런 맥락에서 먼저 자로(子路)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보자.
〈공자가 위(衛)나라에 갈 때 염유(冉有)가 수레를 몰았다. 공자가 “인민이 많구나!”라고 하자 염유는 “이미 인민이 많으면 또 무엇을 더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공자는 “그들을 부유하게 해주어야 한다”고 답했다. 또 염유가 “이미 부유해지면 또 무엇을 더해야 합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사람답게 사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답했다.〉
富國强兵과 敎化
여기서 인민이 많다는 것은 다름 아닌 군사력이 강하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군사, 부유함, 가르침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안연(顔淵)편에 나오는 공자와 자공(子貢)의 대화와 깊이 연결된다.
〈자공이 바른 정치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자 공자는 이렇게 답했다.
“먹을 것을 풍족하게 하고[足食] 군대를 풍족하게 하고[足兵] 백성들이 정치지도자들을 믿고 따르게 하는 것[民信]이다.”
이에 자공이 다시 물었다.
“어쩔 수 없이 셋 중의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어떤 것을 먼저 버려야 하겠습니까?”
공자는 “군사를 버려야 한다”고 답했다. 다시 자공이 물었다.
“어쩔 수 없이 나머지 둘 중의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어떤 것을 먼저 버려야 하겠습니까?” 공자가 답했다.
“양식을 버려야 한다. 예부터 사람은 누구나 다 죽음이 있거니와 사람은 믿음이 없으면 설 수 없다.”〉
결국 두 편을 연결해보면 ‘부국강병(富國强兵)’과 ‘교화(敎化)’로 요약할 수 있다. 안연편을 편벽되게 해석하는 주자학(朱子學)은 족식(足食)과 족병(足兵)은 내버려둔 채 모든 것이 교화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한당(漢唐) 시대를 한마디로 ‘공리(功利)만을 좇던 시대’로 매도하고 부국강병을 자신들의 관심이 아니라고 여겼다.
그러나 자로편과 안연편을 교차해서 읽어보면 공자의 본뜻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부국강병과 백성들을 도리로써 가르치는 일은 모두 군자의 마땅한 임무다.
이렇게 이해할 경우, 군자는 임금이 써주지 않을 때는 바로 이와 같은 부국강병의 방책과 교화의 방법을 늘 함께 연마하고 있다가 임금이 써주게 되면 자리에 나아가 백성들을 넉넉하게 하고 나라를 튼튼히 하며 풍속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쏟아야 한다.
한 줌도 안 되는 공리공담(空理空談)이나 현실과 동떨어진 고담준론(高談峻論)으로 임금의 눈과 귀를 붙잡아 자리나 차지하는 것은 결코 공자가 말한 군자의 도리가 아니다. 이미 공자는 양화(陽貨)편에서 바로 이런 그릇된 부류의 인물군(人物群)에 대해 통렬하게 경고한 바 있다.
“비루한 사람[鄙夫]과 함께 임금을 섬기는 것이 과연 가능할 수 있을 것인가? (벼슬을) 얻기 전엔 그것을 얻어보려고 걱정하고, 이미 얻고 나서는 그것을 잃을까 걱정한다. 정말로 잃을 것을 걱정할 경우 (그것을 잃지 않기 위해) 못 하는 짓이 없을 것이다[無所不至].”
백성들의 삶을 구제할 능력도 없이 그 자리를 맡아 백성들을 부리는 관리만큼이나 비루한 사람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런 사람을 옛사람들은 ‘속유(俗儒)’라 불렀다. 속물 같은 유학자라는 말이다.
역사를 좋아한 정광필
연산군의 뒤를 이은 중종(中宗)은 40년 넘는 재위 기간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족적을 남기지 못한 용군(庸君)이다. 그러나 왕조 시대의 인물은 임금이 만들기도 하지만 시대가 만들기도 한다. 중종 시대를 대표하는 정승 하면 두말할 나위도 없이 정광필(鄭光弼·1462~1538)이다. 과연 그는 어떤 인물이며 어떤 재상이었나?
광필의 아버지는 성종 때 의정부 좌참찬(議政府 左參贊)을 지낸 난종(蘭宗)이다. 1462년(세조 8년)에 태어난 광필은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 어려서부터 배움에 힘써 경전(經傳)과 자사(子史)를 독송(讀誦)해 은미한 말과 심오한 뜻을 묵묵히 이해하고 환하게 연구하여 널리 통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한다. 그의 신도비(神道碑)에 따르면 “《좌씨춘추(左氏春秋·춘추좌씨전)》와 《주자강목(朱子綱目·자치통감강목)》을 좋아해 손에서 잠시라도 놓는 일이 없었으니 속유가 다른 사람의 글귀를 표절하여 필요한 때에 써먹거나 과거 시험에 응시하기 위하여 공부하는 것과는 같지 않았다”고 한다.
1492년(성종 23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해 벼슬길에 들어섰으나 초급관리 시절이 끝나기도 전에 성종이 세상을 떠나 연산군 시대를 맞이했다.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친 그는 1503년(연산군 9년)에 등급을 뛰어넘어 홍문관 직제학(弘文館 直提學)에 제수됐으며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옮겼다. 이때부터 이미 폭군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 연산(燕山)은 자신에 대해 간언(諫言)하는 자를 원수처럼 미워했다. 그럼에도 광필은 일찍이 소(疏)를 올려 연산이 사냥에 탐닉하는 것을 간언했다가 이듬해 아산현(牙山縣)으로 귀양 갔다.
“이때 법령(法令)이 준엄하여 귀양 처벌을 당한 자는 자유롭게 지내지 못하였는데 공은 빗자루를 들고 관문(官門)을 지키면서도 짜증내거나 싫어하는 기색이 없었다.”
마침내 1506년 반정이 일어나 광필도 유배에서 풀려나 날개를 달았다. 훈구(勳舊)와 사림(士林) 모두에게 신망이 컸던 그는 중종 초기 진급에 진급을 거듭했다. 1507년(중종 2년) 특별히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제수됐다. 1508년(중종 3년)에 병조(兵曹)로 전직됐으며, 사헌부 대사헌을 거쳐 등급을 뛰어넘어 한성부 판윤에 제수되고 얼마 있다가 예조판서로 옮겼다. 이조에서 예조에 이르기까지 항상 경연(經筵) 춘추관을 겸직했다.
極諫으로 후궁이 왕비 되는 것 막아
그의 이런 빠른 승진은 무엇보다 반정공신의 한 사람인 성희안(成希顔)의 지원에 힘입은 바 크다. 성희안은 일찍부터 정광필이 정승감임을 알아보고서 계속 초탁(超擢)하여 마침내 정광필은 1513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오른다.
말수가 적은 정광필이었지만 국가의 중대 사안에 대해서는 자기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1515년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죽고 중종의 총애를 받던 후궁이 자기 소생을 끼고 왕비의 자리에 오르려 하자 홍문관 동료들을 이끌고 경전(經傳)을 인용, 극간(極諫)해 새로이 왕비를 맞아들이게 한 것은 그 한 가지 예일 뿐이다.
무난해 보였던 중종 시절 관리 생활 중에서 첫 번째 위기가 1519년(기묘년・중종 14년)에 찾아왔다.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난 것이다. 당시 상황을 신도비는 잘 압축해서 기록하고 있다.
“기묘년에 두세 명의 신하가 거짓으로 벌레 먹은 나뭇잎과 참서(讖書)를 만들고는 액정(掖庭·후궁 경빈 박씨를 말함)을 통해 몰래 아뢰어 천총(天聰)을 의혹시켰다. 그러고는 밤에 신무문(神武門)을 열고 편전(便殿)에 입대(入對)하자, 천위(天威·임금의 위엄)가 진동하여 앙화(殃禍)를 장차 예측할 수 없었는데, 어떤 이가 말하기를 ‘조정의 대사(大事)를 수상(首相·영의정인 정광필을 말함)이 알지 못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자 마침내 공을 불렀는데, 공이 상(上) 앞에 이르러 만 번 죽기를 무릅쓰고 구원하여 화해시키려 하자 상이 진노하여 일어나버렸다. 이에 공이 상의 옷자락을 붙잡고 따라가면서 눈물이 말을 따라 흐르자 상 또한 느껴 깨닫고서 마침내 부월(斧鉞·사형의 형벌)을 너그러이 했으니 이는 공의 힘이었다.”
이처럼 정광필은 국량(局量)이 크고 바른 재상이었다.
權臣 김안로와 대립하다
두 번째 위기는 당대의 권간(權奸) 김안로(金安老)와의 충돌에서 찾아왔다. 처음에 안로가 아직 현달(顯達)하지 않았을 때 정광필이 그를 ‘간사한 사람[憸人]’으로 지목한 바 있었다. 그가 임금과 인척이 되자 내전(內殿) 세력에 의지하여 호곶(壺串)의 목장을 차지해 전답(田畓)을 만들려고 했다. 공이 태복시제조(太僕寺提調)로 재임하면서 법을 끌어대어 허락하지 않자 또 임금의 명령이라고 일컬으면서 반드시 그곳을 얻으려고 했다. 그러나 정광필이 굳게 거부하고 따르지 않자 김안로가 앙심을 품었다. 김안로가 폄척(貶斥)되어 지방에 있을 적에 그를 방환(放還)하려는 자가 있었는데 정광필이 또 자주 그 일을 중지시켰다.
이윽고 김안로가 권력을 쥐게 되자 사사로운 원한을 복수하고자 꾀하여 조정에 화근(禍根)을 빚어냈는데, 공이 재상인 이행(李荇)에게 말하기를 “김안로는 결코 착한 사람이 될 수 없다”고 하니 이로 말미암아 원한을 쌓아 온갖 방법으로 공을 함정에 빠뜨렸다. 결국 정광필은 영의정에서 물러나 중추부 영사(領事)가 됐다. 실권(實權)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김안로의 계략에 의해 1537년 유배를 떠나야 했다.
다행히 6개월 만에 김안로 세력이 실각하는 바람에 정광필은 한양으로 돌아와 다시 중추부 영사를 맡았는데, 그가 한양으로 돌아올 때의 모습과 더불어 그가 세상을 떠난 사실을 신도비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서울로 들어오던 날에 도성 사람들이 발돋움하여 구경하느라 저잣거리가 텅 비었으니, 마치 사마광(司馬光)이 낙양(洛陽)에서 궁궐로 나아오던 때에 조야(朝野)가 목을 빼고서 그가 재상으로 복직하는 것을 바라보던 것과 같았다. 그러나 갑자기 질병에 걸려 일어나지 못했으니 무술년(戊戌年·1538·중종 33년) 12월 갑신일(甲申日)로 춘추는 77세였다.”
‘비루한 사람’의 전형 이기
뛰어난 재주를 갖고서도 욕심이 지나쳐 바른 도리를 망각하는 자가 있다면 예나 지금이나 비난의 대상이 될 만하다. 조선 명종 초 윤원형(尹元衡)을 도와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킨 이기(李芑·1476~1552)와 정순붕(鄭順朋·1484~1548)이 바로 비부(鄙夫)의 전형이다.
먼저 이기는 연산군 7년(1501)에 문과에 급제했고 1527년 한성부 우윤(右尹)이 되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경상도관찰사·평안도관찰사를 거치면서 민정과 국방에 이바지했다. 1533년 공조참판에 오르고, 이어서 예조참판 한성부판윤을 역임했다. 1539년 진하사(進賀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러한 공로로 국왕이 이기를 병조판서에 임명하려 했으나 이조판서 유관(柳灌)이 장리(贓吏)의 사위로서 서경(署經)을 받을 수 없다며 반대했다. 이 때문에 유관은 나중에 보복을 당했다. 국왕의 신임과 이언적(李彦迪)의 주장으로 형조판서가 되고, 이어 병조판서로 발탁됐다. 1543년 의정부 우찬성에 이어 좌찬성·우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인종(仁宗)이 즉위해 대윤(大尹) 일파가 득세하자 윤임(尹任) 등이 부적합하다고 탄핵하여 판중추부사·병조판서로 강등했다. 이에 원한을 품고 있던 중 명종이 즉위해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을 하자 윤원형과 손잡고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실록이 전하는 그의 악행의 일부다.
〈이기는 인품이 흉패(凶悖)하고 모습은 늙은 호랑이와 같았으므로 그 외모만 보아도 속마음을 알 수가 있었다. 평소 집에서 책을 펴고 글을 읽으며 자칭 학문의 심오한 뜻을 깨쳤다 하고 조그마한 일에 구애하지 않고 대범한 척하였다. 일찍이 송경(松京)의 일사(逸史) 서경덕(徐敬德)과 학문을 논하다가 서경덕이 그의 학문을 인정하지 않자 노기(怒氣)를 나타냈다.
중종 말년에 재신(宰臣)이 그가 쓸 만하다고 천거함으로써 흉계를 부릴 길이 드디어 통하게 된 것이다. 윤임의 일이 있자 이를 자기의 공으로 삼아 드디어 정승의 지위를 점거하고 또 권병(權柄)을 장악했다. 그리하여 모든 정사가 그에게서 나왔고 권세는 임금을 능가했다. 당당한 기세는 타오르는 불길 같아 생살여탈(生殺與奪)을 마음대로 하였으므로 공경·재상·대간·시종이 모두 그의 명령을 받아 움직였다. 따라서 모든 화복(禍福)은 그의 희노(喜怒)에 좌우되고, 은혜를 갚고 원수를 갚음에 있어 사소한 것도 빼놓지 않았다. 자신을 의논할 경우 처음에는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하다가 끝내는 철저히 보복하여 전후 살해한 사람이 매우 많았다. 그러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숨을 죽이며 조심하여 감히 이기에 대해 언급하지 못했다.
사방에서 실어오는 물건이 상공(上供)보다 많았으며, 귀천(貴賤)이 마구 몰려들어 그 문전은 마치 저자와 같았다. 그의 자제(子弟), 희첩(姬妾), 비복(婢僕), 배종(陪從) 등이 배경을 믿고 작폐한 것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었다. 이기의 아들 이원우(李元祐) 역시 교활·우매하고 연소한 일개 무인(武人)인데, 아비 기의 연줄로 대언(代言)이 되었다. 동료들이 함께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으나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기가 끝내 수상이 되어 스스로를 정책국로(定策國老)에 비기면서 하지 않는 짓이 없었으므로 대간이 이에 사력(死力)을 다해 논박하여 상위(相位)만은 체직(遞職)시켰으나 호랑이를 찔러 완전히 죽이지 못한 두려움은 남게 되었다. 이기가 다시 수상이 되자 과연 맨 먼저 발의한 대간을 죽이는 등 마구 흉독을 부렸다.
하루는 입시(入侍)하였다가 갑자기 풍현증(風眩症)을 일으켜 상 앞에서 넘어졌다. 수레에 실려 집으로 돌아와 인사(人事)를 살필 수 없는 지경이었는데도 수년 동안 권병을 놓지 않았다. 그리하여 대간이 논계한 뒤에야 비로소 체직하였고, 그가 거의 죽게 됨에 미쳐서는 온 조정이 논계했으나 끝내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惡에 强한 자, 惡에 柔한 자
정순붕은 1504년(연산군 10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사림과 교유했다. 1516년(중종 11년) 조광조(趙光祖)·박상(朴祥)·김정(金淨) 등과 더불어 사유(師儒)로 선발되고, 이어 이조판서 송천희(宋千喜)의 천거로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되었다. 1518년에는 김정국(金正國)·신광한(申光漢) 등과 함께 경연강독관(經筵講讀官)으로 선발되었다.
이듬해 좌부승지·충청도관찰사를 지내고 형조참의에 이르렀다. 기묘사화가 일어나 사림이 일망타진되면서 이에 연루, 전주부윤으로 좌천됐다가 1520년 파면되고, 이듬해 관직이 삭탈되었다. 1531년 이래 영의정 정광필 등에 의해 등용이 논의되었으나 실현되지 못하고, 김안로 일당이 제거돼 기묘사화로 죄를 받은 사림이 모두 풀려나면서 등용되었다.
1539년 공조참판에 제수되어 곧 명(明)나라에 다녀와 명나라에서 구한 《황명정요(皇明政要)》 《요동지(遼東志)》 6권을 나라에 바쳤다. 1542년 형조판서로 승진하고, 곧 호조판서로서 오랫동안 국가 재정을 주관하였다. 1544년 의정부 우참찬으로서 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를 겸임하다가 대사헌이 되었다. 인종이 즉위하여 대윤이 득세하면서 의정부 우참찬에서 지중추부사로 체직되었다. 명종이 즉위하여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윤원형·이기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켰는데, 그는 이기 등과 어울려 음모를 꾸며 많은 사람을 죽이고 귀양 보내니 사람들은 그를 이기 등과 더불어 간흉(姦凶)이라고 불렀다.
대개 사람이 악을 행하는 데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시기하고 음험하여 남을 죽이는 것을 좋아하는 경우는 악에 강(强)한 자로서 이기 같은 예이며, 그것이 악인 줄 알면서도 위력에 겁을 내어 악을 행하는 자는 악에 유(柔)한 자이니, 곧 정순붕의 경우이다. 관직은 의정부 우찬성에 오르고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하였다. 을사사화의 공로로 유관의 가족들을 적몰하여 자기의 노비로 삼았는데, 그중 갑이(甲伊)라는 여종이 주인 유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염병을 전염시켜 죽게 했다 한다.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으나 1578년(선조 11년) 관직과 훈작이 모두 삭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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