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 최종진
내 죽어 다시 태어난다면
한 조각 구름이나 되어
어느 황량한 산 위에
호젓이 떠 있으리라
설령 내 생명이
바람에 정처 없이 떠돌지라도
한 오리 애착도 남기지 않고
산산이 부서져 비 되어 떨어져도
애처로울 것 하나 없는
가벼운 영혼이고저
밤이면 별들의 속삭임도 들어보고
떨고 있는 초생달도 품어 보리라
꽃 피는 전화 / 나태주
살아서 숨 쉬는
사람인 것만으로도 좋아요
그럼요 그럼요
거기 계신 것만으로도 참 좋아요
그럼요 그럼요
오늘은 전화를 다 주셨군요
배꽃 필 때 배꽃 보러
멀리 한번 길 떠나겠습니다
소 / 정연복
커다란 눈망울 가득
하늘 담은 순한 소
뚜벅뚜벅 한 걸음 한 걸음
제 갈 길로 가는 우직한 소
코뚜레에 메이고서도
안달 떨지 않는 소
그 억센 뿔
좀처럼 들이대지 않는 소
이따금 음매 음매
구슬피 우는 소
머리부터 발끝, 꼬리까지
남에게 몽땅 주고 가는 바보 같은 소
너는 꼭
예수나 부처의 모습이다
세신洗身 / 허용회
세신은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다
번식과 유혹을 꿈꾸는 모든 것들도
세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야생화를 보아라
틈틈이, 빗방울과 새벽이슬로 세신을 하고
햇살에 내미는 그들의 얼굴은 얼마나 아름다우냐
벌과 나비와 바람까지
그들을 찾는 이유도
때 묻지 않은 영혼과 유희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생들아
세신할 땐 오감의 촉수에 낀
생의 염증도 함께 씻어 내자
잠글 수 없는 슬픔 / 유용선
저 혼자 여닫을 수 있는 슬픔이면
하마 슬픔이랄 것도 없네
정작 큰 슬픔은
자물쇠를 남기지 않네
당신 가버렸을 때
내 손 닿지 못할 곳으로 가버렸을 때
그제서야 알게 될 둔중한 슬픔
나로 인해 당신 슬퍼하는 줄을
내 설령 아둔한 머리로 헤아린다 한들
이대로 당신 가버린다면
내 손 닿지 못할 곳으로 가버린다면
이 또한 잠글 수 없는 큰 슬픔
가슴을 찢긴 당신
자물쇠를 든 늙은 여자
유월의 시
/ 김남조
어쩌면 미소
짓는
물여울 처럼
부는 바람일까
보리가 익어가는 보리밭 언저리에
고마운 햇빛은
기름인양하고
깊은 화평의
숨쉬면서
저만치 트인
청정한 하늘이
성그런
물줄기 되어
마음에 빗발쳐
온다
보리가 익어가는 보리밭
또 보리밭은
미움이 서로
없는 사랑의
고을이라
바람도 미소하며
부는 것일까
잔물결 큰물결
의 출렁이는
비단인가도 싶고
은물결 금물결의
강물인가도
싶어
보리가 익어가는
푸른 밭
밭 머리에서
유월과 바람과
풋보리의
시를 쓰자
맑고 푸르른
노래를 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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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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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4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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