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제3권
세종조(世宗祖) 고사본말(故事本末)
찬술(纂述)과 제작(制作)
<번역문(飜譯文)>
전략(前略)
○ 옛날 신라(新羅) 때에 설총(薛聰)이 처음으로 이두(吏讀)를 만들어서 관가(官家)나 민간(民間)에서 이제까지 써왔으나 모두 글자를 빌려 만들었기 때문에 더러는 난삽(難澁)하기도 하고 통하지 않기도 하였으니, 비루(鄙陋)하고 근거가 없을 뿐만이 아니었다.
임금이 생각하기를, “모든 나라가 각기 자기 나라의 글자를 만들어서 자기 나라의 말을 기록(記錄)하는데, 유독(唯獨) 우리나라에만 그것이 없다”하여 친히 자모(字母) 28자를 창제하여 ‘언문(諺文)’이라 이름하였으며, 궁중(宮中)에 언문청(諺文廳)을 설치하고, 신숙주(申叔舟)ㆍ성삼문(成三問)ㆍ최항(崔恒) 등에게 명하여 편찬(編纂)시켜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이름하였다.
초종성(初終聲)이 여덟 글자이니, ㄱ ㄴ ㄷ ㄹ ㅁ ㅂ ㅅ ᅌ이요, 초성(初聲)이 아홉 글자이니, ㅈ ㅊ ㅌ ㅋ ㅍ ㅎ ᅀ ㅇ이요, 중성(中聲)이 열한 자이니,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ㆍ이었다. 그 글자 체는 옛전자[古篆]와 범자(梵字; 인도자)를 모방(模倣)하여 만들었다.
그리하여 모든 말소리나 한문자(漢文字)로서 기록(記錄)할 수 없는 것을 막힘 없이 통달하게 하였고, <홍무정운(洪武正韻)>에 실린 모든 글자 역시 모두 언문(諺文)으로 쓰게 되었다.
드디어 오음(五音)으로 나누어 구별을 지었으니, 곧 아음(牙音)ㆍ설음(舌音)ㆍ순음(脣音)ㆍ치음(齒音)ㆍ후음(喉音)이었다.
순음(脣音)에는 가볍고 무거운 것의 다름이 있고, 설음(舌音)에는 정(正)과 반(反)의 구별이 있으며, 글자 중에서도 역시 전청(全淸)ㆍ차청(次淸)ㆍ전탁(全濁)ㆍ차탁(次濁)ㆍ불청(不淸)ㆍ불탁(不濁) 등의 차이가 있어, 비록 무식(無識)한 여인(女人)이라도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이가 없었다.
중국(中國)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黃瓚)이 때마침 요동에 귀양와 있었으므로 성삼문(成三問) 등에게 명하여 황찬을 찾아가 보고 음운(音韻)에 관한 것을 질문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요동에 왕복하기를 무릇 열세 차례나 하였다.
《용재총화》 《동각잡기》
○ 그때 임금이 처음으로 언문(諺文)을 만들자 집현전(集賢殿)의 모든 선비가 함께 불가함을 아뢰어, 심지어는 상소하여 극도로 논한 이까지 있었다.
임금이 최항(崔恒) 등에게 명하여 <훈민정음(訓民正音)>과 <동국정운(東國正韻)> 등의 책을 지었다.
《사가집(四佳集)》
후략(後略)
[출처=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itkcdb/mainIndexIframe.jsp]
<원문(原文)>
전략(前略)

후략(後略)
[출처=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itkcdb/mainIndexIframe.jsp]
[필자(筆者) 주(註)]
모든 말소리를 기록(記錄)할 수 있었던 언문(諺文) 곧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언자(諺字)를 임금이 주도(主導)하여 만들어 놓았는데도 불구(不拘)하고,
당시(當時)의 고급(高級) 지식인(知識人)들이 최소한(最小限) 언문(諺文)과 한문(漢文)을 혼용(混用)하는 일이라도 일찍이 시도(試圖)하였어야 되는데,
언문(諺文)을 활성화(活性化)시키지 못하고 한문(漢文)을 숭상(崇尙)하였던 조선(朝鮮) 시대(時代)의 대다수(大多數) 식자(識者)들을 후세(後世)의 사람들은 어떻게 평가(評價)하여야 될까요?
그러한 불합리(不合理)는 이른바 “소중화”(小中華) 사상(思想)의 발로(發露)이었을까요?
근세(近世) 필가(筆家)로 유명(有名)한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의 아들이었던 이긍익(李肯翊, 1736년~1806년)이 쓴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이라는 책(冊)도 한문(漢文)으로 기록(記錄)되었는데, 이것이 오늘날과 같은 언문일치(言文一致) 형식(形式)의 문장(文章)으로 쓰여졌다면 매우 좋았을 것이라고 봅니다.
혹시(或是), 그 당시(當時)에 한문판(漢文版)만이 아니라 언문판(諺文版)도 함께 간행(刊行)되었다면 어떠하였을까요?
참고(參考)로 언급(言及)하면,
최립(崔岦, 1539년~1612년)의 문집(文集) <간이집(簡易集)> 제3권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文句)가 나옵니다.
“우리 동방(東方)은 중화(中華)의 시서(詩書)와 예악(禮樂), 전장(典章)과 문물(文物) 등을 모두 사모(思慕)하여 본받고 있으므로, 평소(平素)에 소중화(小中華)라고 일컬어져 왔다.”
중략(中略)
“그런데 유독(唯獨) 언어(言語)만은 끝내 서로 통(通)할 수가 없어서 대면(對面)할 때마다 반드시 통역(通譯)을 거쳐야만 하니, 이것은 참으로 유감(遺憾)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사(文辭)의 경우(境遇)에는 중국(中國)과 근접(近接)해 있었다”고 최립(崔岦)이 주장(主張)하였지만, 언어(言語)는 그러하지 않았으므로 불편(不便)하였을 것입니다.
한문(漢文)에 능통(能通)한 지식인(知識人)들은 어떤 글을 쓸 때에 한문(漢文)만으로도 어려움이 없었겠지만, 일반(一般) 백성(百姓)들이 자유자재(自由自在)로 한문(漢文)을 읽고 쓰기에는 곤란(困難)하였을 것입니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언자(諺字)는 후대(後代)에 “한글”로 개칭(改稱)되고 나서야 그 가치(價値)를 발휘(發揮)하였으니, 정말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첫댓글 힘들게 배운 한문 양반 티 낼여고 한것이 문제 지금의 영어 배운 티 낼여고 안달하는 깡통과 일맥상통 진짜 실력자가 한글을 사랑한다면 깡통들은 사라지겠지,,
언문은 소리글자이고 한문은 뜻 글자이므로, 학문을 하는데는 뜻 글자가 더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대학에서는 교과서를 원서를 보는 경우가 많지 않나요?
티낼려고 한거 보다 특권층으로 진입하기 더 좋으니간 그길을 막은겁니다 대표적인게 우리네 로펌이나의료계 이런거죠 자기밥그릇 방어를 위해서 인턴이나연수기간
늘리는거 이런게 다 한방법 돼겟네요....
관심과 코멘트, 감사합니다.
"기다리슈" 선생님..... 본 <카페>는 "실명제"입니다.
본 <카페>에서는 최소한 "자기 이름"(실명/본명)을 내걸고 글을 쓰셔야 합니다.
참고로, 본 <카페>의 "내 정보"에서 "닉네임"을 "실명"(본명)으로 수정하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