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흘러간다. 가로막으면 스며들어 흘러간다 이민복(대북풍선단장)
<전지전능한 북한 수령도 막을 수 없는 '물 흐름'> 물 흐름 같다는 것은 무엇일가.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는 당연한 것을 말한다. 사회 역시 사람 본능에 따라 흘러간다. 본능을 짐승 같다고도 하지만 엄연한 근본이다. 이기심을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인간을 고등화하고 신성화해도 본능을 거스를 수 없다. 그럼에도 거스르면 잘살 수 있다고 한 사상이 있다. 맑스, 레닌주의, 모택동 사상, 김일성 주체 사상이 그렇다. 하지만 실제 해보니 안 된다는 것은 소련과 동구권 붕괴, 중국, 베트남 공산국의 개혁 개방으로 증명되었다. 하지만 이를 유지하는 마지막 나라가 있다. 북한이다. 북한 수령은 신 격이다. 신 격은 오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수령이 <사회주의는 과학>이라고 교시한다. 그 결과 전쟁도 아닌 평화시에 300만 명이 굶어 죽었다. 그럼에도 <나에게 변화를 기대지 말라>고 교시한다. 하지만 물은 흘러간다. 가로 막으면 스며들어 흘러간다. 개인 뙈기밭 농사와 개인 장사가 바로 그것이다. 300만 명이 굶어 죽어나가자 이 흐름은 노골화되었다. 전지전능한 수령도 막을 수 없는 흐름이다. 이 흐름의 역사를 체험한 대로 적으려 한다. 1969년 11살 때 황해북도 서흥군 읍에서 살았다. 읍 농장 마을에 한 여인이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었다. 협동농장 누에를 먹일 뽕을 따다가 사고사한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유난히 모두 애석해한다. 개인 뙈기밭을 몰래 여기저기 해 놓았는데 그가 죽자 어디인 줄 모르게 된 것 때문이다. 당시는 공산주의화를 위한 <천리마운동>이 최고조로서 개인 이기주의를 철저히 박멸하자 투쟁할 때이다. 살아 있을 때에는 비판 대상이었지만 정작 그가 죽자 하나같이 그의 부지런함을 칭찬하며 아쉬워한다. 1972년 14 살 때 평안남도 은산군 읍에서 살았다. 당시는 제 5차 당 대회 결정인 혁명화 고조 시대이다. 혁명화 투쟁 대상은 자본주의(개인주의)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몰래 농장 과수원 곁 공지에 고구마를 심으셨다. 생 쑥을 베어 고구마 밑거름을 하시던 모습이 선하다. 힘겨운 농장 일을 하루 종일 하시고도 무슨 힘이 남는지 모르겠다. 말 같이 크는 다섯 자녀가 한창 먹을 때인데 식량 배급은 군량미로 한 달에 사흘 분이나 떼고 주니 모성 본능으로 <자본주의>를 하신다. 나도 좀 머리가 컷다고 <엄마! 자본주의 하면 어떻게 해요> 하니 <그래 잡아 가라지> 하며 담담하신다. 실제 잡아가는 일은 없었다. 날카로운 사상 투쟁 분위기 속에서도 부지런한 사람들은 소소하게 할 수 있는 대로 했다. 이런 현상은 북한보다도 급진적이었던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59년까지 중국에 살다 북한에 이주한 김성숙 탈북자가 증언한다. 개인주의를 박멸하던 대약진 시대에도 은퇴한 노인들이 빈 땅을 일쿠어 개인 농사를 했다고 한다. 1992년 방금 무너진 소련에 탈북 노정 가보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소련 승용차들은 지붕에 짐 싣는 틀이 거의 다 있었다. 다챠(별장)에서 농사지은 것을 싣기 위함이었다. 이런 다챠의 개인 뙈기밭 면적은 소련 경지 면적의 1%라고 한다. 하지만 생산량은 소련 국가 생산량의 25%나 차지했다고 한다. 개인주의를 공권력으로 가로막으니 이상과 같이 스며드는 식으로 흘러 갔다. 마침내 중국은 1978년 등소평의 개혁 개방으로 물꼬를 텄다. 모택동 때 2억 톤 농산량은 등소평 때 4 억 톤으로 증산되었다. 이에 자극되어 소련도 1985년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으로 물꼬를 텄다. 소련과 밀접했던 베트남도 1985년 도이모이 정책으로 물꼬를 텄다. 그러면 북한은 어땠을까. 1978년 등소평의 개혁개방 영향을 받아서인지 그 다음해에 북한도 뭔가 변화하려고 했다. 1979년 남포농업대학 연구소 연구원으로 있을 때이다. 김일성 교시에 의하여 남포시를 특별시로 국제화한다는 것이다. 생생히 기억나기를 - 상해, 홍콩, 싱가포르와 같은 국제 도시로 만든다는 것이다. 3년 안에 거리에서 외국인들과 함께 거닐게 될 것이라고 했다. 금요 노동날에는 대학에서 먼 와우도 국제 도시 건설장에 걸어가 일하고 또 걸어 오느라 죽을 맛이었다. 온수 난방으로 주택을 지었지만 개 발에 버선 격이다. 기본적인 국제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북한 형편에서 입주자들은 추워 죽을 판에 연탄 난방으로 다 뜯어고쳤다. 이보다는 정치적 이유 즉 공산권 내에서 시위 사태인 1980년 바웬사의 폴란드 노조 사건으로 위축된다. 평양과 너무 가까운 곳에 개방 도시는 위험하다고 본 것이다. 개방 지역은 평양과 가장 먼 라진 선봉 지대로 옮겨 다. 이 지역마저 완전 개방을 할 수 없음은 추후의 일이다. - 중국처럼 개혁 개방은 못하였지만 그로 미친 영향은 컸다. 김 부자의 1983년 <8.3인민소비품생산운동>이 대표적이다. 단체별로 농사나 생활 필수품을 생산해 쓰라는 것이다. 생산물은 국가에 바치는 것이 없는 획기적인 조취였다. 당시 나는 농업과학원 강냉이연구소 연구원으로 있을 때였다. 연구실별로 과외 시간에 뙈기밭을 일쿠어 농사를 지었다. 단체 별로 하라는 <자본주의>는 폭발적으로 개 별로 나갔다. 아무 것도 못하게 했을 때도 스며들며 <자본주의>를 했는데 단체별로 하라고 하니 이게 웬 떡이야 걷잡을 수 없게 번져나갔다. - 1985년 당시 나는 양강도 김정숙군 풍양리 5반(보파리)에 현지 연구시험 나가 있었다. 봄철 동이 틀 무렵 산등성이에서 <빠가닥 빠가닥> 소리가 마을에 울려 퍼져 온다. 너도나도 개인 뙈기밭을 일쿠는 소리이다. 당에 충실한 노 당원 아마이(여자 노인)가 부락 당 비서(세포비서)가 집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이실직고한다. <아이고! 저거 봐요. 저거! 자본주의!> 그러자 웃으면서 부락 당 비서가 천연덕스럽게 하는 말 <아마이두 핫게 나!>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든 듯 그 아마이도 그날로 뙈기밭 하려 간다. 풍향리 분주소장(파출소)은 우람한 체구로 영화 엑스트라로 나온 적이 있다. 김일성의 부인이자 김정일의 엄마인 김정숙을 그리는 영화 <마을 사람들 속에서>의 일본 기마 경찰로 나와 유명하였다. 그도 은퇴하자 다음날로 개인뙈기밭 하려 산에 올라갔다는 것은 마을 사람들의 입에 오른 표징 같은 사건이다. 이 개인주의는 역사상 처음으로 일상생활에서 확 느껴질 만큼 풍요를 불러왔다. 여유 식량이 생기자 평시 먹기 힘든 두부와 떡, 술과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연구원으로서 출장이 많은 내가 가는 곳곳에서 느끼건데 신기한 것은 어떻게 국가가 아닌 개인들이 가격을 공평하게 정하는가였다. 일례로 곡식, 수산물, 생필품 가격이 너무나 적정하게 정해져 유통된다는 것이다. 훗날 알게 된 <보이지 않는 손> 창시자 아담 스미스 이론을 저는 북한 개인주의에서 먼저 실감 있게 체험하였다. 국영 상점들이 텅텅 비어 스산할 정도인 것은 1970년 초반부터이다. 그 반대 현상으로 장마당은 사람들로 붐비었다. 즉 <개인 상점>인 장마당에서는 고양이 뿔 내놓고 다 있다고 했다. 개인주의는 집단주의를 한순간 잡아 먹어 버릴 저력(흡수)이 있었다. 심지어 당국에 까지 영향을 끼쳐 <박철 사건>을 만들어내기도 한다(1985년). 아마도 이 사건은 북한 역사상 처음되는 농업 개혁이라 할 수 있다. 정무원 총리, 중앙당 농업담당비서와 과학담당비서까지 관여되었던 이 사건까지 쓰자면 너무 길어진다. 지금 쓴 분량만큼 차지할 큰 사건이기에 다음 호로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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