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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 47,1-9.12
그 무렵 천사가
1 나를 데리고 주님의 집 어귀로 돌아갔다.
이 주님의 집 정면은 동쪽으로 나 있었는데, 주님의 집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 동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 물은 주님의 집 오른쪽 밑에서,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려 갔다.
2 그는 또 나를 데리고 북쪽 대문으로 나가서, 밖을 돌아 동쪽 대문 밖으로 데려갔다.
거기에서 보니 물이 오른쪽에서 나오고 있었다.
3 그 사람이 동쪽으로 나가는데, 그의 손에는 줄자가 들려 있었다.
그가 천 암마를 재고서는 나에게 물을 건너게 하였는데, 물이 발목까지 찼다.
4 그가 또 천 암마를 재고서는 물을 건너게 하였는데, 물이 무릎까지 찼다.
그가 다시 천 암마를 재고서는 물을 건너게 하였는데, 물이 허리까지 찼다.
5 그가 또 천 암마를 재었는데, 그곳은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어 있었다.
물이 불어서, 헤엄을 치기 전에는 건널 수 없었다.
6 그는 나에게 “사람의 아들아, 잘 보았느냐?” 하고서는, 나를 데리고 강가로 돌아갔다.
7 그가 나를 데리고 돌아갈 때에 보니, 강가 이쪽저쪽으로 수많은 나무가 있었다.
8 그가 나에게 말하였다.
“이 물은 동쪽 지역으로 나가,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로 들어간다.
이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면, 그 바닷물이 되살아난다.
9 그래서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고기도 아주 많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12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5,1-16
1 유다인들의 축제 때가 되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2 예루살렘의 ‘양 문’곁에는 히브리 말로 벳자타라고 불리는 못이 있었다.
그 못에는 주랑이 다섯 채 딸렸는데,
3 그 안에는 눈먼 이, 다리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 같은 병자들이 많이 누워 있었다.
(4)·5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도 있었다.
6 예수님께서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래 그렇게 지낸다는 것을 아시고는,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그에게 물으셨다.
7 그 병자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8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9 그러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다.
그날은 안식일이었다.
10 그래서 유다인들이 병이 나은 그 사람에게, “오늘은 안식일이오.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 하고 말하였다.
11 그가 “나를 건강하게 해 주신 그분께서 나에게,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12 그들이 물었다.
“당신에게 ‘그것을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요?”
13 그러나 병이 나은 이는 그분이 누구이신지 알지 못하였다.
그곳에 군중이 몰려 있어 예수님께서 몰래 자리를 뜨셨기 때문이다.
14 그 뒤에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성전에서 만나시자 그에게 이르셨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15 그 사람은 물러가서 자기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라고 유다인들에게 알렸다.
16 그리하여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건강해지고 싶으냐?”>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서 들은 왕실 관리의 아들을 치유하신 ‘두 번째 표징’에 이어 벌어진 ‘세 번째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축제 때가 되어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어, 안식일에 ‘벳자타 못’을 방문하셨습니다.
거기에는 많은 병자들과 서른여덟 해나 앓아누워 있는 병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서른여덟 해 동안 광야생활에 찌들고 문드러진 이스라엘 백성의 표상입니다.
바로 우리들의 표상입니다.
그가 있는 ‘벳자타 못’에는 ‘물’이 있었습니다.
‘물’은 성경에서 죽음과 생명이라는 상반된 두 가지의 상징과 동시에 정화의 상징입니다.
노아의 홍수와 홍해의 물은 파괴와 죽음임과 동시에 정화와 생명의 상징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에제키엘서의 물과 복음의 ‘벳자타’의 물도 그렇습니다.
정화와 생명의 물은 첫 번째 표징인 ‘가나안의 혼인잔치’에서 새 생명의 포도주로, 파괴와 죽음의 물은 여섯 번째 표징인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걷는 장면’에서 발 아래 짓밟혀질 것입니다.
‘벳자타’라는 말은 ‘은혜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는 ‘은혜의 집’인 여기 ‘벳자타’에서 은혜로운 생명의 물을 마시며 살아갑니다.
어쩔 수 없는 약함과 무능력을 한 아름 보듬고서 말입니다.
벗어나지 못한 질병과 악습과 상처를 부둥켜안고서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
(요한 5,6)
“예”라고 즉각적인 믿음으로 대답하지 못하고, “저를 물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하면서 구실과 변명을 들이대며 투덜대는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요한 5,8)
이는 당신이 참된 '물'이심을 말합니다.
곧 ‘벳자타의 물’로가 아니라, 당신 ‘말씀의 물’로 그를 적셔주시어 그를 걸어가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당신 말씀이 바로 ‘생명의 물’입니다.
곧 당신 자신이 바로 ‘생명의 물’이심을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를 받은 병자에게 들것을 버리고 가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들것에 주저앉아 있지 말고 그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십니다.
자신의 몸을 얹어놓았던 들것을 이제는 스스로의 손으로 들고 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말씀의 물을 마시고 '일어나야' 할 일입니다.
'들것을 들고 걸어가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치유를 받는다는 것은 자신이 누워있던 들것을 버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꺼이 사랑의 표지로 들고 가는 것임을 말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구원의 표시로 지니신 오상처럼, 그 상처를 통하여 우리에게 베푸신 그 자비, 그 사랑을 들고 걸어가야 할 일입니다.
나아가 이제는 다른 앓는 이들에게 들것이 되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상처에서 십자가를 관상해야 할 일입니다.
곧 우리에게 베풀어진 자비와 구원을 관상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절망과 무기력한 사순이 아니라, 파스카를 향한 희망과 기쁨의 사순을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다른 앓는 이들에게 들것이 되어주면서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요한 5,8)
주님!
깔고 있던 들것을 떨치고 일어나게 하소서.
일어나 들것을 들고 걸어가게 하소서.
입은 자비를 드러내게 하소서.
이제는 앓는 이들에게 들것이 되어주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성전다운 성전>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뜬금없이 돌아가신 백안젤로 수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사람들이 사람, 사람 하는데 사람이면 다 사람인가, 사람이 사람다워야지 사람이지!"
이 말씀이 생각난 것은 ‘성전이면 다 성전인가, 성전이 성전다워야지 성전이지!’ 이런 말을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은 ‘성전다운 성전’으로 잡아봤습니다.
성전다운 성전은 두말할 것도 없이 하느님께서 그 안에 계신 성전이지요.
하느님께서 아니 계시면 아무리 아름답게 지어도 성전이 아니고, 신자들이 아무리 많이 모여 있어도 성전이 아니지요.
그러나 오늘 독서와 복음에 비춰 볼 때 성전이란 생명의 물이 넘쳐흐르는 곳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은 또한 사랑이 넘쳐흐르는 곳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공동체는 생명의 물이 없고 그래서 죽어가는 공동체란 말입니다.
왜냐면 사랑이 없는 공동체는 아무런 관심이 서로 간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환자는 서른여덟 해나 앓았는데도 주님처럼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묻는 사람이 없었고,
성전 물에 데려가 주는 사람이 없었고, 그래서 병을 치유할 수 없었습니다.
관심이 없는 곳, 이런 곳이 사랑이 없는 곳의 대표적인 곳입니다.
다음으로 사랑이 없는 곳이란 관심은 없고 욕심만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상대는 내 욕심의 대상일 뿐입니다.
당연히 서로는 욕심의 희생자들이 될 것이고, 심지어 욕심 때문에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곳에서는 당연히 생명이 넘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설치겠지요?
세 번째는 관심도 많고 욕심도 많은 곳입니다.
이런 곳에는 사랑도 있겠지만 사랑만큼 미움도 많을 것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핑계 없는 무덤 없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무엇이고 결과가 있는 것은 반드시 원인이 있듯이 무슨 일이든지 핑계는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핑계를 댄다는 것은 대개는 자기를 인정하지 않고 탓을 남에게 돌리는 마음이 거기에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주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하고 물으시자 아담은 아내 핑계를 댑니다.
또 아내는 뱀에게 책임을 떠넘겼습니다(창세 3,11- 13).
루카복음 14장 15절 이하에 보면 혼인 잔치의 비유가 나옵니다.
초대받은 사람 중 첫 사람은 “밭을 샀는데 그것을 보아야 한다.”고 하였고, 다른 사람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보려고 가는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방금 장가를 들었소.”하며 핑계를 대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벳자타 못가에는 이따금 주님의 천사가 내려와 물을 휘젓곤 하였는데, 물이 움직일 때 맨 먼저 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든 나았습니다.
그런데 많은 병자 중 어떤 사람은 서른여덟 해나 앓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건강해지고 싶으냐?”하고 물으시자 그는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 저를 저 못 속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가 “예, 낫고 싶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안타깝게도 그는 물이 움직일 때 자기를 물에 넣어주지 않는 사람들과 자기보다 먼저 물에 들어가는 어떤 사람을 탓하고 원망하는 투로 대답을 대신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낫게 해 주실 분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자기의 처지를 한탄하며 낫고 싶은 희망을 표현하였습니다.
나를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나쁜 놈’이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나뿐 놈’ 이랍니다.
오직 나만 아는 사람이지요.
오직 자기에게만 관심을 두고 있었으니 그렇게 38년 동안이나 있었지 않았을까?
또한 주변에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었더라면 그렇게 오랜 고통 속에 머물러 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하긴 누구에게나 자신의 병이 가장 절박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모두가 주님의 능력을 만났을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서 하느님을 뵐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하긴 주변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그럴 만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병자에게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 5,8) 하시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습니다.
그것을 본 유다인들이 병이 나은 사람에게 “오늘은 안식일이오.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들 것’을 들었다는 것, 다시 말하면 안식일에 일하는 것만을 보았습니다.
율법에 매여서 볼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아야 할 것은 38년이나 앓다가 걸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봐야 했습니다.
고통을 거두어 주셨다는 것에 감사해야 했습니다.
주님께서 살리는 일은 이미 시작되었고 앞으로도 지속될 것입니다.
걸어가는 것은, 앞으로도 이러한 일이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해서 남을 탓하지도 말고, 규정을 내세워 살리는 일을 막지도 말아야 하겠습니다.
규정을 내세워 살리는 일을 막는다면 그것도 하나의 핑계가 될 것이요, 사람을 위한 법이 오히려 법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으로 본말이 뒤바뀔 것입니다.
“병든 사람이 병든 질서를 만들고 병든 질서가 다시 병든 사람을 낳습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예수님께서 끊어버리십니다.”
(이현주)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사랑을 거부하는 이들의 마음을 어떻게 열 수 있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벳자타 연못에서 앉은뱅이 병자를 고쳐주십니다.
이는 하느님의 큰 사랑입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그것보다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어긴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들은 왜 이리도 큰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할까요?
그것을 받아들일 그릇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가출하여 길을 헤매는 거지 아이를 집에 데려온 적이 있습니다.
씻겨주고 저희 옷까지 내어주셨습니다.
이는 당신과 같은 처지의 아이를 보고 동정심을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거의 양자로 삼으려는 어머니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 아이에게 이 세상은 그렇게 따듯한 곳이 아닙니다.
자기 부모로부터도 분명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부모도 사랑해주지 않는 자기를 생판 모르는 아주머니가 사랑해 줄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 아이는 우리가 학교 간 동안 돼지저금통을 다 털어 도망을 갔습니다.
오늘 복음의 유다인들이 그러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감당할 능력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찾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받아보지 못하면 자기 부모와 세상을 원망하기 위해 다른 사랑을 거부하게 됩니다.
원망하는 맛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잘해주려는 사람도 거부하고 밀쳐냅니다.
그렇게 더 큰 하느님의 사랑은 알아볼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사람들이 하느님의 살과 피를 내어주는 사랑을 알아볼 수 있게 그 사랑으로 이뤄진 공동체가 있어야 합니다.
그 공동체에서 하느님 사랑의 조각을 맛봐야 합니다.
만약 성당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세상의 공동체와 큰 차이가 없다면 미사에 나오는 것만으로 하느님 사랑을 절대 체험할 수 없습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가 새끼 원숭이를 엄마 원숭이와 격리하여 실험하였습니다.
어미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원숭이는 자해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고 다른 원숭이들을 극도로 멀리하였습니다.
그래서 구원자 원숭이를 넣어주기로 하였습니다.
어미와 몇 달을 살며 세상이 온통 사랑으로 여겨지는 원숭이를 같은 우리에 넣었습니다.
처음에는 도망다니다가 그 원숭이가 털을 골라주자 자신도 미안한지 치유자 원숭이의 털을 골라주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다른 원숭이들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우유를 먹고 밥을 먹고 떡을 먹고 고기를 먹을 수 있습니다.
점점 더 단단한 것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체해서 더 딱딱한 것들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게 됩니다.
유튜브에서 보니 성당 다니던 한 자매가 스토커에게 쫓겨 집으로 들어왔는데 그 자매에게 어떤 사람도 신경 써주지 않았습니다.
그 자매는 세상에 대한 원망과 두려움으로 전기가 통하지 않는 이상한 옷을 만들어 입고 문밖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그 남자가 자기를 전기로 죽이려고 한다는 피해망상증이 생긴 것입니다.
공동체로부터 하느님 사랑을 조금이라도 체험하지 못하면 성체 성혈은 너무 멉니다.
그래서 그런 사랑을 보아도 나와 상관없는 것으로 치부해버립니다.
성사를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이들이 줄어드는 이유는 그 성사를 알아볼 수 있게 만드는 사랑을 가진 공동체가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장 발장도 주교의 사랑을 체험하고 나서야 다시 종교에 귀의할 수 있었습니다.
외적인 선교 이전에 사랑의 친교가 가득한 공동체를 먼저 만들어야 합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일어나라고, 걸어가라고,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건너오라고 외치시는 주님>
저 같은 경우 10년 가량 병치레를 했었는데, 그 기간이 얼마나 길고 끔찍하게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벳자타 연못 가에 누워있는 환자 장장 38년 세월을 앓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가가셨을 때, 스스로 일어나지조차 못해 누워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처음에는 뇌졸중이나 중풍이었겠죠.
점점 병이 깊어가면서 사지가 마비됨으로 인해 나중에는 한걸음 옮기는 것조차 힘들게 되었습니다.
변변한 의료시설이나 치료약이 전무했던 당시에 그런 병에 걸렸다는 것은 한 마디로 사형선고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모진 게 사람 목숨이라고, 점점 깊어가는 병을 바라보며 견디고 또 견디다보니 어언 서른여덟 해가 지나갔습니다.
그동안 옆에 누워있던 다른 환자들은 다들 먼저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그도 이제 자신에게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명이 다하는 멀지 않은 어느 순간 세상 뜨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치료 효과가 좋기로 유명한 벳자타 연못가에 초점 없는 눈동자로 하루하루 세월을 죽여가며 그렇게 누워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그는 목숨이 붙어있기는 했지만 사실 죽은 목숨이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다가가십니다.
그리고 일어나라고, 걸어가라고 외치십니다.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무의미한 죽음의 삶에서 의미로 충만한 생명의 삶으로 건너오라고 외치십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어쩌면 천둥처럼, 그리고 감미로운 산들바람처럼 다가온 예수님의 말씀에 그의 경직되고 마비된 살과 뼈가 순식간에 부드럽게 풀렸습니다.
마치 거짓말처럼 그는 부드럽게 일어섰습니다.
마침내 그 오랜 세월 의지처였던 들것을 자신의 두 손으로 번쩍 들고 자기 발로 걸어갔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런 희망이나 기약도 없이 누워있었던 세월이 38년이었습니다.
당시 유아 사망을 빼고 나면 대체로 50세 정도가 평균 수명이었습니다.
그렇게 따지니 그는 평생토록 들것 위에 누워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그가 은혜로운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인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리를 툴툴 털고 벌떡 일어난 것입니다.
그 옛날 벳자타 연못가의 환자처럼 점점 기력을 상실해가는 오늘 우리 교회, 점점 사지에 힘이 빠지고 마비증세가 두드러지는 오늘 우리 수도회의 모습, 그리고 비슷한 처지인 나 자신의 모습을 걱정스레 바라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기적처럼,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우리 교회를 찾아오실 것입니다.
이제 다 끝났어!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라고 낙담하는 우리에게 아직 거짓말처럼, 따뜻한 봄바람처럼 살며시 다가오실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오늘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벳자타 연못가의 환자가 지니고 있었던 예수님을 향한 굳센 신앙입니다.
그분께서 반드시 나를 치유시켜 주시리라고 확신하는 강렬한 믿음입니다.
그분의 은총에 힘입어 치유를 받고 단 하루라도 사람답게 한번 살아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더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오늘 복음에서 '그날은 안식일이었다.' 라는 말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말’입니다.
이 말은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8)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보다 위에 계시는 분입니다.
벳자타 못 가에서 병자를 고치신 일은 어쩌다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안식일이 어떤 날인지를 가르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하신 일로 해석됩니다.
안식일은 아무것도 안 하는 날이 아니라, ‘좋은 일’(선한 일)과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해야 하는 날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마르 3,4).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 주신 일만 전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에 안식일 문제로 갈등과 충돌이 생겼음을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그 부분에 초점을 맞춰야 그 병자가 왜 예수님을 배신했는지를 설명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안식일 규정 때문에 생긴 갈등과 충돌은 16절부터 박해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로마 3,28)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또는 “예수님을 믿어야만 구원받는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안식일을 비롯해서 율법들을 잘 지켜야만 구원받는다고 확신하는 유대인들의 신념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말입니다.
그런데 벳자타 못 가의 병자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고, 모르니까 예수님을 안 믿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믿음’이 있어서 치유의 은총을 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그의 처지를 가엾게 여기셔서 고쳐 주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의 ‘자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고쳐 주시기 전에나 후에나 당신을 믿으라는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믿음’은 은총을 받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받은 은총에 대한 ‘응답’입니다.
벳자타 못 가의 병자는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은총을 받았고, 은총을 받은 뒤에도 예수님을 믿기는커녕 배신한 사람인데,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은총을 주신 일을 취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일을 병자 쪽에서 바라보면, 그는 예수님을 믿었다면 받게 되었을 ‘구원의 은총’을 받지 못하고 그저 ‘몸의 건강’을 얻은 것으로 그친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영혼의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지상에서 몸의 건강을 누리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그 병자는 서른여덟 해나 앓던 병이 치유된 기쁨보다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는 이유로 처벌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글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안식일을 지켰던 유대인들의 심정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든 그 병자는 자기를 고쳐 주신 예수님께 감사드리지는 않고,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밀고합니다.
그것은 분명히 배신이고 배은망덕입니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그의 치유가 완전히 이루어졌음을 확인해 주신 말씀입니다.
‘더 나쁜 일’은 ‘영혼의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되는 일입니다.
‘몸의 치유’는 예수님께서 해 주셨지만, ‘영혼의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일은 그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합니다.
여기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라는 말씀은 받은 은총을 헛되이 버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신앙인은 이미 주님께서 주신 은총의 씨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 씨를 잘 가꾸고 돌보아서 구원이라는 열매를 맺는 것, 바로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몸의 치유’로만 만족하면서 구원의 은총을 향해서 나아가지 않는 것은 주님께서 주신 씨를 헛되이 버리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구원’이라는 것은 보지 않고, 그날이 안식일이라는 것만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유대인들도, 또 몸만 치유되고 구원의 반대쪽으로 가버린 그 병자도, 모두 영혼이 병들어 있는 자들입니다.
벳자타 못 가에 누워 있는 병자들과 장애자들보다 영혼이 병들어 있는 그자들이 더 불쌍하고 가엾은 사람들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생명수의 샘, 생명수의 강”이 되어 삽시다! - 우리 구원자 주 그리스도 예수님과 함께>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 28,20ㄴ)
이 말씀 꼭 마음에 지니고 사시기 바랍니다.
“곁에 있는 사람을 내 몸처럼 사랑하지 않으면, 세상을 구제하자는 이상도 헛된 구호에 불과하다.”
3월 12일자 다산 어른 말씀도 마음에 깊이 와닿습니다.
"명진스님은 평화의 길 이사회에서 이사장직을 사임했다.
“내 나이 75세면(1950년생), 죽음의 문제를 바라보면서 ‘노후 대책’이 아니라 ‘사후 대책’을 준비해야 할 때”라면서 “이후에는 선원 생활을 하면서 수행에 정진하겠다”고 밝혔다."
노후대책이 아닌, 사후대책을 준비해야 할 때라는 말마디에 공감이 갑니다.
하루하루 거품이나 환상, 허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아야 할 때입니다.
오늘 복음 “벳자타 못 가에서 병자를 고친” 예수님 일화는 요한복음에 일곱 표징 중 세 번째에 속합니다.
어제는 두 번째 표징인 왕실관리의 아들을 살리신 일화였습니다.
예루살렘 양문 곁, 벳자타라 불리는 못에는 주랑이 다섯 채 딸렸는데, 그 안 모습이 흡사 세상의 축소판처럼 생각됩니다.
그 안에는 눈먼 이, 다리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 같은 병자들로 가득했다 합니다.
벳자타 못 주변의 이 사람들은 그대로 꿈과 희망을, 빛과 길을 찾는 인간군상들을 상징합니다.
서른 여덟 해나 앓던 사람과 예수님의 만남이 극적입니다.
병자의 치유받고 싶은 간절한 열망의 눈빛이 주님께 포착된 듯 합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주님을 만나 치유받음으로 운명의 질곡에서 탈출이자 해방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도 의미심장합니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주님을 만남으로 육신의 치유와 동시에 죄를 용서받음으로 영혼의 치유 은총까지 받았으니 이제부터 절대 죄를 짓지 말라 하십니다.
그러나 그자는 예수님의 당부를 까맣게 잊고 예수님을 밀고함으로 배은망적덕의 죄를 짓습니다.
노년에 병마와 힘겨운 전쟁을 치루는, 이제 약을 먹으며 은총으로 사는 이들에게 경각심을 줍니다.
은총으로 사는 처지에 죄를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도할 시간, 사랑할 시간, 회개할 시간을 생각하면 죄지을 시간이 어디 있겠는지요!
진짜 생명의 못, 치유의 못은 벳자타 못이 아니라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수의 샘, 생명수의 강은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생명의 샘, 치유의 샘, 생명의 강, 치유의 강이신 주님과 늘 함께 하는 우리들입니다.
바로 구상 시인의 <오늘>이란 시가 은혜롭게도 이런 진리를 새삼 깨닫게 합니다.
“오늘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하나로 관통하는 생명의 강, 치유의 강, 구원의 강, 진리의 강이신 주님과 함께, 주님 안에서 영원한 현재를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제1독서 성전의 샘에서 솟아나 세상으로 흘러가는 생명의 강이 상징하는 바 우리 구원자 예수님이자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생명의 강인 주님 미사의 강가에 심어져 깊이 뿌리 내린 우리들이 얼마나 큰 은혜를 받고 있는지 깨닫습니다.
주님과 하나되는 미사은총으로 우리가 내놓는 주님의 신망애의 열매들은 이웃에게는 양식이 되고 약이 되겠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에덴 낙원에서도 신기하게 물이 흐르고 무성한 나무들 한 가운데에는 생명나무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제 생명수의 강은 우리 믿는 이들의 영원한 살아있는 꿈이, 희망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성전인(요한 2,21) 예수 그리스도의 몸, 곧 그분의 옆구리에서는(요한 19,34)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물이 흘러 나옵니다.
그리고 마침내 희생된 어린양의 천상어좌에서는 생명수의 강이 흘러나오니 바로 이것이 우리의 영원한 꿈이자 희망입니다.
“그 천사는 또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나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나와, 도성의 한가운데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이쪽저쪽에는 열두 번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다달이 열매를 내놓습니다.
그리고 그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에 쓰입니다.”
(요한묵시 22,1-2).
바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모시는 주님이 끊임없이 흐르는 생명수의 강입니다.
생명수의 강이신 주님과 함께 생명수의 강이 되어 세상을 살리며 흐르는 강같은 삶이 되기를 바라며 바치는 기도시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하느님 사랑의 바다를 향해 흐르는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은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하게 또 격류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주님과 함께
계속 한결같이 흐르는
사랑의 강, 생명수의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준비된 사람’>
1997년 대통령 선거 당시입니다.
73세였던 김대중 후보는 상대적으로 고령의 나이였습니다.
그때 김대중 후보 진영에서 내세운 선거 전략은 ‘준비된 대통령’이었습니다.
김대중 후보는 오랜 시간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투옥되어 교도소에 갇혀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김대중 후보는 교도소에서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자신의 사상을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교도소는 ‘학교’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자동차 사고로, 납치되어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래서 김대중 후보를 ‘인동초(忍冬草)’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추운 겨울을 참아내며 피어나는 풀이라는 뜻으로 모진 어려움을 견뎌내고 뜻을 이룬 사람을 비유하기도 합니다.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생활하는 조건으로 교도소에서 풀려난 김대중 후보는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유수의 정치인들과 교류를 맺었습니다.
그분의 영어 인터뷰를 보았는데 발음에는 약간 어려움이 있지만 뜻을 정확히 전달하는 영어를 구사하였습니다.
준비된 대통령이었던 김대중 후보는 마침내 4번의 도전 끝에 1997년 대한민국의 15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등과 같이 남북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최초로 노별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IMF 경제위기로 벼랑 끝에 몰렸던 대한민국 경제를 ‘금 모으기 운동’과 같은 전 국민적인 노력을 이끌어내고, 고강도의 구조조정으로 IMF 경제위기를 조기에 벗어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저는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 부임하면서 ‘준비된 본당신부’라고 인사하였습니다.
전임 신부님 두 분이 모두 저와 동창신부님이기 때문입니다.
동창 신부님들이 있었기에 예전에 몇 번 방문한 적도 있었습니다.
동창 신부님의 초대로 교우들과 함께 성지순례를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동창 신부님들이 12년간 사목하던 곳이어서 낯설지가 않았습니다.
작년에 부임한 보좌신부님은 제가 신학교에서 ‘설교학’을 가르쳤습니다.
영어를 잘 하는 보좌신부님이 있으니 든든합니다.
무엇보다 저는 한국에서 바로 오지 않고 5년 동안 뉴욕에 있으면서 미국생활을 경험했습니다.
미국에 오면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을 이미 다 거쳤습니다.
쇼셜 넘버를 5년 전에 받았습니다.
미국생활에 꼭 필요한 것들 중에 하나인 운전면허증도 5년 전에 받았습니다.
미국 은행에서 발해해준 신용카드도 받았습니다.
2년 전에는 신문사에 있으면서 그린카드도 받았습니다.
이 정도면 적어도 외적인 면에서는 준비된 본당신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적인 준비는 늘 부족함을 느낍니다.
심지도 않고 거두려는 성급함이 있습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때로 불안과 초조가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곤 합니다.
소탐대실이라는 말처럼 멀리보지 못하고, 작은 것들에 집착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약하고, 부족했던 제자들과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도망치고,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평화’와 ‘성령’을 주셨습니다.
저의 부족함을 예수님께 의탁하며 지내려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벳자타 연못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에서 ‘준비된 사람’을 보았습니다.
38년간 누워서 지내야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벳자타 연못에 들어가서 병을 고치고 싶었지만 아무도 데려다 주지 않아서 연못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38년간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기를 희망하며 벳자타 연못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몸은 물론 영혼까지 깨끗하게 치유해 주시는 분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8년간 눈물로 지내야 했던 사람의 고통을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8년 동안 포기하지 않고 일어나려 했던 사람의 의지를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묻습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
38년 동안 누워있어야 했던 사람은 간절한 마음으로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그러자 38년간 누워있었던 사람은 건강한 몸으로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우리는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사순시기는 우리를 주님과 더욱 가까이 지낼 수 있도록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사순시기는 은혜로운 회개의 때입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남은 사순시기도 기도와 자선, 희생과 단식으로 영적인 준비를 경건하게 하면 좋겠습니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 미국 댈러스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과 전혀 대화를 나눈 적 없는 사람은 부탁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강의를 시작하면서 지갑에서 만 원짜리 지폐를 꺼내 들고 말합니다.
“이 시간에는 여러분에게 만 원을 드리려고 합니다.
제가 만 원을 주도록 저를 설득해 보실 분이 있나요?”
몇몇 지원자가 있었고, 그중에 한 명을 지목하니 왜 자신이 만 원을 가져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휴대전화 충전기가 필요하고, 유니세프에 기부할 예정이고, 내게 꽃을 사줄 생각이랍니다.
저는 “그러시리라 믿어요.”라고 말했지만, 만 원짜리 지폐를 주지 않고 손에 꼭 쥐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원자는 또 다른 말로 설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주지 않습니다.
이제 다른 지원자가 저를 설득합니다.
그런데도 저는 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 지원자들이 제게 하지 않은 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일까요?
맞습니다.
만 원을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만 원이 필요한 이유만을 이야기했을 뿐이지, “만 원을 제게 주세요.”라는 말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원하는 내용을 명확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잘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알아서 해주기만을 바랄 뿐인지 이유만 늘어놓습니다.
단순히 부탁하면 되는데, 복잡하게 꼬아서 말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요?
이런 모습이 바로 과거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잘 지켜야 하느님께서 우리의 바람을 들어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당연히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입장은 조금 달랐습니다.
율법은 사람을 구속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 지도자들이 주장하는 율법은 사람을 구속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벳자타 연못에서 병자를 일으키시어 자신의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문제는 이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율법에 어긋난다는 이유를 들어 유다인들은 그 기적이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낸다고 여기기는커녕 예수님을 단죄하는 절대적 증거로 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인간의 행복을 위한 도구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주님께 가장 중요한 말을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저것을 따지면서 정작 주님께서 듣고 싶은 말을 피하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자기 생각을 앞세워서 다른 사람이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또 주님의 은총 안에 머무는 것을 방해해서도 안 됩니다.
이 모두를 위해 주님과 더 가까운 사이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과의 어떤 대화도 없이, 즉 기도나 어떤 신앙생활도 하지 않았던 분이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하느님께서 그러실 수 있습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십시오.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부탁하기가 쉽던가요?
마찬가지로 하느님과 전혀 대화를 나눈 적 없는 사람은 부탁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부탁도 친밀한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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