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깨침의 종교입니다. 그리고 법문은 그 깨친 법성자리를 해설하는 일입니다. 불 법 승 삼보 가운데 법을 깨달으면 부처님이 되고, 깨닫지 못하고 지금 배우고 있는 이가 바로 승입니다.
부처님이 법을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사는 자리, 즉 다시 말하면 눈에 가면 보고, 귀에 가면 듣고, 손으로 가면 만지고 나무에 들어가면 나무가 살고 바위에 들어가면 바위가 흩어지지 않는 생명체를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 생명체를 안 부처님은 따라서 모든 것이 자재한 분입니다. 그것은 즉 몸을 하나로 만들려면 만들고, 천을 만들려면 만들고, 크고 작게, 무(無)와 유(有) 등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지혜가 치성(熾盛)합니다. 이것은 지혜가 세상의 지식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훨 타오르는 불꽃같이 성하다는 것입니다.
또 부처님은 몸이 단정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32상 80종호로 흔히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궁극적인 깨달음에 이르지 못해도 어느 정도 수행을 하면 스스로 몸이 단정해집니다.
그래서 신(身)·구(口)·의(意) 삼업을 자기 뜻대로 행해도 중생에게 덕이 됩니다. 공자나 예수 같은 성인이 바로 이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법을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고 하였는데 법에 대한 설명은 확실히 드러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아라한은 부처님께서 처음 20년간 설한 법에 대해서만 아는 이들입니다. 즉 애욕이 꺼진 상태를 완전한 열반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법화경에 보면 부처님께서 묘법연화를 설하시면서 아라한들이 이해하지 못함을 알고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하자 아라한들이 ‘우리가 40년간 부처님을 따라다니면서 배울 만큼 배우고 알 만큼 알았는데 왜 설하시지 않는가’하고 자리를 떠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라한들은 이와같이 내가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증상만(憎上慢)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만을 가지고 나라는 집착을 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법화경이나 화엄경의 진리를 가르친다고 해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마치 컵에 물을 먼저 담아 놓으면 뒤에 아무리 좋은 물을 부어도 밑에 물이 차 있기 때문에 물이 들어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법을 알기 위해서는 속에 나란 생각을 텅비우고 빈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즉 자기가 가지고 있는 조그마한 지식에 집착해서는 올바른 법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눈에는 돌가루나 흙가루 등이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멀쩡하게 보이던 눈이 흐려져 눈이 안 보이거나 헛것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금가루는 돌가루나 흙가루보다 좋은 것이니까 눈에 붙여도 괜찮겠지하고 붙이면 역시 안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 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학문이나 지식이 좋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집착하면 본래 법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집착을 하면 그른 것이 되어버립니다. 돈에 집착을 하면 돈의 종이 되고, 음식에 집착을 하면 몸에 탈이 나게 됩니다. 또 약을 먹으면 몸이 낫지만 거기에 집착하여 과용하면 중독이 되어 생명을 잃게 됩니다.
이것은 사람이나 법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람도 너무 부족하거나 지나쳐서는 안되지만 법도 여기에 집착을 하게 되면 오히려 법 자체를 볼 수 없게 됩니다. 즉 한 법에 마음이 집착이 되면 마음이 자재치 못하여 비록 눈을 떴다고 하더라도 잘못된 생각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을 비워야만 물건이 보이고 마음을 비워야 바야흐로 성품이 보인다고 한 것입니다.
법계성은 큰 거울과 마찬가지로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 거울을 아름답게 한다고 거기에다 단청을 하면 본성을 볼 수가 없게 됩니다. 따라서 본성을 보기 위해서는 거울에 앉은 먼지를 닦아내야 합니다.
삼귀의에 보면 ‘귀의법 이욕존(歸依法 離慾尊)’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법체는 일체의 욕심을 떠나 있습니다. 즉 법에는 나라고 주장하고 자기를 도우려는 생각이 없어 모양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입으로는 매일 외우지만 실천을 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육바라밀의 수행으로 우리 마음 가운데 밝은 거울에 페인트 칠해 놓은 것을 닦아내야 법계성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은 신구의 삼업이 낱낱이 티끌 속에 들어 있어 후일 우리가 죽은 뒤 염라국에 가면 죄가 비치는 거울 앞에 서게 된다고 합니다. 저울도 있어서 그간의 죄를 무게로 달기도 하지요.
우리 중생의 한마디 소리와 행동까지 진진찰찰의 낱낱 분자에 가서 녹음이 되고 사진 찍힙니다. 음파·광파가 모두 파동을 쳐서 내가 밉다는 생각을 한다거나 벌레가 하는 일 등 모든 낱낱의 것에 관하여 아는 것이 곧 화엄의 도 리입니다.
천태 지의선사가 법화삼매에 드니까 영산회상에서 부처님이 옛 모습 그대로 설법을 하고 계셨다고 합니다. 우리들도 눈이 뜨이면 옛날 것도 다 보이고, 미래의 것도 다 바라볼 수가 있으며 이와 같은 경지가 되려면 다라니를 공부해야 합니다.
다라니에는 티끌 하나라도 그 속에 시간과 공간의 어떠한 것이든 모두 비쳐보일 수 있는데 이를 사사무애(事事無碍) 즉, 걸림이 없는 경지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사물에는 작은 티끌에 조차 삼세제불의 과거·현재·미래 만상이 다 들어 있으며, 일체 중생의 하는 바가 다 들어 있고, 일체 기세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다 반영되어 있다고 하여 사사무애라고 하지요.
트인 사람은 티끌 하나를 보아도 일체를 다 압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알 수 없는가. 그건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으로 인해 본디 맑고 밝은 마음자리가 바뀌고 만 것이지요.
옛날 중국에는 사람이 죽어 묻힐 때 그 사람이 평소 소중히 여긴 물건과 노비, 첩을 함께 묻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를 순장(殉葬)이라고 하는데, 귀한 목숨들을 재물과 함께 묻고 말았던 것입니다. 죽으면서까지 허황되게 욕심을 냈기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이 생매장되었던 것입니다.
중국의 진나라 때 위무부라는 이가 있었는데 그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 갓 스물 넘은 처녀에게 새장가를 갔답니다. 그에게는 과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에게 내가 죽으면 네 젊은 어머니의 청춘이 불쌍하니 좋은 자리를 보아 시집 보내달라고 이르곤 하였지요.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병석에 누운 뒤로부터는 죽은 다음에도 함께 살고 싶다는 욕심으로 아들에게 순장을 해달라고 하였답니다. 후에 위무부는 죽었고 아들이 곰곰이 생각해보니 옳게 행동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죽을 때 함께 순장해 달라는 아버지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장사를 마친 뒤 젊은 어머니를 적당한 인물에게 시집 보내주었습니다. 이웃에서는 모두 부모의 유언을 따르지 않은 불효막심한 자식이라고 손가락질을 하였는데 위과의 말인즉, 생전의 정신이 맑을 때에 아버지는 시집 보내라 하셨습니 다. 정신이 없을 때에 순장하라 하신 말씀을 따를 수는 없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몇해 후에 전쟁이 났을 때 위과는 장수가 되어 전쟁에 임하게 되었는데 상대가 워낙 큰 세력이어서 걱정근심 속에 지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적진에서 이쪽을 향해 추격하고 있는데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초원의 풀을 잡아매면서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말을 타고 달려오던 적군은 모두 묶인 풀에 말발굽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고, 이쪽 편이 승리를 거두었지요.
그날 밤, 꿈에 머리가 하얀 노인이 나타나기에 누구인가를 물으니, 시집 보낸 계모의 아버지라고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유언을 옳게 지켜주어 내 딸을 구해주었으니, 이 은혜를 어떻게 갚을까 하고 고민하던 중에 이번 기회에 도와줄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결초보은(結草報恩)이라고 합니다.
이야기를 하나 더하겠습니다.
바닷가에 사는 어떤 이가 여의주를 얻었습니다. 원하는 바는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구슬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죽은 뒤 두 자녀가 서로 양보하다가, 바다에서 주운 것이니 다시 바다에 갖다두자며 함께 바다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또 하나의 여의주가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욕심을 버리면 복을 얻는데 욕심, 내 생명이 하나 따로 있다고 하는 집착을 버리면 우주전체의 생명을 만나게 되고 우주가 자기의 것이 될 때를 지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합니다.
우주전체의 법성인 생명은 하나인 줄 모르고 내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식(識)이라고 합니다. 이 식 때문에 안으로는 육근이 생기고 밖으로는 육진이 생겨서 아연히 18계가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밖으로 육진 경계를 따라서 무명망상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깨닫고 나면 진여는 오직 하나일 뿐입니다. 나무에 들어가면 나무가 살고, 벌레에 들어가면 벌레가 살고, 사람에 들어가면 사람이 사는 그 생명체는 하나인 것입니다. 이를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라 부르는데 성품은 하나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마음을 흔히 허공에 비유하곤 합니다. ‘허공과 같다’라고 표현하며 이는 허공보다 더 묘하다는 의미입니다. 허공과 비슷할 뿐 허공과 마음이 같은 것은 아닙니다.
한 선사가 ‘너도 불성이 하나 있고 나도 불성이 하나 있다’고 말하면, 자기도 그렇구나 하고 의심하지 않는 것이 요즘의 풍토입니다. 이것은 옳게 배우는 자세가 아니라 옛부터 가지고 있던 버릇이며, 불법문중에 들어와서도 달라진 것이 없게 됩니다.
결국 불법의 속 깊은 이치는 끝내 만나지 못하게 됩니다. 경전에서 ‘우주의 생명체인 불성은 하나’라고 했으나, 너도 하나 나도 하나 따로 있다는 말이 아님을 모두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조실스님인 마조스님과 청년 수좌 백장스님이 어느 강가를 거닐때의 이야기 입니다. 마조스님이 기러기떼가 훨훨 나는 모습을 가리키며 저 새가 보이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보입니다 수좌가 대답하자 한참 지난뒤에 지금도 그 새가 보이는가? 를 다시 물었고 지금은 날아가서 안 보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마조스님이 백장스님의 코를 잡아비틀었고, 백장스님은 아야!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마조스님이 여기 그대로 있는데 어디로 날아갔다고 하느냐?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날개짓 하며 나는 새의 기운과 자기 코의 아픈 기운이 두 가지인 줄 압니다. 그렇지만 이는 둘이 아닙니다. 한 기운이 눈에 가면 보고, 귀에 가면 듣고, 기러기 속에도 들어가고, 사람속에도 들어가는 것입니다. 의상조사 법성게에서도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이라 하여 우주법체는 하나이지 둘이 없다고 했습니다.
여기 천지 대자연과 더불어 하나가 된 자리에서 우러나오는 즐거움을 노래한 게송이 있습니다.
盡日惺惺坐 진일성성좌
乾坤一眼中 건곤일안중
有朋來草屋 유붕래초옥
明月與淸風 명월여청풍
진종일 화두가 성성하게 앉아 있노라니 / 하늘과 땅이 한 눈 속에 있어라 / 벗이 초옥을 찾아오니 / 밝은 달과 맑은 바람이로다.
첫댓글 南 無 阿 彌 陀 佛 _()_
감사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