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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현대시와 그 평설 36
새 신학적 공간과 시적세계관을 변용시법으로 형상화한 정순자의 시세계
- “수세미” “제부도ㆍ1” “누룽지” “주전자~” “목련” “폭우” “라일락” “해당화” -
조신권(문학평론가 · 연세대 명예교수)
서언
가송(佳松) 정순자(鄭順子, 1944- )는 1944년에 경기도 화성에서 출생하였다. 아호는 가송이고 세례명은 수산나이다.
그는 송산중학교(화성군 송산면)에서 정대구 시인을 만났고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부설 고등학교의 전신인 명성여자고등학교에서는 신동엽 시인을 만나 국어를 배우고 익히며 문학 지도를 받았다
. 그 뿐 아니라, 그는 덕성대학교 평생 교육원 시창작 과정을 수료하였고, 그 과정을 이수하는 중에 박진환 교수를 만나 창작 지도를 착실하게 받았고 지금까지 평생의 시지도 사부(師父)로 모셔오고 있으며, 1998년『조선문학』신인상으로 등단하였다. 그 이후로 형상21시문학회와 한국문인협회 및 현대시인협회 회원으로, 그리고 화성 온 새미로 동인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시 창작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시력이 20여 년이 되는 저력 있는 시인이지만 과작이어서 2004년에야 첫 시집『잣나무 숲 현(絃)이 되어』를 출간했으며, 이 시집으로『조선문학』문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아직 단행본 시집으로 묶여 상재되지 않은 상당히 많은 시들을 보유하고 있다.
시에 대한 평가는 계량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질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시작품이 ‘많고 적음’이 그리 크게 문제가 되진 않는다. 정순자 시인이 그의 첫 시집 ‘책머리에’에서 “시는 언어예술이라는 상식에서 출발, 언어로써 형상화해야한다는 시법에 충실하고자 했고 또 충실하고 있습니다. 시는 내 분신이며 시는 곧 신앙이란 믿음으로 시인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그는 시를 신앙과 동일시하는 1963년에 영세를 받은 신실한 가톨릭 신자요 언어와 시법에 충실하려고 진력을 다하는 소명시인이다. 포도농사를 짓고 있는 농부 시인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소중한 시인이고 찬사를 보내주고 싶다.
정수산나 시인은 서울 출신인 남편을 만나 서울에서 쭉 생활하다가 남편이 정년퇴직 후 남편과 함께 화성 본가로 귀향하여 포도 농사를 지으며 사철 야생화가 만발하고 수다를 떠는 새들과 함께 하며 삶의 지팡이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언어에 실어 수수하고 순박하게 표현하고 있는 시인이다. 또한 그 ‘책머리에’에 다음과 같은 시가 실려 있다.
작은 가슴속에
펄펄 끓고 있는
용광로
아침 이슬
한 방울이라도
소중한
신비 - “서시” 전문
이 시는 아무런 제목도 없이 실려 있는 시지만 윤동주의 서시처럼 시인의 내면세계를 잘 반영해주고 있는 시이어서 평자 자신이 자의로 “서시”라고 명명한 시다. 정순자 시인은 ‘자기 자신’을 ‘잣나무 숲’이나 ‘한 방울의 이슬’로 환유된 신비롭고 소중한 자연세계의 풍경을 담아내는 현악기의 ‘현’으로 환치시키고 있고 시인의 ‘시심이나 열정적인 시적인 정신 또는 시적인 자세’를 펄펄 끓는 ‘용광로’로 환치시켜 시인의 정체성을 극명하게 기술하고 있다. 정시인은 시인으로서의 자아정체성이 뚜렷하고 철저한 소명의식을 가지고 시 창작을 하는 수수한 농부 시인이다. 중세로부터 여러 면에서 ‘농부’하고 제일 가까운 신분의 직인(職人)이 ‘목사’(목양자)와 ‘시인’이다. 이런 정체성이 확고한 시인이야말로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물리적으로보다는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중심을 세우는 중추가 될 수 있고 하심(下心)으로 섬기는 동력적인 시인이 될 수 있다. 그런 시 정신을 그의 대표적인 시를 실례로 해서 면밀하게 분석하며 세찰해보겠다.
자연화 된 새로운 신학적인 신성한 공간 탐색
장소(공간)는 하이데거의 말을 빌면, “인간 실존이 외부와 맺는 유대를 드러내는 동시에 인간의 자유와 실재성의 깊이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인간을 위치시킨다.” 이런 접에서 장소는 단순히 지리적 관심의 대상을 뛰어넘어 인간의 여러 가지 양태적인 삶과 그 의식에 관여하는 현상학적인 사건의 자리가 된다. 일찍이 장소에 대한 인문지리학적인 관심을 두고 통찰한 렐프는 인간의 모든 유의미한 행동의 바탕에 장소가 있으며, 그것이 사물이 위치한 ‘어디’의 공간 개념을 뛰어넘는 사건적인 개념임을 밝혀냈다. 에미뉘엘 레비나스는 장소가 익명의 ‘어딘가’가 아니라, 하나의 ‘기반’과 ‘조건’으로 작용하는 특정한 경험의 전제임을 적시하였다. 논의의 관념의 범주를 넘어서기 위해서 가송 정순자의 시들을 예로 해서 자연의 이미지로 형상화된 새로운 신학적인 공간이 그의 시 속에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살펴보겠다. 맨 먼저 “수세미”라는 시를 세찰해 보자.
빳빳한 수세미는
깨끗이 씻기 위해
부드럽게 기진맥진
파란수세미와 하얀 치약으로
우리와 함께 성전바닥 박박 닦는
그 분 맨손
세족례 열두 명 발
무릎 꿇고 고개 숙여
깨끗이 씻기고 비누질하고
수건으로 물기 닦는
그 분 손
울컥 가슴 저린 벅참
우리영혼 세정시키는
수세미(水洗美)
- “수세미” 전문
이 시는 2연으로 이루어져 있는 2019년에 발표한 시다. ‘수세미’ 또는 ‘수세미 오이’는 용도가 다양한 매우 유용한 식물이다. 여기서 말하는 ‘수세미’는 식용이나 약용 또는 화장용으로 사용되는 그런 수세미가 아니라 빳빳한 파란 껍질을 벗긴 과육이 발달하여 이루어지는 섬유질의 하얀 망사조직으로 되어 있는 수세미인 것이다. 시인에 따르면, ‘수세미’가 깨끗이 씻기 위해서는 빳빳한 파란 껍질을 방망이 같은 것으로 두들겨서 부드럽게 하여만 한다고 한다. 제1연의 1-3행에서 시인은 ‘수세미’를 이렇게 부드럽게 만드는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수세미’를 두들겨서 ‘기진맥진’하게 만든다고 하는 것은 부드럽게 깨지지 않으면 ‘수세미’가 될 수 없음을 암시해주고 있다. 시인이 ‘그분’이라고 지칭하는 ‘하나님’(예수)께서 어떤 사람을 쓰시기 위해서 먼저 하시는 일은 ‘빳빳한 수세미’를 방망이 같은 것으로 두들겨 부드럽게 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시행들의 구조와 문맥을 자세히 살피면 ‘파란수세미’와 ‘하얀 치약’으로 ‘그분’이 맨 손으로 ‘우리’와 함께 ‘성전 바닥’을 박박 닦는 것으로 되어 있다. 만물연쇄와 동일성의 원리에 따라 ‘우리’ 즉 ‘인간’과 ‘신’이 연결되어 있는 것은 틀림없지만 위계질서는 다르기 때문에 ‘신’과 ‘인간’이 동급이 될 수는 없다. 그렇게 보면 신성모독이 된다. 그리고 세척하고 청소할 때 사용되는 ‘수세미’는 ‘파란수세미’와 ‘하얀 치약’로 되어 있지만 둘이 아닌 ‘파란 껍질’(밖)과 ‘하얀 치약’으로 대유된 ‘하얀 망사조직으로 된 섬유질’(안)이 합쳐진 한 도구로서의 수세미다. ‘파란수세미’와 ‘하얀 치약’이 합쳐져 있는 물질이 세척용 또는 청소용 도구로서의 한 ‘수세미’가 되기 위해서는 두들겨서 부드럽게 되어야만 한다. 그것처럼 깨끗이 씻는 도구로서의 우리가 되려면 유연하게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내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방망이 같은 ‘회초리로써 초달’(楚撻)해 주실 때만 가능하다. 그래야 수세미와 함께 성전 바닥을 깨끗이 닦는 청소 도구가 될 수 있다. 여기서 성전의 바닥을 닦는 주체는 ‘그분’이시지 ‘우리’나 ‘수세미’는 아니다. 우리는 ‘그분의 맨손’에 들려진 부셔져 부드러워진 깨끗이 닦는 청소용 도구일 뿐이다. 그분은 ‘수세미’와 동일시되는 ‘우리’의 수종을 받아 성전을 청결하게 하는 주체다. 이렇게 본다면 수세미와 우리는 격이 다르면서도 동일시되는 도구로서의 공간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맨 손에 수세미와 동일시되는 ‘우리’는 ‘성전’을 깨끗이 하는 도구이면서도 성전이라고 하는 전체에 속한 한 부분이라고 본다면 ‘우리’와 ‘성전’은 동일한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제1연은 요한복음 2:1-16절의 인유로 구성된 기상천외의 해석을 유도해 낼 수 있는 기발하고 매우 교묘한 시연이다. 예수(그분)께서는 유월절이 가까웠을 때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이 강도와 장사치들의 소굴로 전락된 것을 보시고 분노하여 ‘노끈으로 만든 채찍’을 가지고 종교에 종사하는 ‘탐욕의 무리들’과 ‘장사꾼들’을 몰아내시고 성전을 정결하게 하신다. ‘파란수세미’와 ‘하얀 치약’에 상응하는 예수가 사용한 수단이 ‘노끈으로 만든 채찍’이다. 예수의 ‘채찍’이 없었더라면 예루살렘 성전의 정결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처럼 성령과 ‘물’로 대유된 ‘말씀’으로 인한 ‘거듭남’과 그 외적 표증인 역동적인 신앙행위가 없이는 더러워진 우리의 마음이 성결해질 수가 없고, 마음에 성령이 와 게시지 아니하면, 곧 신앙과 생활의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성전을 섬기는 수세미나 치약과 같은 도구로서의 ‘성전’이 될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시인이 추구하고 탐색하는 ‘예배의 공간’은 자연의 환유인 ‘수세미’라고 하는 공간 이상의 우리의 거듭난 마음과 동일시되는 성전, 즉 ‘수세미’ 같은 자연물로 동일시하는 자연화 된 ‘새로운 신학적인 신성한 공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파랑’과 ‘하양’으로 대비되는 ‘안’과 ‘밖’이 둘이 아닌 하나로 합쳐진 ‘수세미’ㆍ몸과 영혼이 하나인 ‘우리’ㆍ성전이 동일시되는 새로운 자연화 된 신학적인 공간을 탐색하고 있다는 말이다. 시인이 추구하는 공간은 이미 자본제적인 관성에 묻혀서 숨이 멈춰져 가고 있고 교리화 되어 쇠진해 가고 있는 그런 제도화된 공간 건물이 아니라, 내적인 고백을 통해 이루어지는 마음의 성전 ‘수세미’와 같은 자연화 된 신학적인 공간인 것이다. 그렇다고 시인이 현실교회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열려 있어서 산 실재와 만나고 소통하며 노래하고 춤을 추며 생명을 같이 하는 시인 자신이 경영하는 ‘포도원’과 같은 자연화 된 그런 교회를 추구하는 것이다.
제2연은 요한복음 13장 3-17절의 인유로 이루어져 있다. 유월절이 다가오자 이 시에서는 3인칭 대명사로 표현한 ‘그 분’ 즉 예수께서 제자 12명과 마가의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하시려고 모였을 때, 대야에 물을 가득 떠가지고 와 더러워지고 먼지가 잔뜩 묻은 발을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보통은 종들이 하는 발씻어주는 세족식(세족식)을 하신 사실을 인유함으로써 내러티브 서사로 서정을 확대시켰다. 그래서 화두가 엄숙해지고 진지해진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화두가 아니라 예배드리는 장소와 예배의 본질에 관한 신학적 개념문제다. 사실 교회는 어떤 특정된 장소가 아니라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한 백성들 곧 신자 자체다. 그것을 현대에 와서는 제도화된 공간으로 오도하고 있으며 너무 지나치게 거대화하고 교리화 해서 폐쇄되고 경직되어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섬김을 받으려는 본질을 망각한 교회가 되어가고 있다. 사회성을 잃었고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고 있다. 예수님은 그런 예루살렘 교회를 강도의 소굴이라고 했다. 썩어가는 냄새만 가득 찬 회칠한 무덤과 같은 곳이라 하기도 하였고 제도권의 영혼이 고갈되어 죽어가는 신자들을 독사의 종류들이라고 까지 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마지막으로 보여주고 가신 것이 참 예배와 성전의 본질인 것이다. 그렇다고 무교회주의를 옹호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도 게시니까 어디에도 계시는 하나님으로 믿고 섬기자는 것이다. 참 예배는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듯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삶, 그것이 곧 참된 예배라 할 수 있다. 웅장한 건물인 성전이지만, 그곳에 그런 진정한 섬김과 사랑이 없다면 성전은 성전으로서의 성격 곧 장소로서의 성격을 잃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장소가 삶의 기반이 되지 못하면 시인이 2연 말에서 말한 울컥 가슴 저린 벅차오름의 체험이 이루어지는 조건이 되지 못하는,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 영혼을 말갛게 세정시키지 못하는 수세미와 같은 공간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가송 정순자 시인은 그런 새로운 신성한 신학적인 공간을 탐색하고 있다. “저부도ㆍ1”이라는 시를 또 보자.
생명이 펄떡펄떡 뛰는 썰물 펄
낙지 주꾸미 망둥이 게
바지락 백합 까무락 동죽
뽕뽕 구멍 속 들락날락 올림픽 경기
모세 길 냈다 없앴다하는
달님 놀이터 제부바다
하루 두 번
제부도 매 바위 누에 섬
출렁출렁 댄스경연대회 하는
밀물
- “제부도 1” 전문
이 시는 3연으로 이루어진 2018년에 발표된 시다. 제1연에서는 제부도를 배경으로 전경화시킨다. 제부도(濟扶島)는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제부리(濟扶里)의 섬으로서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송교리와 길이 2.3 km, 폭 6 m인 2차선 도로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 길은 만조(滿潮) 시의 최고 해수면보다 낮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하루 두 번, 한 번에 3~4시간씩 바닷물이 차서 건널 수 없다. 시인은 이 곳을 유명한 관광지로 본 것이 아니라 ‘생명이 펄떡펄떡 뛰는 썰물 펄’ 곧 생명의 자리로 보고 있다. 이곳에서는 언제나 낙지 주꾸미 망둥이 게 바지락 백합 까무락 동죽들이 뽕뽕 구멍 속 들락날락거리며 올림픽 경기를 버린단다. 제부도가 시인이 찾는, 지상의 포도원과 같은 이상적인 새로운 신성한 신학적 공간이고, 수많은 다른 어죽들이 같이 살며 싸우고 헐뜯고 미워하고 죽이는 그런 곳이 아니라 뿡뿡 구멍 속으로 들락날락 하는 것이 마치 올림픽 경기하는 것과 같은 선의의 경쟁을 이루며 정정당당하게 겨루고 체육축제를 이루어내는 역동적인 ‘신성한 공간’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제부도는 예배당이고 각종 어종들은 믿는 신자며 뿡뿡 구멍 속으로 들락날락 하는 행위는 곧 생명 있는 예배드리는 축제요 선의의 믿음 경쟁을 벌이는 ‘성전’이라는 것이다. 이곳은 바로 ‘생명공동체’요 ‘축제의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제2연에서는 밀물 때는 하루 두 번, 한 번에 3~4시간씩 바닷물이 차서 건널 수 없다. 그러나 썰물 때는 바닷물이 빠져 나가 모세가 홍해를 지팡이로 갈라서 길을 냈던 성경을 이야기를 인유하여 ‘달님의 놀이터’라 하였다. 밀물 썰물에 따라 강을 건너기도 하고 건너갈 수 없기도 하기 때문에 ‘달님의 놀이터’가 되는 것이다. 예배도 놀이처럼 즐겁고 흠쾌한 행사가 되어야 한다는 암시적인 묵언이라 할 수 있다.
제3연에서는 하루 두 번 제부도 매 바위 누에 섬으로서 출렁출렁 밀물들의 댄스경연대회 하는 장으로 기술된다. 생명이 넘치고 활성에너지가 충만한 곳이 제부도다. 과연 현실 교회가 이처럼 생명이 넘치는가? 활성에너지를 사회와 이웃에게 주는가? 이런 것을 보여주려는 ‘경쟁(겨룸) 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젓가락”이라는 시를 보자.
매일매일
마주보고 눈빛 맞추며
식욕을 위해
사랑을 위해
희망을 위해
자석처럼 하나 되는
우린
헤어질 수 없는
단짝 동행자
- “젓가락” 전문
이 시는 9행으로 전연을 이루는 2014년에 발표된 시다. 이 시는 ‘젓가락’을 통해 새로운 신성한 공간인 성전의 본질을 파악한 기발한 시다. ‘먼 것’과 ‘가까운 것’, ‘큰 것’과 ‘작은 것’, ‘초월’과 ‘일상’, ‘영원’과 ‘시간’ 같은 이질적이며 양극적인 것들을 대치시켜서 충돌시키다가 변증법적으로 승화시켜 보다 나은 융합과 일치를 찾아내는 형이상학적인 기법 컨시트를 현격하게 보여주는 실레다. 젓가락이 그렇듯이, 우리도 마주보고 눈빛 맞추는 코이노니아 곧 교제와 교통 및 교감이 이루어져야 새로운 신성한 신학공간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코이노니아’(교제)는 음식을 먹으며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자석처럼 양극과 음극으로 된 이질적인 그런 존재들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도 각기 다른 사람들이지만 이질적인 것들의 길항작용을 통해 믿음과 사랑과 희망을 이루는 ‘생명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서로 헤어질 수 없는 ‘단 짝 동행자’가 되어 마치 부부처럼 괴로우나 즐거우나 슬프나 기쁘나 같이 동행하며 마주보고 눈빛을 맞추는 ‘코이노니아 공동체’, 시인의 말을 그대로 쓰면 ‘젓가락’ 공동체가 그가 추구하고 탐색하는 ‘새로운 신성한 신학적인 자연화된 공간’이다. “주전자가 고개 숙이다”라는 시를 다시 또 보자.
주전자는
한가득 물을 품고
목마름을 채워주기 위해 고개 숙인다
식사 전에도 식사 후에도 고개 숙여 기도 한다
왁자지껄 떠들어도 꾸벅꾸벅 잔을 채우며
다 비울 때까지 연실 절 한다
빈 몸 되고서야 가부좌하고 앉았나했더니
여보세요 여기 물 더
부엌으로 가서 또 한 가득 채워온다
채우고 비우고
나를 비우는
연습중인
주전자
- “주전자가 고개 숙이다” 전문
이 시는 13행으로 전연을 이루는 주전자를 통해 이상적인 신앙생활을 내다보는 절묘한 시다. 주전자는 물을 가득 품고 목마름을 채워주기 위해 식전에도 고개 숙이고 식후에도 고개 숙인다는 것이다. 왁자지껄 떠들어도 꾸벅꾸벅 잔을 채우며/다 비울 때까지 연실 절 한다/빈 몸 되고서야 가부좌하고 앉았나했더니/여보세요 여기 물 더/부엌으로 가서 또 한 가득 채워온다고 한다. ‘채우고 비우고’하는 것을 연습하고 있는 것이 ‘주전자’이다. ‘주전자’가 곧 예배드리고 생활의 지혜를 배우게 하는 ‘성전’이고 ‘신자’다. 연습은 곧 ‘수행’이요 ‘삶’이요 ‘기도’요 ‘찬미’요 ‘섬김’이요 ‘협동’이요 ‘교제’요 ‘공감’이다. 이런 ‘삶의 기반’이 되고 ‘조건’을 제공해 주는 터전이 바로 ‘주전자 교회’다. 주전자는 언제나 자기를 비우는 연습을 하는 장이요 언제나 요구하는 곳에서는 마다하지 않고 나서서 물을 따라주며 고개를 숙이는 겸손하고 예의바른 공간이요 삶의 장이다. 예배당이 그런 곳이 되어야 가슴 설레고 가슴 뛰는 감동과 황홀과 경이를 체험하며 살게 된다고 한다. 가송 정순자 시인은 현실교회는 살아 있는 생명세계를 오히려 숨 쉬지 못하게 하고 죽어가게 하는 공간이라는 인식과 함께 새로운 자연화된 신성한 공간을 추구하는 것이다.
사물과의 상응관계를 통해 세우는 시적인 세계관
서정시는 본질적으로 어떤 대상의 기술이나 재현이 아니라 주관적 경험의 자기표현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이 선택하는 대상과 현실의 새롭고 낯선 모습들은 결국 시인의 내적 세계를 표현하는 제재인 것이다. 한 편의 시는 이처럼 시인이 현실을 보는 안목이며, 그것의 인식이라고 할 수도 있다. 사물과 사물을 연관지우고 인간과 세계 사이에 새로운 매듭을 만드는 일, 그것이 바로 시적인 인식이다. 시적인 인식이란 우주의 어떤 대상이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를 자아화해서 새롭게 인식하여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인식세계를 나 나름대로 시적인 세계관이라 지칭하는데,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세계는 시인이나 화자와 세계가 동일시되고 일체를 이루는 인식적 체험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가송 정순자 시인이 시에서 보인 시적인 세계관을 시를 실례로 해서 분석하며 살펴보겠다.
가랑비에도 놀라 눈뜬
어린 잠
눈꼽도 뜯어내지 못한
바람이 짚고 간 흔들림에도
눈뜬
어린 잠
눈물자국 그대로
말라붙은
노란 눈꼽도
꽃으로 피는구나
- “산수유” 전문
이 시는 3연으로 구성된 아주 단아한 시로서 ‘산수유’라는 대상과 화자 또는 시인이 상응하는 교감을 통해 일체를 이루는 인식적 체험을 형상화해 주고 있다. 시의 위의(威儀)를 높이기 위해서 시인은 내면의 자아를 붙들고 씨름하고 무척 고뇌한 흔적이 시적 형상화 속에 자 드러나 있다.
제1연 “가랑비에도 놀라 눈뜬/어린 잠”이라는 구절을 세찰해보자. 이를 독자들의 이해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서 풀어서 해설해 보면, 이른 봄에 내리는 가랑비에 산수유가 반응하여 일반적으로 꽃봉오리가 트이는 시기가 아닌데도 꽃을 피울 때가 된 줄로 알고 겨울잠을 자다 깜짝 놀라 일어나는 산수유의 ‘어린 싹’을 ‘노인네’와 일치시켜 통합한 인식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는 산수유의 어린 싹이 봄비 소리에 놀라 발아(發芽)하려는 조짐을 마치 나이가 들어 새벽처럼 일어나 부산을 떠는 노인네의 이른 잠으로 인시하여 형상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시적 세계관 속에서 우리는 갓 눈을 뜬 산수유의 어린 싹에 비추어서, 가랑비 같은 작은 일에도 놀라고 바스락 바스락 거리며 바지런 떠는 노인을 그려보게 된다.
제2연은 “눈꼽도 뜯어내지 못한/바람이 짚고 간 흔들림에도/눈뜬/어린 잠”으로 되어 있다. 산수유에 어떻게 눈꼽이 낄 수 있으며 바람이 어떻게 그 눈꼽을 뜯어 낼 수가 있겠는가? ‘산수유’와 ‘바람’이라는 사물을 시인 자신이나 화자와 동일시하여 의인화하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어린 꽃봉오리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 정도로 살짝 건드리고 스치고 지나간 여린 바람에도 놀라서 눈을 살짝 뜨는 노란빛의 어린 꽃봉오리를 노인네의 눈에 자주 끼는 눈꼽으로 인식하여 시화한 것이다. 시인은 산수우의 노란 꽃봉오리 속에서 아침에 너무 일찍 일어나서 눈꼽도 떼지 못하고 세수도 하지 못한 채 쉴 사이 없이 꼼지락 거리는 노인네의 모습을 그리는 시적인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제3연 “눈물자국 그대로/말라붙은/노란 눈꼽도/꽃으로 피는구나”이라는 표현도 대상과 화자 간에 일체감이 이루어져 일어나는 시적인 인식세계를 형상화한 것이다. 가랑비에 젖었다 채 마르지도 않은 노란 꽃을 피우려는 산수유의 꽃봉오리를 늙은이의 눈에서 잠 잘 때 조금씩 흘러나온 눈물이 아직 다 마르지 않은 그 자리에 낀 눈꼽으로 인식하여 형상화한 시연이다. ‘산수유’와 ‘시인’ 자신과의 일체된 상응관계의 인식도 놀랍지만 어린 아이와 같은 꽃봉오리와 늙은이와의 상응관계로 보는 인식도 놀랍다 아니 할 수 없다. ‘어린’과 ‘늙은’이라는 다른 정황이 부닥쳐 일어나는 갈등을 극복하고 동일시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시인의 시적인 안목과 표현의 솜씨에 따라서는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다. 눈꼽을 노인네의 것으로 보는 까닭은 아이의 눈에는 눈꼽이 잘 끼지 않고 또한 잠도 푹 자지 가랑비가 나리거나 바람이 스쳐지나간다고 해서 일찍 깨질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의 세계는 동일한 제재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시인이 의도하고자 한 모티프와 주제에 따라 각기 다양한 의미로 변용 재창조되는 그런 세계다. 이런 시적인 세계관이 일으키는 파문은 매우 크다. 그래서 이 시를 읽고 나서 다양하고 신기한 연상과 유추를 하게 되는 것이다. “목련”이라는 시를 가지고 좀 더 세찰해 보자.
아침마다
이슬 찍어 바르면
저렇게 하얀 속살의 입술이 될까
한나절 내내
누런 햇볕 핥을수록
희디흰 순수가 되는
목화 봉오리로 피어나는
꽃잎
바그다드의 총성을
소낙비로 알았는지
밤새
하얀 옷 벗어놓고
도망간
목련
- “목련” 전문
이 시는 3연으로 이루어진 시로서, ‘목련’과 젊은 여인네와의 상응관계를 형상화해주고 있다. 제1연에서는 아침마다 맺히는 이슬에 젖은 화심이 ‘하얀 목련꽃 봉오리’를 아침마다 일어나 립스틱을 입에 찍어 바르는 ‘여인’과 동일시하여 파악한 인식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슬에 젖은 목련꽃의 화심은 하얗지만 립스틱을 찍어 바른다고 해서 여인의 속살 입술이 하얗게 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런 설의는 의문이 아니라 의문과 부정을 통한 강한 긍정을 이끌어내는 시적인 장치다. 아무리 립스틱을 입술에 발라도 원초적으로 검어진 속마음은 립스틱을 바르는 것과 같은 행위와 노력으로써 하얗게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목련과 여인, 이슬과 립스틱을 상응시켜 도출한 새로운 인식에 따르면, 목련꽃의 화심은 이슬에 젖고 누런 햇빛을 받을수록 더 하얗게 되지만, 세월이 흐르고 인간이 아무리 애쓰고 하얀 색깔을 사람의 마음에 찍어 발라도 하얗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정순자 시인이 새롭게 인식해서 이루어내는 시적인 세계관은 형이상학적인 차원으로 전이되고 일상이 승화된 초월적인 차원으로까지 연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2연에서는 한나절의 가장 환한 황금빛을 내는 햇볕과 교류되는 목화가 희디흰 꽃을 피우는 것처럼 하얗게 피어나는 꽃이 목련이라고 언술하다. 이는 단순한 언술이 아니라 자기와 동일시해서 보는 인식이어서 목화꽃과 일치되는 목련꽃이 그런 것처럼 태양에 비유되는 천주님과의 교류를 통해 화자 또는 시인 자신도 순수한 숭고미를 드러내고 싶은 기대와 희망을 표출하고 있다. 이것이 대상과의 상응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시적인 세계관인 것이다.
제3연에서는 밤새 떨어져 어디론가 사라진 목련을, 사담 정권이 몰락하고, 2003년 이후에 미군이 주둔한 뒤로는 이슬람 반군들과 미군 사이의 전투로 도시 곳곳에 폭탄 테러나 총격전이 일어난 사실과 상응시켜 마치 그 총소리를 소낙비로 알고 아랍 여인으로 의인화된 목련이 여성의 정숙함을 상징하는 ‘하얀 히잡’을 벗어던지고 수치나 부끄러움도 잊은 채 도망간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숭고한 정신, 고귀함’이라는 꽃말을 갖는 목련을 여성과 상응시킨 것이나 하얀 목화 봉오리나 이슬 등과 연결시킨 것은 자연스러우나, 바그다드의 총성과 연결시킨 것은 비유로서 부자연스럽다. 이런 부자연스러운 비유 사용(catachresis)을 통하여 ‘자의’(恣意)를 ‘질서’로, ‘추함’을 ‘아름다움’으로, ‘부정’을 ‘정의’로, ‘죽음’을 ‘삶’으로, 모든 것을 ‘사랑’(신)으로 전진시키는 수법을 써서 새로운 시적인 세계를 만들어낸다. ‘하나 속에 모든 것이 있고 모든 것 속에 하나가 있다’는 상응의 원리에 기반을 두고 이루어지는 것이 새로운 시적인 세계관이다. 칼 융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상응의 원리를 동시성(일치)라고 할 수 있다. 형이상학적인 동일성(일치)은 우주의 체계를 개개의 문제로 적응하게 될 경우, 유추(analogy)라는 방법을 따르게 된다. 유추에 의한 법칙을 확충하는 것으로 새로운 경험의 영역을 포괄하는 것처럼 정순자 시인도 일상이나 자연의 대상들과의 일체화를 통해 새로운 시적인 세계관을 추구하고 있다. “폭우”라는 시 한 편을 더 살펴보자.
죽창이라도 꽂힌 듯
날선 대철못이라도 박히듯
물기둥으로 쏟아지는
광란의 발길질
아마도
하느님께서
물회초리로
잠을 깨워 주시나보다
돋보기 쓴 듯
어른거리는 시야를 안고 달리는 고향 길
토요일 오후 3시가
물위로 떠밀려간다
- “폭우” 전문
이 시는 어느 토요일 오후 고향으로 차를 타고 달리는 차 안에서 물기둥처럼 쏟아지는 폭우를 만나 느끼고 체득한 체험과 인식을 형상화한 시다. 제1연 “죽창이라도 꽂힌 듯/날선 대철못이라도 박히듯/물기둥으로 쏟아지는/광란의 발길질”에서 물기둥처럼 보이는 쏟아지는 폭우를 ‘죽창’이나 ‘대철못’으로 연결시켜 놓은 시적인 세계다. 이런 세계상은 현실에서는 잘 볼 수가 없는 그런 세계이지만, 원시적인 투쟁이나 건축 현장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세계다. 다 아시다시피 ‘죽창’은 대나무로 창(bamboo spear)을 말한다. 예로부터 동양권에서 애용되었던 무기로, 굉장히 만들기 쉬우면서 살상력도 갖춘 무기이다. 대나무는 기후만 맞으면 양분을 줄 필요도 없이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면 하루에도 몇 센티미터씩 쑥쑥 자라날 만큼 자생력이 뛰어나며, 그 대나무를 꺾어다 적당한 길이로 잘라서 끝을 비스듬히 깎아주면 생각보다 날카로워서 급조용 무기로 충분히 쓸 만 하다. 하지만 살상력은 있지만 대나무 자체가 내구성이 좋은 재료는 아니므로, 몇 번 찌르다 보면 끝의 날 부분부터 대나무의 결을 따라서 쩍쩍 갈라지기 일쑤이다. 이를 어느 정도 방지하기 위해 날 부분에 기름을 먹여서 열처리를 하는 경우도 있다. 대창은 보통 전투에서는 사용되질 않고 농민봉기 같은 때에 주로 사용된다. 대철못은 일종의 건축자재로서 사람의 정수리에 박으면 즉사시키는 잔악한 기구로도 야만인들 사이에서는 사용되었다. 죽창이나 대철못은 작고 큰 살상용 도구로 사용된다. 물론 좋은 차원에서 선하게 사용되는 경우도 많지만 여기서 폭우를 대창이나 대철못으로 환치시켜 비교한 것은 쏟아지는 폭우가 마치 살인을 하려고 죽창이나 대철못을 가지고 덤벼드는 모습과 흡사함을 보여준다. 그런 잔인하고 무질서한 행위가 일어나는 난장을 광란의 발길질로 연계하여 자연 현상과 인간들의 도구를 만드는 것 같은 문명행위와 상응시켜 암암리에 현대문명을 질타하고 있다고 봐도 좋을 것 같다.
제2연 “아마도/하느님께서/물회초리로/잠을 깨워 주시나보다”라 하여 수직이동을 시켜서 하늘과 땅, 하나님과 인간을 이으며 폭우를 ‘물회초리’로 파악하고 인식한다. 하나님을 옛날 서원의 훈장처럼 글을 읽다 딴청을 부리거나 꾸벅꾸벅 졸면 회초리를 들어 징계하듯이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 그리고 징계로 내려치는 것이 ‘폭우’라는 것이다.
제3연 “돋보기 쓴 듯/어른거리는 시야를 안고 달리는 고향 길/토요일 오후 3시가 /물위로 떠밀려간다”고 폭우가 내리던 시점과 당시의 현장 상황을 박진감 넘치게 그려주고 있다. ‘돋보기 쓴 듯 어른거리는 시야’라 한 것은 시인이 몰고 가는 차창에 폭우가 막 쏟아져 앞이 잘 보이질 않고 어른거린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고향나들이 가는 그날, 그 도중에 도로에서 폭우를 만난 것이다. 빗줄기가 차창에만 내려치는 것이 아니라 도로 위로 쏟아져 도로가 금세 강물처럼 된 듯싶다. 화자가 차를 몰고 고향 길을 달려가던 토요일 오후 3시경이었다. 가상의 시간일 수도 있고 실시간일 수도 있지만 시간의 정확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이 도로에 넘치는 강물 위로 떠밀려서 간다는 것이 우리의 주목을 끈다. 시인은 한 마디 결구를 남길 듯도 한데 군더더기를 달지 않고 그대로 끝낸다. 그래서 감동과 울림의 여운을 더욱 길게 남긴다.
결언 : 창조적 변용으로 시를 출발시키는 솜씨 돋보여
인간은 갈대와 같이 약하나 사유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다른 어떤 대상들보다 월등하고 존엄하다. 시인은 다른 사람들과도 또 달리 더 많이 사유하고 끊임없는 정신적인 성숙을 거쳐 깨달은 자연의 오묘한 변용의 의미를 상징과 은유로서 표현한다. 정순자 시인이 자연을 노래했건, 계절이나 여행, 정신적이고도 내면적인 것, 또는 정치적 현실이나 성지순례를 노래했건 그 시법은 예외 없이 변용의 틀을 중시하는 곳에서 시를 출발시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시를 제시해서 이를 구체적으로 논의해 보겠다. 먼저 “라일락”이라는 시를 가지고 세찰해 보자.
코로 맡았는데
가슴으로 취한다
에테르보다는 약하고
코티분 보다는 강한
사랑이나
그리움으로나 묻어날
취기
지나가던 한나절 햇살도 취했는지
불록담에 등 기대고
곤히 잠들었다.
- “라일락” 전문
이 시는 3연으로 구성된 시로서 4월 중순 쯤 만개하여 향기를 풍기는 라일락꽃에 대한 서정을 형상화해주고 있는 시다. 제1연에서 ‘코로 맡았는데’라고 한 것은 후각을 통한 인식인데 반해, 다음 행에서는 ‘가슴으로 취한다’로 변이시킨다. 정서와 감각을 합일 시키면, 코로 냄새를 맡으며 가슴으로 알코올에 취하듯이 취하는 공감각적인 인식이 가능해진다. ‘코’가 ‘가슴’으로, ‘맡는다’가 ‘취한다’로 자리바꿈을 냄새를 맡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술에 취하듯이 그 향기에 취하는 환각상태까지 이르게 되게 한다.
제2연에서는 “에테르보다는 약하고/코티분 보다는 강한/사랑이나/그리움으로나 묻어날/취기”로 되어 있다. 에테르 냄새보다는 약하고 코티분 냄새보다는 강한 것이 사랑과 그리움인데, 그런 사랑이나 그리움에서나 묻어나는 향기와 같은 것이 라일락 행기로서 그 냄새가 술의 취기처럼 취하게 하는 것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제1연에서는 ‘코’를 ‘가슴’으로 자리를 바꿔 놓는 감각의 정서화를 보여주었지만, 제2연에서는 박진환 교수의 말대로 라일락 향기를 사랑이나 그리움에서 묻어나는, 그런 도취상태에까지 이르게 하는 관념화로 변조시키고 있다. 즉 라일락의 감각적인 향기를 보이지 않는 사랑이나 그리움에 취하는 것으로 관념화한 것인데, 이 솜씨가 놀랍다고 아니 할 수 없다.
여기서 끝나질 않고 종연에 오면, 정서ㆍ감각ㆍ관념이 객관적 상관물의 동원에 의해 설득력을 배가시키는 효용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햇볕이 따스하고 그 햇살로 라일락이 벙글고, 벙근 라일락 향이 골목을 메울 무렵이면 춘곤증을 불러오는 생리적 변용을 수반하게 된다. 이를 향기로만 해석하지 않고 “지나가던 한나절 햇살도 취했는지/블록담에 등 기대고/곤히 잠들었다”고 햇살을 잠든 것으로 구체화시키고 있는데, 이러한 객관적 상관물의 동원 또한 변용의 시법을 성립시키는 한 방편이 된다. “해당화:”를 시를 가지고 좀 더 살펴보자.
한 여름 땡볕으로
달궈진 모래밭
해당화 가지마다
불씨로 번졌는지
핏빛 불바다다
발끝까지 밀고 와
놋대야로 끼얹는
파도의 진화에도
꺼지지 않는 불
끼얹을수록
해풍 부치질 삼아
활활활 잘도 타는
해당화
- “해당화” 전문
이 시는 3연으로 구성된 해당화에 대한 정서적 인식을 형상화한 시다. 제1연에서는 한여름 땅 볕으로 달구어진 모래밭, 그 너머로 출렁이는 푸른 바다와 모래밭에 가지마다 핏빛처럼 붉게 핀 ‘해당화’를 나란히 놓아 가지에 불이 붙는 것으로 양극화시켜 놓고, 제2연에서는 그 불길을 끄기 위해 햇볕에 금빛으로 물든 파도를 놋대야로 변용시킨 후, 그 파도를 ‘놋대야’로 퍼 끼얹어 불을 끄고자 하는 것으로 불과 물을 상충하게 한다. 그런가하면, 제3연에서는 물을 끼얹을수록 해풍을 부채질 삼아 활활 잘도 타는 것으로 양극화를 고조시키고, 긴장을 갖게 했다가 해풍의 매개를 받아 파도(물)과 붉은 꽃(불)이 화해하여 활활 불타오르는 것처럼 해당화를 붉게 피어나게 함으로써 역시 변용의 시법을 적절히 구사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이, 가송 정순자 시인은 대부분의 시를 변용의 시법으로 출발시키고 있으나 지면 관계상 이것으로 줄인다. 이 분석을 통하여 알 수 있듯이, 정시인은 창조적 변용의 시법을 구사하는 기본 능력이 뛰어나고 돋보인다는 것이 극명하게 입증된다. 그래서 박진환 교수는『잣나무숲 현이 되어』시집평설 결어에서 이런 결론을 내리고 있다. “결론적으로 지적하면 정순자 시인의 시는 변용을 시법으로 변용에서 시를 출발시킨 변용의 미학이었다는데 귀결될 것으로 본다.” 나도 박진환 교수의 결론에 전적인 동감을 표한다.
다만 여기서 덧붙이고 싶은 것이 하나 있는 데, 모든 변용은 유추작용에 의해서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유추 작용은 물질과 마음을 결합시키는 지각이라 할 수 있다. 이 유추작용이 없으면 자연이 갖는 무수한 변용의 의미를 지각할 수가 없다. 우리가 하는 모든 생각은 유추적이고 이런 환유를 배우는 것이 시인이 하여야 할 중의 첫 번째 도리라고 생각한다. 시인은 자연이 끝없이 변용하는 의미를 성찰과 통찰 또는 투시로 직관적으로 인식하여 비유를 통해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변용은 자연히 비유와 관계를 짓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비유가 단순히 유추에 의한 유사성의 발견이나 말의 효과적 전달을 위한 장식이거나 새로운 말의 창조라는 수사학적 논리 만으로서는 미흡하다. 그보다는 차라리 비유의 현대적 논의에서 보여주고 있는 바와 같은 ‘언어의 상호작용’이나 ‘긴장관계’에서 그 가능성의 단서를 발견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비유’의 본질은 어떤 사물을 드러내기 위해 그와 유사한 다른 사물을 비교하여 설명하는 어법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걸 ‘의미의 전이’로 설명했고, 이러한 의미의 이동을 ‘대치이론’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 대치이론의 맥락에서 본 비유로는 ‘치환법’ 즉 ‘옮겨놓기’가 있다. ‘치환법’ 즉 ‘옮겨놓기 비유’란 두 사물간의 비교가 아니라 A라는 사물의 의미가 B라는 사물에 의해 ‘자리바꿈’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비유의 진수는 ‘의미의 옮겨놓기’가 아니라 ‘병치’, 즉 ‘마주 놓기’의 관계에서만 보다 철저히 밝혀질 수가 있다. 이것은 어느 한쪽으로의 ‘합침’이 아니라 서로 각각 ‘대결 상태’를 유지하면서 제3의 ‘효과’나 ‘의미’ ‘정서’를 자아내게 하는 방법이다. 정순자 시인은 이런 자리 바꾸기나 ‘이질적인 사물들’이 새롭게 고안된 ‘병치’에 의해 일치되게 하는 특수한 인식을 통해 의미나 정서를 나타내는 시법에 능하다.
첫댓글 <조선문학>2020년 가을호
조신권(평론가)의 연재 [한국근현대시와 그 평설] 36
(곧 단행본으로 출간예정)
가송 정순자 시인에게 밗수를 보냅니다.
*우리 <온새미로> 동인분들도 많이 축하해 주세요.
새벽
ᆢ
기별도없이
찾아오신손님,
정순자時손님을
허리깊게숙여
맞이합니다.
'수세미'
'주전자가
고개숙이다'
'산수유'
'목련'...
이슬발걷히지않은
시들을품으니
아,정말좋습니다~
당분간은
누가고약한시비를
걸어와도
헤실헤실웃을것만
같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평설
꼼꼼히
잘읽었습니다.
"'수세미'
'주전자가
고개숙이다'
'산수유'
'목련'...
이슬발걷히지않은
시들을품으니
아,정말좋습니다~
당분간은
누가고약한시비를
걸어와도
헤실헤실웃을것만
같습니다^^
"
좋은 시 한 편을 또 읽습닏다.
芳淵님은 이미 시인입니다.
선생님 진짜 멋지십니다^^
훌륭한 선생님과의 오랜 인연을 맺으신 대단하신 가송님 축하합니다. 늘 바쁘신 가운데서도 머리속은 항상 시로 꽉 차 온새미로회원들에 모범이십니다.
.
가송님!
몇 번을 읽었습니다.
아직도 얼마나 더 읽어야 될런지....
저의 머리도 가슴도 용량부족입니다.
겨울 지난 묵정밭을 다시 일구시며
거기에 작은 소망의 씨앗 뿌리시며
포도 곁순 따내시며
작은 알 솎아내시며
봉지 씌워놓고 기다리시던 포도송이
날씨따라
마음까지 변화무쌍
조리며, 애태우며, 목말랐을 일년 열두달
그렇게
수십년을 사신 것처럼
詩를 가꾸셨으니
어느 누가
그 詩앞에 설 수 있으리요
그런 가송님을
곁에서 지켜보며
마치
도공이 도자기 빚듯
포도알을 빚으신다
표현도 해 봤지만
글을 읽고
용량부족을 느낀 것처럼
감히
가송님의 詩心을
무엇으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많이
배우겠습니다.
많이
이끌어 주십시요.
가송님을 만나게 된 것도
온새미로 동인이라는 것도
참 행복합니다.
이순욱 올림
댓글이 모두 존경과 정성을 다한 曲盡한 詩篇 같네요.
온새미로회원님들 고맙습니다.
주인공 가송도 답사가 있어야 할 것 같네요.
선생님 생각도 못했는데
읽어주시고 평설까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건안 하세요
芳淵님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분간은
누가 고약한 시비를 걸어와도
해실해실 웃을 것만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홍윤희님 오래간만에 반갑습니다
감사 합니다
청지님 읽어주어 감사하고
답글 쓰는 것 가르쳐 주어 감사합니다
hyedang 이순욱님 읽어주시어 감사 합니다
과찬까지 해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읍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