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어진 목걸이를 보며
정상옥
성화골 들녘에서부터 불어오는 초겨울 바람은 한치의 편견도 없이
매정 온몸을 훑고 지나간다. 현관문을 들어서자 매서운 찬바람을
맞고 들어온 체온이 밀려드는 후끈한 실내 온도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
하고 거부감을 나타낸다.
왼종일 추운 바람막이를 해주던 두꺼운 털스웨터가 갑자기 답답해진
다. 빨리 이 거추장스러움에서 벗어나고자 서둘러 옷을 벗었다. 옷
이 머리를 채 빠져 나오기도 전에 무엇인가가 먼저 “찰그락”소리를
내며 방바닥에 떨어진다.
“목걸이” 목을 감아 조이고 있던 이 답답함은 목까지 올라오는
털스웨터만이 아니었다. 분명 일정한 무게로 목에 매달려 있었음에
도 그 무게조차 감지하지 못할 만큼 길들여진 무딘 감각이었다.
내가 살아오는 동안 아무런 느낌 없이 길들여진 습관과 또 살아가며
맺어진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의 인연,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내 것이
되어 무심히 써오던 살림살이들.....
그로 인해 감사함, 기쁨, 그리고 부담스러움이 분명 있었으리라.
이 모든 것들을 하루에 한번, 아니 열흘에 한번이라도 기억하려 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고 알고는 있었지만 일상적에 묻혀 지나쳐 버림으로
인해 더 크게 밀려오던 부담감은 얼마나 많았는가?.
책장 한구석에 항상 같은 자리를 지키며 먼지를 뒤집어쓰고 꽂혀 있
는 저 책도 서점의 그 많은 책 중에서 내가 택한 선택이 아니었던가?
그 책에서 철없던 유년의 향수를 찾으려 했고, 청년기의 불타던 삶의
열정을 보려했으며 그리고 중년의 생에 대한 허무, 방황을 잠재우는
중후한 너그러움이 있었건만 진실을 담고 있는 저 서적 위에는 위선
과 허영 그리고 탐욕이 먼저 자욱을 남긴 채 있다. 내 것이라 했음에
도 내 것이 되지 못한 부끄러움에 고개가 숙여진다. 한해의 끝자락
에서 그 동안 헝클어져 가득 담긴 생의 실타래를 하나씩 정리해보자.
난 또 어떤 것들은 다듬고 사려서 생의 바구니에 다시 담아야 하고,
어떤 것은 추려서 지는 해에 묵어 달아보낼 것이며 또 새로운 인연의
끈을 찾아야 할까?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않은 자식을 문설주가 닳도
록 긴 기다림을 하시다 기린목이 되어 먼저 가신 외할머니, “못난 사
람, 못난 사람”만 되뇌이다 상여끈을 어렵게 놓아주고 떠나는 할머니
를 오랫동안 바라보며 서 계시던 외할아버지의 뒷모습이 각인된 안산
모퉁이의 하얀 배꽃 밭은 이제 기억의 끈에서 빼내린다. 사상도 이념
도 분단의 슬픔도 이산의 아픔도 나는 모르기에.
늦여름 거무틱틱하던 햇 밀가루로 술빵을 만들어 연닢새 뚝뚝 꺾어
한 보퉁이 싸들려 주시던 외할머니, 철뚝길 지나 냇물 건너며 몇 십리
길 타박타박 걸어오는 동안 내내 풍기던 연닢 향내만은 외손녀 가슴속
에 오래도록 매어 놓으련다.
살아오는 동안 용서해 줘야 할 것이 얼마나 있으며 또 용서 받아야
할 것은 얼마나 있을까? 얽히고 설킨 이해의 끈을 한 가닥씩 살살 풀
어서 사려보니 용서해야 할 부분보다는 용서받아야 할 몫이 더 많다.
처음엔 내가 받아야 할 몫이라 생각했던 것이 돌이켜 생각해볼진대 살
아가는 지혜와 사랑을 하는 법을 배웠기에 내가 갚아야 할 빚이 더 많
은 부끄러운 삶. 슬그머니 자신이 없어지고 부끄러운 뒤안길이 고개
가 숙여진다. 그러면서도 난 봉사라는 이름으로 오만함을 감추려 위
선의 탈을 썼고 정의를 앞세워서 독선을 고수했다. 아집인걸 알면서
도 머리 속을 헤집는 끊이지 않는 상념을 적절히 합리화시키면서 나를
길들이는 타성에 젖어 살고 있었단 말인가? 내 목에 처음 걸릴 때만
해도 분명 차갑고 금속의 무게에 거추장스럽고 또 보내준 마음에 뜨거
운 사랑을 느꼈고 사치스러운 허영심도 적잖게 반영된 목걸이가 어느
날부터 나의 신체의 일부분이 된 듯 이질감 없이 받아드린 타성처럼
할 수 있었음에도 하지 않았던 나태와 해야했지만 모른 척 외면해 버
렸던 비굴한 도피를 적절하게 곁들이면서. 새로운 여명이 밝아 오기
전 난 고백을 해야한다. 사람의 눈을 의식하며 사랑이라 쏟아놓은 위
선을 줏어 담아야 하고 그로 인해 누군가의 가슴에 난 시린 상처를 정
말 뜨거운 사랑으로 정성스레 보듬어야 할 때이다. 용서를 해 주려던
오만을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용서를 구할 것이며 가슴속에 옹매
듭을 지어 놓았던 울분도 너그럽고 푸근한 아량으로 술술 풀어 가지런
매만지고 다듬어서 기억 할 수록 감사한 뒷 모습을 인생의 바구니
에 곱게 담아 놓으련다.
그래서 먼 훗날 인생의 황혼기에 올라설 때 타성에 길들여져 무심했
던 목걸이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끊어버리는 통한의 과오를 범하지
말자. 그리고 밝아오는 새천년에는 푸른 하늘을 한껏 우러러보자.
한점 부끄럼 없는 커다란 웃음을 웃으면서.
2000. 6집
첫댓글 참 진솔된 고백입니다.
멋진 작가님 이가을 건강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