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우물] 표지 이야기
사백오십리
아름다운 순례길
살다 보면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많다.
가진 것에서 떠나고 싶고, 있는 곳에서 떠나고 싶고, 하던 일에서 떠나고 싶고.
그렇게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길을 나서는 순간 떠났다고 해도 자유롭지 못하고 가진 것을 버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길에서 묻고 만난 이야기는 그렇게 전북 고산 오도재에서 시작했다.
오전 10시 30분경. 오덕 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한 순례자를 만났다.
주하성(야고보 . 63세)씨. 순례 이틀째인 그는 아침 7시 30분에 송광사를 출발해
오도재고개를 넘어 오덕사를 지나오는 길이라고 했다.
"신문을 보고 순례길을 알게 됐어요. 6일 정도 예상하는데 틀에 박히지 않고 그냥 걸으려고요.
답사도 할 겸. 아주 좋아요. 가톨릭 신자만 아니고 다른 종교인들도 오면 좋겠어요."
꼭 어디라고 정하지 않고 가는 만큼 그냥 가는 거라며 잠시 내려 놓았던 배낭을 짊어지고
다시 길을 떠나는 주하성 씨.
그의 뒷모습에 홀가분함이 있다.
지금 이 길은 끊어지고 사라진 자연의 길을 다시 찾아 이어준 '아름다운 순레길'이다.
전주와 완주, 익산을 잇는 180킬로미터 도보순례길이다.
다시 살아난 옛길이 이어질 때마다 천주교 . 불교 . 개신교 . 원불교 4대 종단의 흔적이
나타나고, 느리게 느리게 기어가는 달팽이가 길을 알려주는 표지로 새겨져있다.
"순례하는 동안 우리는 지금 살고 있는 곳을 떠나 과거 그들이 살았던 역사 속으로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살았던 역사의 현장에서 지금 평범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분위기도 함께 느끼게 된다.
이렇게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순례를 하는 동안 우리는 역사적으로 훌륭하게 산 인물,
또는 후세가 훌륭하게 각색한 인물에게서 느끼는 순간적인 감동을 넘어
지금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도 더 영원한 감동을 얻게 된다.
역사와 문화를 넘어 현재에도 작용하고 있는 하느님의 숨결을 느끼게 된다.
순례 동안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순례 동안 나는 무엇을 기도 했는가?
순례에서 돌아오는 것으로 순례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본격적인 순례가 계속된다.
내 인생에서, 내 인생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뿐만 아니라, 내가 미워하고 나를 미워하고,
내가 상처를 주고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 안에서.
다시는 보고 싶지 않는 미운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 순례가 계속된다.
순례 그 자체가 내 인생의 목표다."
[이제민. -인생낱말사전-]
순례는 떠남이라는 이상원(라파엘 . 60세) 씨.
"현재에서 새 생활로 가기 위해서는 떠나는 것이 필요해요.
현재의 생활 . 가정 . 계획 모든 것을 다 놓고 떠나야 합니다.
저는 이번에 욕심이나 교만심을 털어 버리려고 출발했어요.
그런데 막상 걷다 보니 일정 안에서 생기는 불만과 불편함을 다시 짊어지고 가더라고요.
그래서 다음날에는 다시 사랑하고 용서하고 화해하자고 다짐하고 걸었어요.
날마다 새롭게 다짐하는 날이었지요."
신발이 불편해 중간에 순례를 포기할 뻔했던 유재환(아우구스티노 . 67세) 씨.
발이 너무 아파 기도도 못하고 하느님 생각도 못했지만
어린 손자들에게 순례길을 완주하고 돌아오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걸었다.
돌아온 그에게 천방지축 손자들은 캠프를 다녀왔느냐며 어디서 재미있게 놀다 온 줄 안다.
순레길에서 겪었던 차가운 바람과 육체의 고단함을 그들이 알 리가 없다.
그래도 괜찮다.
어린 손자들과의 약속을 지켰다는 기쁨에 충분히 행복했으니까....
산길 고개를 오를 때면 차가운 날씨에도 땀이 흐르고
낙엽이 쌓여 발이 빠지는 산길을 내려갈 때는 아픈 다리가 더 무겁기만 하다.
그래도 고요한 시골 마을의 정겨운 풍경에 얼굴을 다꼬,
갈대숲 사이 만경강 지류에 마음을 씻으면 세상 모든 것이 고맙기만 하다.
전주 치명자산에서 천호성지까지 거의 54킬로미터를 두 아들과 함께 걸었다는
신혜경(아녜스 . 40세) 씨.
아들 둘을 키우다 보니 자꾸 목소리가 커지는 자신을 발견했단다.
아이들이 열 살 쯤 되면 도보 여행을 하고 싶었는데
이번 기회를 발판 삼아 해보자는 생각에서 순레길에 올랐다.
사실 단단히 고생을 시켜볼까 했는데 비를 맞으면서도 불평하지 않는 두 아들이
신기하기만 하다.
"막상 순레를 마치고 보니 고생은 제가 하고 아이들은 오히려 즐거워 했어요.
평소에 기도하고 미사 할 때 은총을 많이 청하잖아요?
저는 은총이 좋은 거, 나를 잘 살게 하는 거라고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번에 함께 걷는 분들이 아이들에게 좋은 말씀을 해주시는 것을 보면서
이게 바로 하느님의 은총이구나! 은총은 삶을 통해서,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주어진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끝까지 걸을 수 있었던 것도 좋은 사람들과 같이 걸었기 때문이에요."
가방이 무거워 짐을 내려놓아야 하는데도 선물을 주면 또 받아 담는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며 비움을 생각하고.
내 가방이 무거우도 함께 걷는 이가 힘들면 대신 들어주는 배려와 따듯한 격려에서
그들은 자신을 만나고 이웃을 만나고 하느님을 만났다.
다시 돌아온 일상. 변한 것은 없다.
하지만 힘들고 고단해도 나무가 예쁘고,
하늘이 불이 난 것처럼 붉게 타는 노을이 예쁘고,
함께 걸어서 좋았다는 준용(이 프란치스코 . 8세)이의 말처럼
아름다움을 느낀 순간의 기억은 살면서 힘겨움이 찾아올 때
우리 마음을 다시 뛰게 할 것이다.
벗어던지고 싶은 삶의 무게 속에 나를 살리는 무언가가있을 거라는
막연한 깨달음은 아무 생각없이 걷고 또 걸었던
시간이 건네준 소중한 선물이다.
사) 한국순례문화연구원 063-232-5000
www.sunryegil.org
글 : [야곱의우물] 편집부
위 내용은 월간잡지 [야곱의우물] (바오로딸 발간) 2010년 1월호에 실린 기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