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도화동(桃花洞)
밤적골 뒤의 골짜기에 있던 마을로 '도화천'이란 바위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밤적골 맞은 평에 조그마한 마을을 이루었으나 1970년부터 가톨릭상지대학이 설립되면서 대학 부지에 편입되어 지금은 '도화동'에는 민가가 흔적조차 없어졌다고 한다.
39. 신정리(新井里)? 옥정동(玉井洞)
본래 안동부 동부의 지역으로서 맑고 큰 우물이 있었다고 하여 '신정리'라고 하였다. 1914년 7월 5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율세동에 편입되고 1931년 4월 1일 안동읍제(安東邑制) 실시에 따라 율세동의 일부를 잘라서 '앵정'이라 부르다가 1947년 일본식 동명 변경에 따라 옥정(玉井)으로 고쳤다. 옥정동의 우물은 (안동의료원 옆)감리교회 정문 맞은편 집과 농협중앙회(농협은행)앞 음식의 거리 입구 부근의 개천, 그리고 구 안동군청 앞에 있었다고 한다. '옥정'은 원래 밤에도 물밑이 훤하게 밝아서 어두운 한 밤중에도 물을 길을 수 있었고, 여름날 날씨가 가물어서 시내의 모든 샘물이 말라도 옥정은 늘 물이 풍족하게 넘쳤다고 한다. 그래서 멀리 법석골이나 잿골 주민들이 물지게를 지고 옥정동의 옥정까지 물을 얻으러 왔다. 그러나 어느 때 도둑이 샘물 밑의 옥돌을 훔쳤다고 한다. 그때부터 옥정이 어두워졌는데 물은 그 후에도 전혀 줄지 않고 솟앗다고 한다.
40. 동문거리
동쪽 관문이라는 뜻에서 불리어지며, 안동시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성내는 상인이 살았고, 성외에는 양반들이 살고 있었다 한다. 이때 양반들이 성안에 살고 있는 상인(常人)을 일컬어 '성안 것'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양반과 상인이 사는 지역을 구별하기 위하여 성내로 들어가는 동쪽 관문을 '동문거리'라 일컬었다고 한다.
41. 법흥골? 법흥(法興)
지금의 임청각(臨淸閣 부근으로 신라 대 법흥사(法興寺)가 잇어서 이 일대를 '법흥'이라 하였다. 그 당시에는 탑골과 평지가 포함되었다. 고성 이씨가 그 지역에 정착하여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42. 고갯길? 괘목? 괴목(槐木)
현재 안동댐 입구 부근에 있는 조그마한 고갯마루를 중심으로 해서 서편과 동편에 촌락을 이루어 오가는 사람이 잠간 멈추었다 가는 고갯머리에 괴목(槐木)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43. 동성(東城)
신라말 동쪽 법흥사(法興寺) 뒷산 능성에 안동을 지키는 토성(土城)이 있어 이 일대를 '동성'이라 불러 왔다. 옛날 이 곳에는 안동교도소가 있었으며, 현재 주택가가 형성되어 있다.
44. 탑골? 탑곡(塔谷)
안동댐 진입로 서쪽에 잇는 마을이다. '칠층전탑(七層塼塔)이 있는 뒷골짜기'라는 뜻에서 붙여진 명칭이다. 고성이씨들이 터전을 잡았다.
45. 평지(平地)? 평리(平里)
탑골 남서쪽의 마을로 넓은 경작지가 있어서 '평지' 또는 '평리'라 불렀다고 한다. 이 마을에 살았던 고성이씨의 이헌복(李憲復) 선생의 호가 평지옹(平地翁)이믈고 지금도 그 자손들을 평지인(平地人)이라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