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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1만 4천여 명의 피란민을 구한 흥남철수의 주역인 '메러디스 빅토리호’ 선장 레너드 라루 선장은 영하 35도의 추위와 바다 곳곳에 깔린 지뢰를 피해, 배고픔과 공포 속에서 목숨을 건 항해 끝에 1950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날, 한국 거제도 장승포항에 무사히 도착하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이는 인류애가 만든 역사적 사건이었다. 배에 타고 있던 피란민 중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었고, 운항 중에는 5명의 아기가 태어나는 경사도 있었다. 이 항해는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불렸으며, 빅토리호는 역사상 가장 많은 생명을 구한 기적의 배로 세계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라루 선장은 흥남철수 작전 4년 후인 1954년, 미국 가톨릭교회의 성 베네딕토 수도원에 입회했다. 그는 200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47년간 수도자의 길을 걸으며 생애를 보냈다. 생전에 라루 선장은 흥남철수에 대해 “황량하고 차가운 한국의 바다 위에 하느님의 손길이 우리 배의 키를 잡고 계셨다”라고 회고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이 세상은 다 필연이고 무엇이든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레너드 라루 선장이 머물던 미국 성 뉴튼 수도원은 2002년 한국의 왜관 수도원에서 인수하였고, 지금은 성 바오로 수도원으로 100주년을 맞았다. 이 수도원은 ‘기도하고 일하라’는 수도회의 영성을 바탕으로 이민자의 영적 보금자리 역할을 하고 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레너드 라루 선장은 “마리너스”라는 천주교 세례명으로 47년을 살다가 2001년 향년 87세의 나이로 선종하셨다.
그분은 자신의 위대한 업적을 드러내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한 채,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진 세상에서 귀감이 되는 삶을 사셨다. 최근에 나 역시 피난민의 자녀로서, 그 당시 값비싼 헬기와 트럭, 탄약과 항공유 500톤의 군수물자를 버리고 피란민들을 태워준 생명을 우선시한 라루 선장의 판단과 선택 덕분에 살아난 생명임을 깊이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그분의 자료를 찾아보며 감동의 마음으로 그의 삶이 재조명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얼마 전 용산의 전쟁기념관에 가서 느낀 점은, 왜 하필 전쟁기념관이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그곳이 엄청난 폭력과 살상의 처절한 불행을 기념하는 공간이라니, 차라리 “전쟁 역사 기억관”이라는 이름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라루 선장의 판단과 선택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원을 구조한 빅토리호의 배 모형이라도 전시하여, 생명 우선주의 정신을 후세에 남기고 기억하며 본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다행히 거제도에는 흥남철수작전 기념비가 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정신을 접할 수 있도록 용산 전쟁기념관에도 빅토리호의 모형이 전시되길 간절히 바란다. 국가 보훈처에서 12월 한국전쟁 영웅으로 선정했다고 하니 그나마 위안이 된다. 라루 선장은 겸손하게 자신의 업적을 드러내지 않고 평생을 봉사와 기도로 살았던 분이다. 그의 정신이 미래세대로 이어진다면, 전쟁이 사라지지 않을까? 생명을 우선시하고 자유와 존중의 정신이 살아 있는 생명의 항해는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아닐까?
영화 '국제시장'에서는 피난민들이 서로 배에 타려고 아비규환을 이루는 모습이 그려졌지만, 국방 방송과 전쟁 전문가들의 주장에 따르면, 실제로는 질서 있게 백 명씩 탑승하며 한민족의 저력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자료를 보다가 김동리 선생의 소설 “흥남철수”가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월드피스의 안재철 저서인 “생명의 항해”라는 책도 접하게 되었다. 라루 선장의 생명 우선주의와 인류애적 정신이 문학, 영화,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형태로 다시 살아나 영원히 기억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의 삶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를 알고 싶고, 부모님과 형제, 친지들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한 책도 보고 싶다. 라루 선장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구한 생명의 덕행은 영원하기에.
세상은 여전히 전쟁의 아픔 속에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1000일째에 접어들면서, 북한의 참전으로 북-러 간 동맹이 강화되는 상황은 한반도의 불안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또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갈등은 무고한 생명들을 잔인하게 앗아가고 있다. 라루 선장과 같은 인물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진정한 종교가 여전히 숨 쉬고 있다면, 전쟁은 종식될 수 있지 않을까? 마치 희망의 씨앗이 땅에 뿌리를 내리듯, 그들의 존재가 평화의 열매를 맺는 기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질문은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다시 한번 고민하게 한다. 평화와 인류애의 정신이 더욱 깊이 뿌리내리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평화의 씨앗이 살아나길, 이 가을 간절한 기도를 시로 쓴 김현승 시인의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와 김남조 시인의 “너를 위하여”를 읽으면서 위로받는다.
“너를 위하여 / 나 살거니 / 소중한 건 무엇이나 너에게 주마 / 이미 준 것은 / 잊어버리고 / 못다 준 사랑만을 기억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