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지난번에 제논과 파르메니데스, 엘레아학파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그 다음에 헤라클레이토스 학파에 대한 논의가 있었죠? 거기에서 포인트는 역시 철학의 가장 근본 골격이 ‘존재’와 ‘생성’의 관계를 어떻게 볼 거냐. 그랬을 때 ‘존재’라고 이 때 ‘존재’란 개념은 그냥 책상, 걸상 이런 존재 개념이 아니고 제가 말했을 때는 대문자를 써서 ‘Being’했을 때 어떤 의미에서 불변적인 존재로서의 ‘존재’, 영원한 존재로서의 ‘존재’,
1 절대적 존재로서의 ‘존재’라는 그런 맥락의 ‘존재’라고 하는 경우에 그 ‘존재’와 일시적으로 존재하다가 사라지게 되는, 또 어떤 존재를 부여받게 되어서 갓 태어나게 되는 그런 경우를 우리가 넓은 의미에서 ‘생성’이라고 한다면 그 ‘생성’과 ‘생성’을 넘어서 있는 절대적 차원의 ‘존재’. 그 ‘존재’와 ‘생성’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라고 봤을 때 대개 엘레아학파 계통의 맥락은 ‘생성’의 세계는 극단적으로 말하면 허구다, 그것은 하나의 착각이고 그런 세계에 대한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독사’, ‘거짓된 앎’에 불과하다, 편견이고 우의이고 그렇게 봤는데 불변적 ‘존재’에 대해서 아는 건 ‘에피스테메’, ‘참된 인식’이라고 우리가 얘기했었잖아요.
2 이 점에서 어떤 인식론 상에서도 절대적 인식을 이야기하고 존재론 상에서도 ‘절대적 존재’를 이야기하는 게 엘레아학파 계통이라고 본다면은, 반면에 그런 세계 자체를 그리거나 추구하는 것이 역으로 착각에 빠져있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이 불멸하고 싶어 하는 어떤 강한 집착 때문에 갖게 된 허구의 세계이다라는 거죠. 그런 세계는 없다. 정말 우리에게 존재하는 세계는 영원히 존재하는 ‘존재’란 있을 수 없고 ‘절대적 인식’이란 있을 수 없고 우리의 인식은 늘 상대적일 수밖에 없고 우리가 처해있는 실제 상황은 늘 ‘생성과 소멸’을 겪는 세계 안에 있다.
3 이런 맥락을 한번 짬날 때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것이 지금은 정년퇴임이 임박한 사람이죠. 엄정식이라는 사람. 이 사람이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쓴 적이 있죠. 글을 수필류로 재미있게 쓰는 경향을 지닌 사람인데 그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그 사람이 쓰는 용어를 쓰면은 엘레아학파는 ‘저 세상 철학’을 하고 있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고 헤라클레이토스 이 쪽 맥락에 있는 사람들을 ‘이 세상 철학’을 하고 있다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래서 ‘저 세상’, ‘이 세상’이란 용어를 쓰고 있는데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보면은 ‘이 세상’ 중심으로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며 사는 사람도 있고 또 ‘저 세상’에 훨씬 더 의미와 가치를 두고 사람들이 있잖아요.
4 그랬을 때 ‘이 세상’에 너무 지나치게 시선을 돌리고 사는 사람에 대해서 ‘저 세상’에 어떤 시선을 가진 사람이 볼 때는 속물적이라고 이야기하죠. 반면에 ‘저 세상’적인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 세상’에 집중하는 사람들은 참 이상적이고 꿈꾸고 있다 그렇게 이야기하잖아요. 철학이 흔히 비난을 받는 것은 바로 ‘저 세상’에 너무 치중된 그런 맥락에서 관념적이다, 사변적이다 이렇게 비판을 많이 받잖아요. 그렇게 볼 때 사실 ‘이 세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고 ‘저 세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 세상’과 ‘저 세상’의 관계를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어떻게 그 관계를 정립할 것인가.
5 이런 문제를 놓고 볼 때 지금까지 수많은 철학자들이 싸워왔죠. 아직도 그 문제는 풀리지 않았고요. 아마도 이 문제가 풀려버리면 철학은 끝날 겁니다. 그 때부터는 더 이상 철학이라는 학문이 존재할 이유도 없고 철학이 끝나면은 인간의 지성도 끝나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인제 제가 오늘 집을 이사한 지가 한달쯤 되어가는 데 새집이라서 그런지 먼지가 많이 날려요. 책상 위에 제가 참 아끼는 하나의 어떤 상징적 존재가 있는데 그게 바로 ‘이카로스’라는. 그 그림들을 너무 좋아해요. 나는 ‘이카로스’라고 생각하거든요 제 자신에 대해서. 그거는 철학도 곧 ‘이카로스’라고 생각해요.
6 언젠가 나에게 호를 지어준다면 ‘사이’라고 지어 달라. 하늘과 땅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 남자와 여자 ‘사이’, 주체와 타자 ‘사이’. 나는 어느 쪽에 서고 싶지 않다 그래서 ‘사이’에 있고 싶다. ‘사이’좋게 살고 싶다. 그래서 ‘사이’가 살아있는 세상에 살았으면 좋겠다라는 게 ‘사이’는 욕심이 있으면 존재할 수가 없어요. 타자가 주체를 지배할 때도 이미 ‘사이’는 소멸되어버리고, 주체가 타자를 지배할 때도 ‘사이’는 소멸되어버린다. 그래서 그 ‘사이’에 서 있는 것도 아파요. 왜냐하면 양쪽으로부터 회색분자라고 몰아붙이기 때문이죠. ‘사이’가 견디기는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사이’는 이미 모순이고 ‘사이’는 이미 고통이예요. 그래서 ‘이카로스’는 이미 고통스런 존재이고 모순 속에 버티어야 되는 존재죠.
7 ‘생성’과 ‘존재’의 두 극을 자기 안에 품고 살아야 되는 게 인간인데 ‘생성’으로 달려가면 ‘존재’가 그립고 ‘존재’로 달려가면 ‘생성’이 그립고. 그래서 이 두 세계를 어떤 해결할 수 없는 아픔을 안고 사는 게 ‘이카로스’라는 새의 운명인데 그 모순과 아픔을 우리가 서둘러 극복하기 위해서 어떤 한 쪽으로 문제를 풀어가려고 몰입하게 되면은 문제의 진상을 왜곡시켜버릴 우려를 항상 쌓게 마련이죠. 그런 면에서 볼 때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의 싸움이라고 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이 풀 수 없는 문제 앞에 직면해 있는 과제인지도 몰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그 문제를 풀기 위해서 인간은 달려왔고 또 오늘날 우리가 흔히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차이’를 살려주라.
8 다원주의 사회에서 문화 간의 어떤 ‘차이’를 인정하라. 남자, 여자 간의 ‘차이’를 존중하라. 이런 ‘차이’에 대한 인정과 존중을 이야기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 전통의 싸움에 그 연장선에 서 있다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오늘 우리가 다루게 될 엠페도클레스, 아낙사고라스, 데모크리토스 등 이런 쪽의 기계론자들. 이 사람들은 다 하나같이 다원론자들이거든요. 다원론자들인데 이 다원론자들이 왜 다원론을 들고 나와서 자신들의 철학을 구축하려고 했던가. 그것이 아마 오늘 우리가 좀 근본적으로 풀어야 될 과제 중의 하나가 될 것 같구요.
9 그리고 그 다원론자들의 문제 풀이방식이 기계론적이단 말이죠. 그러면 왜 기계론적으로 문제를 풀려고 했는가. 사실 잘 알다시피 유명한 칼 맑스가 자신의 박사학위논문에 썼던 주인공이 바로 데모크리토스잖아요? 데모크리토스를 갖고 박사학위논문을 썼잖아요. 바로 이미 유물론자인 데모크리토스를 통해서 자기철학이 성립되었고 홉스의 [레바이던]이라는 책에 깊이 깔려 있는 사회 시스템이론도 사실은 데모크리토스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는 거죠. 오늘날 서구의 소위 말하는 ‘해부학’, 또 수술을 통해서 인간의 몸을 치료를 하는 이 계통도 사실 데모크리토스 이론에 배경을 두고 있는 거거든요.
10 그래서 이 데모크리토스 이론이 고대에서 그렇게 아주 각광을 받고 중심무대로 진입하지는 못했지만 근대에 들어오면 엄청난 파워로 등장을 하게 되고 그것이 뉴턴의 ‘메카닉스’에서 확산되고 유클리드 기하학을 통해서 발전되는 그런 모습들을 보이거든요? 그래서 이런 상태들을 좀 역사적으로 인지하면서 오늘 이 부분을 좀 더 한번 들여다볼 필요가 있지 않느냐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처음 제목을 보면은 “Ⅳ. 기계론자들과 아낙사고라스 -물질과 정신”이라고 탁 되어있는데 이 ‘물질과 정신’에 대해서 아낙사고라스라든지 기계론자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그 부분을 한번 살펴봐야 되겠는데요. 그 다음 쪽에 “A. 기계론자들”이라고 해서 엠페도클레스하고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에 대한 언급이 나오죠.(p.78)
11 사실 엠페도클레스같은 경우에 그 ‘원소’라는 소제목이 나오죠. 그 제목에 보시면 ‘아르케’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죠? 지난번에 제가 ‘아르케’에 대한 설명을 드린 바 있죠 그죠? ‘아르케’는 소위 말하면 ‘웃시아’와 같은 맥락이죠. 사실 ‘아르케’는 뿌리, 근원 이런 의미가 들어있는 거죠. 그래서 ‘뿌리’, ‘근원’이라는 것은 모든 것들의 원리가 된다라고 해서 결국 ‘아르케’가 ‘원리’가 되기도 하는 거죠. 우리가 영어에 ‘primary’ 그랬을 때 이것이 ‘일차적인’이란 뜻도 있지만 ‘기초적인’, ‘토대적인’이라는 의미가 있잖아요. ‘principle’하고 문맥이 닿아있는 거죠. 그래서 이 ‘아르케’를 찾는 작업이 고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 일반적이죠.
12 세상이 궁극적으로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무엇이 궁극적인 근거인가 했을 때 ‘아르케’를 찾는다라고 보는 거죠. 그래서 이 ‘아르케’를 찾는데 이 때 엠페도클레스같은 경우는 4원소을 내놓았다고 나오죠? 지수화풍. 불과 물과 공기와 흙을 이야기하죠. 그래서 이 존재는 바로 소위 4가지의 ‘뿌리’로 이루어져 있다라고 보는 거죠. 그래서 이 4가지 뿌리들이 흩어지고 모아지면서 이 세계에 대해서 생성이 일어나고 소멸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거죠. 우리가 아주 흔히 중학교, 초등학교 물리시간에 배웠던 것이나 화학시간에 배운 거를 보면은 물이 이완돼서 수증기가 되고 물이 응고가 돼서 얼음이 되고 이럴 때 물이라는 것을 구성하고 있는 어떤 원소가 해체되거나 다시 모임으로써 하나의 일정 물체가 형성되는 과정.
13 그걸 생각해 보면은 원자들의 이합집산을 통해서 어떻게 물이 얼음으로 변하고 어떻게 수증기로 변하는지 그 생성, 변화의 과정을 원자들의 이합집산의 방식을 통해서 설명해내고 있는 것이죠. 그 점에서 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 근간이 되는 근본 요소가 4개라고 보고 이 4가지가 소위 분리되고 만나면서 이 세상에 생성과 소멸이 일어난다라고 보고 있는 거죠. 그래서 거기에 ‘단편8’의 인용문을 보시면은 “「모든 죽어버리는 사물들 중에서 태어나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저주받은 죽음으로 끝나버리는 것도 없으며 오직 혼합과 이 혼합된 질료들이 뒤바뀌는 일만 있을 뿐이다」”(p.78)
14 이게 무슨 말을 의미하느냐라는 것을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거든요. 제가 오늘 아침에도 번역을 하느라고 낑낑대면서 사실, 번역을 올해 끝내야 되는데 큰일 났어요 저는. 올해가 한나 아렌트 100주년인데, 100주년을 즈음해서 책을 출판을 해야 되는데 아렌트의 원전을 하나 제가 번역을 이번 달까지 해서 넘겨줘야 되는데 아직 못 끝내고 있어요. 제가 아침에 낑낑대면서 그 짓을 하다가 거기에 아렌트의 이런 부분이 나와요.
15 서구의 어떤 면에서 ‘끝남’, ‘시작됨’. 영어에 ‘In the beginning’ 그러죠. ‘태초에 말씀이 계셨나니 이 말씀이 ...’. 그러니까 예수가 죽음이후 부활하는 시작 그 시점이 바로 어떤 면에서 우리가 말하는 달력에 시간으로 들어오는 거죠. 그 때부터 인제 시간이 시작되고 있는 거예요. 그 전사, 그 이전 시간은 사실 우리한테 ‘시작’ 개념으로 아직 들어오지 않았단 말이죠. 그런데 바로 예수의 그 탄생이라는 바로 단 하루, 그것이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서 ‘시작’이 일어났고, ‘시작’이 발생했고, 그 ‘시작’이 ‘끝’을 낸다는 거죠. 그래서 기독교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는 거예요.
16 이것이 바로 중세 사상과 그리스 사상의 결정적인 차이를 낳고 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렌트가 거기에서. 그리스 사상에서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거예요. ‘끝’이 ‘시작’이고 ‘시작’이 ‘끝’이고 돌고 도는 거예요. 그런데 이 그리스도교 사상 안에 들어오면은 ‘시작’과 ‘끝’이 형성되어버린다는 거죠.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 서구의 결정적인 중요한 특징으로 부각된다라고 해서 아렌트가 시간 개념에 대한 분석에서 그 이야기가 나오고 있거든요? 그런데 제가 이 이야기를 왜 하는고 하니 여기에 엠페도클레스와 관련해서 사실 죽음도 없다라는 얘기를 하고 있단 말이죠. 죽음도 없다라는 말을 하고 있잖아요 그죠? 예를 들어서 제가 죽는다고 가정을 해보면 어떻습니까. 내 몸뚱아리가 사라지는 거죠.
17 내 몸뚱아리가 사라진다는 거는 뭘 의미합니까. 내 몸을 이루고 있는 무슨 요소들이 분해되는 거죠. 그런데 그 분해되는 요소들이 어디로 가는 거냐 이거죠. 땅으로 가겠지요. 땅에서 식물이 자라고 그죠? 땅에서 생명체가 자라잖아요. 다른 생명체에 나를 이루고 있던 구성요소들이 옮겨간다는 거죠. 그러면 내가 죽는 게 아니라는 거죠. 내가 죽는다는 것은 나를 이루고 있는 모든 요소들이 다 그 원초적으로, 근원적으로 다 사라져버려야 되는데 나를 이루고 있던 요소들이 다른 데로 옮겨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걸 보면 불교에서 윤회설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올 수가 있지 않겠어요? 이런 맥락에서 보면은. 그래서 만나고 흩어지고 할 뿐이지 완전한 ‘끝남’, 완전한 존재, 처음 ‘시작됨’ 없다 이말이예요.
18 이런 면에서 죽는다고 해서 슬퍼하지 마라는 거예요. 죽으면 그냥 너의 몸이 흩어질 뿐이고 태어나면 만날 뿐이다 이말이죠. 그래서 북치고 장구치고 놀자는 거예요. 이런 맥락에서 ‘무시무종’을 이야기하는 하나의 배경적 상황들이 나타나는데 이런 생각들이 그리스 사상 안에 상당히 오래 깔려있습니다. 기독교 사상에 들어오면서 이런 것들이 상당히 배척되거나 비판받고 어떤 면에서 뒤로 물러나게 되는 그런 상황을 띠게 되죠. 오늘날 와서 다시 이 논의가 심각하게 이루어지고 있구요. 그래서 나중에 뒤에 나오겠습니다만 ‘정신’이라는 것도 별 것 아니라는 겁니다.
19 물질적 입자들의 만남 활동이예요.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해볼 수가 있는 거죠. 내가 ‘정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무얼 가지고 입증하냐는 거죠. 제가 지금 생각을 하고 있다는 하나의 사태를 보여주면 되는 거죠. 생각을 못하는 존재에 대해서 ‘정신’이 있다는 말을 안 하잖아요. 제가 지금 여러분한테 말씀을 전하고 있고, 말씀을 전하고 있다는 것은 제가 지금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렇지 않습니까? 말의 현상은 생각현상을 이미 입증하고 있고 그 생각현상은 생각현상을 가능케 하는 주체를 이미 상정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 생각현상의 가능 주체는 누구냐. ‘정신’이라는 거죠. 그래서 ‘정신’이 존재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 이것은 굉장히 어떤 논리적 비약이 있다는 겁니다. 나중에 옥스퍼드대학에 있는 길버트 라일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 옥스퍼드대학에서 많은 활동을 하고 있죠.
20 도서관에 가보시면 Ryle의 책 중에 [The concept of mind]란 책이 있어요. ‘마음의 개념’이란 책이죠. 그 책에 보면은 이런 엠페도클레스와 같은 생각들이 조금 묻어있는 거예요.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다는 현상으로부터 그 생각을 가능케 하고 있는 어떤 주체로서의 정신적 실체가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사과를 떨어지게 하는 어떤 원인자가 사실은 지구의 중력일 뿐인데 어떤 정신이 그걸 당긴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착각을 일으키고 있다는 겁니다. 실제로 우리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뇌의 일정부분이 손상이 되면은 생각을 못한다는 겁니다.
21 그러면 생각은 어디서 나오냐는 거예요. 뇌를 이루고 있는 구성 요소들의 기능작용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생각현상에서 어떤 알지 못하는 X로서의 정신이라는 실체를 원인자로 상정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라는 겁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현상으로부터 중력법칙을 갖는 것은 인정이 되지만, 인간의 생각현상으로부터 정신의 실체를 원인자로 설정하는 것은 마치 ‘기계 속에서 유령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 사람의 용어가 굉장히 유명해졌죠. ‘ghost in the machine’이라는 용어가 아주 유명해졌습니다. ‘기계 속에서 유령을 찾고 있다’라는 겁니다.
22 그런 말을 하면서 정신적 실체를 생각현상으로부터 끌어내려고 하는 이 경우를 ‘categorical mistake’, ‘범주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이런 어떤 생각들을 우리가 한번 다시 현대철학자인, 지금 살아있는 철학자, 영국의 일상언어학파에 속하며 많은 각광을 받고 있는 이 철학자의 말을 우리가 한번 생각해본다면 엠페도클레스 B.C. 400년대 이런 시대 사람아닙니까 그죠? 이 사람의 생각이 그 시대로 끝나버리는 얘기가 아니라 지금 옥스퍼드대학에 있는 이 교수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라는 겁니다. 이런 생각은 여기만 머물러 있는 게 아니고 오늘날 소위 심신철학, 심리철학 쪽으로 넘어와 보면은 여기서 ‘심신 동일론’이라는게 나와요. ‘심’과 ‘신’은 다른 게 아니라는 겁니다.
23 결국은 ‘mental phenomena’는 ‘physical phenomena’로 ‘reduction’(환원)이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환원주의적 입장에서 결국은 ‘mental substance’는 없다는 겁니다. 있는 건 ‘physical substance’밖에 없다는 거죠. 우리가 기타를 연주하게 되면요. 기타를 치게 될 때 손가락의 어떤 움직임과 기타줄과 마찰을 통해가지고 소리가 나잖아요. 그런데 줄이 끊어져버리고 손가락이 마비되어버리면 그 음악은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감명깊은 음악을 듣고서 ‘야 저기 신의 소리가 들리고 있다’. 정신의 어떤 내뱉음이 있다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건 착각이라는 겁니다. 이런 맥락에서 ‘정신적 실체’를 거부해버리는, ‘physical substance’를 중시하는 자들이 상당히 오늘날 발전적으로 나타나고 있거든요?
24 이게 더 구체화되어서 진보된 모습으로 나타난 게 뭔가 하면 ‘인지과학’입니다. 이런 인지과학적 프로그램들이 좀 더 체계화된 게 로봇공학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로봇공학의 첨단제어계측학 쪽에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어떤 논의를 한 번 들어보면 상황이 이러합니다. 우린 아직도 인간이 만든 로봇이 수동적으로 어떤 인간의 작동 시스템에 의해서 움직여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죠? 그런데 이 사람들이 꿈꾸고 있는 게 뭔가 하면 자율적 활동을 하는 로봇시대가 도래하길 기대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비근한 예를 다른 상황에서 든 바가 있는데 실제로 카이스트에서 발명한 발명품 중에 청소기. 우리는 지금도 전원 코드에 꽂아가지고 청소기를 밀고 다니잖아요 그죠?
25 지금 발명된 로봇 청소기는 어떤 거냐 하면 이 청소기는 안에 광센서 칩이 내장되어 있는 거죠. 그래서 햇볕을 찾아가서 에너지를 충전합니다. 우리가 마치 햇빛에 가서 자기 생명력을 얻듯이. 에너지 충전을 하고 먼지 있는 데로 가서 먼지를 빨아 당겨요. 그리고 배출구에 와서 우리가 대변을 보듯이 먼지를 배출하는 거예요. 청소기가 스스로 돌아다니면서 자기가 집안의 모든 먼지들을 제거를 하는 겁니다. 이런 과정들이 점점 더 진행되면은 지금 미국에서 큰 병원들에서는 뭡니까. 상당히 첨단적으로 로봇으로 수술을 하잖아요. 인간 의사는 실수를 하고 손이 떨리고 이럴 때가 있지만 로봇은 정확하게 그 부분을 수술해낸단 말이죠. 그렇게 보면은 이것을 좀 더 철학적 틀로 가져가 보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물질이 점점 진화되면은 ‘정신’이 나온다는 거죠.
26 인간도 처음부터 정신이 있었던 존재가 아니라고 봅니다. 이 사람들 볼 때는. 새는 날개를 썼기 때문에 날개가 발전했고 인간은 머리를 썼기 때문에 머리가 진화돼서 지금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앞으로 더 진화된 물질이 나오는데 그게 바로 로봇이라는 겁니다. 인간보다 더 진화된 존재. 지금도 보면은 컴퓨터 같은 걸을 보면은 그것이 인간보다 훨씬 더 많은 기억들을 하고 있죠? 훨씬 더 정확한 기억을 하잖아요. 훨씬 더 정확한 판단을 내리고. 아 선생님 그렇지만 자기가 스스로 자유롭게 하는 건 아니지 않냐고. 물론이죠. 그 사람들의 반격이 뭐냐 하면 인간은 처음부터 자유롭게 했냐는 겁니다. 상황 속에서 적응하면서 발전한거지.
27 그러면서 결국 앞으로 유기체공학, 섬유공학, 로봇공학, 전자공학. 이것들이 결합해서 뭡니까. 유기체로봇이 나온다는 거죠. 이런 시대의 도래를 통해서 미래의 어떤 인간의 시대가 지금 추구되고 있는 겁니다. 무시무시한 세계죠 사실은. 근본적으로 이런 맥락과 관련해서 지금 우리가 경북대학교 병원에 가도 뭡니까. P.T. 인가요? 우리 몸 검사하는 것 있잖아요. 암검사도 하고. 옛날에는 암환자가 몸에 암이 다른 데로 전이됐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썼던 기법이잖아요? 그런데 요즘은 예방의학에 쓰여 가지고 이제는 어떤 캡슐을 하나 입에 넣고 그러고 있으면은 몸으로 돌아다니는 거죠. 그래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뭡니까. 암인자를 발견해주는 거죠. 80만원 주면 해주죠. 그래서 요즘 돈 있는 사람 가서 많이 하잖아요.
28 조금 더 있으면 우리 인간 몸 안에다 칩만 하나 부착해놓으면 몸 안에 이상이 생기면 신호가 오는 거죠. 이런 시대가 앞으로 우리한테 도래가 된다는 걸 생각하면은 아프면 뭐예요. 인공장기를 만들어서 그죠? 인공두뇌를 만들고 그것들 사이의 분해 결합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시스템이예요. 4원소의 분해와 결합을 통해서 생성, 생명세계를 구축하는 거죠. 그러니까 틀은 뭐 ‘지수화풍’으로 되어있다는 이야기가 우리한테 좀 엉성한 이야기지만 세계 구조에 대한 근본틀을 규명하고 어떤 면에서 나름대로 짜나가는 그 어떤 상황에서 볼 때는 엠페도클레스의 이런 생각이 오늘날에 굉장히 심화되고 있는 거죠 사실은. 그래서 제가 계속 반복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뭐냐 하면 고전철학이라는 것이 갖고 있는 그 주장들이나 생각이 단순히 한 시대의 어떤 우화집에 나오는 장난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충분히 의미 있게 오늘날에도 그 역할들이 재생산되거나 발전되고 있다는 거죠.
29 그런 맥락에서 이 엠페도클레스 부분에 대해서 고민을 해볼 필요가 있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79쪽 12째줄 보시면 “원소와 관련되어 있는 세계의 궁극적인 구성요소가 영원하다고 하는 그의 두 번째의 생각이다.” 그러니까 원소 자체는 영원하다는 겁니다 그죠? 이게 나중에 질량불변의 법칙에 해당되는 뉴턴역학에 그대로 나타나거든요? 그런데 원소 자체는 불변한다는 얘기는 뭘 의미할려고 하는 겁니까. 사실 방금 오늘 이 시간에 와서 처음 말씀드렸던 게 뭡니까. 불변자인 존재와 그죠? 생성하는 유한자 사이의 이 앙상블을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의 문제가 인간의 고민사에 계속돼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것 아닙니까 그죠?
30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데 이 부분에서 불멸성의 부분을 붙들고 싶은 거죠 이 사람들도. 그러니까 원소는 불멸한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생성, 소멸의 세계를 무시할 수는 없는 거죠. 그러니까 어떻게 되요. 원소들의 만남과 흩어짐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원소 자체를 통해서 불멸성을 붙들고 원소들의 만남과 흩어짐을 통해서 생성, 소멸을 붙드는 양동작전을 펴는 거죠. 이런 관점을 한번 간파를 해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면 한 가지 중요한 부분은 뭐냐 하면 그 다음 단락에 보시면은 “질료에다 힘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거죠. ‘질료에다 힘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뭘 의미합니까. 질료의 힘을 인정하면 어떻게 되요.
31 질료 자체 안에 자기 자발적 역량을 허용하게 되면은 어떤 상황이 나옵니까. ‘유기체론’이 나옵니다. 그렇게 되죠? 그런데 엠페도클레스는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는 건 뭐예요. ‘기계론자’란 이야기죠. 어떤 물체가 이동하는 과정이 자기 안의 어떤 자발적 의도를 갖고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적인 어떤 충돌과 부딪힘과 끌어당김의 과정을 통해서 그냥 일어날 뿐이지 여기에 무슨 자발성을 가진 목적지향성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건 나중에 홉스에 가면 재미있는 부분이 나오거든요? 인간, 자연을 분석해낼 때도 홉스는 어떻게 봅니까. 인간을 이빨과 발톱 붙은 야수라고 봤거든요? ‘만인의 만인의 투쟁’을 벌이는 어떤 짐승으로 봤단 말입니다.
32 그러니까 욕구라는 먹거리에 끊임없이 끌려 다니는 어떤 존재로 봤단 말이죠. 돈이 보이면 돈으로 눈이 확 가고 말이죠? 예쁜 여자가 보이면 그쪽으로 눈이 가고 말이죠. 그러니까 소위 인간이라는 존재가 본능적으로 자기를 자극하고 있는 요인에 의해서 끌려간다는 거죠. 욕구의 노예란 말이죠. 욕구의 족쇄에 채여서 욕구의 법칙에 지배를 받는 그런 욕망적 존재라고 인간을 홉스가 이해하고 있잖아요 그죠? 그래서 욕망시스템을 개발하는 게 사회과학이라는 거죠. 욕망의 제어장치 그게 바로 ‘사회계약론’이죠. 그럼 엠페도클레스의 이런 생각을 사회시스템에 가져 가면은 홉스의 이론이 나오는 거죠 그대로. 그리고 우리가 언 듯 생각할 때 오늘날 우리 인간들이 욕망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들이라면 홉스 이론에 너무도 잘 들어맞는 거죠. 욕망으로만 인간을 설명할 수 없다면 홉스 이론은 안 맞는 거예요.
33 과연 그래서 어디까지를 인간사회의 형성원리의 기준으로 삼을 것이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하버마스 같은 친구도 실제로 ‘의사소통이론’을 내놓을 때도 그 친구 하버마스가 그런 언급을 하지 않습니까? 그 뭡니까. ‘노동과 상호행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이 친구가 뭡니까. ‘지성’을 이야기할 때 ‘도구적 지성’하고 ‘실천적 지성’을 구분을 하잖아요. ‘도구적 지성’이란 게 뭐예요. 욕구 추구하는 그런 전략적 능력을 가진 존재를 말하는 것 아닙니까 그죠? 그런데 ‘실천적 지성’이라는 것은 타자에 대해서 그의 인격을 존중하고 타자에 대해서 배려하고 하는 윤리적인 고민을 안고 있는 주체가 ‘실천적 지성’이잖아요.
34 그런데 하버마스가 모더니즘의 어떤 미완의 기획을 공격할 때 모더니즘이 기형화되었다, 잘못됐다 했을 때는 뭐냐 하면 ‘도구적 지성’만 발전해버렸고 타자에 대한 윤리적 책임은 고민하지 않는 ‘윤리적 지성’은 망그러져 버린. 그게 인제 아도르노로 말하면 ‘도구적 지성’의 남발이고 그죠? 그 누굽니까. 마르쿠제가 말하는 ‘일차원적 인간’인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그렇게 볼 때 소위 ‘기술적 지성’의 메카니즘을 가지고 문제를 풀려고 하는데 대해서 하버마스는 곤란하다. 그렇게 보니까 당연히 홉스를 하버마스가 공격한단 말이죠. 그 뿐 아니라 하버마스는 홉스를 공격하는 연장선에서 맑스도 공격해버리죠. 프로이트도 공격하죠. [인식과 관심]이라는 책에서 하버마스가 프로이트 자체도 공격을 신랄하게 있단 말이죠.
35 그 요인이 뭡니까. 마르크스같은 경우는 인간을 경제적 동물로 봐 버렸다는 거죠. 자본의 욕구체계에 의해 움직이는 놈으로만 봤다는 거죠. 그러니까 전형적인 실증주의적인 사고를 갖고 있다라고 아렌트도 그렇고 하버마스도 다 그렇게 공격을 하는 거예요. 또 그것뿐만 아니라 프로이트에 대해 공격하는 이유도 뭡니까. 프로이트는 뭐라 그래요. ‘리비도’를 가지고 인간을 설명한단 말이죠. 모든 인간의 욕구체계를 소위 말해서 ‘sexuality’를 가지고 설명한다는 거죠. 이미 욕구체계를 가지고 인간을 설명해내니까 그걸 또 하나의 심층심리학이라고 하지만 그 자체가 이미 뭡니까. 따지고 보면은 ‘행동주의심리학’이랑 별반 다를 거 없다 이말이예요. 그래서 프로이트 이론조차도 실증주의적이다라고 하버마스가 많이 공격하잖아요? 그리고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문명]이란 책에서도 ‘에로스’의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이 너무 프로이트식으로 풀어 가면 문제가 풀리는 게 아니다 이거예요. 그건 너무 주관심리학적이라는 거죠.
36 사회의 어떤 객관적 구조에서 보지 않고 있다는 거죠. 그런 논의들이 점진적으로 많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과연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사실 엠페도클레스의 이런 세계관을 가지고 세계와 사회를 이해할 것이냐, 아니면 그걸로 부족하냐 이 문제를 놓고 볼 때. 누만과 하버마스의 싸움은 바로 그런데 있는 거죠. 막스 베버와 하버마스의 싸움도 일정 부분 거기에 관련되어있는 거고. 어쨌든 이런 맥락들을 우리가 잘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는 거죠. 그래서 ‘질료에서 힘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발성을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발성을 주지 않았다는 것은 ‘유기체론’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 원초적인 실제는 어떻게 하든 움직여야만 한다. 이 운동은 두 가지의 원초적인 힘, 즉 사랑과 미움에 의해서 생긴다.
37「나는 너희들에게 두 가지의 것을 가르쳐 주려고 한다. 여러 가지 것들이 뭉쳐 당장 하나의 것이 생겨났다간 곧 다시 분리된다. ……그리고 이 끊임없는 교환은 절대로 중단되지 않는다. 당장 모든 것들이 사랑 속에서 하나로 합쳐졌다가 당장 다투는 미움 속에서 하나 하나의 사물로 분리되어 버린다」” 이걸 우리가 전형적으로 말하면 ‘물활론’이라 그래요. 물활론. 칸트가 [판단력비판]에서 이 ‘물활론’을 심각하게 공격하거든요?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모든 존재를 ‘물활론’으로 설명하는 것도 곤란하다는 겁니다. ‘사랑과 미움’이라는 것은 하나의 뭡니까. 인간을 하나의 ‘passion’에 지배받고 있는 존재로 보는 거거든요. 어떤 감정의 정념에 지배받는 노예라고 보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건 곤란하다는 거죠. 왜냐하면 당장... 어제 내 방에 수의학과 학생 한분이 부지런히 찾아오거든요?
38 약간의 우울증도 있는 학생이예요. 제 수업들었던 한 학생의 소개로 해가지고 중간에 제 방에 왔던 것이 계속 일종의 철학 치료를 받고 있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뭐냐 하면 언니는 경대 의대를 다니고 있어요. 그 아버님은 의사였는데 일찍이 사고로 돌아가셨어요. 그 어머님은 뭐냐 하면 이 언니처럼 의대를 못 가고 수의대를 갔다고 늘 이렇게 무시하는. 그래서 이 친구는 뭐냐 하면 어머님에 대한 증오, 그래서 집에 가기 싫다는 거, 사람이 싫다는 거. 이런데 대한 굉장히 어떤 그 고민에 휩싸여 있는 친구예요. 그래서 제가 그 친구를 만나서 자주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야말로 이야기를 해요.
39 우리가 이야기를 할 때 제일 근본정신을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건 이야기는 목적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야기에는 어떤 의도가 들어가면 안돼요. 이야기에는 답을 가르쳐주려는 어떤 자세를 갖춰서도 안돼요. 이야기는 그냥 이야기예요. 그냥 말할 뿐이예요. 그냥 서로 소리칠 뿐이예요. 그게 철학 치료의 근본 목적이거든요? 정신치료는 답을 갖고 출발해요. 어떤 답을 가지고 자꾸 치료할려고 해요. 그런데 철학치료는 그게 아니예요. 답이 없어요. 그냥 이야기해줄 뿐이예요. 그런데 이야기해주는데 좋다는 거야. 이야기해주는데 그냥 답이 되는 거야.
40 그런 친구가 찾아와서 ‘사랑과 미움’에 관한 이야기를 저랑 많이 나누었어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이 친구가 나 때문에 국선도를 나가요. 내가 국선도를 왜 나가게 했느냐 하면 우울증환자들이 국선도 많이 나가거든요? 국선도를 이렇게 해보면은 하나 국선도나 태극권이 좋은 게 뭐냐 하면 명상을 한 사오십분하는 데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느껴요. 누워서 쫘악 뻗어 있으면은 온 몸을 놓는 거죠. 쫘악 누워 있으면은 맥박이 뛰어요. 그리고 손가락 끝부터 발가락 끝까지 뭐가 일어나고 있는 분위기가 느껴져 와요. 그러면 그 하나하나에 대해서 감사해요. 당신 자체를 이루고 있는 모든 구성원에 대해서 내가 내 정신의 욕망을 위해서 얼마나 너를 괴롭혔고 너 손이 내 욕망을 위해서 얼마나 많이 고통을 당했고 너 머리가 내 정신을 위해 얼마나 고통을 당했냐.
41 너 발이 나를 위해서 얼마나 많이 시련을 당했냐. 미안하다 품어주고 써 담아주고 자기 몸에 대해 포옹을 하는 거예요. 자기 몸과의 어떤 애정나누기를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뭐냐 하면 자기 몸과 애정을 나눈다는 거는 뭡니까. 타자를 사랑할 줄 아는 거예요. 온통 자기 몸에는 뭐냐 하면 그 동안 타자에 대한 불신만 쌓여져 있었거든요. 그래서 몸에서 일어나는 훈기들에 대해서 직접 느끼고 거기에 그대로 몰입해 들어가는 거죠. 그러면서 뭐예요. 어머니에 대해서 미움 감정을 떨쳐버리죠. 미움을 가지면 가질수록 너는 빠져나올 수 없다. 그래서 요즘 상당히 좋아지고 있어요. 어제는 굉장히 기분 좋게 찾아왔더라고. 그래서 인제 제가 이런 이야기를 왜하느냐 하면 이 때 미움이라고 하는 거라든지 사랑이라는 개념있잖아요?
42 상당히 욕구 장치 안에 들어와 있는 것들인데 근본적으로 이걸 떠나야 된다고 보거든요? 이 엠페도클레스도. 이걸 넘어서야 된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지금의 일어나고 있는 모든 생성, 변화 속에서는 이것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거죠. 우리가 사랑도 미움도 그 안에 머물러 있는 자는 극복이 안 되거든요. 그래서 그런 생각들을 한번 해보시기 바라구요. 그 다음 쪽으로 넘어가 보시면 소제목 “세계형성”이라는 단락에 2째줄 보시면 “공모양으로 둥근 시기에는 사랑만 지배하고 모든 것이 하나이며 특수한 것들은 하나도 없다. 두 번째 시기에는 투쟁이 끼여든다. 그래서 통일은 깨어지고 원소들은 분리되고 다양성이 점점 더 늘어난다.”(p.80) 자 ‘통일이 깨어지면서 다양성이 늘어난다’고 되어있죠 그죠? 그렇잖아요.
43 그 동안에 우리는 통일을 우리가 희망하는 바고 조화를 우리가 추구해야 될 바로 생각했잖아요. 그런데 포스트모던은 뭡니까. 후자잖아요. 깨어짐, 충돌, 불가공약 그죠? 이것들이 굉장히 중요한 개념으로 떠올랐잖아요? 그래서 다양성의 확보라는 것은 충돌을 통해서 일어난다는 거죠. 그래서 사랑과 미움이라고 하는 것은 조화와 통일 이 쪽과 분열과 깨어져 나감이라는 두 가지 상황에서 이게 문제를 봐야지 어느 한 쪽만 갖고 문제를 봐서는 안된다라는 그런 인식이 이 안에 들어있다라고 볼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엠페도클레스의 이런 생각들 속에서 사랑과 미움이 계속 돌고 돈다는 순환 사관으로, 순환적인 생각으로 논의를 풀어가고 있죠 그죠? 그 다음으로 다음 단락에 보면 “영혼의 세계”란 부분이 나오죠.
44 “엠페도클레스는 물체의 세계 외에 영혼 또는 정신의 세계도 탐구했다. 영혼이나 정신은 원래 신들 곁에 있었다. 그러나 어떤 나쁜 짓을 했기 때문에 영혼들은 땅에 떨어지게 되었는데 다시 정화되고 육체에서 풀려나 저 세상에 들어갈 수 있을 때까지 몇 차례 육체에 들어감으로써 계속 윤회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상당히 불교적이죠? 이런 걸 보면은 사실 그리스 사상과 인도 사상이 기독교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렇게 큰 차이는 없었어요. 거의 순환사관을 갖고 있었고 영혼과 정신 사이의 이런 구조를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거죠. 그래서 놀랍게도 이런 배경들을 이해해보는 것은 오늘날에도 굉장히 의미가 있다라고 볼 수가 있겠죠.
45 그 다음에 이 쪽에 보면은 다음 단락이죠.(p.81) 엠페도클레스의 인식론이 나오죠. “우리들은 항상 같은 것을 통해서 같은 것을 안다고 하는 사상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흙의 질료를 가지고써 흙을, 우리들의 물을 가지고써 물을, 우리들의 영기를 가지고써 신의 영기를 우리들의 불을 가지고써 모든 것을 없애버리는 불을, 우리들의 사랑을 가지고써 세계의 사랑을, 그리고 우리들의 슬픈 미움을 가지고써 세계의 미움을 본다」” 같은 것을 통해서 같은 것을 본다. 결국 내가 어떤 존재를 알려 그러면 내가 그 존재와 같은 수준에 올라가야 된다는 거죠. 그 수준에 못 올라가면 내가 그 존재를 알 수 없다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결국 존재론적인 어떤 동률상에 있지 못하면은 인식론적인 갭(간격)을 메울 수 없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거죠. 그 말은 결국 뭡니까. 역시 인간은 우주의 한 부분이라는 거죠. 우주 속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 혼자 우뚝 서서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건 아니다는 거죠.
46 우주와 합일을 통해서만이 우주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는 것이고 자기에 대한 이해를 근본적으로 얻어낼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나중에 데모크리토스 같은 친구를 보면 인간을 ‘소우주’라는 말을 씁니다. 그 맥락에서. 자 그 다음에 한 단락 더 지나보시면 ‘헤라클레이토스와 엘레아학파를 재미있게 종합해 놓은 것이 엠페도클레스의 사고’인데 “엘레아학파의 철학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은 생성되지도 않고, 파괴되지도 않으며, 질적으로 변하지도 않는 존재 즉 원소가 있다고 하는 그의 학설이다. 특히 세계시기의 제 1기는 완전히 엘레아적인 사상이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은 생성을 결정하고, 제 1시기 이외의 세계시기를 지배하고 있는 끊임없는 혼합과 분리라고 하는 사상이다. 엠페도클레스에 있어서는 하나의 한결같은 존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성과 운동도 있다.”라고 보는 거죠.
47 그러니까 제가 두 세계의 종합론이라고 말씀을 드렸던 그 핵심적인 주장이 여기 담겨있는 거죠. 자 여기까지 내용 중에 혹시 문제될 부분이 있습니까? 궁금한 사항이라도 있습니까? 없으시면 “b)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로 넘어가는데요. 첫 단락 밑에서 6줄 올라가시면 “데모크리토스는 이론적으로는 유물론자였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모든 시대를 통해서 가장 위대한 관념론자였다.” 이런 말이 나와요.(p.82) 유물론자인데 관념론자라니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냐. 아마 이해가 좀 필요한 부분일 거예요. 일단 잠시 그 부분을 의문표로 찍어놓고 밑으로 내려가 보죠.
48 원자에 관한 이론을 내놓았다고 보고 있고 “질적으로 아무런 차이도 없는 한 가지 모양의 존재가 있을 뿐이다.” 이 원자는 ‘Atom’이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나눌 수 없다’는 거예요. ‘Atom’. 그 밑에 보시면 “엠페도클레스가 원소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던 것처럼, 데모크리토스는 원자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라는 말이 있죠. ‘원소’, ‘원자’. “원자는 공간을 채우고 있으며 꿰뚫고 나갈 수 없는 것이며 무겁고 영원하며 파괴할 수도 없는 것이다. 원자의 수는 무한하다. 원자에는 질이 없다. 모든 원자들은 꼭 같은 종류이다. 그러나 원자의 모양은 달라서 낫 모양의 원자, 갈구리 모양의 원자 및 구슬 모양의 원자 등이 있다. 그리고 그 크기들이 다 다르다. 또 원자들은 서로 다르게 배열될 수 있으며, 서로 다른 위치를 택할 수가 있다.”
49 요즘 뭐 DNA구조가 다 다르다는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그죠? 철학적 상상력이 대단한 사람들이죠. 그런데 여기 이걸 보면은 금방 누구를 떠올리게 되느냐 하면 라이프니츠를 떠올리게 됩니다. 근대철학자. 라이프니츠는 16세기, 17세기 철학자죠. 라이프니츠는 법학자이기도 했고 실제로 법관이지고 했죠. 이 라이프니츠가 내놓은 이론이 ‘모나돌로기’, ‘모나돌로기’. ‘모나드’라는 말을 써요. ‘모나드’는 우리말로 ‘단자’이죠. 그래서 ‘단자론’을 내놓은 사람이 라이프니츠란 말입니다. 이 세상은 무수한 단자들로 이루어져 있다라고 주장한 사람이 라이프니츠거든요.
50 그런데 이 ‘단자’들의 만남과 헤어짐의 과정을 기계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반대하거든요. 그것에 대해서 일종의 뭐냐 하면 상대적 설명을 하는 거예요. 라이프니츠의 이 이론이 나중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낳게 됩니다. 그런데 라이프니츠의 이 ‘모나드’도 무수히 많아요. 무수히 많은데 다만 차이는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는 물질이 아닌데 데모크리토스의 ‘Atom’은 물질이예요.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는 정신입니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는 ‘질’이 있어요. 데모크리토스의 ‘Atom’에는 ‘질’이 없어요. ‘양’이예요.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나 데모크리토스의 ‘Atom’이나 죽지 않고 불멸합니다. 그건 똑같아요. 그런 점에서 다원론자라는 점에서 맥락이 같아요.
51 다원론자라는 맥락이 같고. 다만 다원론자인 그들 사이에 ‘원소’가 정신이냐, 물질이냐의 차이에서 ‘유물론’과 ‘유심론’으로 갈라져 버리는 겁니다. 이게 결정적인 차이가 나는데 그러면 왜 다원론이 여기서 나왔냐고 하는 것은 역시 근대의 라이프니츠가 다원론을 내놓은 배경하고 똑같아요.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요. 라이프니츠가 있기 전에 누가 있었냐 하면은 데카르트와 스피노자가 있었습니다.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싸움의 골격은 뭐냐 하면 정신과 물질의 관계예요. 나중에 근대철학에서 자세히 설명이 되겠습니다만 데카르트는 ‘정신’과 ‘물질’을 두 가지 ‘실체’로 봤습니다. 전혀 다른 ‘속성’을 갖고 있는 독자적 ‘실체’로 봤습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심신상호작용설’을 주장한 사람입니다.
52 ‘정신’이라는 ‘실체’가 ‘물질’라는 ‘실체’에 영향을 주고 ‘육체’라는 ‘실체’가 ‘정신’이라는 ‘실체’에 영향을 주는 그런 ‘상호작용설’을 주장했던 사람이예요. 그런데 이 부분이 사실은 문제가 되어서 나중에 심리철학에 본격적인 어떤 화제가 되었는데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바늘로 콕콕 찌르면 ‘아!’ 그러잖아요. ‘육체’라는 ‘실체’에 자극을 줬는데 어떻게 ‘정신’이라는 ‘실체’에 전달이 되었는가. 물과 기름처럼 전혀 다르면 전달이 안 될 텐데 어떻게 전달이 되는가 했을 때 데카르트가 말하기를 인간의 대뇌의 정수리에 보면은 ‘송과선’이 있는데 ‘송과선’에 의해서 ‘정신’과 ‘물질’의 관계에 연결을 시키고 있다는 것. 실제로 한의학을 배우면은 뇌의 중추신경이 약한 사람한테는 치료법이 송과선 치료라는 것이 있습니다.
53 고도의 스트레스에 빠진 사람들이 밤만 되면 계속 신경적인, 신경증세를 보여서 잠을 못 이루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중추신경치료를 받거든요? 그 때 송과선 치료를 한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이 ‘송과선’이 있어가지고 양자 사이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보거든요. 실제로 그것이 있든지 없든지 그건 차치하고라도 이것이 스피노자의 공격대상이 됩니다. 왜냐하면 데카르트의 정의에 의하면 ‘정신’은 ‘길이’가 없다고 봅니다. ‘물질’은 ‘길이’가 있다고 봐요. 그런데 ‘송과선’이라는 것이 대뇌 정수리에 위치하고 있다면 논리적으로 공간을 점하고 있는 겁니다. 공간을 점하고 있다는 것은 ‘길이’가 있다는 겁니다. ‘길이’가 있다는 것은 송과선도 ‘물질’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송과선’에서 ‘정신’으로 어떻게 전달되는가를 또 설명해야 되는 부담이 나오는 거예요. 이 문제에 답이 막혀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스피노자가, 나중에 스피노자가 들뢰즈한테 많은 영향을 주거든요?
54 상당히 많은 영향을 주는데 이 스피노자가 ‘이 멍청아, 정신과 물질이라는 것을 독자적인 실체로 인정하니까 그런 문제에 빠진 거지. 처음부터. 정신과 물질이라고 하는 것은 한 실체의 나타난 모습일 뿐이지 정신이라는 실체가 따로 있고 물질이라는 실체가 따로 있고 아니다 이말이야. 정신과 물질은 한 실체의 양면이다’해서 ‘심신양면설’을 주장해버립니다. 이렇게 주장을 하면서 소위 말해 두 개의 ‘실체’사이를 설명해야 하는 부담을 털어버려요. 나중에 이게 들뢰즈의 뭐로 나타나느냐 하면요. ‘아방’개념으로 나타납니다. 영어로 ‘event’, ‘사건’개념으로 등장합니다. ‘이벤트 온톨로기’라는 용어를 자주써거든요, 현대철학에서. 제가 언젠가 그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을 것 같긴 한데 ‘사건’이 일어났다. 오늘 새로운 세 분이 또 이 자리에 오셔가지고 네 분과 함께 일곱 명이 앉은 ‘사건’이 일어났다.
55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은 단순히 이게 뭡니까. 물리적인 어떤 상황만을 설명할 수 없는 거예요. 이 일에 참여한 그 분들의 정신적 세계가 동참된 거예요. 그렇다고 정신적 세계만 있다고 이렇게 ‘사건’이 일어나진 않아요. 몸뚱아리가 와야만 사건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건’은 이미 뭐예요. ‘정신’과 ‘물질’이 같이 돌아가. 그래서 ‘사건’에서는 ‘정신’을 빼버릴 수도 없고 ‘물질’을 빼버릴 수가 없는 거예요. ‘사건’은 이미 ‘주체’를 뺄 수도 없고 ‘객체’를 뺄 수도 없는 거예요. ‘사건’은 이미 ‘주체’와 ‘객체’가 같이 들어와 있는 거예요. 그런 맥락에서 들뢰즈가 이 ‘아방’이라는 개념을 자주 쓰고 있거든요? 어쨌든 그런 맥락에서 스피노자가 주장을 하게 되는데 스피노자 철학 안에 가장 큰 문제점은 뭐냐 하면 어떻게 ‘정신’과 ‘물질’이라는 세상이 큰 ‘실체’ 하나에서 나타날 수가 있느냐. 어떻게 나타날 수가 있느냐. 이걸 설명을 못해요.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란 책을 들뢰즈가 썼잖아요?
56 ‘실체’가 어떻게 ‘양태’로 표현되는냐. 그걸 설명해야 되는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그게 설명이 안 돼가지고 고민에 빠지게 되는데 ‘무한자’에서는 ‘무한자’가 나와야지 어떻게 ‘유한자’가 나오느냐. 이게 나중에 헤겔의 변증법이론에 굉장히 많은 영향을 주게 되거든요? 스피노자의 철학하고 셀링 철학을 싸잡아가지고 헤겔이 비판하거든요. 헤겔이 뭐라 그러냐 하면 스피노자와 셀링의 철학 체계를 ‘깜깜한 밤에 검은 소를 보는 거와 같다’. 구체성이 없다는 겁니다. 어떻게 ‘무한’과 ‘유한’의 관계를 그렇게 신비적으로 설명하냐 이말이예요. 하이데거가 헤겔주의를 공격하는 것과 똑같은 맥락이예요. 어쨌든 ‘무한’에서 ‘유한’을 풀어내는 문제와 ‘유한’에서 ‘무한’을 풀어내는 문제가 스피노자에서는 어렵게 되요.
57 그러니까 라이프니츠가 나와서 ‘결국 니네들 문제는 어디 있냐. 실체를 두 개로 인정하는 데카르트 이론도 틀렸고 실체를 하나만 보는 스피노자 이론도 틀렸다. 실체가 여러 개면 그런 문제가 안 생긴다’는 거죠. 그래서 ‘실체 다원론’은 마치 파르메니데스하고 헤라클레이토스 이 둘의 싸움을 볼 때처럼 ‘존재’만 주장하거나 ‘생성’만 주장하면 문제가 생긴단 말이죠. ‘실체’를 여러 개로 놓으면 그런 문제가 안 생긴다는 거죠. 이래서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도 여러 개라는 이야기하는 거예요. 싸움의 구도는 똑같아요. 자세한 것은 근대철학가면 언급될 거니까 지금 너무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그 때가면 다시 꼼꼼하게 논의될 필요가 있는 거니까. 그래서 결국 데모크리토스 같은 경우는 ‘양적 기계론자’이죠. 이 부분이 나중에 근대 공리주의, ‘양적 공리주의자’ 벤담한테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58 벤담도 아시다시피 그런 얘기를 하지 않습니까 그죠? 인간의 어떤 행위는 선한 행위이다, 어떤 행위는 악한 행위이다는 이것을 결정하는 것은 뭡니까. ‘쾌락의 강도’, ‘쾌락의 지속성’, ‘쾌락의 순수성’, 그런 걸 따지잖아요. 다시 말해 ‘쾌락의 양’을 가지고 선과 악을 정하거든요? ‘쾌락의 양’이 많으면 선한 거죠. 적으면 악이라고 본단 말이예요. 결국 이런 면에서 본다면 모든 것들을 ‘양화’를 시켜냄으로서 설명을 해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이쪽으로 가게 되면은 ‘질적인 것’은 배제가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시대를 보면은 양화주의가 굉장히 강화되고 있거든요? 이것도 이런 맥락하고 관계된다고 볼 수 있죠.
59 자 그 다음에 ‘질적인 면’은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도 고민해주시고 그리고 이 사람의 인식 문제와 관련해서도 ‘감각지각’ 있잖아요? ‘감각지각’에서 우리한테 쓰게 느껴지는 것, 짜게 느껴지는 것, 맵게 느껴지는 것, 이런 것 다 있잖아요? 이건 다 뭡니까. 주관적이라고 봅니다. 실재가 아니라고 봅니다. 이미 그 단락 끝에 가보시면 데카르트와 로크, 특히 로크에 가서 ‘제 1성질’과 ‘제 2성질’이라는 말이 나오거든요? 조금 어렵게 느껴질지 모르겠는데요. 전혀 어려울 게 없습니다. 철학적 용어라서 부담이 가는 건데 아무 것도 아니예요. 제가 만약에 양치를 하고 사과를 입으로 깨물면 어떨까요. 맛이 원래 맛이 안 나죠. 사과의 원래 맛이 그 맛이 아닌데 이를 닦음으로써 맛이 달라져버리잖아요. 그죠?
60 나한테 주관적으로 느껴지는 맛 있죠? 그게 ‘secondary quality’입니다. 원래 그 사물체가 갖고 있던 고유한 성질, 그것은 ‘primary quality’라 그래요. ‘제 1성질’이라 그럽니다. 우리가 ‘감각지각’을 통해서 파악되는 것은 ‘제 1성질’이 지각되는 것이 아니라 ‘secondary quality’라는 거죠.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미 로크가 근대에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엠페도클레스, 데모크리토스도 이미 이 이야기를 합니다. ‘감각지각’은 다 허망한 상상인 거예요. ‘유물론자’들의 재미있는 것은 뭐냐 하면요. 착각을 떠나라. 착각으로부터 떠나라. 정신의 착각에서 깨라는 거예요.
61 그 다음에 원자들이 텅 빈 공간에서, 이 사람들이 공간을 이야기하거든요? 그 사이를 움직이면서 소위 활동을 한다라고 보고 있죠. 운동을 한다라고 보는 거죠. 움직이는데 이 움직이는 과정이 굉장히 기계적으로 움직인다는 거죠? 작용과 반작용에 의해서 기계론적으로 움직인다는 거죠. 84쪽 소제목 ‘인과적 기계론적 자연관’이라는 부분 위에 단락에 보면 “기계론적으로 세계를 설명하는 전형적인 유형이다. 자연은 이제 신화에서나 헤라클레이토스에게 있어서 처럼, 신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우리들은 이제 엠페도클레스에서 본 바와 같은 깊은 생각이니, 죽음이니, 의지니 하는 따위의 인간과 비유되는 범주를 가지고 있지 않고 물체와 운동만을 가지고 있다. 이런 것들과 함께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은 압력과 충돌”뿐이다.
62 모든 것은 뭡니까. 물리적인 어떤 운동관계로 설명하겠다라는 거죠. 모든 사태를 이렇게 접근해 들어가는 겁니다. 철저하게 ‘계량화’하는 거죠. 이렇게 ‘계량화’를 하니까 어떤 문제가 생겼습니까. 이 ‘계량화’를 바탕으로 한 게 어떤 면에서 행동주의 심리학의 전형적인 틀이라고 볼 수 있는 거예요. 뭐 제가 자주 비유를 하지만 파블로프의 개 실험하면서 뭐예요. 종치고 밥주고, 종치고 밥주고 그래서 종만 치면 침 흘린다는 거 있잖아요. 그게 일종의 기계적인 반응 아닙니까 그죠? 연상 심리학 자체가 기계론적이잖아요. 그렇게 볼 때 상당히 우리가 불쾌한 것은 뭐냐 하면 나한테 어떤 그런 실험을 적용하면은 내가 감히 거기에 대해서 수긍하고 싶지 않잖아요. 그죠? 그것은 이미 나에게 뭐가 작동하고 있다는 거예요. 내가 자발적으로 내 행위를 수행하는 어떤 의지를 갖고 있다는 것 아닙니까.
63 내 의지력은 기계론적인 설명방식에 의해서 모든 걸 해명할 수 있을 만큼 종속되어 있지 않다는 거죠. 실제로 우리가 ‘어떤 사람한테 너 왜 그 짓을 했니? 너 그러면 안 되잖아’. 그렇게 따졌을 때 그 따짐의 상황을 어떤 면에서 우리가 인정할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 사람이 그 행위를 스스로 했다는 것을 전제해야죠. 내가 이걸 슬쩍 훔쳐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선생님 강의하러 와서 왜 물건을 훔칩니까’ 그랬을 때 내가 ‘아 손이 저절로 가는 걸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이건 내 통제 밖의 상황이라서’. 이렇게 나오면 책임을 물을 수 없잖아요? 내가 이걸 통제할 수 있다는 걸 전제할 때만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 아니예요. 그렇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통제 불능인 금치산자한테 책임을 안 묻잖아요. 정신병자한테 우리가 책임을 묻습니까? 안 묻잖아요.
64 그렇게 볼 때 적어도 이런 식으로 전개해 버리면은 책임을 묻고 있는 이 세계의 상황을 설명할 수 없게 되어버리죠. 안 그렇겠어요? 따라서 이 ‘기계론’에 대한 공격이 나오는 겁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거든요. 왜냐하면 나중에 알튀세르나 루카치나 아도르노도 마찬가지이고 이런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뭐냐 하면은 마르크스를 공격합니다. 마르크스를 공격하는데 가장 근본적인 공격은 어디 있는냐 하면은 ‘반영설’에 있거든요. ‘반영설’이라는 것 들어보셨어요? ‘의식은 물질의 반영이다’. 마르크스의 테제 중에 가장 중요한 테제가 뭡니까.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이 말이 나오죠. 그죠?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65 이 때 ‘존재’란 말은 다른 맥락에서 말하면 뭡니까. ‘사회적 상황’이죠. 내가 좋은 대학 가가지고 박사학위를 해가지고 교수가 되고 싶은데 이 빌어먹을 돈이 없다. 그런 ‘사회적 상황’이 내 의식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이 말이예요. 결국 이렇게 볼 때 ‘경제적 구조, 물질적 하부구조가 나의 의식의 상부구조를 규정하고 있다’는 거죠. 이게 ‘유물론’아닙니까? 그죠? 그러니까 물질의 왜곡된 구조는 정신의 왜곡을 낳을 수밖에 없고 물질의 왜곡구조를 만드는 것이 자본주의이고 따라서 자본주의의 메카니즘을 깨뜨리지 않으면은 정신의 기행적 현상을 극복할 수 없다는 거예요. 이 부분을 놓고서 비판을 하는데, 막스 베버도 이 점에서 마르크스를 공격하죠. 마르크스를 공격할 때 결국은 마르크스가 보고 있는 ‘유물사관’ 이란 거 아닙니까. 막스 베버는 기독교적 사관이 깔려있는 거니까.
66 결국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의식’이 ‘존재’에 의해서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때로는 뭡니까. 또 ‘의식’이 ‘존재’에 영향을 주기도 하는 것이지 어떻게 일방적으로 ‘존재’가 ‘의식’을 지배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거죠. 예를 들면 마르크스는 지나치게 인간을 ‘경제적 동물’로 편승시켰고 ‘경제적 상황’에 의해서 인간의 의식을 옭아매져 있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죠. 마치 융이 프로이트를 공격할 때 너무 인간의 본능적인 성적 메카니즘을 가지고 인간의 모든 행위를 설명할려고 한다는 것이 문제가 있다는 것 아닙니까 그죠? 그래서 융의 ‘집단 무의식’이론도 나오면서 ‘의지’부분에 대한 강조가 나오잖아요. 그렇게 볼 때 데모크리토스의 이런 생각이 누구로부터 공격을 받느냐 하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공격을 받습니다.
67 결국 뭐냐 하면 ‘너의 이론 안에는 모든 것들이 의식이 물질에 기계론적 지배를 받고 있는 구조를 갖고 있다’라는 겁니다. 칸트도 그래서 나중에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오늘 낮에 음식을 잘못 먹어가지고 배가 아프다. 이것은 니네가 말하는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거야. 그러나 내가 내 마음이 아프다. 이것은 그것 갖고 설명이 안 된다 이거야. 내가 배 아픈 것만으로 마음이 설명이 안 된다 이거야.’ 그래서 칸트는 인제 인간의 세계에서 목적론적으로 설명이 되어야 될 것과 유기체론적으로 설명되어야 될 것이 있고, 기계론적으로 설명되어야 될 것이 있는 것이지 어느 한 원리를 가지고 세계 전체를 설명할려고 하는 이것은 횡포다. 이론이 ‘도그마’적이고 이게 근대 담론의 테러라는 거죠.
68 그런 맥락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기계론적인 세계이해방식’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지적을 하게 되는데요. 바로 그게 여기에 나와 있죠. 85쪽 소제목“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이라고 나와 있죠. 거기서 3줄 내려가 보시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원자론자들은 경솔하게도 운동의 군원을 밝히기를 소홀히 했다고 지적함으로써 이 원자론의 약점을 들췄다. 사람들은 운동이 영원한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이 영원한 운동의 근거를 밝힐 의무를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것은 반드시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기계론적인 인과관계만이 인과관계의 전체인가? 또 우리들이 존재를 완전히 이해하려고 할 때에는 과연 다른 원인이 필요하지 않는가 하는 물음들이 당장 제기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데모크리토스의 이론은 존재를 때려 부셔서 얻어진 부분들은 보고 있으나 모든 것을 통일시키는 요소들은 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기란 어렵지가 않다. 괴에테는 「너희들은 부분들은 손에 쥐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것들을 얽어맬) 정신적인 끄나풀은 가지고 있지 못하구나」할런지도 모른다.”
####교수님께서 책에는 ‘괴에테’로 표기되어있는데 ‘피히테’로 착오하신 건지 아님 ‘피히테’가 원래 맞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확인해 봐야겠군요####
69 피히테가 이런 주장을 할 만한 나름의 사연이 있죠. 피히테가 우리가 흔히 알려져 있는 것이 뭡니까. ‘절대아’의 철학을 했다고 많이 얘기를 하잖아요. ‘절대아’의 철학, 그리고 헤겔에서는 ‘절대자’의 철학. 이런 말을 하잖아요. 그런데 피히테가 왜 이런 주장을 하느냐 하면 피히테의 대표적인 저작이 뭡니까. [독일국민에게 고함]이죠. 많이 알려져 있는 책이잖아요? 그 책을 피히테가 왜 썼겠습니까. 피히테는 아시다시피 근대 민족국가를 제창한 사람이죠. 우리 사회에서도 ‘국민교육헌장’ 만들 때 가장 많이 참고한 책이 피히테의 [독일국민에게 고함]이었거든요.
70 소위 국민국가 모델을 피히테철학에서 끌어와서 박정희가 형성하려 했던 것이지요. 그 때 박정희가 늘 했던 말이 뭐냐 하면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게 없다. 한 번 해보자. 이런 식의 슬로건을 많이 내걸었죠. 사실 독일에서도 그 당시에 칸트가 프로이센왕정체제 아래에 있을 때 그 때에 프랑스가 1789년에 프랑스혁명을 일으키죠? 프랑스가 혁명을 일으킬 때 그걸 보면서 칸트가 굉장히 박수를 칩니다. ‘아, 드디어 인간의 세계에 자유의 깃발이 꽂혔다. 이제 이 봉건의 시대가 끝나고 인간의 자유가 확보될 수 있는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라고 기대를 한거죠.
71 그래서 자기가 쓴 글들에 보면 프랑스혁명에 대해서, 혁명 자체는 반대하지만 프랑스혁명에 대해서는 굉장히 긍정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헤겔도 프랑스혁명에 대해서 다루거든요? 프랑스혁명에 대해서 역시 헤겔조차도 긍정적으로 읽게 됩니다. 피히테는 헤겔보다 앞서고 간트와 동년배 시대입니다. 피히테는 칸트보다도 나이가 약간 어렸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모두 그러면 왜 프랑스혁명에 긍정적이었던가. 그것은 아시다시피 아직도 프로이센이 뭡니까. 봉건시대를 못 벗어나고 있었어요. 그래서 봉건의 타파를 자국의 자체 내의 힘으로 극복할 수가 없는 그런 상황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외부자의 힘을 통해서 내부의 모순을 깨는데 어떤 그런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72 마치 우리 개화파가 우리 내부의 모순을 깨고 나갈려고 했던 그런 상황과 같죠. 위정척사파는 붙들려고 했지만. 그랬을 때 그들이 반한 프랑스혁명에 대해서, 나폴레옹에 대해서 손을 내밀면서 빨리 들어오라. 그래서 예나에 나폴레옹이 들어왔을 때 헤겔이 저기에 ‘세계정신’이 지나간다 그렇게 얘기했었단 말이죠. 그죠? 그러면서 나폴레옹에 대해서 굉장히 칭송하는 그런 말을 했는데 피히테가 초기 철학에서는 역시 마찬가지로 헤겔처럼 칭송을 하거든요? 그런데 후기 철학으로 가면은 굉장히 심각하게 프랑스를 욕합니다. 이 놈들이 들어와가지고 자유의 깃발을 꽂아주기보다는 완전히 제국주의로 나갔다는 거죠. 그래서 피히테가 여기에 대해서 굉장히 분노하면서 쓴 게 [상업국가론]이라는 책입니다.
73 아직 우리나라에 피히테 연구가 잘 안 되어있는데 제가 지난번에 논문 하나를 발표했었습니다. [상업국가론]에 대해서 썼는데. 그래서 그 당시 제국주의자들이 무역, 상업을 굉장히 많이 했었습니다. 이러면서 피히테가 뭐냐 하면 독일의 해방과 게르만인의 자유를 마련하는 것은 타국을 통해서 가능한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 만들어내야 된다는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도 하면 된다. 원래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이 하면 된다 그러잖아요? 있는 건 몸뚱아리 밖에 없다. 해보자 이런 거 있잖아요. 그런 일념으로 독일 국민들한테 뭡니까 정신무장을 시키는 게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책입니다. 박정희도 우리 국민들 정신무장시켜야 되니까 국가를 위해 똘똘 뭉쳐라. 그 논리가 거기에 깔려 있었던 거죠.
74 그래서 피히테가 인간의 현실적인 육체적 조건보다도 정신의 강인함, 이 정신의 강인함이 더 중요한다고 보거든요. 여기에 피히테의 철학이 나옵니다. ‘아’와 ‘비아’의 관계가 나오는데, 제가 선생님들한테 말씀드리는 방식이 고대철학할 때는 고대철학만 딱 얘기하고 현대철학 할 때 현대철학만 한정해서 이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이걸 왔다 갔다 썪어서 하겠다고 제가 처음부터 말씀드렸었죠. 피히테가 칸트를 공격을 하거든요? 칸트를 보시면 아까 우리가 ‘제 1성질’, ‘제 2성질’ 얘기했잖아요. 이 존재가 ‘본래부터 갖고 있던 성질’과 ‘내가 파악한 2차 성질’하고의 갭(간격)이 있잖아요. 그래서 칸트는 이 ‘제 1성질’에 대해서 인간이 알 수 없다고 말하거든요? 내가 너가 될 수 없기 때문에 너 자체를 알 수 없다는 겁니다. 내가 우주가 될 수 없고 내가 당신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당신에 대해서 다 알 수 없다는 거죠. 어떻게 주체가 타자를 다 알 수 있냐 말이죠. 어차피 타자는 주체의 방식대로 파악할 수밖에 없고 주체가 보는 방식대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는 거죠. 타자 그 자체를 온전히 볼 수 있다는 내가 타자가 되어야 되는데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이거죠.
75 그런 면에서 칸트는 바로 알 수 없는 ‘물자체’를 인정해야 된다는 거죠. 그런데 피히테가 볼 때 너무나 칸트의 이 주장이 연약한 주장으로 느껴진 거예요. 어떻게 읽혔냐 하면 극복할 수 없는 타자가 있다는 것을 굴복하자는 얘기냐. 이렇게 읽힌 거예요. 내가 알 수 없는 타자를 상정해야 된다는 얘기는 극복할 수 없는 타자가 있다는 거기에 해당된다는 거죠. 이것은 뭐냐 하면 바로 프랑스에 굴종하는 거다 이거야.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이런 맥락이 깔려 있었기 때문에 이미 ‘비아’는, 내가 아닌 타자는 ‘아’를 통해서 정립된 ‘비아’일 뿐이라는 거예요. 결국 ‘비아’자체는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이죠. 이미 ‘비아’는 ‘아’의 ‘비아’다 이거예요. 이래서 ‘절대아’를 내놓거든요.
76 그래서 ‘아’를 막 키웁니다. ‘아’를 계속 키워가는 과정에서 인제 정신의 절대성을 강조하거든요. 이렇게 나오니까 셀링이 볼 때는 자아도취에 빠져있는 걸로 보이죠. 그렇게 되는 거죠. 어떻게 ‘아’가 ‘비아’를 너 마음대로 할 수 있느냐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아’는 절대자의, 절대타자, 절대자의 한 부분일 뿐이다 이렇게 되돌아가는 거죠. 그럼 스피노자 식이 되는 거예요 또. 헤겔이 가만히 보니까 이 피히테하고 셀링이 꼴갑을 하고 있는 거야. 둘 다 한 쪽만 붙들어가지고 시소 게임을 하고 있는 거야. ‘아’가 최고라고 그러고 한쪽에서는 ‘비아’가 최고라고 그러고 말이지. 이러고 있는 거야. 그래서 ‘아’와 ‘비아’는 최고가 없는 거야. 어차피 ‘인정투쟁’이야. ‘아’와 ‘비아’는 대립을 통해서 발전해가는 거야.
77 그래서 ‘즉자’와 ‘대자’가 싸우면서 진행되는 변증법이 안 들어오니까 문제가 안 풀리는 거야. 이렇게 나온 거예요. 그런데 변증법으로 푸는데 야 헤겔 너 천재다. 너 정말 똑똑한 놈이다. 그런데 이 바보야. ‘아’와 ‘비아’의 투쟁을 그렇게 관념론적으로 풀면 되냐. 물질적 현실 구조에서 철저하게 그걸 풀어야지 하면서 그걸 유물론적 변증법의 틀로 못 보고 관념론적 개념으로 봤다고 굉장히 비판한 게 맑스라는 말입니다. 그 틀로 이어져요. 이런 틀을 보면서 오늘날 현대철학에서 뭐냐 하면 변증법 철학 이거 폭력이다. 왜 ‘아’와 ‘비아’가 그냥 다름을 인정하고 열어주면 되지 왜 ‘아’와 ‘비아’를 꼭 통일시킬려 그러냐 이말이죠. 그것은 간섭이고 구속이고 지배라는 거죠. 이러면서 다시 뭡니까. ‘아’와 ‘비아’의 통일을 부정하죠. 그게 바로 아도르노의 [부정의 변증법]이죠.
78 아도르노의 [부정의 변증법]이 나오면서부터 ‘네오막시스트’가 나타나거든요. ‘네오막시스트’, ‘포스트막시스트’가 나타난다고요. 알튀세르, 푸코 이런 인물들이 막 튀어나온다고. 이런 논리적인 상황들을 한번 꿰뚫어볼 수가 있는데요. 여기서 뭐냐 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볼 때 크게 두 가지를 데모크리토스에 지적하고 있는 것이죠? 하나는 뭐냐 하면 기계론적으로 양적으로만 세계 읽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통일과 조화에 대한 어떤 진정한 모델링을 못 갖고 있다라는 것을 지금 비판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죠? 이런 비판을 하면서 어떤 의미에서 한 존재, 존재가 자발적으로 어떤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 어떤 존재가 어떤 목적을 향해 스스로가 움직여가고 있다는 것. 내가 오늘 공부하러 왔을 때, 내 스스로가 여기 왔다는 것, 이게 내가 그냥 기계적으로 끌려온 게 아니다 이 말이죠.
79 이런 어떤 의미에서 목적을 가진, 지향성을 가진 존재. 그 부분을 데모크리토스가 빼먹었다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하고 있는 것이죠. 또 모든 존재는 어떤 하나로 수렴되는 곳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고민이 없다는 거죠. 이런 걸 아리스토텔레스가 데모크리토스를 공격하는 데 또 데모크리토스 입장에서 가만히 있냐. 또 반대의 공격을 할 수가 있는 거죠. 반대의 공격이 딴 게 아니라 그럼 모든 존재가 목적을 갖고 있느냐, 어떤 지향성을 다 갖고 있느냐. 그렇지 않다고 보는 거죠. 따지고 보면 다 원인이 있다는 거예요. 원인없이 어떤 일이 안 일어난다는 거예요. 그런 맥락에서 반박이 들어오게 되고 또 어떻게 꼭 하나로 수렴시킬려고 그러냐, 수렴 안 시키면 어떤데 이런 반박도 들어오고. 그래서 어떤 문제의 갈등들은 계속 존재하고 있습니다.
80 그래서 자꾸 우리가 철학사를 읽어나갈 때 어떤 철학자를 읽을 때 이 사람은 맞아, 이 사람은 틀렸다 이렇게 심판하는 식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항상 열린 물음 자세로 고민하는 자세로 읽어줘야 되는 거지 얘는 안 돼, 저건 됐어 이렇게 갈라버리면 안됩니다. 그것은 철학사를 읽은 방식이 아니예요. 그 사람의 장점과 단점을 열어놓은 상태로 받아들여야 돼요. 그래서 처음에 같이 공부해나갈 때 철학사를 공부하는 것이 곧 철학이다 그랬어요. 그런 말씀을 드렸던 이유가 그 맥락과 관계가 있는 거죠. 그 다음에 정신과 영혼이라는 것도 원자와 원자들의 운동에 불과하다는 말은 아까 전에 말씀드렸고 그죠? 다음 쪽으로 한번 넘어가보죠.
81 결국 ‘미’라는 것도 쾌락일 뿐이다 그죠? 이게 뭡니까. 예술철학을 공부하면 가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까. ‘미’가 뭐요 했을 때 그죠? 결국 즐거움을 주는 게 ‘미’지. 즐거움을 주면 ‘미’다. 영화를 봤는데 참 아름다운 영화다는 것은 즐거움을 줬으니까, 고통을 주면 아름다운 영화가 아니다. 내가 그림을 봤는데 참 기분좋다 그러면 아름다운 그림이 되는 거예요. 이런 거 있잖아요. 그러니까 ‘쾌’와 ‘미’를 연결시키는 과정이죠. ‘쾌’와 ‘선’을 연결시키고. ‘쾌’를 많이 주면 선한 거고 ‘쾌’를 많이 주면 ‘미’인 거고. 이런 관점인데 과연 그런가 하는 거죠. 여기에 논란이 되죠. 왜냐하면 칸트가 [판단력 비판]을 쓰게 될 때 나중에 뭐라 그러냐 하면 ‘미’는 ‘무관심성’에서만 제대로 드러난다. 이 때 ‘무관심성’이란 말은 관심을 비우는 거예요.
82 영어의 ‘interest’라는 말은 사실 뭡니까. ‘관심’이라고 우리말로 번역할 때 ‘야 너 관심있니’라는 말보다도 따지고 보면 ‘이익과 손해에 대한 관심’이죠. 이익과 손해에 대한 관심을 ‘에포케’해야, 그걸 괄호에 넣어버려야 진정한 아름다움이 드러난다는 거죠. 한 여인이 비키니를 입고 해변가를 걷고 있는데 그 여인의 몸에 대해서 뭡니까. 어떤 욕심을 비워버려야 그 아름다움이 들어온다는 거죠. 아 저 여자 꼬셔가지고 어떻해든 결혼해야겠다 그래가지고는 아름다움이 안 보인다는 거죠. 또 저 들판에 있는 꽃을 팔아먹어야 된다 그러면 아름다움이 안 보인다는 거예요. 그 때 인제 ‘무관심성’이라는 말을 써요. ‘미’는 ‘무관심성’에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칸트는 ‘미’는 질료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형식’이다. ‘형식미’를 주장합니다. 이런 부분들이 ‘쾌’와 ‘미’를 결합시키는 방식하고는 결정적인 차이라고 볼 수가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