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중국에서 활동하던 중 일제에 체포되어 고문 받다 자결함. 향년 65세.
해방 후 조국에 살아 돌아온 이회영의 형제는 동생 이시영 뿐이었음. (다른 형제들
은 모두 중국에서 운명을 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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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의 동생 이시영. 이회영 형제 중 유일하게 해방 후까지 살아남은 인물로,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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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혈질 성향이 강한 이회영과 달리 이시영은 냉철한 사람으로 알려짐. 1908년 고종 내각에서 한성재
판소장, 고등법원 판사, 외부 대신 등을 역임했으며, 을사조약에 항의해 사직했으나 이내 고종이 평
안도 관찰사로 임명함. 시영은 평안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형제들의 뜻을 따라 평안도에 신식 학교를
설립, 민족 교육에 힘쓰다 결국 중국으로 망명함.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법무
총장을 지냄.
독립된 조국에 무사 귀환한 이성재는 1948년 이승만 정권 하의 초대 부통령으로 부임함. 그는 이회
영의 평생 숙원이었던 민족 교육 사업에 대대적인 지원 정책을 폈으며, 체신부 장관에 독립 운동가
윤석구를 천거하는 등 독립 유공자들을 위한 보상에도 힘을 기울였음.
1951년 이승만의 반민주적 통치에 항의해 사임서를 내고 스스로 물러남.
이시영의 영향력 아래 이회영 가문의 후손들은 재기할 수 있었고, 독립 유공자 후손을 위한 장학 재
단인 우당장학회를 운영하게 됨.
이회영의 아들 이규학은 고종의 조카딸인 조계진과 결혼. (왕가의 후손인 조계진은 독립운동을 하는
시아버지와 남편과 함께 엄청난 고생을 했고 해방 후에도 삯바느질로 연명하게 됨.) 이들 사이에 태
어난 아들 중 한명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전 국정원장 이종찬 씨임.
이규학과 조계진 사이에 태어난 자손들, 즉, 이회영의 직계 손자들 명단은 다음과 같다.
종찬(鍾贊·1936년생, 전 국회의원이자 국정원장)
종걸(鍾杰·1957년생, 국회의원)
종현(鍾炫·1962년생, 매일경제신문 기자)
이회영의 큰 형이었던 이건영의 손자들 명단은 다음과 같다.
종육(鍾毓·1928년생, 외무부 영사)
종환(鍾煥·1935년생, 예비역 대령)
종국(鍾國·1939년생, 한국교원대 교수)
-자료 출처 네이버- |
첫댓글 감동의 눈물이 주주주줄.. ㅠ_ㅠ; 이런 분들때문에 우리가 존재하는 거겟죠. 흐흑흑
아 이분 엄청난 재산가였는데 아마 무관학교 건립비도 이 사람 재산이 상당히 많이 차지하는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저 정도 되는 인물이면 '노블리스 오블리쥬'라는 말 자체를 싫어할 듯 하네요. 고귀하기 때문에 그에 합당한 책임을 치룬 것이 아니라,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입장과 신분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한 분이니까요. '노블리스 오블리쥬'는 다분히.. 엘리트주의적인 뉘앙스가 있죠.
정말 훌륭하신분...이런분들 덕분에 지금 우리가 살아갈수 있는거죠.
감사합니다......저희들이 있게 해주셔서....... 살아계시면서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부디 넋이라도 평온하시길...
저런 분들 중에는 일부 우리나라에 기여하는 계층으로 남아있지만 다수의 독립 유공자들은 가난하게 산다는게 부끄러운 현실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