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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의 방식 /이만섭
직선은 천성이 분명하다 바르고 기껍고
직선일수록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이는 곧 정직한 내력을 지녔다 하겠는데
현악기의 줄처럼 그 힘을 팽창시켜 울리는 소리도
직선을 이루는 한 형식이다
나태하거나 느슨한 법 없이
망설이지 않고 배회하지 않으며
좋으면 좋다고 싫으면 싫다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단순한 정직이다
밤하늘에 달이 차오를 때
지평선이 반듯하게 선을 긋고 열리는 일이나
별빛이 어둠 속을 뻗쳐와
여과 없이 눈빛과 마주치는 것도
직선의 또 다른 모습이다
가령, 빨랫줄에 바지랑대를 세우는 일은
직선의 힘을 얻어
허공을 가르며 쏘아대는 직사광선을
놓치지 않으려는 뜻이 담겨있다
그로 인하여 빨래는
마음 놓고 햇볕에 말릴 수 있을 것이다
바지랑대는 빨랫줄로 말미암고
빨랫줄은 바지랑대 때문에 더욱 올곧아지는
그 기꺼운 방식
- 2010 신춘문예 경향신문 당선 작 -
오래된 서가(書架) /이만섭
먼지 수북이 뒤집어쓴 채
케케묵은 책들의 색인번호를 다시 쓴다
빛바랜 표지를 뒤적일 때마다
세월에 짓눌린 활자들의 비명이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좀 먹은 자국에서는
볼모로 잡혀온 세월을 탓하듯 눈을 흘기고
오랫동안 방치된 까닭인지
사상도 사라진 무정부주의자처럼
주인의 명령에도 저항한다
손에 닿지 않은 그늘에 갇혀
풍장을 치르듯 적멸에 든 책들에
빛을 쏘이고 바람을 불어넣으려
부스럭부스럭 손끝에 올려보는 책장 소리
위편(韋編)*을 흉내 내는
내 위험한 독서
* 위편삼절*
풍경의 소묘(素描) / 이만섭
한 하고 포근한 젖빛하늘
일광이 풍경을 흔연스레 비추는데
산이 강에 내려와 물을 베고 누워 있다
저렇듯 한가로운 날은 산도
물 곁에서 한 숨결 내리고 싶은 것일까,
거대한 몸집은 필시
일순간에 첨벙 하고 들여놓았을 터인데
물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표정은 숨죽인 듯 명징하다
바람은 어디서 불어올까,
물의 촉수들이 일제히 수런거리자
산이 재빠르게 물속을 빠져나간다
어느 쓸쓸한 저녁, 달이
강 가운데서 은밀히 노닐던 그 밤에도
물의 촉수들이 바람결에 수런거리자
달은 황급히 하늘로 돌아갔다
그때도 나는 깨달았다
고요는 풍경을 소묘하지만
중심을 잃으면 그리지 않는다는 것을,
박연폭(朴淵瀑)*을 베끼다 /이만섭
직하하는 물기둥은 전신이 비백(飛白)이다
어느 창공을 날다가 내려오는 천마의 흰 날개인가,
도끼로 빠갠 듯이 장엄하게 그어댄 붓질은
붓이 가지 않은 자리가 박연폭이라,
송도삼절에 두 인걸은 가고 홀로 남아
만고의 세월로 주야에 긋지 않으매
절륜한 사랑 찾아 쏟아지는 저 폭포,
동자를 뒤꼍에 두고 용소를 가리키는데
고매담(姑梅潭) 아래 자취 감춘 박(朴)선비를 찾는가,
넋 나간 듯 우러러보니 우레와 같은 물소리
귓전이 먹먹하다, 유성동(流聲洞)이 따로 없다,
*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
인왕제색도 (仁旺濟色圖)*를 보다 / 이만섭
산이 폐부 깊숙이 운무를 드리웠다.
견갑골 아래 반쯤 가린
비 갠 윤오월의 산색이 더욱 현묘하다.
필시 한바탕 소나기에 감흥이 일어
천만 년 적묵으로 정좌한 산의 자태가
농묵의 때를 얻은 것인가,
골마다 질탕치는 물소리에
金剛心으로 발원한 붓끝은
도끼날로 장작을 팬 듯,
싸리비로 마당을 쓸어내린 듯,
육신의 은거지에 음각을 하고
묵찰법(墨擦法)의 필의를 산골짜기에 秘藏하였다.
송림 사이로 드러난 山家의 지붕에도
촉촉하게 배어든 산기운은
낮게 내린 하늘을 이고
잿빛 궁륭(穹窿)을 머금었는데
老軀에 벗은 보이지 않고
비탈에서 마중하며 드는 처마는
차마 산제비라도 날아오를 듯 허공을 향해 뻗었다.
무심한 세월에도 굳건히 변치 않고
그대 정녕 자연으로 순명해 갈 때까지
이 한때, 인왕의 흰 산의 품에
묵적(墨跡)하자는 게 아닌가.
* 국보 216호 정선의 산수화
나무의 詩 / 이만섭
숲길을 지나다니면서도
나무 아래를 걸어다니면서도
여태껏 몰랐던 것이 있다
나무와 나무가 이루고 있는 간격이
한 편의 시라는 사실을,
나무는 서로 비켜 자라며 바람에 흔들려도
한결같이 나무만의 개성 있는 시를 쓰고 있다
멀리서나 지근거리에서나
가지마다 잎마다 팔을 벌려 관계하는 사이를
하나의 문장의 행간으로 마음 나누며
씨줄과 날줄로 짜여도
솔기마다 부딪힘이 없이 매듭짓는 피륙처럼
서로 물 스미듯 가지런히 닿아있다
관계로 놓인다는 것은
서로 사이에 조화로움을 갖는 것이다
나무와 나무가 그들 사이를
시처럼 조용히 보여주고 있다
달빛검투사 / 이만섭
직립의 나무를 빌러 검을 만들고
허공을 내리칠 제
노랗게 흘리는 피를 보았는가
그럼에도 비명 없는 달밤이 고요하다
그러니 주검이라고 할 리 없다
차라리 그윽해지는 까닭에
밤 풍경을 벤치처럼 뉘어놓는다거나
빨랫줄처럼 허공에 걸어놓는 일도
그 배후일 것이나
그가 이루고자 하는 꿈은
외롭거나 쓸쓸한 밤이
강물처럼 다스져지는 세상일 것이다
마침내 푸른 눈빛의 무사는
서편 산 등에 이르러
밤을 다스린 일망무제의 검을 들어
농익어 물컹해진 둥근 등을
스스로 베어버리고 떠나간다
봄밤의 달빛 소품들 / 이만섭
등 뒤에 푸른 별 무리 걸어놓고
휘영청 어둠을 밝혀 가부좌를 튼 화강암 너럭 마당, 고요가 벅차다
처마 끝 허공을 깎아 절벽으로 세워
남실남실 숨결 짓는 만조의 달빛바다
뜰의 꽃나무들 여린 새순 틔워 이슬 받아먹는데
두엄 가 늙은 고욤나무는 관음사 목어처럼 등 굽은 채 잠들었다
보드라운 비단 그물로 내린 호젓한 정적,
고단한 농기구들 쉬어 있는 헛청이며
어슴푸레 유폐된 뒷간 길에도
가뭇하게 번져 있는 적막감,
해묵은 대추나무 그림자도 담벼락에 기대서서
무료하다 못해 제 혼자 스무고개 내놓고
알아맞히면 안 잡아먹지
해진 옷깃 추스르며 부스스 부스스 몽달귀 분장을 하고
흙 속에 씨감자 파묻어놓고 비닐 덮어씌운
정지문 앞 텃밭이 유난히 새하얗다
손바닥만한 그리움조차도 견딜 수 없어
정처 없이 헤매고 싶은 봄밤,
장독대는 머리에 하얀 분진을 이고
음- 음- 그리움이란 이런 거라고 슬몃슬몃 귀띔해 주는데
잠든 창들이 일제히 불빛을 밝힌다
그리운 바오밥나무 / 이만섭
날씨가 추워진 탓일까,
세한도(歲寒圖)를 다시 본다
사람의 마음에 내린 나무의 뿌리를 읽는다
그리고 바오밥나무를 생각한다
나무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그때까지 그 아름드리나무를
나는 건성으로 보고 살아온 것이다
그가 생의 서쪽 부루 마운틴 계곡으로 자취를 감추고 나서
가시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내 가슴의 헛헛함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길을 가다가도 나무가 그리울 때면
먼발치를 향해 고개를 들어
하늘에 닿을 듯 직립으로 서 있던 자리를 바라본다
그러다가 정작 소나기라도 만나면
천 년도 더 묵은 나무속으로 피신한다
넉넉한 품에서 비가 갤 때까지
쉼터인 양 시간을 허락받으면
밖은 높새가 이는 지 천둥이 치는 지
알 수 없이 아늑했다
가끔 일상의 저물녘이 쓸쓸할 때도
행여 나무의 긴 그림자가 어디선가 비춰올까 봐
사뭇 문밖을 내다보았다
그럴 때 가슴에 어리는 나무는
가슴이 안는 아름보다 더 크고 넓었다
바오밥나무가 그립다
물수제비 띄우는 법 / 이만섭
강가에 가면
나도 모르게 강물에 젖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잠자코 강물을 바라만 보라
물 쪽을 향해 누군가를 부른다거나
손짓 하는 일은 가급적 삼가라
그것은 유유히 흐르는 물흐름을 거스르는 행위이다
조약돌 하나 손에 쥐고
뜨개질로 그리움에게 건너가기 위함이라면
벌판의 허수아비 새 쫓듯
훠어이 훠어이 내달릴 것이 아니라
그 마음 깊이로 가다듬어
강물이 저녁노을에 들 때까지 기다려 보라
곰살거리는 물결 잦아지고
강물이 조약돌 하나 던져주길 바랄 때
수계 위까지 낮아진 몸
강물과 몸의 각도에 시선을 두고
한껏 던져 물 위에 놓는 노둣돌
징검징검 건너 가는 그대의 팔매질은
어디까지 뻗어 갈 것인가
그리움도 마음길인데
조약돌 하나인들 강물에 던지는 일이
어디 예사로워서 쓰겠는가,
생의 저녁에 깃드는 불빛은 /이만섭
가끔은, 아주 가끔은
생의 저녁이
일상의 것보다 더 극명했으면 좋겠어
노을이라면 화염처럼 붉게
서녘 하늘을 태우는
매우 극사실적인 채색이면 더욱 좋겠어
하루가 지났다고
할 수 없이 오는 저녁이 아닌,
네모난 창에 갇혀
겨우 천정에 매달린 알전구나 켜는
이기적인 저녁이 아닌,
주렴 같은 어둠을 헤집고 뜨는
밤하늘의 별처럼
어둠으로부터 호명되듯이 깃드는,
그런 저녁은 생각만 해도
자분자분 웅숭깊다
비의 독서법 / 이만섭
비는 책을 통권으로 읽어내는 습성이 있다
그 집중력 하나만큼은 유별나다 하겠는데
이는 햇빛의 묵독법과는 사뭇 다르다
가령, 뙤약볕이 자글거리는 날 풀숲에 가 보면
방아깨비나 노린재 따위의 풀벌레들이
함께 책을 읽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주변은 독서실처럼 정숙하다
한 글자의 오독도 허용치 않을 듯
행간마다 투명하게 읽어내는 모습은 말 그대로 박이정이다
곁에 어린 풀여치가 더듬이를 세우고
풀잎의 행간을 짚어가면서 따라 읽는 것을
자세히 보니 햇빛이 읽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비는 그런 온유한 탐독법이 아니다
처음부터 제 감정을 속속 드러내며 호명하듯 낭독한다
이르테면 정이박의 형식을 띤다
그가 목울대를 세우고 읽는 파상음을 따라가 보면
책갈피의 어디쯤인가 스스로 발목까지 빠진 음울한 대목에서
어떤 이는 그것을 비켜가지 못하고 휩쓸려
그만 눈시울부터 젖어나는데
가슴까지 스며든 독해력이 그곳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꽃은 누가 피우는가 / 이만섭
꽃은 누가 피우는가
그늘에서 꽃대가 몰래 피우는가
담장을 넘어온 바람이 피우는가
보아라, 꽃을 누가 피우는가를
거기에는 생명의 손이 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감춰진 손
침묵으로 살아가는 따뜻한 손이
꽃을 피우고 있다
골목시장 어귀에 종일토록 쪼그려 앉아
풀무를 돌리는 노인을 보았는가
굽은 손등으로 회전기 감싸쥐고 튀밥을 튄다
봄날 벚꽃이 함박웃음 짓고 뛰쳐나오듯이
바구니에 쏟아지는 저 하얀 튀밥들,
아이들은 엄마 등 뒤에 숨어 있다가
환호성으로 만개한 꽃들을 바라본다
꽃을 피어내는 것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그 생명이 지닌 마음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다
자루 속에서 나오는 튀밥 한 공기가
기쁨을 나누고 있다
노인의 손이 꽃을 피어내고 있다
낙엽 한 접시 / 이만섭
공원 벤치에 낙엽 한 접시
바람이 놓고 갔을까,
누군가 김밥을 먹고 간 스티로폼 접시에
막 떠나는 가을을 배달해 온 것이다
이미 바닥에 수북이 쌓인 낙엽들과
주변에 흩어진 몇몇 낱장들은
그냥 습관적인 낙엽일 뿐인데,
스티로폼 접시에 떠나는 가을을 모듬해놓은 것이다
네 잎 클로버가 책갈피에 놓일 때
추억이 되었듯이
벤치의 낙엽 한 접시가
엉거주춤 발길을 붙들어 놓고
늦가을의 맛을 내고 있다
가을산 / 이만섭
푸른 날들이 깊어지면
수목은 등걸에 이끼를 피워내고
이파리마다 紋章을 색인한다
추억이란 반드시 한곳으로 모이는 거라고,
그리하여 더욱 투명해진 그리움으로
가슴에도 산 하나 우뚝 세운다
그대, 꽃이 진다고 서러워하던 때가 있었던가.
뒤따라 나선 푸름도 어느덧
골짜기마다 산그늘 비켜 세우고
저리도 숨죽여 메말라가는데
다시 꽃 때를 찾아왔구나,
그대와 나의 거리가
혹여 붕새의 날갯짓만이 헤아린다 해도
추억 저편의 향기를 어찌 무심히 지나치리,
지느러미 같던 등뼈는 굳어갈지라도
가슴에 들끓던 열망의 아우성은
탁본처럼 종이의 배면을 물들고
유폐된 옛사랑의 오솔길을 열고 오느니
그대와 내가 간직한 그리움마저
먼산으로 머물 수 있겠는가.
실밥 / 이만섭
허름한 옷에서 밥 짓는 냄새가 솔솔 난다
한 몸 가리어 풍상을 견디다 보니
타개진 솔기 사이에서 앵돌아 나오는 밥,
기제사에 메를 짓고 내오듯
밥은 끈기 잃어 퍼석퍼석하다
그간 옷은 말 못할 거식증에 시달린 것일까,
육감적으로 부끄러운 표정이다
몸의 접경지대에서 오랜 세월 부지하며
어미의 탯줄 같은 실을 빌어 옷을 먹여 살리더니
이제 저렇게 고스레처럼 문 밖에 내놓는다
산목숨인들 밥 거두면 그만일 진데
아무리 옷인들 아니 그럴까,
세월마당에 낡아진 옷이
실밥을 지어놓고 도대체 후줄그레하다
팽이의 약전(略傳) / 이만섭
나는 팽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팽이가 되었다
호된 채찍으로만 살아가는,
돌아버리고 싶은 날들을 지나
이젠 돌아야만 사는 날이 되었다
채찍은 사디즘을 낳고
사디즘은 존재를 낳고
존재는 환희를 낳고..
저 지칠 줄 모르는 살풀이는
소름끼치는 생의 법칙이다
수혈을 받아야 생명을 보전하는 환자처럼
자전을 잃어버린 몸은
채찍을 맞을 때마다
몸을 세상의 중심에 세운다
매번 어지럼증에 시달리면서도
매의 중독 앞에서
기꺼히 살아있다는 증거를 보여준
팽이가 되어버린 나는,
서 있는 나무 /이만섭
정면에서 보면 꿈쩍 않는 산이거나
아름으로 동여져 흐르는 강물이거나
강풍에 꺾인 가지 하나쯤은
훌쩍 눈물 서너 방울 독하게 묻어놓고 있던지
온몸으로 견뎌낸 생의 내력은
의연하다 못해 비장하다
그러나 측면에서 볼라치면
비바람이 훑고 간 서걱거린 자리마다
흔들림을 감당한 것들만 등지고 있다
이파리도, 가지도, 열매도,
그늘에 가린 노근의 물관조차도,
고요에 들면 모든 것을 다 잊고 마는 저녁은
가지 끝에 밤하늘의 달을 걸어놓고
운치 있는 수면에 드는 일은
강물이 달을 품고 있는 정경에 견줄만하다
그 깊은 심성을 헤아리자면
육신을 인두질 당한 인고의 세월에도
단 한 번도 불평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관용과 화해의 배후에는
몸 안에 격정들을 해독해온 커다란 귀가 있다
그것은 더러 몸 밖에 옹이로 매듭을 지어 보이니
고향의 살구나무가 오랜 세월에도
무너진 흙담 곁에서
가지 꺾인 채 꿋꿋이 추억을 지키고 있으니
누가 어리석다고 할 것인가
직립의 그 견디는 힘을
바람의 무게 / 이만섭
바람이 허공에서 몸을 저울질한다
공중의 새들이 그러하듯이
좌우 날개로 평형을 유지하고
몸의 중력을 횡으로 두는 것이다
빠르면 빠를수록 더해지는 무게는
벌판을 지난다거나 강을 건널 때는
달음질하듯 몸을 잰다
나무가 흔들리고 물결이 이는 이유도
그 하중을 견디는 중이다
다른 비율은 허용치 않는 독식,
그것은 바람만이 지닌 무게다
그가 깃을 접을 때면
저울대 위 무게를 내리듯
허공은 비로소 바늘을 수직으로 세운다
밑줄 / 이만섭
어릴적 어머니는 햇빛 쨍쨍한 날은
마당에 든 햇살이 아깝다며
손수 빨랫줄을 쳐놓으시고
이불 홑청을 뜯어 냇가에 가서 빨았다
파초記 / 이만섭
볕 좋은 날
느티를 닮은 파초나무 큰 키 아래서
궁창을 바라본다
봄날을 빌려쓰는 나른함으로
푸른 저편, 꽃다지를 건너가는
솜사탕 같은 구름에 묻어가노라면
봄 꽃나무들 꽃등을 달던
三春의 가장 화사한 날이었던가
남행길에 들어
조치원에서 한 무리 새떼들의 영접을 받고
한밭 건너 금강에 발을 담그려 했던 심사는
남녘의 파초를 얻고자 했음이니
일월삼주가 따로 없었다
내 안에 씨감자 틔우듯
뜰이 무성하도록 잎잎이 푸른 동아리 지어
화경을 세우고 싶다
한철 눈부신 여름이고 싶다
파초여,
가만히,라는 말 /이만섭
저 말 애초부터 조신하다
여린 듯, 찬찬한 듯,
은근히 배어나
전체가 중심이며 전체가 가장자리다
자칫 깨어나기 쉬운 든 자리,
눈빛이나 몸짓보다도
마음이 먼저 살금스럽게 다가간다
철저히 묵인된 고요는
그 자체만으로 유유자적하다
칠월의 뙤약볕 아래
밍밍하게 익어가는 연못 같은,
그 위에 앉아있는 소금쟁이 같은,
그것 말고도
우리가 연애할 때,
사랑하는 사람 슬그머니 잡았던 손도
사실은 가만히, 있다.
청풍계*를 가다 / 이만섭
내가 명주바람과 마주한 것은 청계로 모전교 앞에서였다
뉘엿거리는 저녁 해 길이만큼이나
산그늘 따라 비스듬히 그가 쫓아왔던 것이다
아니다 아니다,
발아래 돌돌 거리는 내를 벗 삼다가 무심코 객을 맞던 것이었다
그때 나는 문우와 더불어 무슨 할 일이라도 찾고 있는 듯
해묶은 모과나무 아래를 해찰하고,
초파일 연등처럼 여유락락하게 듬성듬성 피어난 분홍 꽃들
봄 저녁을 화사하게 밝히는데
도끼날로 내려찍은 듯 서 있는 회색 빌딩 사이로
인왕골을 내려온 물살을 거슬러 나도 모르게 청풍계에 든 것이다
북악의 골짜기마다 노송을 입은 산자락
저 백악 아래 부벽준으로 붓질한 산수 간에
푸른 등걸로 날개 올린 삼림의 처마 끝
풍경 없이도 청음은 숲을 채우고
연둣빛 실버들도 재넘이 따라 춤을 춘다
이리오너라, 이리오너라,
원백 노인께 문안드리려 왔다
*정선의 진경 산수화
바람의 시선을 읽다 / 이만섭
그의 눈빛은 늘 열망에 차있다
머문 자리 따로 없고 비운 자리 따로 없는
어디론가 떠나지 않고선 못 배기는
야생마 같은 근성을 지녔다
그가 아늑한 골짜기나 구릉 아래 몸을 두지 않고
가파른 벼랑 끝이랄지
허공에 집을 짓고 사는 연유도
제 몸의 교활함을 믿기 때문이다
잎새에 햇빛이 내리쬐어도
어디선가 쥐눈이콩만한 눈동자로 지켜보고 있다
하지만 그의 자취를 면밀히 살피는 까닦은
나무의 꽃눈을 틔운다거나
그 꽃의 열매가 실한 가를 확인해보는 데 있다
정작 나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언제나 그의 시선이 닿아 있다
나는 그의 시선을 건기로 읽지는 않는가
그를 곁눈질하지는 않는가
기차는 왜 직선인가/이만섭
기차가 풍경의 중심에 밑줄을 긋고 갈 때면 가시권에 든 추억들이 손을 흔든다 벌판의 바람은 얼마일 것이며 들풀 또한 수천수만 번 손을 흔들고 또 흔들었을 것이다 심지어 가시권 밖 무관한 것들도 추억이란 명분으로 찾아와 기차에 손을 흔들었던 것은 아닌지 그럴 때도 기차는 묵묵부답으로 떠나갔다 그래서 기차의 뒤태는 언제나 야속하다 못내 아쉬운 이별 앞에서도 직선을 가는 것만이 감당해야 할 몫인 듯 나는 새처럼 선회하여 돌아올 줄 모르니 기착지까지 연계된 선에 동승하는 마음이라면 그리움이 아니고 무엇일까 기다림의 끝에 오는 기차든 떠나간 기차든 밤하늘의 유성을 생각하면 더욱 분명해진다
나무의 내재율 / 이만섭
나무의 외관은 잎과 줄기 뿌리일테지만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보면
전체가 3악장으로 된 시가형식을 띠고 있다
이를테면 이 세 부분이
한 문장이루며 생명의 서사를 쓴다
행길 가의 양버즘나무가 그렇고
산비탈의 떨기나무가 다르지 않는데
교목은 교목대로 관목은 관목대로
저마다 걸맞은 내재율을 담아
이파리는 햇빛 층에서
줄기는 바람 층에서
뿌리는 물관부에서
서로 광합성을 위한 화음을 키고 있다
이것은 꽃을 피우거나 열매를 맺기 위한
생명의식이 아닐까 싶은데
무릇 꽃이 아름답고 열매가 튼실함도
여기에서 나오는 듯싶다
어금니 /이만섭
어금니란 말, 가만히 우러내보면
어머니란 말과도 흡사하다
고루하게 나열해간 치아의 맨 뒤쪽에
어머니가 들어앉아 계시는 듯 하다
딱딱하고 질긴 내용물은 그곳에 와서 씹힌다
어릴 때 어머니는 그랬다
우리에게 질긴 음식을 넘겨줄 때
자근자근 살펴 당신이 먼저
부서뜨렸던 곳,
어머니는 삶의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도
그곳의 힘으로 버티며 살아오셨다
아마, 나를 낳으실 때도 어금니를 꽉 깨무셨으리라
이제 저 비워진 당신의 너울자리,
그루터기조차 뽑히셨으니
알사탕 하나도 그곳에서는 얼러내지 못하신다
생각하면 어룽어룽 눈물이 돋는다
가슴 산책 /이만섭
어쩌다 가슴에 들어와 보니
방들은 참 많기도 하구나
그래선지 저 생각에서 오는 것들은
쌓아둘 자리도 넉넉하구나
해 바른 방은 기쁨이 들고나며
창가에 꽃가지 걸어놓고
모퉁이에 그늘진 눅눅한 방
같은 방인데도 쓸쓸함이 꼼짝 않고 구들을 졌다
저곳엔 우울이 몇 번인가 기웃거렸으리
가둘 수 없는 바람 같은 것은
사랑채로 들어앉은 허파 쪽으로 보낸다 해도
슬픔이 뚜벅뚜벅 걸어들어와서
우물처럼 고여들 때
그런 때는 눈자위까지 퍼올려
눈물샘으로 흘려보내야 하리
명치 끝에 대문 하나 달아놓고
썰물이든 밀물이든 걸러내야 하리
갈대 /이만섭
강가에 가면 부르고 싶은 이름이 있다.
한 세월 외로움도 잊고 살았을,
그 외로움 위로해주고 싶어서
곁으로 가 가만히 자네라고 부르고 싶은,
창공을 가르며 날아온 청둥오리 떼
수초 사이에 깃들 때도
바람이 쏠리는 쪽으로 몸을 두어
새처럼 날개를 접었다.
그런 날들을 견디고 나면
헛헛해진 마음 부둥켜 안고
갈대도 가끔은 눈물을 삼켰을 것이다.
그도 한 번쯤은 강물 따라
멀리 흘러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달밤이 오면
곁을 흐르는 강물을 누가 지키랴,
오랜 세월을 허공에 매달려
내색 없이 견뎌냈으니
외롭다는 생각도 아예 잊을 수밖에.
풍경이 길을 만든다 / 이만섭
굽은 길을 생각한다
당착에 빠진 길도 길이었다
협착과 구릉 사이를 지나서도
길은 언제나 풍경을 찾아다녔다
때로 아주 멀리
발길 닿지 않은 곳까지 가서
입때까지 감춘 모습을 찾아내고 풍경을 익힌다
발에 밟힌 들풀들도 누웠다가 일어나
자세를 가다듬는다
바람이 잦아드는 빈터의 길이나
산그늘 사이에 나있는 호젓한 산길이나
산, 내, 들, 강, 호수,
물가에서 갈대를 날리는 높새며
다 길의 행방에서 자취를 보인다
삶의 행여에 오른 길 저편
어디에도 변함없이 풍경은 기다린다
길에서 멀어질수록 삶은 아득해지고
길은 매번 그 사용법을 일러준다
풍경이 길을 만든다
잔설 /이만섭
겨울 패잔병들이 숨어든 삼나무 숲
군데군데 쫓겨간 발자국들이 어수선하다
나무들은 금세 내가 아군인 것을 알아차리고
골짜기 쪽으로 길을 터준다
동장군의 졸개들은 아직도 비탈 아래 매복해 있는 듯
능선에서나 부는 소소리바람 소리로 암호를 주고 받는데
무언가 등 뒤에서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
궁노루처럼 멈칫 놀란 나는
앗, 수류탄이다!
나도 모르게 몸을 지표면에 바짝 엎드린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데
사방이 쥐 죽은 듯 고요하다
슬그머니 일어나 툴툴 털고 경계에 드니
오리나무 삭정이 부러진 소리
부스스 나무의 각피가 유난히 허옇다
강물역에서 /이만섭
저녁강에 서면 / 이만섭
귀로의 뒷모습처럼
물들이 나작나작 엎드려 저녁강에 모여든다
노을 비낀 강 언덕의 갈대도
어둠을 맞느라 수런거린다
일광이 산화하는 짧은 시간에
강물은 저희끼리 저녁노을을 나누고
금비늘로 돋아낸 살갗을 서로 비비다가
밤의 적거지를 만들어
물결 위로 내리는 어둠을 이불처럼 끌어당긴다
하늘엔 별등이 하나 둘 켜지고
물로 흘러와서 물로 잠들어가는
저 포근한 평화,
이제 밤은
물의 고요를 위해 정적을 다스리고
바람도 더는 길을 트지 않을 것이며
하루 동안 저벅저벅 걸어온 몸을
깊고 아늑하게 두리라
내 마음도 강물의 수표면에 나직이 눕는다
가을은 편집중 / 이만섭
북창으로 햇살 비껴놓고
가을이 편집 중이다
날카로운 눈매에 까칠한 얼굴은
머릿단을 가느다랗게 말리며,
이 지난한 건기의 시나위는
갈대밭을 날아오른 한 무리 되새떼가
강 건너 하늘에다가 그물을 쳤다
자중지란에 시달리며
마침내 가을다운 가을을 위해
자칫 제 몸이 베일지도 모를
별신굿의 강신무나 타는 작두 날을 밟고
훠어이훠어이 쫓아서
날선 그리움이 무디어질 때까지
애끓는 열망을 색인하며
불온한 문자들을 지워간다
바야흐로 이 가을은 편집 중이다.
풀꽃 /이만섭
풀은 천성이 착해서
밤하늘의 별들을 모아다가 꽃을 피운다
풀잎만으로도
대지가 살아있다는 것을 보일진대,
길섶에 푸른 깃발을 꽂고
먼 길 가는 나그네를 배웅할 제면
몸에 별꽃을 피워 손을 흔든다
그럴 때면 바람도 이웃 되어
푸르게 푸르게 풀향기 흩날려주니
스르르 내리는 꿈속에
한 점 이슬로도 씨방을 짓고
계절이 다하면 순장하듯 대지에 드러눕는다
풀꽃이여,
꺾이지 않는 지조 하나로 살아가는
풀의 수명을 위로하고
마침내 뿌리에 생을 두던 마음이여,
내 곤궁한 삶의 기쁨이여,
누가 푸름을 조율하는가 / 이만섭
한 개의 현, 두 개의 현,
열두 개의 현, 혹은 스물네 개의 현,
그 배수가 집약되어
공명으로 번져 온 저 일색의 현현들,
알 수 없다
잎이 푸른 내력은 몸이 나무라는 것을,
광합성에 들기까지 햇빛은
창공에서 얼마나 부서져 내린 것일까,
실어 오고 실어 가고,
바람도 우듬지에서만 맴돈 것은 아닐 테지
밤사이에 소리 없이 일군 저 군락,
나무 아닌 삼림 없고
나무 아닌 터전 없고
터전을 바라보자니
가분수가 된 신록은 감당할 길이 없구나,
땅 기운 돋아 안개를 짓고
안개는 이슬을 짓고
이슬은 청명을 짓고
청명은 산수 간에 마음을 짓고
짓고 지어, 푸름 밖에서 성찬을 받자니
정녕 저 진경을 조율하는 자가
따로 있다는 말인가
당신의 목록 (目綠)/ 이만섭
나의 노스텔지어는 이렇습니다
민음사 간 시집 <애너벨 . 리> 한 권,
그 19페이지에 담긴 당신의 미쁜 손길 위에
가만히 나의 손을 얹습니다
꽃 꽃 꽃잎이 흔들리듯 지금도 가슴이 떨리는군요
그때 당신은 도홧빛 얼굴로 다가왔고
나는 당신의 가슴 속 손거울을 살짝이 엿봅니다
거울은 반드시 사물의 정면을 비춰줍니다
그 무렵부터 초콜릿과 딤섬은 우리의 품목이었습니다
이것은 당신으로부터 작성한 첫 목록입니다
아, 깜빡 잊을 뻔했군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건기의 사이프러스를 적시던 베를렌느의 비를,
비는 는개처럼 우리 사이를 흩뿌렸지요
촉촉해진 사월의 사과나무는 꽃눈을 틔우고
푸른 계절을 흰나방처럼 꿈꾸던 나
저녁이 오면 창가에서 장미를 위한 연가를 부릅니다.
사랑은 목록을 만드는 거라고 말했나요
그런 저녁은 밑줄을 그어 당신의 목록을 적습니다
추가, 또 추가, 목록에 등재되던 수많은 언어들,
먼바다로 가는 푸른 기차는 언제쯤 오나요
당신과 나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그럴 때마다 계절의 약속은 더욱 묻습니다
기다림은 배낭처럼 꼬박꼬박 꾸려집니다
한 시절 가슴에 쓰여진 우리들의 시편들
당신, 이 여름 당신에 대한 나의 노스텔지어를 열고
나 이렇게 당신의 목록을 읽습니다
가랑잎 변주 /이만섭
가겠다고 벼르는 것일까,
바람 비낀 난간에 번지점프라도 할 듯
불붙으면 이내
화르르 타버릴 것만 같은데,
메마른 가슴 다독이며
허공을 엿보는 가을나무
아차, 하는 사이
바람에 추락하지 않게
사뿐히 날려보낼 채비를 서두르며
가르랑가르랑
목젖이 아리도록 키는 저 변주,
소슬한 탄금(彈琴) / 이만섭
바람의 연주를 듣는 저녁
꽃등 같은 붉은 열매를 매단 마가목 활엽들이
수런수런 배경으로 서 있네
이파리마다 고스라져
어디서 현을 키는지 물을 수 없네
한때, 물오른 버들가지 희롱하고
하얀 배꽃 분분히 날리던 사연들은 다 잊었는데
쫓고 쫓기는 분주한 몸짓에서
여전히 드러나는 방랑 벽은
갈색 숨결로 묻어오는 마른 향기조차도
거칠게 다가올 때는
수수밭을 쓸고 둔덕의 억새꽃마저 흔드네
그리하여 어디에도 새 한 마리 날지 않는
허공으로 허공으로 내 마음을 이끄네
처음 들려주던 낮은 목소리는
G선의 음계처럼 지평에서 일었어도
아무도 듣는 이 없이 외로울 때면
야성의 아우성으로 벌판을 허허로이 난무했네
이제 서걱서걱 계절의 쓸쓸함을 노래하며
흩어지는 저 탄금 소리가
마침내 저녁길의 이정비처럼 나를 세우네
나뭇잎 하나에도 손수 현을 키는
저 악기 소리 소슬하네
주름의 문장 /이만섭
무엇을 바라볼 때, 그것이 빤히 보이는데도
감추고 있는 것이 더 크고 깊은 것이 있다
이를테면 나무의 껍질 같은 것이다
나무는 그 몸속에 나이테가 있다는 것을
표피에 덕지덕지 껍질로 씌워놓고 있다
그러니까 몸속에다 세월의 문장을 감춰놓고 있다
어디 나무뿐일까, 사람도 나이가 들면 들수록
길고 긴 세월의 문장을 몸속 깊은 곳에 쓴다
세상의 주름이란 주름은 다 이것의 얼굴이
이것은 사물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되겠는데
가령 어둠 속에서 빗발치는 양철지붕인들
그 가슴에 골판지 같은 문장을 쓰지 않고서야
어찌 밤새워 쏟아지는 빗소리를 감당해낼 수 있을까,
은행잎 지는 길 / 이만섭
은행잎 지는 길을 걷습니다
단 하나의 색깔로 물들어
노랗게 지는 잎,
이파리마다 어느 한 곳도 빼놓은 곳이 없습니다
바람은 열 마디 손가락을 다 펴들고
육성으로 흔들어댑니다
어서 가,
어서 가,
친정어머니가 딸을 보내듯,
저 환한 나무 아래인들
어찌 이별의 슬픔이야 없겠습니까,
애써 눈물을 감추고
보내는 가 봅니다
그래서, 떠난 이후
다시 그리워할 수 있음에
길 자체가 추억인가 봅니다.
비의 무늬를 보다 / 이만섭
수묵의 다섯 빛깔 가운데
맨 마지막에 번지는 농묵 같은,
잎새들 뒤란에 그늘을 짓고
스미고 스며
불빛 창에 귀를 여는 도화나무
봄날 어느 한때, 흙담 곁으로
자드락자드락 오선지의 선율을 밟고 와
나직이 귀엣말로 노래했는데
또다시 추억의 음표를 달고
잎새마다 그리움의 지문을 찍으며
젖은 불빛 사이로 발그레 드리운
투명한 비의 무늬를 본다.
환승, 군자역에서 / 이만섭
저녁 7시, 역사 안으로 들어오는 전동차가
한 마리 악어 같다
계단을 내려간 사람들,
마라강 언덕 아래 이르렀는가
한입에 먹어치우고 떠나버린 전동차
전동차에서 내려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
하루의 강을 건너와
생의 해방지대를 향해 앞다투는가,
쫓기는 누우떼처럼
굼실굼실 검푸른 등걸이 굽이친다
곳곳에 나붙어 안내하는 표지판
군자역인데,
그래, 말은 늘 그렇지 행위보다 점잖지
낙오하지 않기 위해 촘촘한 대열에 합류해 가는
나는 일개 群子일 뿐,
도시는 늘 분주함으로 진가를 확인한다
그리하여 군중은 광장을 만들고
광장의 중심에 꽂히는 깃발,
깃발이 나부끼는 쪽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한순간 강물처럼 보였다
석류 / 이만섭
혹여, 그리움을 가슴에 품되
그 열정 가슴만큼만
다독이지 못해 끝내 터져버린 붉은 속살은
감당할 길이 없구나
나는 환장이란 말이 무슨 뜻인고 했더니
저리도 미쳐 빠개져버린 가슴을 두고
이르는 말인 줄 차마 몰랐다
파적도(破寂圖)를 보다 / 이만섭
적요의 한낮이 황급하다
복사꽃 만개한 뜨락에
화들짝 고요를 깨뜨리고 달아나는
검은 고양이의 눈빛,
봄이라야 오는 봄으로 치자면
저 혼비백산에도
버선발로 쫓아가는 노구의 몸은
한갓 꽃이 피는 줄만 알았겠지
바람이 아니어도
철없이 우듬지를 꺾고 가는
어처구니없이 속는 봄날이 야속하다
쩌억, 대를 가르듯
한바탕 파적으로 깨어나는 봄은
어찌 그르침만일까,
감나무 상형문자 / 이만섭
뜰앞 나무가 아침 창문에 상형문자를 쓴다
먼동을 비켜 온 햇살로
써놓은 글자는 말간 수묵색이다
나무는 아침마다 그의 문장을 쓰고 간다
잎이 무성할 때는
참새떼도 날아와 지저귈 수 있는
산뜻한 소전체(小篆體)를 쓰고
잎이 헐벗을 때는삭은 옹이에도 근골의 손길 내려
강건한 대전체(大篆體)를 쓴다
그의 조형언어는 사철 내내 몸을 베낀다
그러나 감꽃이 필 때만은
유난히 그때만은
행간마다 비백(飛白)을 날려
향기라도 베어 문듯 가뿐하다
나무도 문자로 성정(性情)을 드러낸다
겨울 아침 감나무가
문자향 배인 상형문자을 써놓고
함박눈은 사륵사륵 나무의 문자를 타고 앉는다
안개꽃 연가/이만섭
그립다고 말하는 그리움은 그리움이 아니다
슬프다고 울먹이는 슬픔이
슬픔이 아니듯,
별빛 아래 밤새워 기도해본 적이 있는가,
그 밤을 건너와 이슬 젖은 아침
가만히, 정작 가만히 꽃등을 들고 서 있는
수채화 같은 너의 착하디 착한 가슴
그리움이여, 나직하고 나직하여라
너를 바라보다가 나는
끝내 이명의 뒤끝처럼 먹먹해진 귓불로 서 있다
그루터기 / 이만섭
나무는 죽어서도 풍장을 치른다
밑동이 잘린 채 뼛속 깊이 생의 이름을 쓴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무라는 말로서
그 이름을 대신한다면
굳이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 온당할까,
생을 움켜쥐고 수원지를 찾아 헤매던 뿌리는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땅속 깊이 박힌 채 몸의 중심부에서
여전히 무슨 소식이 오길 기다리는 것이나 아닐까,
베인 밑동은 깊은 고뇌에 들었다
살아 잎을 틔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건만
수액을 나르던 등피는 잘려나가고
화살의 과녁처럼 나이테만 동그마니 남았다
그 표적에 앉아 세월의 출구 쪽으로 귀를 연다
똑, 똑, 석회암 동굴에서 종유석을 키우는 물방울 소리
오랜 세월 풍찬노숙으로 키운 얼마나 애써온 생인가,
생명을 지키던 가쁜 숨소리가
전류를 머금은 코일처럼 찌릿찌릿 감겨온다
생을 그리 내주고도 표정은 이처럼 담담할까,
누구나 삶의 단층을 들여다보면 그곳에
생이 지니고 온 지도가 혈류처럼 간직되어 있다
더 굵게 더 광활하게,
그러니까 생은 둥글기 위해 살았던 것이다
나무 한그루 자라서 베어질 때까지 평생토록
하늘을 향해 생명의 문장을 써온 것이 그 이유라면
이제 몸의 가장 낮은 자리에 중심을 내려
저렇게 나이테만 남기고 피안에 들었다
나무가 생의 이력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시(詩)를 말리다 / 이만섭
가을 볕에 시(詩)를 말린다
농부는 씨앗를 말리고
나는 가슴의 담낭에서 괴어나오는
낯선 언어들을 펼쳐놓고
눅눅한 시를 말린다
마악 나온 나의 시는 감정이 뜨겁다
모락모락 김을 피어내며
낯 모르는 물가의 아이처럼
자꾸만 달아나려 한다
그렇기에 아직은 기다려야 하는 습한 언어다
사유는 탯줄처럼 언어의 끈을 매달아
가을빛 앞에서 기다림에 들고있다
씨앗처럼 시가 말려지는 동안
창가에 이는 훈훈한 바람,
따사로운 햇빛에 튼실하게 말려간 시의 언어들이
마음의 도화지에 점차 모여들고 있다
그들의 자리를 찾아서
겨울 연밭에 가서 /이만섭
연꽃들이 다비식을 치른 새미원에 갔었네
두물머리 질펀한 강물 곁에
한 자취 그대로 인연을 짓고 떠난 자리
꽃의 뒤태가 나직나직 아른거리고 있었네
꽃은 강물을 안고 피었다가 떠났건만
질 때는 화엄으로 졌는가
폐곡선의 늪을 수놓은 헤일 수 없는 건조체
삭아 검불이 된 생의 경전을 이리저리 뒤적이다가
꽃의 지문을 해독하네
불립문자를 짓고 생명을 밀어올린 마른 꽃대
예불을 드리듯 조심스럽게 일으키는 손
찰랑, 강물이 손등을 씻어주네
인연이란 지은 곳에서 다하고
다한 곳에서 짓는 것인가
어느덧 내가 연꽃으로 환생하고 있었네.
바람의 형용사 / 이만섭
한 무리 되새 떼가 군무를 짓자 허공은 재빠르게 그물을 거둬간다
아구 같은 입속으로 들어가버린 새 떼들,
새 떼들은 잔잔하다 싶으면 언제고 깃들어와서 날갤 파닥거리다가 사라지곤 한다
저 홀연하고 기이한 몸짓은 허공이 비어 있는 내막이다
한 마리 새의 날갯짓인들 허공은 마다했던가.
手帖論 / 이만섭
언제부터인가 내 가슴에 그대가 세들어 산다
내 육체의 어둑어둑한 협착지대에서
굴뚝새같이 겨우 몸만 들락거리며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도 행적을 잊지 않고
산수 간에 담아내는 사유조차 글 품이라도 팔듯
또박또박 받아쓰는 문장은 간결하다
바쁠 때는 바쁜 대로 거두절미하고
형편에 맞는 문자나 기호로 대처하지만
결정적일 때는 밑줄을 그으며 뜻을 분명히 한다
나는 기억자리가 희미해지고 막막할 때면
손을 내밀어 그대의 자취를 이모저모 살핀다
그대는 오래전에 나의 자화상이 되었다
나의 깨어 있는 순간을 위해
쉼 없이 내게 귀를 기울이는 꼼꼼한 그대
오늘은 내가 그대의 크고 부드러운 손이 된다
갈꽃 / 이만섭
잎은 지고
풍각쟁이도 떠나 없는데
꽃잎마다 찬이슬 머금은 외로움이여,
세월아,
메마른 땅 돌아나 보고 피었는가,
건기의 생애가 이토록 막막하다
차마 이슬 맑다고
햇살 몇 조각 투명하게 쏘아댄다고
한 자취 돋아낸 그리움이라면
절국대 끝에 걸린 산바람을 보아라
길가인들 밭 언덕인들
발길 닿지 않는 낯선 산골짜기
이 땅 그 어느 곳이라도
툭 하고 터트려
대지에 깃드는 씨앗 하나
그뿐이면 되는 것을 너는,
참으로 너는,
바람의 이중주 / 이만섭
허공을 건너온 손이
나무의 옷자락을 만지작거린다
손은 가지와 가지 사이로
깍지를 낀다거나
등 뒤로 와서 간지럼을 태우다가도
바쁠 때면 데면데면 수인사만 나누고
무채색의 유순한 표정을 짓고 간다
저 나긋하고 한들거리는 손길은
보랏빛도 되었다가 하늘빛도 되었다가
잔정어린 마음이 역력하다
간혹 광기 있는 몸짓을 앞세워
자기만의 이유로 거친 손짓일 때
흉흉한 울음소리를 내며
나무의 가슴에도 상처를 입힌다
그렇다 애먼 자가당착의 오류를 물리고
건기의 지리한 갈증을 씻으며
시원한 빗줄기라도 몰고 오는
크고 부드러운 이타적 모습이라면
나무가 햇빛을 받아 광합성에 들듯
화음을 연주하는 악사와도 같이
곱고도 아름다운 손길인 것을,
소금에 대한 소고(小考) /이만섭
한 톨의 입자라 해도
세상에 올 때 약속한 것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인데
바다는 그것을 감추었다
혹은, 말하지 않았다
세상은 스스로 규명해주었다
이치를 보이고 싶었던 것일 게다
수수만년 동안 바닷고기들이
함께 몸을 담그고 살아온 내력은
그것에 영원을 담았기 때문이다
진실을 모르는 자는 오직
음미함으로서 진실을 깨닫는다
빛이란 어둠을 밝히는 것이다
어느 때가 될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세상 밖에서 유기물이 썩어갈 때
소금만이 그것을 지켜낼 것이다
거미 / 이만섭
유년의 기억 자리에 희미한 풍경 하나가
엎드린채 모로 걸려 있다.
빛바랜 흑백 사진 속 고즈넉한 고향집
황혼은이끼 낀 흙담 아래서 졸고
검푸른먹감나무에 어둠이 깃들면
하늘빛쫓아 아스라한 추녀 끝으로
드넓은성좌의 바다가 닻을 올린다.
나무와 추녀 사이 위태한 선의 난간에
곡예사가되어 원형의 날줄을 엮어놓고
유혹을모자이크 하다가
어언화석이 된 부생浮生의 자리에
이제도내 어머니가 앉아계신다.
골방 한구석에 주름 깊은 세월 끌어안고
인고의씨줄을 놓으시며
어느해여름 태풍 불어오던 날
난바다로떠난 당신의 아들을 기다리다가
더는곱울 수 없는 손마디에는 피멍이 들고
그밤도 뜬눈 지어 날을 새운다.
마른꽃 소묘/ 이만섭
왜 그런거 있지,
추억을 붙박아놓고 싶은 거
저것이 지난날의 그리움이었나니,
저 꽃 필 때 봄이였던가
한 차례 가랑비 다녀가고
연두로 옷 입던 나무들
가슴에 골짜기바람 불던 날
붉자고 핀 꽃 지고 아, 생은 막막했다
떨어진 꽃잎 바라보며
강물따라 흐르고 싶었던 회한
꽃은 어쩌자고 피어
꽃 지는 가슴은 그리도 슬펐던가
후리지아를 내다 버린 적이 있는가,
꽃다발을 받았을 때 환희를
간직하고 싶은 적이 있었는가,
꽃이 진 후에도 꽃은
화석으로 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마음벽에 걸린 꽃을 본다
기차여행에 대하여 / 이만섭
나만의 길인 양 내 마음의 활로가 있다.
미답의 길이어도 좋고 갔던 길 다시 가는 길이어도 좋다
무조건 기차에 몸을 실어라.
돌아오는 홀가분함보다 떠나는 가뿐함에 젖어라,
그러다가 떠나는 기차. 도시를 벗어나면서
한바탕 기적소리를 울리더니
언제 다리를 건넜는지 기차는 이내 변두리의 촌락 가를 지나간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낮은 지붕들, 장독대도 보이고
슬라브집 옥상에는 흰 빨래가 나부낀다.
그 사이에 술렁거리던 마음 다소 진정이 되고
다시 바라보는 창밖, 기차는 금새 벌판을 지났는지
머리 위에 흰 구름 얹혀
놓은 먼 산들이 퍼즐처럼 겹쳐 있다. 무엇이 나를 떠나게 했던가
저 벌판을 가로질러 흐르는 시내 기차처럼 흘러간다.
저 시내 또한 무엇이 저처럼 흐르게 하는 것인가.
정체된 삶에서 떠나는 여유로움을 배우는 것이 여행일 것이다.
아니 떠나는 여유로움만 배울까, 돌아오는
아름다움도 배울 것이다. 이런 만족에 그치지 아니하고
이방인의 모습으로 저만치에서 자신이 자신을 바라보는
객관적 탈자아를 찾았다면 그 여행은 모름지기
삶을 비추는 거울 같은 여행일 것이다.
붉은 우체통에 대한 경배 / 이만섭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은
그리움이란 정해진 곳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방황하는 것일까,
비가 쏟아지는 거리에서도 신호등은
노란 경계선 밖에서 기다림에 들고 있다
차들은 흙탕물을 끼얹으며 질주해 가는데
무심한 거리는 방황을 일삼아도
결코 좌절을 말하지 않는다
안개가 자욱한 날은 바람이 불어와
안개를 거둬가 주길 원했건만 바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움이 지독해지는 까닭은 거기에 있다
비가 그친다거나 안개가 사라진 뒤에도
처음에 혼자인 자는 맨 나중에도 혼자였
이 막막한 자학 속에서도
길을 가다가 붉은 우체통을 보면
변함없이 가슴이 뛰는 까닭은
혼자임을 어디론가 편지처럼 붙이고 싶기 때문이다
갈망의 푯대 끝에서 이정표로 서 있는
저 해방구의 랜드마크로 가서,
풀잎의 서(書) / 이만섭
가만히 들여다보면
저들의 몸은 피륙투성이다
바람이나 비를 맞을 준비가 철저하다
햇빛이나 안개까지도,
한 장 한 장 낱장으로
단층을 지어 펴 있는 푸른 날개가
칼날처럼 예리한 가운데
부드러운 솜털의 하모니즘이 박혀
이슬을 거둘 때도 숨결과 같이 고요하니,
어느 한 번은 내가
문우마을에 가서 시누대를 베어다가
죽필을 만들었던 뜻도
언측(偃側)의 서(書)를 쓰고자 함이었다
드러누웠을 때도 지탱하는 생으로
저 뿌리와 같은 꿋꿋한 잎은
한 생애가 의미 없이 태어나 시드는 풀 포기가 아닌
단장(丹粧)의 풀잎인 것을
몸소 깨닫고 싶었던 것이다
자귀꽃 / 이만섭
자고새 날아와 울고 간 뒤란으로
대낮에도 적막하여 꽃등을 켜든다
나릿나릿 봉우리마다 금실 지펴놓고
그리움 깊어지면 속울음으로 울었다
청홍으로 다시 이울 밤은 언제일까
기다림은 분홍적삼만 흥건히 적시고
아침이 오면 부챗살로 벙그는 아릿 가슴
순정의 세월 뉘라 서럽다 말하는가,
봄볕 아래서 깁다 / 이만섭
정물이 꼼지락거리는 풍경을 본다
앵둣빛 붉게 쏘아대는 거,
그 이파리 연초록으로 색칠하는 거,
저것들은 한창 깁는 중이다
솔기 없이 싱싱하게
잎은 진초록 빛깔로
열매는 또옥 따질 때까지
생명으로 피워낸 몸을
봄볕 아래서 가만가만 깁는 중이다
상처속의 안부 / 이만섭
가끔은 망연히 들여다보는
어둠 깊은 안쪽
그곳의 안부를 묻네
아직도 용소처럼 들끓고 있을까
점등으로 아스라한 푸른 섬 같은
깊다랗게 패인 그곳을 남겨두고 떠나와
황량한 벌판을 정처없이 걷고 있네
거기 적멸해간 모성이 있기라도
눈물 훔치며 하늘 올려 보던 가슴은
슬픔을 수신하네
홧홧 타오르다가
꽃마당 뒤란에서 지는 봄을
가만히 한 움큼 움켜쥐던 꽃잎같이
상처 속 안부를 묻는 내가
안타까움에 겨워 진저리치네.
쑥부쟁이 사랑/이만섭
눈 감으면
쓸쓸해 오는 사랑이 있다
마음 품어 곁에 두고도
떠도는 사랑이 있다
바람도 떠나고 햇빛도 시들해진
늦가을 해 질 무렵
마른 그림자로 드러 누워
채온을 더듬는
고든재 산죽나무 길
아무도 눈길 주지않는 곳에
낮달처럼 들어앉은 하얀 얼굴
누가 너도 그리움을 아느냐고 물으면
세상의 슬픔은 눈물이 가르쳐 주었기에
생긴 것 이라고 말하마
칠흙이 내리기 전
허물같은 기다림의 꺼풀을 벗고
이 가을날
맨 나중에 하는 사랑이 있으니
슬픈 쑥부쟁이 사랑이다
*고든재: 치약산 오르는 길
북회귀선 / 이만섭
유성의 화살로 쏜 성좌의 표적에
열정의 풍향계를 세운다
바다위에 드러누운 붉은 태양
지칠줄 모르고 격랑하는 파도는
하얗게 표백되는 희열의 등고선에서
마침내 오로라의 땅에 이른다
극점에 서면 모든 사랑은
귀향을 꿈꾸는가
한 계절을 뿌리채 뽑아놓고
아지랑이로 피어오른 대지여
죽도록 사랑을 도모한 지상의 찬란함이
이제는 봄이 떠나가도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자오선에는 하얀 열꽃이 피고
남은 한조각 슬픔까지도 불사르리라
고사 오수도 (高士 午睡圖) /이만섭
원백元伯 노인께서 단정학丹頂鶴 불러 놓으시
초당에 누워 계시니,
조우遭遇 하자고
담장 너머로 솔향도 기웃하고
흰구름도 내려와 엿보고 있다
먼 산은 그림자 지어서 기다림에 들고
뜰 앞 오죽烏竹은
이파리 하나도 까닥하지 않는다
노인은 한낯의 혼곤昏困한 세상에 취해 계신다
동자童子의 인기척이 들릴 때까지..
*MEMO : 원백은 18세기 진경 산수의 畵聖
겸재 정선의 자
마음이 찾고있는 비상구 /이만섭
바람에 날려 온 종이쪽지에 글을 쓰는
마음은 어지럽기만 하다
그물처럼 촘촘히 박힌 산만이 축제라
나의 본질은 단촐함이려니,
리리시즘을 위한 선물이라며
부재중에 아는 후배가 놓고 간 것은
타들어 가는 파이프를 문 이상李箱의
자화상이 그려진 시집이였다
평소 그는 나를 읽고 있었는지
안개같이 흐려진 마음을 묻고 있다
요즘은 새로움도 어지러움이다
나를 단속하지 못하고 있는 일상들
맑음조차 혼비한 속력으로 안겼음에도
비 몰이 나서는 구름 때 처럼 나는 흐려져 있다
나를 가두고 있는 껍질들이 차츰
빠저나갈 수 있도록
나는 비상구가 필요하다
바람을 사랑한 홀로새/ 이만섭
적요의 숲
흔적없이 스쳐간 바람자리
홀로새 한 마리 앉아서
깊은 슬픔에 젖어
각혈하듯 슬피운다
그림자조차 서리지 못 함에
하늘에 두어 간 멍한 눈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 눈물, 눈물,
사위어간 노을자리에
어스름은 그물처럼 내려앉고
조금만 더 별빛 내려오면
사연이라도 물어 볼 듯
홀로새 한 마리가 이 저녁
저렇게만 슬피 울고 있다
그대라는 말/이만섭
살아가면서 가슴 속 언어는
헤일 수 없다
그 누구를 그리워 함에
그대라고 부를 수 있음은
지극한 기쁨이다
하나의 언어에
따스한 입김을 올려
그 곁으로 다가가는 모습은
진정한 행복이라 할 것이다
기쁨에 겨운 날에도
슬픔으로 에워쌓인 날에도
잔잔한 마음을 담아
나직히 불러보는 한 마디 말
그대,
그대라는 말이 있으니
또 하나의 그리움을
곁에 놓는다
사랑의 추억/이만섭
회상의 저편,
쓸쓸히 돌아선 설운 날이
아픔으로 찿아왔을 때
그대
이별을 사랑한 적이 있는가
지나간 사랑이란
다만 추억할 뿐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다
갈증에 겨워
한 방울의 물이고자 하여도
그 달콤한 입마춤이 깨어나면
너와 내가
버금앓이로 나누었던
이별조차 부끄러움 일지니
꽃잎처럼 지고 간
망각의 뜰
헤일 수 없는 그리움일랑
저 사랑한 날에 두어라
흔들리는 섬/이만섭
내가 바라보던 것은 바다였다
결코 섬은 아니였다
그는 꿈쩍않고 서 있었다
푸른 하늘도 그리알고 있었다
파도가 부서지고 있음을..
저녁 노을이 자줏빛 머풀러 휘감고
가슴자리에 혼절해 간 날에도
섬은 그냥 고요로만 멈추어 있었다
어느 한 날,
물안개도 잠이 든 날
먼 그리움이 가슴패기에 안길 때
그가 흔들리고 있음을 나는 알았다
그날을 나는 보았다
꽃밥/ 이만섭
봄볓 아래
나무들이 꽃밥을 짓는다
바람이 살랑거릴 때마다
아름아름 번져오는 밥 냄새
밥 냄새만으로도 봄날이 포근하다
이팝나무 가지 끝에
하얗게 고봉으로 짓고
입술을 달싹이며
꽃잎들은 제가 지은 밥을 제가 먹는다
밥 속에서 날아오르는 나비 때들,
햇빛도 와서 먹고 가고
바람도 와서 먹고 가고
길가는 이라면 아무나 퍼준다
눈물 많은 명자나무
붉게 꽃밥 지어놓고 어디 갔을까,
꽃밥이 식는다
봄날이 간다
꿈의 자화상 /이만섭
햇봄이 채마전 자리에서
사그락 사그락 분칠해 갈 때
묵은 구지뽕나무에 단정학이 울고
샛바람에 강물도 범람하여 갔으니
물안개 피어내던 그 신비의 길을
나는 무엇을 미행하여 갔던가
골짜기에는 서설이 희끗하게 남아서
산등을 타고 내려오는 바람의 노래를
아쉬운 귀울림으로 엿듣고 있었으니
나의 발길은 계절이 내린 잠을
그렇게 털어내고 있었다
목마로 달린 소리없는 어둠의 숨결들
처절하게 떠나왔던 회상의 길 위에
세월은 빈곤한 육신을 휘감고
푸른 금줄을 쳐 놓았다
어디쯤인가에서 계절이 무르익어 갔다
구지뽕나무 이파리도
무성히 하늘을 덮어 갔다
마침내 나는 한 허름한 잠사蠶舍에서
지친 몸을 내려 혼곤한 잠에 취해갔고
알집을 직조하기 위해서
고열로 몸부림 친 꿈자리
벌판에는 철갈이하는 새때들이 푸득이고
한 마리 애벌래는
섶으로 섶으로 오르고 있었다
잠들지 못하는 침묵의 생명선을 타고서
클로드.모네/이만섭
빛이 누우니
더불어 풍경도 눕는다
일광의 잔상이
선홍빛으로 물드는 순간
삶이란 한 폭의 그림
나는 그 속에 낱알로 돋은
풀씨라도 좋았다
자연이란 환생하는 것인가
호수를 품은 숲은
황혼이 되니
림프의 속삭임을 들려주고
아름으로 성긴 꽃무릅
여인의 고운 자태는
차양이 큰 모자에 가리어 있다
아름다움조차도 숨긴
풍경 하나가
마음의 뜨락에 내려와
가슴까지 물들이고 있다
시(詩)의 기억 /이만섭
밤이면 기억속을 더듬어
묻어놓은 시를 하나씩 꺼내온다
나는 왜 이다지
나를 훔치는 것일까
아침이 오면
구겨진 휴지들은
머리맡에 삼삼오오 흩어져 있다
벌때같이 상념을 쫓아다니며
열끓었던 짝사랑의 언어를
나는 왜 여직껏 잊지못할까
바람이 되어 흔들리고
물결이 되어 격랑했던
심상의 바다 저편에
못견디게 쓸쓸했던 젊은 내가 있다
광란에 몸부림친 질정의 내가 있다
그렇다,
그곳에는 미쳐버린 한때의
내 가슴이 있다
세월이 가는 것은 /이만섭
저 불어오는 바람의 들목을 보라
그대는 어디쯤이나 서 있는지
아직이라고 말 해놓고 세월이 가면
아니잊는다고 말 해놓고 세월이 가면
술래의 발자국을 따라 가는
기억의 그림자가 슬프다
우리에게 세월이 가는 것은
사랑하는 마음이 다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붙잡아도 방관해도 제자리로 흘러가는 것을
세월인들 어찌 모르리
깨어있는 날 만이 살아있음의 전부일찌니
어느날인가 화사 허물 벗고 떠난 자리처럼
훌쩍 자취만 남길 때
태양은 그늘에 가리워지고
정원의 꽃들도 미소를 잃는다
그리운 사람아 저 흘러가는 세월이 보이느냐
바람 잦아진 흰 오월 어느 날
길섶에 앉아 해찰하며
홀씨로 기다리는 민들레의 둥근 꽃무리를
나는 망연히 바라본다
세월이 가는 것은 저들의 자리가
바람도 없이 흩뿌려지는 것이리라
다저녁에 저 하찮은 것에서
기다림의 의미를 깨우친다
아버지의 바다 /이만섭
황혼이 붉게 물들어간
저녁바다의 수평선
포물선을 그어 간 태양의 끝점에
아버지의 바다가 있다
바라볼 때마다 한없이 시린 눈끝
그곳에 나직히 몸을 내리면
가슴으로 안기는 저녁노을
철없는 나는 풀숲인 양
네잎크로바를 찾고
곁에는 염소가 한가이 풀을 뜯는다
기다림이 다할 무렵이면
언제나 어스름을 앞세워
아버지는 귀가 길에 오르신다
뒷켠으로 만조가 되어 출렁이는 바다를 두고
질척이는 생의 뻘을 밟고 오시는 나의 아버지
어깨에는 해조류들이 주렁주렁 매달리고
발길 따라서 격랑하는 바다가 따라온다
그때마다 파도살 위로
나는 한 마리 갈매기가 된다
침묵 /이만섭
무엇을 꿈꾸기 위해
언어는 몸을 뉘여
고요에 깃든 것일까
적요를 품은 말의 쉼표는
사유를 담금질한 모습이다
어둠속에서도 자라난 말의 가지는
매 순간 새순을 돋아내건만
항변하는 침묵의 날에 베어
서글픈 채 의식을 잃는다
감춘 말의 자리,
대체 어디서 찾아야 하는 것인지
저 은둔해 간 언어의 알레고리를
깊이를 물을 수 없이
잠수해 간 언어라 해도
진정코 말이 그리워지면
어둠이 그렇듯
빛이 들면 깨어나야 하리
비오는 날의 삽화(揷畵)/이만섭
흐린 창에 나무그림자 하나 세우고 싶어
갸웃하게 건너다보는 먼 밖,
빗줄기 흘러가는 곳으로 부풀린 생각
불현듯, 산은 섬으로 떠있고
희끄무레하게 펼쳐진 지평(地平) 위에
목선 한 척이 빗발을 저어 오네.
존재하는 것들은 멀찍이 사라지고
사라진 사이사이로 스멀스멀 흘러들어
풍경으로 오는 그리움
나를 가두어 가득히 차오르네.
절대그리움 /이만섭
짙푸르러간 파도 살
파랑의 행간마다 피어난
눈물꽃을 보아라
용소가 된 가슴패기
서러움은 강줄기로 흐르고
별이 쏟아지는 밤이면
나는 창가에 앓아 누었다
한때는
서러움도 세월도 다 잊고
침묵속에서 죽도록 아파하다가
차라리 부서지고 싶었다
너의 사랑도 그러하느냐
말 좀 해보아라
슬픈 시 그리기/이만섭
마음이 슬픈 시 하나 써보라 한다
가슴 한 켠이 절여오도록
정작 가슴은 만류하는데도
마음은 한번 써 보라 한다
젖어간 것들은 세월속에서
바스랑거리도록 말라버렸는데
흥건한 자리를 어디에서 찾을가
주섬주섬 베란다로 가서 밖을 내다보다가
비오는 날 저녁 무렵
마침 젖은 우산 하나가 공원 벤치위에
접힌 채로 누워 있다
아무도 없는데 공원은 덩그마니 쓸쓸하다
누군가가 놓고 갔을까
이런 날 젖어올 모습을 기다린 것일까
가만히 우산 옆으로 추억 하나가 들어선다
그날도 비오는 날이였다
아니, 눈물이 범벅으로
가슴에 담기는 날이였다
모든것은 차라리라는 말로
끝말잇기를 하면서
찍고 또 찍어내는 눈물..
서럽다 서럽다 하여도
이별이 이렇게 서러 울 수가 있을까
하늘 끝까지 가자던 맹세가
한낱 공원앞 벤치아래로 초라하게 흩어지고
바람도 불어오지 않는데
슬픈 사랑 하나가 속절없이 나부끼었다
가을의 언어/이만섭
이슬빛 투명한 그리움
부라운을 채색하여
지상의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꿈꾸던 사랑을 고백하노니
사무치도록 때를 기다린
한번도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한
가슴앓이가
마침내 미완의 껍질을 벗고 있다
목마름으로 다가선 나날들
개화를 앞둔 꽃망울의
설레임이 이러했을까
작열하던 태양아래서
두레질로 퍼올린 여름날은
이제 하얀 강줄기를 이루어
풍요의 벌판을 가르고
저녁 놀 내리는 들꽃 무성한 자리
저리도 아름다운 가을 빛에
애오라진 나의 언어는
환희의 낱말을 쏟고 있다
헤세의 아침/이만섭
미명의 새벽
가뭇한 어둠을 털고
아침을 깨운 헤세는
안개 내린 가을 풀섶으로
또 다시 나비를 찾아 나선다
그 언제였던가
밀림이 하늘을 숨긴 날
선잠속에서 나뭇잎들은
나비때가 되여
꿈으로 펄럭이고 싶었다
그후,
어둠이 마른 손길을 건널 제
개울 뒤켠 푸른 숲속으로
홑잎되어 사라져 갔다
다름질하는 환몽
밤을 건너 새벽에 닿은 헤세는
마침내는 날개로 돋아난 살가지를
밤으로 꾸었던 꿈의 손아귀에 놓는다
호랑가시나무 위를 건너 와
이슬잠에 취한 나비때들 곁으로
숨결처럼 피어나는 아침
기다림에 들던 은빛 날개가
햇살아래서 시린 눈 부비며
신생으로 기지개 켜 오면
헤세는 젖무덤같은 미늘을 내려
그토록 간직해 온 꿈길을
살포시 밟으려니
고요의 진상(眞相) /이만섭
생몰연대가 확실치 않는
미이라가 누워있는 숲이 있다
어느 고고학자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한 백만 년 쯤은 되었을 것이라고 했고
또 다른 이는
태고(우리가 살기 전)적 때인 것 같다고 했다
어쩌면 다 틀린 말 일지도 모른다
숲이 있고 미이라가 생겨났을 것이라고
나는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냥, 오랜 옛날 쯤으로 생각하고 싶다
밤이면 그곳에 귀신이 나온다는 얘기는 아직 없었다
세월이 하도 오래 되어서
귀신도 살아 있을것 같지 않은 숲은
미이라를 간직한 채
밤이 되면 달빛이 내려와 지키고 있다
가을 장미/이만섭
삼백예순 날 사랑을 하면서도
갈증에 겨운 사랑일 때
가을의 어디쯤에서나 피어날까
가시 돋힌 살결이 부끄러워
꽃들의 정원을 뛰쳐나와
낙엽길에 단풍처럼 곱게 피었다
그러나 잊히지 않기 위해
아름다움이 된다는 것은
사랑의 추억을 잃는 일이다
멀어져간 태양을 배웅하고 돌아온
가을밤은 이제 어둡고 쓸쓸하다
가슴에 별을 품어 열정을 태운 지난날이
견딜수 없는 그리움으로 찾아오면
그대 어둑해진 마음은
눈물샘 고인 촛불을 켜야 하리
사랑이 기다림으로 오는 것임을
기꺼이 깨달아야 하리
가을, 독백 하나 /이만섭
우린 우물 안
저어기 아래 좀 봐
파란 하늘도 내려와 있잖아
밤이 오면
달도 별도 내려올꺼야
그래,
한번은 철저히 젖어야 해
그런데 문제는 젖은 몸을
어떻게 건져 올리지
고추잠자리가 날 때마다
물결이 떨리고 있어
어, 저 나뭇잎 좀 봐
바람이 데려가려 하잖아
저런,
그냥 놔 둬도 곧 따라갈텐데
왜 저렇게 에워싸고 망정이야
잠깐!
물 길러 온 한 여자가
얼굴을 빤히 내려보고 있어
그래,
마침 잘 됐어
어서 물 위에 눕자
두레박을 내리면 잡을 수 있게,
사랑, 빗살무늬토기로 빚다/ 이만섭
47.5센티 즐문토기를 빚기로 했다
세심정(洗心亭)에 공방 하나 들어놓고
연밥 따낸 새미원에서 퍼온 차진 진흙
아무도 모르게 물레에 앉혀놓고
몇날을 달밤으로 빚어간 어느 날
불현듯, 물레 속에서 빗살의 현을 타고 들리는 아리아가 있어
구석기시대 어느 못다한 사랑인가 싶어
귀 울리는 쪽으로 찾아 나서니
계곡에서 들려오는 물소리 같기도 하고
숲에서 노래하는 새소리 같기도 하고
아니어라, 아니어라,
꽃들이 웃고 있는 것을 보니 봄날 같기도 하고
호수 속 물갈대 사이에서 파닥거리는 물고기 떼들
어느 계절인지는 알 수 없는 곳,
밤안개 어린 달빛 아래
소리는 멀리 갔다가 원을 그리며 내게로 온다
달의 나이테 안을 얼마나 헤매였던지
소리의 끝점에 돌아와 보니
빗살무늬토기가 황금빛으로 구어져 있다
나무의 뼈와, 새의 뼈와, 꽃의 뼈들이
태워지지 않고 온몸에 근골로 박힌 채
영원을 빚어놓고 있었다
어리별꽃/ 이만섭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가슴에 별 하나 품어 사는 일
눈부실 때도 별 하나
슬플 때도 별 하나
그러나 사랑이 어찌 눈부신 날만 있을까
돌이켜보면 슬픈 날이 더 많았지
눈물 많아서 부른 이름일까,
어느 날 고개 떨구고
때 아닌 슬픔으로 울먹이며
길가에 서 있을 때
달려가 이름을 물으니
그리움에 겨워 글썽이던 눈빛
이 밤에는 창가로 가서
내 가만히 불러보리
슬퍼서 고운 너에 이름을,
지다 남은 꽃/ 이만섭
꽃은 반만 피어
아름다움을 보일 것이니
지는 꽃인들 알까
진실로 사랑하고도
이별이 오는 것은 아픔이어라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
나 아직 하지 못하고
꽃 지는 저녁에 서 있네
지다 남은 꽃나무 아래
세월 가두고
못다한 말 고백하려네
시 (詩)의 말, 가가론(論) /이만섭
시를 끼적이다가 받힘(言語)이 틀렸을 때
밤하늘을 날아가는 기러기를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그들이 길라잡는 언어는
우리말 첫 음절 가가다
기러기는 달밤을 날아가며
가가(可嘉)를 반복하면서 한 편의 서사시를 쓴다
이로써 횡렬을 맞추고
뒤따르는 대열(隊列)이 이탈하면
가가의 된발음인 꺄꺄(呵呵)를 소리쳐
대열의 이탈을 나무란다
어릴 적 할아버지는 가을 밤하늘을 가르켜
공부하는 새는 기러기뿐이라고 말씀하셨다
시(詩)의 행간이
어둠 속을 긋고 가는 기러기만도 못해서야,
연필로 그은 오자(誤字)가 홀로 부끄럽다
등나무 연보(年譜) /이만섭
덕수궁 대안문(大安門) 모퉁이를 지나면
그늘로 생의 내력을 삼은 나무가 있다
곧은 것조차 선벌(先伐)되는 대한제국에 태어나
몇 굽이 굴절의 생을 줄기의 힘으로 지켜냈으니
기로년(耆老年)에 제 몸에다 등왕각(藤王閣)을 지었다
한 나무가 태어나 꽃이 필 때까지
세속으로부터 몸을 건사하는 데는 목심(木心)이 있겠다
하물며 근골(筋骨)을 얻어야 사는 법가(法家)의 영토에서
순전히 줄기로 뼈의 연대기(年代記)를 써내려왔으니
그 보전함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꽃의 아름다움은 자랑하여 가지가 꺾이고
향기 또한 그런 연유로 탐하게 되니
생이 하늘에 있다 하겠는가,
오월 하늘 아래 보랏빛 수려한 자태를 드러내고도
늘 아래로만 고개 숙여 피워낸 꽃의 연유가
하마 거기 있었을까,
숲길을 걷다가 /이만섭
숲길을 걷다가 나는 나무에게 미안하다.
나무들 세상에 와서
가르마 같은 길을 내며
독차지한 기분으로 걷는다는 것이,
괜히,
잘 놀던 새들도 포롱포롱 날아가버리고
아기자기한 풀꽃들도
영문 모르고 발밑에서 꺾인다.
마실 나왔던 다람쥐도 화들짝 놀라
바위틈 뒤로 숨어가고
그간에 적요했던 숲은 혼란에 휩싸인다.
나는 숲의 테러리스트다.
비의 서시(序詩) /이만섭
비는 내릴 때마다 서시(序詩)를 쓴다
한 차례 난데없이 들이닥친 소나기도
땅기운 얼러내며 가만가만 내리는 사월의 실비도
지상의 행간을 채워
자연의 이름으로 머릿글을 쓴다
흐린 창공을 가르는 바람짓이며
먼 하늘가의 운수행각(雲水行脚)이
다 비의 서시(序詩)를 위함이니
산골짜기에 이름 모르는 꽃이 피는 일도
비가 햇빛과 밀약한 약속이다
풀잎이 허공에 몸을 세우는 일이나
강이 오래도록 그 이름을 간직하는 일도
비가 쓴 서시(序詩)의 기록이다
이 궂은 날에
비는 내 마음에도 서시(序詩)를 쓴다
불빛 없이 읽는 책 /이만섭
바쁜 세상에 책 한 권 읽기가 쉽지 않아
잠들기 전, 가까스로
가슴에 어둠의 책 한 권 올려놓고
뒤척뒤척 불빛 없이 읽는다
갈피마다 일상의 고단함이 밀려와 꽂힌다
아직은 정월이라서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았는데도
추위 탓인지 책 속에 한기가 가득 배어있다
그래 이 추위가 책을 읽힌다
이것이 나의 독서법이다
책을 손 놓은 지가 참 오래되어서
독서 없이 살아온 날들을 타박이라도 하듯
글자의 행간마다 빤한 글씨들이 낯설다
사유가 이만큼이나 거칠어졌다는 증거다
저만치에서 잠이 자꾸 불러 대고
오늘 읽은 갈피에다가 피리어드를 찍는다
어둠의 책이 칠성판의 뚜껑처럼 닫힌다
불빛에 대한 소고(小考) / 이만섭
언제부터인가 불빛은
내게 비춰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나를 보살피고 있었다
가슴을 앞 대이고 두 팔은 등을 감싸며
박동하는 심장의 혈류를 타고
온몸 가득히 온기를 전해주었다
단 한 번도 불빛 앞에서
나는 주저할 수가 없었다
언제나 따뜻이 다가와서
원을 그리듯 내 몸을 포근히 껴안았다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체온만으로도 넉넉히 의미가 되었다
강 건너 불빛인들 다를까
어둘수록 아늑해지는 모습은
바람 앞에서 꺼질 듯 가물거려도
발자국을 더듬어 가보면
추억 속 희미하게 웅크린 옛집 한 채
세월이 흐른 뒤에도
아직도 거기 아궁이에 온기로 남아
재 속에서 불씨을 지피고 있었다
문장강화, 오자(誤字)를 생각하며/이만섭
저 닳아빠진 몽당연필이 제 걸어온 길을 돌아가려 한다
몸을 꾹꾹 눌러 쓰인 행간 어느 한 부분인가가
글월의 자획(字劃)이 그릇되었다는 것이다
문자에서 문자로 수많은 길을 걸어와서 이제 몸을 굽히겠다고 저러니
몸이 바르게 섰을 때 지녔던 수호자(守護子)만 있어도 단칼에 베어내듯 어긋난 자획을 솎아낼 수 있는데
이미 닳아버린 몸은 한 치도 물러설 수가 없다
일획(一劃)의 온전함을 원칙으로 할 때 모음 하나 틀려도 그것이 문장을 해치거늘
하물며 하나의 오자(誤字)는 파문(破文)이 될 것이다
자칫 전부가 훼손된 것이나 다름없으니 이유를 막론하고 파지로 전락할 일이다
몽당연필은 이에 제 걸어온 길을 깨닫고 그릇된 뜻을 살피려 하나
오호, 그것은 쓰임이 이룬 과오를 참회하는 수준이다
이후에 쫓는 모든 필(筆)은 모름지기 몽당연필의 오자(誤字)를 교훈 삼아
문장의 그릇됨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시를 새기는 나는,
발 /이만섭
몸을 신전(神殿)으로 받들어 길의 이력을 써왔다
외투라면 한 켤레 신, 그뿐,
비록 그 크기 한 뼘 단구라 해도
제아무리 먼 길도 마다치 않고 앞에 놓았다
말짓거리 흘려 행여 수고로움을 물으면
한갓 발품에 지나지 않다는 겸허함으로
신전(身全)을 건각(健脚)으로 세웠으니
몸의 주춧돌이다
간밤에 몸이 고단이 잠든 사이에도
천정을 향해 열 발가락을 세워 경계를 섰으니
수많은 삶의 궤적을 헤적여 왔어도
생의 발자국 몸 안에 들어놓고 몸을 지킨다
그러고도 삶의 고단은 맨 먼저 쫓아와 일러주었다
삼백예순날 단 한 번도 휴식을 자임하지 않았으니
지난여름 염천이 들볶아대서
몸 따라 홍천강 가로 천렵을 나가 탁촉에 든 것이
휴식이라면 네 휴식의 전부였다
작설차 끓어놓고 우러나는 사이
가부좌를 트니 무릎 괴어 드는 발
손끝으로 가만히 굳은살을 어루만진다
내 마음 *불유구(不踰矩)에 이르렀는가,
*논어 위정 편 (七十而從心 所欲不踰矩.
일흔이 되어서는 마음먹은대로 행동하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
쓸쓸한 클라식 /이만섭
늦가을 어스름 녘,
적갈색 사이프러스 숲에서
거무데데한 장막을 치고
몇몇 11월이 연주회를 열고 있다
홧홧 타오르던 농염한 옷가지를 벗어놓고
나무는 바람의 틈새에서
목관악기의 현으로 빈 가지를 켜,
수피로 들려주는 낮은 음결은
잎새로 펄럭이던 소리보다 한결 장중하다
숨죽인 마른잎 객석도
양탄자를 깔아놓은 듯 적요하다
쓸쓸하다는 것도 아름다울 때가 있다
저만치 멀어져가는 가을날이
나직이 내림장조로 가슴을 밀친다
행복마을 꽃집 / 이만섭
행복마을 꽃집을 아세요
행복마을 꽃집에 가면 꽃들이 꽃을 팔아요
꽃은 저희끼리 유리문 안 좌판대에 가지런히 모여
손님들의 꽃바구니에 꽃을 예쁘게 담아주어요
주인은 바삐 꽃수레에 꽃을 실어나르며 웃고 있어요
꽃이 어떻게 꽃을 파냐고요
꽃들은 화기애애하게 서로 도우며 꽃을 팔아요
조금 전에도 백 송이의 붉은 장미를 사러온 젊은 손님에게
덴하그풍의 튤립과 산골짜기 소녀 같은 안개꽃이 곱게 포장을 해주네요
안개꽃은 사랑하는 연인을 위한 꽃인 줄 아는지
그냥 보낼 수 없다며 신부의 들러리처럼 몇 송이가 따라나서지 뭐예요
꽃으로 사랑을 이루라고 응원하러 갔나 봐요
아침나절에는 나이 지긋한 분이 오셔서
아내 생일이라며 수국을 한 아름 주문했어요
그때도 튤립과 백합이 따라나섰어요
백합은 향기를 담고 튤립은 영원한 사랑을 담아갔어요
꽃들은 손님의 마음을 저렇게 따뜻이 챙기네요
행복마을 꽃들은 손님의 행복이 되려고
종일토록 가슴 설레나 봐요
입덧 /이만섭
곰소항 전어철은 유둣날 싸게 만난 돼지 거시기 같다. 이놈도 쿡, 저놈도 쿡, 검지 끝이 뭉뚝해질 때까지 찔러보는 것이 예사다. 먹성 부리는 짓은 점잖은 축에는 못 끼지만 쩝쩝대는 배냇짓이란 나도 나 모르게 터져 나오는 것이기에 오죽 했으면 그렇겠는가, 항구 초입에 소금창고 지나다가 천일염 한 줌 움켜쥐니 아침은 아침대로 저녁은 저녁대로 전어 소금간 맞추는 일은 그만일테지만 회치고 끓이고 굽고 온갖 방정을 다 떨어도 가을 문턱 차고 오른 고소한 전어 아흔아홉 가지 맛을 다 찾아낼 수는 없는지라 계절병이란 제철을 넘겨야만 재울 수 있는것이 아니던가,
은어 /이만섭
햇봄, 부안읍내 알미장에 나순개 팔러 나온 아지매 툭하면 물비늘 돋는 눈부신 강물 이야기 좀 들란다. 그 아지매 섬진강 가에 열일곱 먹은 마음 착한 딸 두고 와서 내게 자랑할 때면 나는 혼자서도 눈에 익어 가 괜스레 삼삼했다. 매화꽃 이른 날 강바람으로 펄럭이는 물치마살에서 봄 잠이나 자고 몸 풀고 가겠다고 벼르는 은어보다도 곱다고, 김 모락이는 하얀 만두를 받아들고 속살을 헤집다가 그만 거기 일렁이는 맑은 강물 속으로 헤엄쳐 드는 은빛 고기떼들, 어느덧 나는 강둑에 나앉아 그 소녀 기다리며 하모니카를 불고 있었다.
물결이 이는 시간 /이만섭
고즈넉한 저수지에 철새 떼 날아와
일파만파 번지는 물이랑,
저수지는 철새 떼들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일까,
부리를 내밀어 헤엄치는 곁으로
목선을 띄우듯 나릿나릿 따라나선다
여름철 따가운 햇볕 아래
소금쟁이 면밀하게 물 표면을 복사하고 올 때도
발자국의 중심에서 피어나던 물결,
소나기 빗발칠 때도
내리꽂는 빗줄기의 중심에서 일기 시작하여
저수지가 몸을 불리는 내내 설렁거렸다
그러니까 물결은 늘 저수지의 몸짓이었던 셈이다
작은 미동에도 어김없이 심경을 드러내며
한 동아리 거대한 기다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저수지가 지닌 생명이 아닐까 싶은데,
가만히 눈 감으면 그 현상들이
저수지가 심연에서 꽃대를 올리는
물꽃임을 알 수 있다
그리운 폭설 /이만섭
나의 애완용 삽살개여, 어디 갔다 이제 왔니 동무들과 어우러져 사방팔방 쏘다니다 돌아왔니 뒷동산도 좋고 저수지 둑길도 좋고 이제야 추억을 물고 왔니, 며칠 전부터 앞 냇가 미루나무 빈 가지를 들랑날랑 오르내리던 까막까치 은빛 날개에서 나는 이 겨울 너의 귀환을 예견했다 장하구나, 너의 발자취 따라 마침내 산천이 묵는다 네가 수차례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입으로 꼬리를 잡으려고 마당가를 빙빙 돌던 날, 너도 허전할 때면 나처럼 근질거려 못 견디듯이 몸이 먼저 반응하는구나, 하고 그때 나는 침울한 하늘을 우러러보고 중얼거렸다 눈은 왜 센티미터로 오는가, 그냥 펑펑 한 질로 내리면 되지 논두렁 밭두렁 사라지고 그리로 난 길이 보드라운 지평선이 될 때까지 한세상 적요해지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그곳에 두 발목 푹 빠뜨려놓고 두더지 한마리 키우면 좋겠지 너는 다시 두더지를 찾아 나설 것이고 나는 너의 뒤를 하염없이 쫓을 것이다 나의 애완용 삽살개여, 너의 보드라운 흰 털에 나는 아직도 자라나는 턱을 마구마구 문지르고 싶구나, 우리가 누구더냐 말코 같은 이것아!
두부고(豆腐考)/이만섭
저 무른 것이 반듯이 놓여있는 것을 보면
연골 사이 서로 엉켜있는 살들은 대견하다
애초에 두부를 만든 사람은
아마 먹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음식의 법도를 세우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콩으로도 할 일은 얼마나 많은가
그 가운데 조리법을 애써 고안하다가
저리 자세를 바르게 세우는 법식을 찾아낸 것이다
그래서 콩은 사라지고 두부가 대세다
반드시 소반 따위에 받혀놓아야 하는 것이니
모가 나 있어도 궁굴어져 보이는 성질은
언제나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자긍심을
암암리에 스스로 차지한 것이리라
이모저모 뜯어봐도 느슨한 듯 편안한 차림새는
뭇 음식의 한 법도가 될만하다
하여 콩을 불려먹는다는 말은
두부에 이르러 완성을 본 것이다
봄 숲에 들면 /이만섭
봄 숲에 들면 난데없는 격발소리 요란하다
타앙 탕- 고요한 꽃문 열고 나오는 신생의 소리
전열을 가다듬어 꽃차례 짓고
피웅피웅- 마구 갈겨대는 총포 소리 일대 난전이다
나무들은 마른 가지 올려 바리케이드를 치고
산동백은 비탈에서
진달래는 바위틈에서
동그란 화서(花序)를 지어 뿜어내는 개화 소리
자지러지듯 드러눕는다
계곡을 물들고 능선을 오르는 분홍빛 점령군
비명으로 피워내는 정경은 가관이다
그래서 봄꽃은 화사명랑한가
고지를 점령한 신생의 전사들
꽃자리마다 연두의 깃발을 올리고
자화자찬 일색이다
꽃의 포성에 에워싸인 귓불이 먹먹하다
청춘의 봄꽃인들
방아쇠를 당기지 않고 어떻게 피워낼까!
골목은 둥글다 /이만섭
골목이 기다랗다고요, 천만에
그렇다면 어귀가 따로 있고 끝이 보이지 않아도
그곳에 대문이 있을 터이고
간혹 대문보다 더 깊이 들어박혀 있다는 건가요,
왁자지껄하게 싸우며 놀며 크는 아이들
제풀에 겨워 썰물처럼 빠져나가면
고양이는 그제야 어슬어슬 순찰하러 나옵니다
적요해지는 동작 소리,
갑자기 담벼락이 뻣뻣해지네요
사열을 받는가 봅니다
그래서 골목에 들면 고양이는 더 의젓해지나 봅니다
그게 아니군요, 일상적 코스를 밟고 있군요
고양이도 제 삶의 방식이 있으니까요
굽은 담장을 따라가는 발자국은 영역을 표시하고 있어요
꼬리를 말아 올리며 자꾸 실눈을 치켜뜹니다
언제 어디서 호각소리가 들릴지 모르는
일색의 긴장된 몸짓이어요
보초병처럼 서 있는 담장을 완주할 작정인가 봅니다
그러다보면 골목은 머리가 꼬리에 닿을 테지요
저 해찰, 심심한 아이의 근성을 닮았군요
잘하면 어디쯤인가에서 한바탕 뒹굴고 가겠습니다
골목이 둥글다는 것을 보여주겠습니다
[현대문학 2010년 4월호]
겨울나무의 進化 / 이만섭
이 땅의 연연 가운데 가장 깊은 것은 뿌리이겠다
뿌리를 내리지 못해 고사한 나무 그 얼마인가
벌거벗을 때까지 진화해온
그러고도 끄떡없는 나무여
기다림은 이토록 멀기만 한가,
지나온 계절을 다 비우고
직립으로 서 있는 생의 목록을 읽는다
육탈에 든 듯, 성스럽다,
꽃과 인연을 맺는 게 봄이었다면
여름은 이파리와 더불어 생을 누렸다
가을은 그대 품에 머물며
열매를 익히고 떠났는가,
깡그리 비운 몸은
마침내 저토록 핍진한 사유에 이르렀다
몸을 비워가며 진화해 온 표정이 담백하다
저것이 진정한 기다림이라면
뿌리가 일러주었으리라
낙조 / 이만섭
서녘 하늘이 모닥불을 피운다
활활 타오르며 번지는 불꽃
하루의 마지막을 살라먹기 위해
까마귀떼처럼 깃드는 어둠
풍경이 닿는 곳마다
돌아보면 길 아닌 길 없었건만
지상은 무슨 연유로
강물을 바다에 흐르게 했던가,
순교하듯 명멸해가는 일광의 뒷모습이
비장하다
월명을 기다리는 주인이시어,
어디쯤인가에서 저 광경을 지켜보시거든
태양의 생애를 노래해주오
아름다웠다고,
달빛은 혼자서/ 이만섭
유약하나 저 예리한 눈빛은
문설주에 시누대 그늘 수묵으로 물들여놓고
손 하나 까닥 않고 다스리는 고요가
고스란하다
누구일까 마중하는 이,
오래전부터 이쪽을 향해 끊임없이 추파를 던지며
꽃밥을 짓듯 무연히
열 손마디 저렇게 가지런한 것은,
신명이다,
적요하고도 예스럽다
어둠에 닿는 족족 연두처럼 새날이 되어 깨어난다
돌아보면 그리움은
더할수록 얼마나 모자랐던가,
밤이 이슥하도록 우려내는 모과향 한 자락
창 넘어 은은히 번져오는데
저 눈을 뜨기까지 시리도록 기다린 가슴이
마침내 견디기 어렵게 뿌듯하다
이 밤의 숨결 새근거리며 잠겨갔으면,
저녁을 위한 당부/ 이만섭
기차가 터널에 들어서면
모든 창을 닫고 불을 켜세요
가까이 따라오던 풍경도 잠기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어요
그럴 때, 그대와 나 닫히는 문 하나에
마음조차 나눌 수 있나요
서녘 하늘도 붉은 노을 뭉텅뭉텅 잘라내며
저렇게 순박해지고 있어요
세상은 하루 한 번쯤 새로워져야 하기에
응달에 드는가 봅니다
설사 우리의 몸에 돋아난 소름 같은 것조차도
밤을 맞는 눈빛이어야 해요
그래야만 온전한 저녁이 되어요
낮 동안 터벅거리며 걸어온 피곤한 발등
앞 대어 흘러든 검은 강에
흔연스레 담그세요
어둠보다 먼저 아득해지세요
아득함에 부치다 / 이만섭
이녘은 시방 절대 고요에 에워싸여
구름 안개 눈비로부터 아무런 거리낌 없는 가시권에
홀연히 당신의 모습을 세웠습니다
훤훤바람이 벌판을 훑고 가듯 가장 허공다운 적나라함으로
마침내 열린 나만의 경계입니다
아시나요 당신, 저 벽공을 나는 새 무슨 새라고 말할 수 있나요
새는 한 점 간격을 날 뿐입니다
수천수만 번 접고 접는 날갯짓으로 저 묘연함에 이른다 해도
그것은 아른거리는 환(幻)의 입자일 뿐,
그 너머 감춰진 아득함이 팔만사천일지도 모릅니다
저 문에 이르기까지 비록 어둠을 견디며 세운 창이라 해도
창은 빛을 만나야 어둠을 물리듯이
나는 불씨처럼 감춰진 당신을 찾아가는 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잊었겠지요 생의 막막함 뒤에 있는 당신을,
명명백백함에도 다 이르지 못하는 생이
점멸로 성긴 아득함에 매달리는 까닭이 무어냐고 묻겠지요
그러나 나는 중얼거립니다
모든 생의 뒤편은 모태의 끈에 닿아있다고,
비록 그곳이 희미하고 희미해져 아스라해졌을지라도
그 가이없음을 미혹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저 관습을 강요하는 세속은 여태껏 열망만 키웠습니다
바야흐로 이녘의 불빛이고 싶은 먼 당신,
눈이 시려 올 때까지 황량을 감당하는 구도자로서
당신은 나의 사위를 지키는 영원입니다
물방울들 / 이만섭
일탈자들은 꿈꾸기 위해서였다
물의 대열은 얼마나 고루했던가,
저리도 뛰쳐나와 몸을 빨판처럼 붙여놓고
무언가에 골똘한 것을 보면,
나도 내가 알지 못하는 한때
저렇게 생을 집약할 수 있는 표면장력에 들었다
그래서 늪의 파충류처럼 꼼짝 않고
햇빛을 기다린 적이 있다
저 응결된 물의 파편처럼 오직 투명한 방법으로
위태한 난간도 마다하지 않고
존재를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다
말랑말랑하고 촉촉한 살결에
햇빛이 감미롭게 무지개를 새기는 동안
기화하는 몸은 끝없는 갈증에 시달리다가
요람은 서서히 무덤을 짓고
그것이 자학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진정한 물은 강에 이를 수 있어야 하는 것을
물방울들이 말한다
스스로 무덤이 된 투명한 지시어로,
깃털/ 이만섭
새들은 앉기만 하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려 한다
수차례 그 행위를 반복하면서
휴식을 이끌고 간다
더러 그것을 날개 속에 감추어 놓고
보여주고 싶지 않을 때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허공으로 날아오르기도 하지만
그러는 사이 순해진 표정으로 돌아앉는다
무엇을 감춰둔 것일까
이윽고 몸을 다독이던 부리로 노래를 부르는데
노랫소리 가만히 들어보면
아주 가벼워지겠다는 것이다
가볍고 가벼워져 허공을 날 때면
몸에 붙은 무수한 깃털이 오선지의 음표처럼
악보를 타며 나붓나붓 떠다니고 싶은 것이다
필시 그의 유언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몸을 에운 그대로 허공을 날다가
어느 날 털끝만큼도 다치지 않고
날갯짓만으로 감추어가길 바랄 것이다
나부끼듯 온전함 그대로
봄꿈 -입춘에 붙여
이만섭
마른 굴뚝새가 집 모퉁이 도화 나뭇가지에 앉아있다
어디에도 꽃눈은 보이지 않고
잠 깬 아침을 혼자 맞는다
간밤의 추위에 검게 그을린 표정이 쇠락하다
울 너머 동산 가는 길
먼동을 달려온 햇살이 좇고
겨우내 뜬눈으로 밝힌 침엽의 촉수들
그제야 슬그머니 다시 감는 눈,
거기 몽그라진 마른 덤불에도
젖몸살 앓듯 나뒹군 멧비둘기 깃털조각
자울자울 혼몽에 젖어 있다
겨울은 그것들이 견뎌냈다
그 깊은 궁륭에 들기까지
애달아 하던 기다림은 얼마인가
간간이 펄럭이는 명지바람이
몽그라진 마른 덤불을 깨우고 있다
부드러운 칼 / 이만섭
사과를 깎다 보면 과도의 예리한 날이 육즙을 즐긴다
한 마리 활어처럼 칼은
스륵스륵 과육 사이를 헤엄쳐 다니고
은근히 피워내는 사과 향기 주변이 오롯하다
제 몸 베이면서도 어느 한 곳 상한 데 없이
짜릿한 사과의 비명이 둥글고 환하다
상큼한 맛을 즐긴 칼은 포만감에 겨운 듯
잠자코 소반 위에 드러눕느다
꽃 핀 자리처럼 사과의 눈부신 속살 드러내놓고
달콤한 육즙에 젖어 자르르 윤기 흐르는 과도의 날
그 견고한 부드러움
저 별밭으로 오시는 이는 /이만섭
가만하게 깃드는 어둠의 날갯짓 사이
저녁의 무늬가 촘촘히 번져 있다
별들은 창마루 끝에
기다란 주렴 빽빽이 세워놓고
나는 별등 아래 귀를 연다
자드락자드락 잣눈 밟는 소리
이 저녁 저 별밭으로 누가 오시는가,
아슴아슴 잊고 지낸 사연
돌아오는 것일까,
소리는 귀엣말을 열고
봄 산에 피어나는 여린 현호색처럼
맑디맑은 하늘빛이다
그래, 지나간 무수한 날들
갈망을 습관처럼 길들이며
나의 숨통을 죄였던 고삐가 아니던가,
소리의 손길이 무장무장 나를 어루만진다
다시 물이끼처럼 촉촉해진 몸이
한 진인을 찾아가듯
어둠 속 저 별밭으로 나선다
꽃의 성분/ 이만섭
바람은 꽃나무를 흔들고 오지만
꽃은 바람이잠들 때 피어난다
그래서일까, 꽃들은 하나같이 고요로와
말갛게 낯 씻고 나온 표정이다
엽엽이 포갠 둥근 볼 살은
필시 고요의 화신이라도 숨겨놓은 듯 평화롭다
누군가 말하지 않던가,
고요는 고요하지 않은 것을 다스리는 중이라고
그래서 꽃이 피었다는 말은
그 은밀한 자태를 드러냈다는 말일 것이다
무슨 말인가를 입술로 건네는 것보다
꽃은 먼저 얼굴빛으로 고백하곤 하는데
그것은 내면에 지닌 따뜻함을
묵시적으로 보이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래서 꽃봉오리 이전의 슬픔조차도
감추지 않는 꽃다움이 더 아름다운 것이다
누가 부른다 / 이만섭
봄 저녁의 내 귀는
개화기에 든 우슬초 이파리인가,
너른너른 포개 올린 꽃대의 첨탑에 피어난
자줏색 꽃잎 만지작거리며
허공에 날아드는 연둣빛 종소리
바람은 어디에도 일지 않는데
앞 여울이 속닥이는가,
밤안개처럼 번져오는 이 야릇한 현기증은
거기 물버들나무에 갓 숨 탄 배꼽쟁이
무럭무럭 솜털 부푸는 중인가,
거꾸로 매단 우듬지에서 나는 소리 같기도 하고
골짜기 멀리 잦아드는 쏙독새 울음에도
시나브로 가빠지는 숨결
적요의 반란처럼 가만가만 호명하며
꽃눈보다 먼저 뜨는 귓불
이 마음을 어쩔끄나,
2월, 산길에서/ 이만섭
나무와 함께 산길을 걷는다
얼마 만인가, 겨울 들고 서로 잊고 지낸 지가
나무는 발등에 얹힌 눈 쓸어내듯
가까이 마중을 나와 야윈 손 내민다
나도 연인들처럼 그의 손을 꼬옥 움켜쥔다
딱딱한 몸에서 배어나는 겨울의 체취
아직은 찬 기운 역력하다
혹한을 견디느라 갈라진 손금이
손바닥에 인장처럼 박힌다
동한거를 마친 수도승 같다
우리의 재회를 기뻐하기라도 하듯
빈 가지 갈기처럼 올린 나무의 마른 이마에
투명하게 부딪히는 햇살이 쟁그랑거린다
나무도 나도 서로 한 기쁨 나누지만
이쯤에 오기까지 나무는 이 헛헛한 빈 산에서
세상 소식 묻어놓고 겨울을 어떻게 났는가
비탈에 드러난 몇몇 뿌리는
심한 추위에 시달린 듯 더욱 굽어 있다
인내력 없이 겨울을 저리 지낼 수 있을까
독락이라면 또 다른 독락일 것이다
한동안 산길을 걸으며
나무가 들려주는 세한을 나는 이치를 듣다가
잠시 한 발 뒤로 물러 가슴에 적는다
나의 노트/ 이만섭
나는 종로 2가에 가서 노트를 사온다. 집 앞 상가 문구점에 얼마든지 많은데 하필 고생을 사서 하느냐며, 보다 못한 아내가 시장 다녀오는 길에 아울렛에서 두어 권 사왔으나 시큰둥했다. 나는 내가 필요로 하는 노트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파고다 공원을 끼고 훤훤대로 가에 한 리어카 가득 채운 공책 노점상, 중년의 그가 하고많은 일 가운데 저렇게 별반 돈도 되지 않은 노트를 판다. 단속반을 피해 헐리우드 앞 이면도로에 리어카를 세울 때면 소문난 국밥집에서 솔솔 배어나는 일천 오백원짜리 해장국 냄새가 세상의 야박한 인심을 다독여 준다. 그는 나 같은 사람 때문에 이 짓 면치 못한다고, 비 오는 날 바짓단을 적신 채 우두커니 세상을 내다본다. 나도 그런 마음으로 시를 쓰지만 치켜 쓴 비닐 우비 사이로 드러난 관조의 눈빛은, 그가 내 마음보다 먼저 빈 노트에 세상의 시를 쓴다.
절창 / 이만섭
동백이 툭, 하고 지는 까닭을
아는 이 드물다
그의 그리움은 하도 붉어 나서
꽃 필 때면 작정하고 뿌리를 황천 가에 둔다
그렇지 않으면 꽃나무 발병이 나
거기 내린 뿌리 거두지 못하고
푸른 잎사귀 누렇게 떠
춘삼월쯤이면 영영 고스라진다.
봄 섬에 가다/ 이만섭 그 바다를 기다려 봄 섬에 간다
하늘바다를 젓는 상앗대에 쏟아지는 햇살 바람도 낭창낭창 싱그럽고 눈 시리다
새벽을 열고 떠났건만 섬은, 다가오는 듯 달아나는 듯 저만치에 있는 듯 아득한 듯
물안개는 여태껏 피어오르고 다문다문 해조음만
그 섬에 접안하면
먼발치가 점점 삼삼하다 |
봄비/ 이만섭
겨우네 움츠려 있던 굽은 잔등
이곳저곳에서 토닥토닥 두드리는 소리
폐부의 피돌기가 수월하다
살아있는 이름을 호명하는 일은
이날처럼 기쁜 날도 없다
그래서 겨울을 난 이름이라는 이름은 모두
불러내고 싶다
기지개를 켜는 나무의 가느다란 팔에도
그렁그렁 기쁨을 달고 있다
슬그머니 이완되는 몸
나도 같은 이름으로 합류한다
느티나무 숲/ 이만섭
마을 어귀에 느티나무 한 그루
잠자코 바라보면 숲처럼 보인다
혈혈단신 자라 숲이 된 나무
나무는 언제부터 무성해졌을까,
한 그루 숲이 되기까지
견뎌낸 세월은 무엇일까,
처음 심어졌을 때 마을 사람들
저 나무 한 그루에 마음도 함께 심었을 것이다
그 아래 정자를 세워 여름이면
나무가 펴놓은 그늘에 들어 쉬고 싶었던 것이다
길가에 서서 먼동을 바라보며
동그마니 홀로 자라는 동안
그 얼마나 황량했을 것이며
아침저녁으로 마을 사람들을 대할 때면
또한 그 얼마나 겸연쩍었을까,
세월의 뒤꼍으로 싸목싸목 몸 부풀려
저렇게 한 아름 숲이 되었을 것이다
외로운 세월을 삭이지 않고서
저리도 넉넉해질 수 있을까,
외로움이란 마음의 섬일 뿐이다
강물 연가/ 이만섭
능내리 굽은 길을 가면
몸은 바깥인데도 마음은 안쪽에 있다
양수리는 아직 이른대
먼저 강물 소리 마중 든다
이쯤에 오면 나는 왜 들뜨는 것일까,
나와 무관할지도 모를 일인데
그게 아닌, 조급한 마음을 꺼내 들고
현묘함에 귀를 기울인다
그럴 때면 밤사이 흘러온 강물
나작나작 내게로 흘러든다
물비늘 돋아내며 자맥질해오는 물이랑
눈에 보이지 않는 풍경까지 들여놓고
언제라도 그만한 담담함으로
어른거리는 물결무늬
어느결에 굽어 있는 내 눈빛
사랑의 팔은/ 이만섭
사랑의 팔은 길수록 좋다
그래야 끌어당기는 맛이 있겠다
그러니까 손마디 쫙 펴
문장부호 소괄호처럼 팔꿈치를 둥글게 오므려
지그시 끌어안는 견인성,
허리가 휘도록 보듬는 게 좋다
그렇지 못하고 손마디만으로
내미는 팔이라면 힘도 실리지 않을 뿐
거기 손끝에서 미적거리다가
놓쳐버리기 십상이다
아뿔싸,
그것은 길어도 길지 않은 팔
꽃들이 몰려 온다 / 이만섭
이 환한 느낌표,
누가 아름다움이라 이름 부르는 중인가
말몰이 하듯 봄바람 채찍질하며
꽃들이 몰려 온다
이 아침,
그대는 목울대 높여 목련을 노래하고
나는 가슴을 펴 백합을 노래한다
우리 마음도 꽃의 정수리에 핀다
오라, 꽃들이여
봄은 자유다
망설이지 말고 기꺼이 오라
한 수레 가득 싣고 와도 좋고
한 고백 가득 속여도 좋다
네가 피워낸 꽃자리 신생이면 족하다
누구 하나 돌보지 않는
강 언덕의 개불알꽃이면 어떻고
앉은뱅이꽃이면 또한 어떠랴,
꽃들이 피어나는 동안
뜨거워진 옥토는
씨앗을 틔워내기에 바쁘다
꽃들이 몰려온다
허공을 강타하며 창문 활짝 열어젖혀
칙칙한 공기 몰아내고
내 가슴에도 수북이 쌓이는 봄편지
버드나무 카페 / 이만섭
봄바람 살랑거리는 날
버드나무 카페가 성업 중이다
입간판 하나 없어도
강 언덕에 노랗게 벙근 산수유 발길 따라
알음알음 찾아오는 손님들
봄날이 좋긴 좋구나
연둣빛 눈썹 달고 물오른 버들개지
스륵스륵 불어오는 샛바람에
빗질하는 머릿결
햇살 비쳐 뽀얗게 일어난 솜털은
봄처녀 부푼 마음 같다
물결 자작거리는 창가에
개개비떼 먼저 와 자리 잡고
수다 떠는 몸짓도 발랄하다
강가에 마실 나왔다가
얼떨결에 들른 후두티 한 마리
혼자여서 그런지 머슥한 표정으로
마당 가를 서성이는데
연기처럼 피워 올린 물안개에
가지마다 촉촉한 나무들
차를 끓이지 않고도
버드나무 카페가 성업 중이다
봄꽃/ 이만섭
꽃을 다 말할 순 없다
그러나 말간 봄볕 곁에 오늘 핀 봄꽃
신열을 거둔 발그레한 낯으로, 눈부시다
무럭무럭 부푸는 세상
어딘가에서 나비 날아들 것만 같다
자명한 하늘 땅
기쁨의 언저리를 오가듯
내 눈빛의 중심에 일직선을 이룬 꽃차례
가슴까지 환하게 문 열고 온다
해와 달 다할 때까지 유혹 참아내며
순결 지켜주고 싶다
비록 짧아 섧은 봄날일지언정,
복사꽃 아래/ 이만섭
사월이 오면 복사꽃 아래로 가서
그대의 볼에 입맞추고 싶다
간질이는 꽃잎 사이
언뜻 비쳤다가 가만히 눈 뜨는
발그레한 마음 꽃나무 아래 내려놓고
꽃그늘 눈부신 분홍과 연두 사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단정한 나부낌으로 낙화하는 꽃잎들,
말갛게 햇살 머금은 하늘호수에도
비단주름으로 이는 윤슬,
도무지 그늘 속은 아닌 듯
먼 권적운에 몸 띄우는 꽃바다의 자맥질은
살굿빛 꽃갈피를 탐한 것도 아닌데
가슴은 왜 이리도 울렁거릴까,
자꾸만 부푸는 분홍빛이여,
복사꽃은 필 때도 질 때도 현기증이어라
폐부 깊이 배어든 꽃향기
나 그대를 꿈꾸는 중인가!
꽃을 보다/ 이만섭
오월 아침 꽃을 본다
말간 햇살이 철쭉꽃 붉은 잎살에 닿아
꽃잎의 맥박이 두근거린다
햇빛을 만나면 꽃은 왜 설레는 것일까,
숨소리라도 엿들을 듯
나도 모르게 한 발자국 더 내민다
일찍이 꽃을 이토록 주의 깊게 바라본 적이 없다
계절이 오면 당연히 피어나는 것으로
그저 아름답다는 생각 뿐
꽃 같은 열망 따위 품은 적이 없었거늘
잠시 고요의 경계선을 넘는다
한순간 꽃의 아름다움이
꽃나무가 피워낸 것이 아닌
우주 저편에 존재하는 화엄으로 환치된다
살아가면서 수많은 꽃을 볼진대
이처럼 환희의 자태를 얼마나 가슴에 담을 것인가
꽃이 핀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빌어
생명의 존귀함을 드러내는 일일 것이다
충만한 생의 헌사 앞에
숙연해지는 아침이다
휘파람새 울음을 받아쓴 적이 있다 / 이만섭
화사 허물 벗고 떠난 유년의 밭 언덕
찔레나무 꼭두난간에 웅크려 울던 휘파람새
명치끝에 울혈이라도 고인 듯 목젖 굴리며
허공 드높이 토해내던 울음소리 아직도 쟁쟁하다
사위는 저녁놀 짙게 배어드는데
새는 한사코 우는 일에만 열중이었다
그 새소리 시방 나는 울음이라고 말하는가,
울음이 슬픈의 방식일 수 없듯이
수숫대 베어낸 비탈밭 아니어도 날갯짓 한바탕이면
날아 울 수 있는 곳은 많고도 많을진대
어쩌면 그곳은 새가 간직한 그리움을
아무렇게 내려놓고 싶은 마음의 뒤란이었는지 모른다
찔레꽃 하얗게 피워낸 추억자리에 돌아와
목젖이 터지도록 울어대는 간절한 발성법은
그리움에 띄우던 주파수는 아니었을까,
떨기진 나뭇가지 어디쯤에 빈 둥지 남아 있을까,
더듬더듬 찾아가는 애틋한 귀한은
한때 멀미나도록 흐드러진 찔레향이며
이랑마다 나풀거리던 푸른 수숫대만큼이나
울창했던 나뭇가지에 다시 돌아오기까지
새는 허공에 새겨진 무수한 발자국들을
탐색에 탐색을 거듭하며 찾아왔을 것이다
더는 남아 있지 않고 지워져버린 먼 자취들,
그립디그리워 아득하게 깊어진 이녁의 융슝그린 가슴으로
마른 열매 따내듯 토해내는
자물녘의 한때가 마냥 정처 없었다
낡은 책상의자/ 이만섭
저 수척한 나무계단 중턱에 걸터앉아 결가부좌 중인 무릎을 잠자코 어루만진다
자화상 그대로, 서책들의 종지기 같은 생애가
묵묵히 한 무명시인의 몸을 떠받치며 시중에만 전념했으니
오래전 벼슬길이라도 나섰다면
한 시대 적절한 품계를 받을 수도 있었겠으나
끝내 내 곁에서 좌선을 택했고
그로 말미암아 뼈마디마다 저려오는 신호음은
저의 수행법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무게를 비운 자리 귀로 듣기에 충분하다
한 눈에도 여실히 세월 묻어나는 존재는
사물의 한 생애가 무게에 연연치 않고
초지일관 자리 지키는 일로서 편안을 주었다면 얼마나 투철한 헌신인가,
저가 감당한 내력을 이미 내가 알아주느니
*그대가 곧 선비다
* 士爲知己者死
쟁명한 오후/ 이만섭
제 그림자 등진 하오의 햇볕이
절반을 잘라낸
사과처럼 한쪽만 붉다
채마전 밖에 마실 나온 자벌레
고무락고무락 배냇짓 하듯
속살인 채 일광을 길이로 재더니
어느 사이엔가 풋잠에 들었다
생의 그늘 자리를 벗어나
양지에 피운 몸꽃 모쪼록 평화로운데
텃밭을 그냥 지날 리 없는 참새가
살같이 다녀간다
햇빛은 때가 되면
저렇게 창공을 나는 새 한 마리에게도
일용할 양식을 지어주시고
무엇 하나 부족함 없이 묵묵히 익혀낸다
때론 거룩하게
아름다운 소멸/ 이만섭
이른 아침 사과상자를 접는다
텅 빈 육면체의 거푸집을 뜯어
평면으로 선을 접는 간편한 일인데
이 허드렛일이 여느 일 같지 않고 특별하다
그동안 상자는 베란다 한곳에
사과를 정중히 들여놓고
사과가 무탈하게 지낼 수 있도록
체온을 지키며 나름대로 애썼을 것이다
평소 사과를 담아두던 까닭에
숙명처럼 따라다니는 이름일 테지만
납작하게 접히고나서도 상자의 이름은
여전히 사과상자다
분리수거장에서도 아마 그럴 것이다
붉은 사과를 품에 지녔던 상자의 뒷모습이
사과라는 말처럼 향기롭다
사물을 통해 소멸의 아름다움을 얻는
청명한 아침이다
봄책의 문장은 만연체다/ 이만섭
봄책을 읽는 데는 다소 인내가 필요하다
서론이 너무 길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독자는 자칫 해이해질 우려가 있다
느릿거린 행간에 중언부언 쓰인 기상해설이며
첫 장부터 긴밀성을 떨어뜨린다
예를 들어, 입춘 이래 진달래까지
진달래 이후 벚꽃이나 살구꽃까지
구절마다 기다림 일색의 췌사다
꽃을 은유한 지문이 수미쌍관 감정이입만을 다루고 있다
하기야 얼마나 메마른 겨울을 견뎌냈던가,
꽃나무만 해도 할 말이 너무 많은 것이다
그러나, 그 후 몰려오듯 쓰인 꽃들에 대한 문장은
내가 궁금해하는 사과꽃이나 앵두꽃 같은 추억거리도
꽃의 주변만 왁자지껄하게 나열해 놓고 있다
그마저도 집중할 만하면
황사 따위의 활자가 독서력을 어지럽힌다
오늘 내가 읽는 405페이지가 그렇다
모쪼록 청명절의 햇살이 창에 눈부신데
생각하면 가슴까지 환해지는 명자꽃인데
어릴 적 누님과의 추억은 어느 행간에도 없고
공원에 분홍빛 꽃봉오리만 수줍었다
저 꽃 피면 붉다는 것을
꽃의 뒤편에 이내 연두가 돋아날 것도 나는 안다
그렇게 봄날은 무연히 질 것이고
그런 줄 알고 읽는 만연체 문장의 봄책이다
온점의 詩/ 이만섭
글자들이 문장부호 속에 갇혀버렸다
외마디 피리어드의 무게가 視線을 거둬가고
나는 아직 표음문자의 행간을 빠져나오지 못했는데
몸만 나와 비추고 있다
봐라, 옴짝 못하는 자충수
내가 벌 받는 중이다
春花源記 / 이만섭
봄 무르익어 발길 닿는 곳마다 만화방창이다.바깥이 화사하니 안인들 견딜 수 있을까, 화창에 손목 잡아끌리듯 휘적휘적 따라나서니 무릉의 어부가 들었던 도원길 수로도 아니요, 나른함에 겨워 잠시 거풀잠 붙일만한 곳도 아닌,도미나루 건너 굴참나무 숲에서 들리는 탁목조 소리다.군데군데 참 꽃 흐드러놓고 나를 불렀던가, 소리는 아직 진정되지 않은 듯 적요한 골짜기에 반향되어 돌아오는데 발아래 꽃 짓는 산자고
초롱초롱한 눈빛, 솜털 같은 쫑곳귀 달고 두리번거리는 노루귀며, 부끄러운 듯 저만치에 몸 비트는 비비추, 여린 봄꽃들 비탈에 내린 숨결도 맑다.혼자임을 삼가지 못하고 꽃샘 든 표정으로 산벚나무 등 뒤에서 바지춤을 여미는데 때아닌 홀딱새 허공에 솟구친다.호호타쿠-호호타쿠-
춘정에 허물 들지 말라는 소린가, 음각의 비명처럼 가슴에 경고하고 든다. 尙意!
꽃의 성분/ 이만섭
바람은 꽃나무를 흔들고 오지만
꽃은 바람이 잠들 때 피어난다
그래서일까, 꽃들은 하나같이 고요로와
말갛게 낯 씻고 나온 표정이다
엽엽이 포갠 둥근 볼 살은 필시
고요의 화신이라도 숨겨놓은 듯 평화롭다
누군가 말하지 않던가,
고요는 고요하지 않은 것을 다스리는 중이라고
그래서 꽃이 피었다는 말은
그 은밀한 자태를 드러냈다는 말일 것이다
무슨 말인가를 입술로 건네는 것보다
꽃은 먼저 얼굴빛으로 고백하곤 하는데
그것은 내면에 지닌 따뜻함을
묵시적으로 내보이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래서 꽃봉오리 이전의 슬픔조차도
감추지 않는 꽃다움이 더 아름답다
마당 / 이만섭
평평한 땅을 밟고 서 있으면
마당이 궁금해진다
귀마다 각기 자리가 있어 그쪽으로
길을 여는 원심력으로
비어 있을수록 넉넉한 앞섶이기에
그래서 시골집 마당은 살림의 도량을 짓고
두루두루 생활을 거느리고 있다
모퉁이돌에 경배하듯
아침저녁 마당을 쓰는 내력은
저 평면이 단단해야 곳간이 듬직하다는
아버지 말씀이 아니어도
지붕의 용마루며 처마끝의 서까래가
확실히 바르게 드리워 보이고
담장은 담장대로 대문은 대문대로
흐트러짐 없이 건사하는 것이니
토방 아래 대문 앞까지
날빛 불러들인 편편함만으로도
매양 지신 밟듯 평온하다
빗방울 귀 / 이만섭
빗방울 소리 처마 밑에서 들을 때면
빗방울이 먼저 귀를 열고 온다
후박나무 잎에 후드득후드득 꽂히는 빗방울이거나
마른 땅에 팍팍 못질하는 빗방울은
그거야 내 귀가 듣는 빗방울일 테고
내가 저들의 소리를 경청하고 있으면
부산을 떨고 오는 길에
허공에 나지막하게 문 하나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처마 밑에 오래 서 있으면
앞다투며 오는 수많은 빗방울이
그곳의 문설주를 지나는 것을 보겠는데
그의 귀는 대기권에 들기 이전부터
이미 생각의 날개를 달았던 것은 아닌지
나는 빗소리를 들으며 자꾸자꾸
그의 귀를 통해 내 마음을 전하려 한다
마음벽에 붙어 주르륵주르륵 흘러내리며
차갑고 축축한 연주를 하는 까닭을 알 때 쯤이면
내 마음의 절반은 들려준 셈이다
내가 비를 좋아하는 것도
내가 비를 기다리는 것도
빗방울이 내게 귀를 빌려주기 때문이다
저문 강 / 이만섭
저문 강에 손을 적시네
옷깃이라도 끌리듯
적신 손이 강물을 따라나서네
내 마음 같을까 싶어도
저만치에 멈춰 서네
세상은 저녁 빛 들면 처연해지고
우두커니 아득해지는 강물 바라보네
어둠은 사위를 지우는데
생은 여전히 진득하지 못하고
불빛을 쫓듯 하염없음이여
저문 강에 적신 손
거두지 못하는데
강바람이 이마를 짚고 오네
오동꽃/이만섭
꽃이란 꽃은
아름다움을 위해 필 진대
개중에는 그렇지 않은 꽃도 있다
오랜 세월
나무가 아름드리를 짓는 동안
꽃은 얼마나 한결같던가
비원의 종소리라도 들려줄 듯
꽃 필 때마다 귀를 열어
나무의 몸에 소리를 키웠으니
꽃을 받쳐든 너른 이파리도
청태 같은 가지도
켜켜이 붕새의 꿈을 꾸었으리
그렇기에 저 꽃밥의 주인은
필시 음악가일 것이다
연주회에서 돌아온 저녁이면
월광곡이라도 쓰듯이
그는 오동나무 아래로 가서
천 년의 악보를 쓰는 것이다
언젠가 나무가 속을 다 비울 때까지
아름다운 악기를 위해
아직도 기다림의 말미를 주며
그 사이 꽃은
하얗고 고즈넉하게 핀다
달빛 문장 / 이만섭
어둠은 검푸른 인화지
회화도 음악도 아닌 수묵빛인데
난간 사이, 팔을 뼏쳐
쓰다듬는 손길이 희고 곱다
먹감나무 이파리에
서리꽃 피우며 부서져 내리는
은은한 달빛 가루
남새밭 파꽃도 수줍다
그림자 등지고 속닥거리는
잔잔한 우유체 문장
뒷산 솔밭의 부엉이나
집 모퉁이를 어슬렁거리는 검은 고양이
외로운 자태로 읽히기에 그만이다
적요에 갇혀
밤늦도록 주석을 다는 내 마음도
괄호 안 말없음표로 읽히고
물결들/ 이만섭
강가에 서 있으면
물결이 그립다는 듯이 쫓아온다
그것들은 내게 오고 싶어 하는 마음을
달리 표현할 길 없어
결의 뒤편에 부는 바람에 의탁하여
쉼 없는 일렁임으로 손짓하는지도 모른다
산맥 같은 기다란 행렬을 짓고
어깨와 어깨를 맞대어
기폭에 강물의 사연을 담아
끊임없이 어우러지는 춤사위 같다
강이라는 이름은
단순히 물이 흐르는 것만이 아닐 것이다
그 흐름을 가꾸는 물결이 아니고
자짐이 아니고, 강이라 부를 것인가
정녕 그립다 할 것인가
별꽃은 왜 피는가/ 이만섭
어쩌다 풀숲에서 마주친 별꽃,
왜 그렇게 면밀해지는 마음인지
지나칠 뻔했다는 생각이 들 때
깊이로 읽히지 못하는 풍경의 원근법을 생각한다
(소중해서 감춰온 것은 아닐진대)
별은 밤마다 아득함을 마다치 않고
풀숲에 영롱한 이슬을 지으며
꽃자리마다 꿈을 영글어놓았는데
지상은 이 고즈넉함을 헤아리지 못하는가,
꽃이 피기까지 바람은 얼마나 자분거렸을까,
나도 지나쳐버렸다면
별꽃의 생은 어둠으로 와서
어둠으로 질 수밖에 없으려니 아찔하다
그래서 밤하늘의 별은 어둠 속에 빛나며
생각 밖 무심한 것들까지도
수굿하게 함께 밤을 지새우는 것일까,
어느 별의 눈물이 반짝이고 반짝이다가
지상에 떨어져 응결된 것이라면
내 마음에도 여태껏 잊고 있다거나
아직 돌아보지 못한 그늘진 자리를 위해
별꽃은 피어난 것인가,
와성일색(蛙聲一色)/ 이만섭
유월은 나무들만 푸른 게 아니다
살아있는 거라고는 다 푸르러지고 싶어 안달이다
저 밍밍한 무논에도
야간음악회를 여는 족속들,
어찌 알았을까, 광합성의 때를,
쟁기날로 갈아엎은 놀란흙이 일러주었을까,
땅심 하나 기특하다
감자꽃 피는 달밤이
이리 좋을 순 없다고,
불러도 불러도 목청은 왜 이다지 단단해지느냐고,
와굴와굴 부르는 세레나데
산바람에 실려오는 밤꽃 내음에
볼록볼록 커지는 귀
저 수저음에
보청기 꽂아놓고 밝히는 푸른 밤,
여름 숲에 들다/ 이만섭
초록의 시간이 신성하다
나무들, 너른 너른 푸른 무언극으로
이웃끼리 손 마주 잡고
푸근한 자태로 둘러 있다
몸 자리 에운 것을 보니, 밖에선
야적해놓은 그물처럼 모닥거려 보였으나
광합성을 위한 결속이었다
묵묵히 번진 이끼들,
나무 저편 수런거리는 소리
미처 듣지 못한 이쪽의 말 풀며
수화를 하고 있다
가도 가도 잔잔한 말들,
들어도 들어도 물리지 않는 한속으로
깊은 데 이르지 못해도 나는
기꺼이 푸른 지도 하나 품은 이방이다
푸르다는 것은 얼마나 참된 일이냐,
숨결 가득 차오르는 넉넉함으로
아늑한 궁륭에 든다
저녁 무렵,
새들도 처소로 돌아가고
잠들기 위해 천천히 귀가하는 숲
정중히 자리를 뜬다
저녁의 질료/ 이만섭
순교하는 날빛 들목에
수묵색 외투를 걸친 어스름이 잠시 묵념을 올린다
뒤따라 일제히 기립하는 정령들,
모든 경계를 허물고 판화처럼 음각되어
횡렬로 번지는 검푸른 귀의,
잠시라지만, 그 사이
광합성을 꿈꾸던 담벼락의 편백나무도
일광을 쫓던 우듬지마다
날갤 접은 채 제 그늘에 갇힌다
텃새들도 거처로 돌아간 울타리 안,
농묵으로 착색된 어둠의 귀에
재넘이는 풍경처럼 낮은 소리를 흔들다가
슬금슬금 대문 밖으로 빠져나간다
이제부터는 냄새의 시간이다
쌀을 씻어 밥을 안치는 일도
달그락거리며 음식을 만드는 일도
일상을 간추리는 소리의 음색은 더욱 긴밀해지고,
무기질처럼 귀의하는 저녁
체내에도 어둠이 번지기 시작한다
어떤 고요에 대한 自省/이만섭
해 질 무렵 개울 가를 걷다가
피라미떼 뛰어오르기에 가까이 다가가니
물고기들 수표면을 향해 입찔이다
나작나작 저녁빛에 반짝이는 물결과 놀이를 하는
생동하는 풍경이 압권이다
수선거리는 자리에 첨벙, 돌멩이 하나 던지니
금세 달아나버리는 피라미떼
수표면 일그러지고 동그란 포말이 물꽃처럼 피어난다
물고기가 떠난 고요,
방금 전까지 노닐던 물고기들의 평화를
수탈하여 얻은 고요가 무참하다
한동안 정적이 흐르고
내가 신처럼 군림한 자리에 들어선
무거운 고요를 지키며
피라미떼가 다시 나타날 때까지 기다렸다
진정, 나는 산책 중이였던가!
눈 뜨는 아침/ 이만섭
아침을 깨워 낸 것이
어디 쥐똥나무에서 재잘거리는 참새떼뿐일까,
창틈을 비껴든 낱장의 햇살과
창공을 떠다니는 물푸레 빛 찬란의 미립자들,
옹알이하듯 빈터를 기웃거린다
이슬이여, 이슬이여,
투명한 손길로
풀잎의 눈곱을 떼는 이슬이여,
가슴마다 울창울창 설레놓고
나무들 홰치는 수간 계곡
눈 시린 초록의 날개들이여,
산비알을 내려온 궁노루
여울 가에 어성거리는 해맑은 눈동자
쫑긋 귀도 가볍구나
밤을 달려 강물 소리 키우다가
담장 밖 고개 내민 능소화
금빛살 우편함 같은 설렘이 어디 너뿐이랴,
풀/ 이만섭
아버지는 밭에 가시면
곡식 안 되는 것은 죄다 뽑아버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여름날의 밭은
풀의 수난사다
밤사이 줄기를 뻗어 빨치산처럼 급습해온 비탈밭의 보래기며
팔다리 뚝뚝 분질러놓아도 비만 오면 슬금슬금 밭고랑으로 기어드는 쇠비름잎들
본래 그것들은 순하디순한 풀이었다
이 땅의 파수꾼으로 살아가기 위해
비바람으로부터 억척스러워진 것뿐인데,
그럴 때면 나는 땅이 풀 없는 황무지가 될까 봐 걱정했다
온갖 고난에도
가을이면 대지의 곡식으로 열매 맺는 푸나무
이 땅을 지켜낸 것이 대견하다
우리 집을 건사하신 아버지
돌이켜보면 풀의 다른 이름이었다
별은 왜 뜨는가 / 이만섭
아직 부르지 못한 흉중의 이름이 있어
기다리는 별의 시간
어둠의 쪽문을 젖히고
밤하늘 저편에 귀를 열면
호명하듯 파고드는 가느다란 섬광이, 홀연하다
저 아슴한 궁륭이 눈 뜨기까지
가슴의 골짜기는 얼마나 곤궁했던가,
갸륵하도록 에워대는 뭇 별들이건만
어디에도 찾을 수 없는 상실감은
여전히 유효하고,
별을 기다려 본 이는 안다
그리움이란 애틋함으로 깊어가는 것을,
아무리 거대한 욕망조차도
그것이 한갓 순명으로 길들어질 제
별은 가슴에도 뜬다는 것을
그리움이여,
그대에 이르는 길이 달리 없는가
하현(下弦)을 보다 / 이만섭
밤의 공산에 허리 굽혀
어둠의 과녁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는 궁사의 어깨뼈 아래
단단히 움켜쥔 손이 파르라니 떨리고 있습니다
예리한 눈빛이 언뜻 긴장감을 자아냅니다
언제부터인가 어둠은 궁사를 불러놓고
저렇게 사방팔방으로 달아나길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화살을 맞고 꼬꾸라진 자화상을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본능에 충실한 모습이지요
그러다가도 어느결에 등 뒤로 와서
쪽배를 띄우듯 궁사의 등을 떠밀어댑니다
어둠의 뒤편에서 불어온 바람인가 봅니다
마음이란 쫓는 것에 쫓길 때가 있듯이
저 닮은꼴의 궤적을 쉽사리 해명하지 못하는 까닭에
예의 주시하는지도 모릅니다
공산을 지키는 궁사의 비장한 몸짓이 고스란히 실려오는
쟁명한 스무사흘 달밤입니다
나무의 성선설 /이만섭
어릴 적 여름날이면 나는
마을 당산나무에 올라가 놀곤 했는데
아름드리 팽나무의 시원한 그늘 때문만은 아니었던 듯싶다
때론 만만함으로, 때론 편안함으로,
나무는 늙어 곳곳이 주름투성이였지만
마치 할아버지가 손자를 돌보듯이 손잡아 주곤 했는데
그럴 때면 가지와 가지 사이를 새처럼 옮겨다니고
나무의 친화력은 내 이름자를 외우고 있기라도 하는 양
언제라도 기탄없이 맞이했다
그 사이에 딱총놀이에 쓰일 열매를 따기 위해
나는 잎사귀 새파란 가지를 꺾고,
“야야! 떨어질라, 하필 나무에 올라가 노니. 무섭지도 않냐?”
지나는 마을 사람들 한마디씩 거들고
그때야 마지못해 내려오면
나무 아래 꺾인 팽나무 가지와 흩어진 푸른 열매들,
다음날에 다시 찾아가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나무는 잎을 흔들어 흔연스럽게 맞이하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팽나무 굳은살이 박이도록 장수한 까닭이
그 태연자약한 심성이었던 것 같다
나무는 뿌리가 키만큼 뻗어 간다는데
내가 꺾은 나뭇가지와 함께 자란 뿌리는 얼마나 상심했을까
흙 속에 박힌 그 뿌리의 본성이 아직도 궁금하다
하오에 부는 바람 /이만섭
바람이 불지 않고 걷는다
거친 촉수들 국숫발처럼 낭창거리며
무게 없는 발길이 차분하다
풀밭에 닿으면 꼬리를 흔들듯
드러누운 풀잎들 살랑살랑 간질이며
강물에 이르면 등줄기 무뎌진 물결 쓰다듬어
나릿나릿 흐르게 한다
이제까지 제 몸보다 앞선 뜀박질로
갈기를 세우던 바람이 아니던가
무슨 까닭에 이타적인 길로 접어든 것일까
손길처럼 쓰다듬으며 곳곳에 눈 뜨는 입자들
마음 안에서도 속닥거리는 소리
허공은 하릴없듯 따라다니고
풍경은 이럴 때 깊어간다
이런 날 몸 푸는 꽃나무 아름다움으로 열리는
향기로운 친교가 어른거린다
여태껏 함부로 휘두른 야성적 본능 때문에
자취 잃은 것들 얼마이던가
봄빛에 얼굴 내민 양지꽃처럼
속닥이듯 다가오는 바람의 걸음걸이에
도란도란 마중 나오는 것들
오후의 느린 햇볕 거들며 뒤따르고
벼랑의 꽃 /이만섭
꽃나무 한 그루, 천 송이인들 만 송이인들
모두 벼랑으로 꽃 핀다
교목이나 관목이 아닌 넝쿨로 오를 때, 꽃들의 모험은 더욱 치열하다
꽃은 왜 벼랑에서 피어나는 것일까,
꽃 필 때가 되면 꽃마다 나무의 우듬지가 되어 애써 위험을 무릅쓰는 것일까,
꽃이 핀다는 것, 그 봉인된 가슴을
난간에 열어젖히는 데는 우리가 닿지 못하는 미혹이 있겠다
그곳은 일찍이 허공의 영역이었으나 위험을 무릅쓰고 차지한 꽃자리이기에
세상의 관심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꽃들은 아름다움이 다할 때까지 피어난 내력을 지킬 것이다
아름다움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모험이다
벼랑에 핀 꽃이 더더욱 그렇다
포풀러/ 이만섭
누이와 내가 여름 등성이에서
눈빛을 나누듯이
포풀러 반짝이네
이파리 사이로
하늘은 호수처럼 깊어 있는데
바람이 구름을 데리고 숨어드네
기다란 그늘 짓고 흔들리는
저 떨림이
한 생애에 닿아
여름날이면
내 마음의 뒤란으로 하늘거리네
자경문 自警文을 읽다 / 이만섭
밤새워 쓴 시를 출력하다가
A4 지의 날에 손가락을 베었다
선연한 피가 손가락을 긋고 순교하듯 솟는다
종이의 날이 때로 살갗을 베는 것쯤은 예사로운 일이지만
순간 그 섬뜩함이
마음에 한 생각을 들여앉힌다
삶이란 불찰로부터 오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경계선 밖에서 오는 것들은 차라리
가시권이라는 감지장치를 거쳐 들어선다
지금은 그런 습관으로부터 자숙할 때,
시를 담아내던 종이가
내 의중을 살피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그렇다,나는 세상에 내보이는 원고를
손으로 공손히 받들지 못하고 끼적끼적
감정만 앞세워 섣불리 드러내지는 않았는가,
돌이켜보면 부끄러워 낯이 화끈거린다
이 아침 고귀한 선물인 듯
밴드를 붙인 손가락을 지그시 움켜지고
저만치 마음을 물러 세운다
<2011년 월간 '우리詩' 2월호 >
달빛 문장 /이만섭
어둠은 검푸른 인화지
회화도 음악도 아닌 수묵빛 일색인데
난간 사이,팔을 뻗쳐
쓰다듬는 손길이 희고 곱다
어둠 속에서
까닭없이 사운대는 먹감나무 이파리에도
서리꽃 피우며 부서져 내리는
은은한 분말 가루
집 모퉁이 남새밭 파꽃도 환하다
뒷산 솔밭의 부엉이나
집 모퉁이를 어슬렁거리는 검은 고양이
호젓한 자태로 읽히기에 그만인,
그림자 등지고 속닥거리는
잔잔한 우유체 문장
적요에 들어
밤늦도록 풍경에 주석을 다는 내 마음도
괄호 안 말없음표로 읽히고
<2011년 월간 '우리詩' 2월호 >
얼룩말 장화 / 이만섭
-사파리 룩(safari look)을 찾아서
장맛비를 헤치고 아내와 찾아간 곳은
얼룩말들이 쫓겨 온 사바나의 한 구릉지대였다
말들은 우리를 보자마자 자유롭던 망중한을 접고
갈기 휘날리는 생의 발굽 소리로
초원 일대가 흙먼지로 뿌옇게 풀썩거렸다
비가 주춤하는 사이
태양은 사보텐이라도 피워낼 듯 작열했고
초원을 달리던 말들은 더욱 또렷해져
아내는 연방 얼룩말의 건각에 눈길을 떼지 못하는데
마라강 언덕 쪽으로 무지개가 칠색조처럼 아름답게 피어올랐다
저거야, 아내의 환호성이 터지고
채찍비가 한바탕 훑고 간 오렌지나무 가에
유난히 흑백이 선명한 얼룩말떼 웅성거리고 있었다
빗속을 달려왔으나 보송보송한 채
그것은 우기를 건너온 횡축의 거대한 원근법이었다
사바나에서 뛰는 것들이 말뿐일까만
초원에 흙먼지를 날리며 임팔라도 타조도 기린도
쫓고 쫓기는 극한상황 속에서
말들은 또다시 발굽과 발굽의 간격을 좁히며
타각타각 생의 행로을 찾아
유난히 굳건한 동작으로 초원을 유유히 빠져나가고
아내와 내가 그 뒤를 좇고 있었다
- 시와 정신 2011 가을호
語錄 (어록) /이만섭
세상의 말들은 무덤이 없다
어떤 말은 죽고,
어떤 말은 잠들고,
어떤 말은 새겨지고,
난무하는 군중 속에서 행불자가 된 말도
저 혼자 질주하다가 전복되어 아웃사이더가 된 말도
무덤을 따로 갖는 법은 없다
사라지거나 존재하는 이분법만이 있을 뿐이다
또 어떤 말은 성대질환으로
읽어도 읽어도 혼탁하게 들리고
그 저항성 때문에 귀청이 거슬려도
말의 내력으로부터 추방할 수는 없다
나는 지금 어느 말들이
불사조처럼 사유의 영역을 나는
존재하는 말 사이에 있다
부단하고 부단하게, 내 진부함을 환기 시키며,
그것은 변함없이 있었던 일이지만
새삼스럽게 말을 붙들어
입으로 읽고 귀로 듣는다
풀들이 무성한 어느 여름
도봉산 골짜기에서 만난 풀에 대한 말이
두고두고 내 가슴에서
푸른 날갯짓을 하니
시 한 편이 모조리 경전이 되었구나,
- 시와 정신 2011 가을호
겨울의 깊이 / 이만섭
외출에서 귀가하는 저녁
목덜미를 움켜쥐는 바람손을 뿌리치다가
누에섶을 올리는 천지간을 본다
나무들 벌거벗은 채 뿌리를 껴입고
깃털을 부풀려 서녘을 나는 새떼들,
바람에 날개를 달아주고 지층에 바짝 엎드린 허허벌판이
폐사지의 기왓장처럼 검게 그을렸다
시시각각 이는 생각들 좇는 저편
지평의 끝은 징소리도 닿지 않을 듯
낮아진 것들은 동면에 들고
높아진 것들은 아득하여 정처 없다
나도 나의 저녁에 닿으면
빗장을 걸고 아랫목을 차지하겠지
그런 저녁은 함박눈이라도 내려
황망한 사위가 한 점 자취 없이 잠기어
기억 한가운데로 고스란히 내려가서
아슴아슴한 추억들을 풀어놓고 뒤적거리다가
그만 적막으로 덮여갔으면,
그리하여 어슴푸레한 시간으로부터 점차 뚜렸해지는 음각들,
그렇게 동면으로 한 몸 궁리에 들었다가
봄이 오면 적막의 껍질을 벗고
씨앗처럼 깨어났으면
날개의 영역/ 이만섭
새의 공중이 있다
허공뿐인 듯해도 수많은 능선으로 이루어진
산들을 좇는 분망함은
외경에 해상도를 들여놓았을 뿐인데
날갯짓은 한사코 산맥을 넘는다
첫 비상에서부터 끊임없이 진화해온 날개는
여전히 어디론가 팽창 중인 듯
좌우대칭의 너비를 긋는 동선이 활기차다
저 반원의 높낮이로 옷깃을 터는 외재율은
바람을 불러 부양하는 듯싶지만
숫제 깃털에 힘입은 터에
비상하는 소리 자연스러워지면 허공은 더욱 가벼워질 것이다
무릇 날개는 무게를 줄여야 날개답다
절벽에서 추락하는 경우나
유사한 행위는 무게를 단 듯 억지스럽다
그것들은 깃털도 없이 허공을 나는 위험한 족속들이다
진정한 날개의 공중이란
스스로 부양된 채 보이지 않는 길을 트며
조감도를 그리는 일이다
그래서 새들은 제 형세를 지우고 산 너머로 떠난
새털구름의 길을 좇지 않는다
오직 날개를 가진 자부심으로 공중을 비상할 뿐
어떤 허세도 깃털 안에 들여놓지 않는다
그것을 자유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 『시와표현』2011년 가을호
새점 /이만섭
봄날 노변에서 길을 묻듯이 새점이나 본다
새는 꽃을 노래하는 일을 잊고 조롱을 들락거리며
꽃 이전의 꽃나무의 생을 뒤적인다
꽃의 내력을 찾아내려는 것일까,
색을 식별하지 못하는 새가 날개와 부리 사이
밀약이라도 해놓은 듯 포르르 포르르 익숙하다
날개는 더는 공중의 날개가 아니며
부리 또한 먹이를 찾아다니는 부리가 아닐 진데
태연자약한 몸짓은 어디서 온 것일까,
새가 기억할 수 있는 일이란
모태로부터 생을 얻던 부화의 시간과
이소의 때를 추측할 수 있겠는데
그마저 사람의 조롱에서 온전히 남아 있을까,
햇살이 괘사처럼 비쳐오니
소곤소곤 볕 좋은 하늘을 귀띔해준다
흐린 하늘에 대해 더는 물을 이유가 없다
땅에 붙어살아 가는 미물들은 한 번쯤
새의 날개처럼 속 시원히 하늘을 날고 싶은 것이다
그 가벼운 몸으로 나무 끝에 앉아 깃털을 고르며
바람에 실어보기도 하며 삶을 조감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날개가 없는 사람의 문제다
새가 알아차린 것이다, 영험하다
2012년, - 월간 우리시 6월호 -
구름의 수사법/이만섭
방목 중인 양떼들이 우르르 몰려 가는 것을 보았다
초원에서는 종종 목겨되는 일이지만
유난히 일사불란한 그들의 집단행동에
투명하게 쏘아대던 햇빛들이 자리를 비켜주고
양떼들은 변방 멀리 몰려가 웅성거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울부짖는 것이었다
필시 무슨 곡절이 있는 듯싶었다
울음소리의 파장은 징소리처럼 둥글게 퍼져오고
짐작대로 구름장葬이 거행되는 것이었다
어떤 주검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초원은 건기로부터 얻어낸 해법 가운데
일찍이 하늘은,누군가 죽어야 산다는
소멸과 생성의 법칙을 소유권처럼 쥐고 있던 터에
양떼를 몰던 적운층은 검은 상복으로 갈아입었던 것이다
주검 앞에서 모든 것은 엄숙하다
바람은 문상을 가는지 나뭇가지를 흔들고
산들도 예를 갖추어 어둔 색으로 침묵하고 있었다
슬픔은 아낌없이 나누어야 슬픔답듯이
한바탕 눈물을 억수로 쏟아내더니
계곡이 활기를 얻고 초목이 싱그럽게 반짝거렸다
울음이 응어리진 가슴을 지우고 평상심을 찾아줄 줄이야
변방의 양떼들도 자취를 감추고
한세상 역마살에 허랑방탕한 줄만 알았던 그의 행보가
이처럼 깊은 뜻이 들어 있는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럼에도 속뜻을 정확히 짚어내기란
그가 흘리는 눈물방울의 수효를 헤아리는 일만큼이나
여전히 난해한 일이긴 하지만
너른 초원에 양떼를 방목하며 초원의 평화를 자처하는
떠돌이의 꿈을 한갓 헛되다고만 할 것인가,
비켜 있던 햇빛이 다시 들어서고
멀리 떠난 양떼들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깃털마다 은빛으로 색칠하고
2012년, - 월간 우리시 6월호 -
조망권(眺望權) / 이만섭
남향집 담벼락에 기대여
은화식물을 키우는 측백나무 그늘
빛을 잃어버린 자리에 이끼처럼 번져간 생명들
봄이 와도 꽃 피우지 못해 창백하다
그늘은 허구한 날
하늘의 구름과 지상의 산이 어깨를 겨루듯
한 발자국도 물러설 줄 모르고
그 사이로 자취 감추었던 해가 얼굴 드러내면
개들이 먼저 쫓아 나와 짖어대는 것이다
풍경은 어느 사이 이방인의 표정이 되었다
나무는 무단 침입한 그늘에 대해
가지마다 별방울을 매달아 변명이라도 하듯
일방적인 생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 버거운 운명을 견뎌내는 힘은
별의 풍경을 꿈꾸는 데서 나온다는 것이었다
누구도 귀담지 않던 어느 날
창에 뻗쳐온 그늘을 말끔히 지워버린 남향집 담장 가에
빛의 차양처럼 하늘에 걸려 있던 흰 구름 내려와
스러진 교목을 한일자로 타고 앉아
고물고물 흩어져 있던 은화식물의 귀에 대고
잃어버린 봄의 주소를 일러주고 있었다
총총,더불어 나직하게
진홍빛 몽유 / 이만섭
계절 깊은 날 저녁이 오면
나는 알 수 없는 병을 얻는다
서녘 하늘에 노을빛 붉게 색칠해 갈 때
까닭 없이 눈물이 날 것만 같다
대체 이 서러움은 어디서 오는 일렁임인가,
짙게 물든 노을에 마음 뺏기고 나면
마그마 같은 하늘이
강물이 되어 흘러가는 게 보인다
저곳은 한때 푸른 호수였던 자리
언제부터 물줄기 이루고 흐르는 강이 되었나,
저 강물 곁을 서성이며
눈빛 시리도록 마음 뒤척이면
그대의 말간 눈동자 어리어 있던 자리는 잠시
내 망막 속으로 침전되어 오건만
이내 철문처럼 굳게 닫치고
갇히면 갇힐수록 뛰쳐나가고 싶은 갈망은
무슨 조화 속인지
내가 얻은 병은 어둠이 건네 온 환유인가,
바람이 풍경 속을 지나다가
내 야윈 어깨를 툭 치고 간다
둥근 저녁이 어둠 속에서 / 이만섭
태양의 포물선을 따라간 해거름의 길목 끝에 그어놓은 수평선이 팽팽하다
기다랗게 자란 미루나무 그림자는 저녁을 맞이하기 위해
몸을 키운 사양을 가로막고 보초병처럼 서 있다
시작은 뿌리에서 나왔지만 우듬지에서 한 생애가 꽃 피우듯이,
하루의 일과도 예외 없이 여명과 더불어 왔다가 노을이 피어나는 접점에서 수평선을 지우고
저녁을 바다처럼 열고 온다
어부가 그물을 던지듯 사물들을 가두며 일제히 촉수를 접는 빛살들의 시간에
노을을 배웅하는 집은 마당에 깔린 일상을 돌돌 말아 모퉁이 벽에 걸어놓고 어스름의 한가운데 정좌한다
달그락 달그락 빗장을 거는 소리를 쫓아 처마 끝 허공이 심해처럼 내려와 천지간이 접힐 때
창문이 닫히고 담장이 지워지며 골목이 사라진다
목탄빛으로 색칠하며 더듬이 같은 침묵으로 덮이는 어둠속에서
천천히 떠오르는 저녁이 만월보다 둥글다
서정(抒情)과 묘사(描寫)에 대하여 / 이만섭
1. 筆意와 詩意
소식이 왕유의 시 “산거추명(山居秋暝)”에 대해 시 가운데 그림이 있고 그림 가운데 시가 있다고 한 말은 서정과 묘사의 관계를 극명하게 조명한 말이기에 오랜 세월 회자되는 게 아닌가 싶다. 시나 회화가 서정으로부터 출발하여 묘사를 통해서 얻어지는 게 당연하다고 하겠지만 묘사다운 묘사란 서정의 개념을 화자의 정신에 담는 일일 것이다. 더욱이 시에 있어서는 대상을 이미지화한 부분을 정제하여 언술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대상을 통한 시정신에 대한 밑받침이 중요하다. 따라서 모티브가 전제되지 않는 이미지는 시도 그림도 될 수 없을 것이다. 소식은 왕유의 시에서 그 점을 읽은 듯싶다.
무릇 시의 출발점은 감흥의 발현일 터인데 감흥이란 대상으로부터 무엇을 얻고 있는가 하는 의미의 해석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해석이라는 말은 논리와는 무관하다, 논리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이치를 증명하는 행위이기에 자칫 대상에 대한 설명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시는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더욱 시다운 모습을 지닌다. 그렇기에 시가 언어의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문학인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식은 왕유의 시에 대해서 왜 이처럼 찬사를 아끼지 않았을까,
인적 없는 텅 빈 산에 비가 그치니 /늦가을 날씨는 더욱 더욱 쌀쌀하고, /소나무 사이로 밝은 달빛 비치니, /맑은 샘물은 바위 위로 흐르네. /대숲 서걱거리는 소리에 아낙네들 돌아가고 /연 잎 흔들리니 고깃배 내려가네. /봄꽃이야 시든지 오래이건만, /그런대로 이 산골에 머물만하구나.
(원문: 空山新雨後 天氣晩來秋 明月松間照 淸泉石上流 竹喧歸浣女 蓮動下漁舟 隨意春芳歇 王孫自可留)
이 오언율시(五言律詩)는 비 온 후 산촌의 가을저녁 풍경을 읊고 있지만 한 폭의 산수화를 대하듯 자연(풍경)을 회사(會寫)를 해놓고 있다. 소식의 말대로 시중유화 화중유시(詩中有畵 畵中有詩) 그대로다. 그러면서도 풍경 뒤편에 감춰진 이미지까지 그려놓고 있는 것이다. 가을비 그친 대지가 완연한 초겨울로 접어든 가운데. 가을날의 풍경을 그림을 그리듯 묘사한 쓸쓸함이 고즈넉하다. 풀들은 이미 말라버렸건만 건들바람에 사붓대는 대나무 소리, 물소리 들으며 맑고도 그윽한 달빛이 소소하게 비치는 시골 저녁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천지간에 봄꽃은 없더라도 산중에 머무는 나는 그래도 행복하다. 라는 은일자의 모습으로 왕유 자신을 비춰낸 이 시의 함축성은 궁핍한 심경의 묘사를 통해 넉넉한 서정의 아름다움을 발현시키고 있다. 왕유의 필의(筆意)를 통해서 소식은 시의(詩意)를 얻고 있는 것이다.
2. 意味와 解釋
인왕제색도*를 보다
산이 폐부 깊숙이 운무를 드리웠다
견갑골 아래 반쯤 가린
비 갠 윤오월의 산색이 더욱 현묘하다
필시 한바탕 소나기에 감흥이 일어
천만 년 적묵법으로 정좌한 산의 자태가
바야흐로 농묵의 때를 얻은 것이다
골마다 질탕치는 물소리에 금강심으로 발원한 붓끝은
도끼날로 장작을 팬 듯
싸리비로 마당을 쓸어내린 듯
육신의 거처에 음각을 하고
수묵의 필의를 산골짜기에 비장하였다
송림 사이로 드러난 산가의 지붕에도
현현하게 배어든 산기운은
낮게 드리운 하늘을 이고 잿빛 궁륭을 머금었는데
노구의 벗은 여태도 보이지 않고
비탈에서 마중하는 처마는 산제비라도 날아오를 듯
허공을 향해 곧게 뻗었다
무심한 세월에도 변치 않고 굳건히
자연으로 순명해 갈 때까지
정녕 이 한때, 인왕의 흰 산의 품에
그대 묵적하자는 것인가,
* 정선의 산수화
필자의 이 졸시의 모티브는 물론 시제 그대로 겸재 정선의 “인왕재색도(仁旺齋色圖)”다. 호암미술관에서 처음 본 “인왕재색도”의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진경시대의 대표적인 산수화라는 점은 차지하고라도 수묵에 다섯 가지 색이 있다지만 몰골법으로 그려진 수묵기법은 종래의 전통회화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대담한 파격이었으며 그 변화무쌍한 구도는 신묘하기까지 했다. 창윤한 묵색의 기운은 금세 옷자락이라도 젖어올 듯 산허리를 휘감아 도는 안개가 감상의 시선을 압도하는데 배관하는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화가는 왜 저렇게 그림을 그렸을까, 하는 낯설음으로 그림의 배경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그리고 그 후, 얼마간의 세월이 지나 ’진경시대의 산수화 전‘라는 어느 기획 전시회에서 다시 감상할 기회를 얻었는데 그때 화가는 그림을 그리기 위한 일상적인 풍경을 그린 게 아니고 그림 속에 이미지화한 다른 사의(寫意)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림의 배경에는 당대의 문장가이며 시인이던 화가의 외우 사천 이병연이 있었던 것이었다. 사천이 병석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벗의 쾌유를 위한 애틋한 마음을 담아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 뜻에서 바라본 그림은 곧 수묵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쓴 시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겸재의 그림과 사천의 시의 관계는 겸재가 그림을 그리면 사천이 시를 짓고 사천이 시를 지으면 겸재가 그림을 그렸다고 하니 두 사람의 시와 그림이 서화동원(書化同源)이란 말을 헤아리게 한다.
시에 있어서도 서정의 모티브가 묘사를 핍진하게 하는 경우는 이처럼 무한한 감동을 준다. 여기서 화가는 무슨 연유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가, 하는 그 동기부여가 필의(筆意)를 다지게 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림은 단지 그림일 뿐인데 어느덧 문장으로 읽히고 시로 읽히는 것이다. 감동이 감동을 낳듯이 필의(筆意) 속에서 시의(詩意가 탄생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막연히 좋은 시를 찾아 나서기 일쑤다. 그러나 그것은 사유하고 고민하지 않으며 어딘가에 단지 좋은 시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들떠있는 경우다. 시인에게 가장 두려운 약점이란 그처럼 시를 선험적으로 쓰는 일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경험을 중시하지 않는다는 말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어떤 탁월한 발상이라도 경험을 통해서 얻어야 진정한 시일 것이다. 경험을 존중한다는 것은 적어도 거짓으로부터 자유로운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를 통해서 고결한 인격을 만날 수 있다고 해서 그 시가 좋은 시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사소한 경우라도 화자가 경험을 담아내는 정신이 시다운 시를 낳는 바로미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시가 진정한 삶을 노래했을 때 희망 아닌 절망일지라도 그것이 경험에 충실한 묘사라면 훨씬 드높은 가치를 지닌다. 따라서 타인의 경험을 제 것인 양 차용하고 융합하는 관념적이고 주정적인 시가 감동을 줄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3. 表現과 克己
시의 궁극은 어떤 의미에서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대상을 직관의 뒤에 숨겨놓고 스스로 좇아가서 찾아내듯이 누가 탐내는 것도 아닌데 주체와 대상이 충돌하는 방식으로 저 혼자 꾸미고 작란하고 이용하고 애착에 빠져드는 것이다. 그것이 시의 서정이며 시의 내재율이다. 그렇기에 모든 시들은 그런 방황으로부터 획득한 산물인지도 모른다. 참으로 불가해한 아이러니다. 그러면서 모든 시들은 상관물에 대한 의미를 짓는 도정이다. 그러나 절망조차도 애착으로 바라볼 때 시는 눈부신 아름다움을 싹틔운다. 서정은 모름지기 그것을 제공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 어떤 부조리한 것이라 해도 시를 통해서 단죄하고 신천지를 열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시의 표현이다. 좋은 시란 문장 안에 의미와 리듬을 동시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사의 지록위마는 억지이며 절대모순일터지만 시의 지록위마는 표현이 극기한 새로운 언어의 영역인 것이다. 그것을 묘사하는 것을 설득력이라고 말하고 싶다. 샤르트르가 “존재와 무”에서 비존재라는 것은 실현되어 있지 않으면서도 이미 실현되어 있는 것을 거부케 하는 가능성의 세계를 뜻한다고 말했듯이 좋은 시란 서정을 드러내는데 있어 사물 밖에 숨어있는 것을 묘사해야 한다. 그것이 시가 지닌 힘이다. 시가 시다워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다.
2011년 -두레문학 12호 -
松絃 /이만섭
고사인물도를 보면
소나무 아래 든 선비의 풍모가 유장하다
장삼 같은 옷자락 걷어 올린 손에
죽장은 노구를 이끌고 있는데
자세히 보니 귀가 몸의 중심에 와 있다
무심히 나무가지를 흔드는 바람결은
사시장춘인 소나무의 내력을 살피는 중인데
생의 결을 고스란히 통과하는 사이
귀로 건네받는 악보가 열락이다
그 맑은 청음을 얻으려
애써 굽은 등으로 나무 아래 이른 것이다
푸른 날에 청학이 날고
맑은 날에 흰 구름이 머물던 뜻도
저 소슬한 무량의 현을 켜는 일을 도왔을 것이다
소나무와 선비가 세월을 나누는 광경을
솔바람이 엿듣고 있다.
조롱(鳥籠) 의 발견 / 이만섭
우리들의 집과 우리들의 서랍은 입구가
가장 편리한 곳에 있다
울타리에 갇힌 집을 찾아가는 발길과
책상 속에 서랍을 뒤져 쓸모를 가져오는 손길과
그 동일성의 경계를 지나면
언제라도 노래하기 좋은 공터가 있는데
그늘이라고 불릴만한 구석에서 자란 무화과나무
저 꽃 피울 수 없는 나날들
무료의 시간이 오면 우듬지에 날아와 새가 노래한다
노래하다가 제 흉금 깊이 담아놓은
외로움 주머니를 근근이 열어 보이곤 하는데
거미줄처럼 얽힌 창의 한 가운데인들
조롱은 조롱만일 때 한 그루 새의 나무다
적막을 깨워 삶의 영역이
숲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새는
한 톨의 풀씨를 얻어 노래하고
문득 노래에 섞여 우는 소리 집 밖에서 들을 때
우리들의 귀는 새의 노래를 듣는 것이 아니라
적막 속에 가둔 슬픈 생을 목격하는 것이다
천정이 허공을 매달고 고요가 구석을 차지한
우리들의 집에 별은 언제 뜰 것인가
저녁나무에 쓸쓸히 앉아
비를 맞지 않고도 젖어 노래하는 새가 있다
왼발의 기억 / 이만섭
내 몸이 휘청거리던 생의 길목에서
한발 앞에 와 놓인 왼발이 있었다
힘에 부친 오른발을 부축하며
보폭을 맞추느라 뚜벅뚜벅 따라와 어느덧
걸음이란 두 발의 연동작용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새삼스럽고 분명하게 왼발이 설파하던 것인데
그것은 항상 앞에만 있던 오른발의 뒤축을
변함없이 가지런히 놓으며
빠르면 빠른 대로 느리면 느린 대로 순응하며
내 몸을 받드는 것이었다
여남은 살 무렵인가, 동산에 풋나무를 꺾으러 올랐다가
낫으로 발등을 찍었을 때
철철 흐르는 피를 동여매고
오른발 곁에서 꺼이꺼이 울던 왼발
여느 손길도 미치지 않는 긴박한 순간에 후다닥-
나를 둘러업고 비탈길을 내려와
허겁지겁 병원으로 뛰기 시작하는데
아, 그 순간은 용사처럼
그럼에도 오른발의 자취를 조금도 거스리지 않고
깁스를 하고 상처가 아물 때까지
잠 못 이루며 병실을 지켰다
그 후 어느 세월 내가 또다시 큰 병을 얻어
아내가 속으로 울먹일 때도 왼발은 더욱 굳건했다
내 곁에서 오른발의 보폭을 맞추기 위해
온전하게 설 수 있을 때까지
일념으로 순종의 시간을 견디던 것이었다
오른발의 상처를 위해 얼룩진 세월이여,
이 저녁은 무릎을 가지런히 내려
수고로운 왼발을 따뜻한 물로 닦아낸다.
- 계간 -문학청춘 -2012년 가을호
폭우/ 이만섭
양동이로 물 길어 나르는 장정들의 행렬 뒤로
푸른 나무들이 목탄색을 입고 있다
나무들은 강을 건너온 물소 떼처럼 지쳐 눈빛만 껌벅거리는데
풍경을 마주하는 일조차 힘겨운지
창은 문을 벽으로 방어진을 치고 밖을 닫아버린다
비의 사나운 매질 소리에 귀는 더욱 얇아지고
저항할수록 파고드는 소리의 완력에 붙들려 마침내 물 긷는 행렬에 엮인다
코도 눈도 잠긴 범람의 악몽에 시달리다가
나비인가 참새인가 알 수 없는 젖은 날개의 신음에 깨어
어둠을 걷어내는 아침
시련의 풍랑을 노 저어 와 고스란히 정박한 것들
어느 노역이 저처럼 굳건할 수 있을까,
간밤의 난장에 드러난 속살을 추스르며 휘청휘청 일어서는 뼈들은
- 계간 -문학청춘 -2012년 가을호
토마토가 익는 시간 / 이만섭
열매들은 정오에 익는다
나무도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
물 스미듯 색을 입는다
올망졸망한 초록 덩이를 매달아
기온이 오를수록 부푸는 체온을 재며
적요의 틈새에서 나오는 색의 눈금을 확인하는
햇빛은 온전한 색을 얻기까지
모성 가득한 작열이다
곱살스레 붉어간 색의 성정을
손끝에 담아보는 순간
순을 짚듯이 거두는 밑동이
푸른 꼭지에 떠받쳐 포실하게 올려진다
탯줄을 끊고 나온 자리에
뜨거운 수액이 그렁그렁 맺히는데
둥금 마디에 칼집을 내어
수혈하듯 붉은 열매를 비워내는 한낮이다
- 시로 여는 세상 - <2012년 겨울호 >
詩語들 / 이만섭
신국의 말들은 천 개의 귀를 지니고 있어서
아무도 모르게 구석에 가서 중얼거린다
그런데 벽과 벽 사이 주름 잡힌 귀가 있다
다시 창가로 나와 내 홀린 말들을 주워드는데
문밖의 새와 나무가 비켜보고 있다
새도 나무도 없는 빈들에 나가
울렁거리는 혼잣말 허공에 쏟아내는데
지나가던 바람이 채어 간다 너의 것이 아니라는 듯
어디에도 함부로 내놓을 수 없는 말들,
길을 걸으며 무시로 내뱉은 그간의 말들은
들풀이 듣고, 샛강이 듣고, 미루나무가 들었을 터이니
나의 산책길도 더는 안전지대가 아니다
조금만 방심하면 저 귀들이
예리한 날로 나를 베이려 든다
아- 나는 입때껏 내 궁핍을 채우기 위해
저들이 지닌 말들을 조탁하다가 허전함만 키웠구나,
이제부터 내가 흘러놓은 말들의 역순을 밟아
그간의 부끄러움을 거둬들이며
내 말을 관통하는 저들의 귀를 배워야겠다
오늘은 강가에 가서 내가 해야 할 말이 있는데
강은 이미 알아차리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 시로 여는 세상 - 2012 년 겨울호
동경(冬景)에 기울다 /이만섭
마른 풀 사이를 누룩뱀이 빠져나간다
길 좁아진 풀색의 등걸에
스락스락 살갖 부딪치는 소리 서늘하다
차운 마찰음으로 귀를 틔우며
불현듯 기별해오는 것들,
녹음 시절에 찔레나무 아래 벗어놓은 허물
흰 꽃잎에 덮이어 소실되어가듯
빛깔도 소리도 멀어진다
메마른 생의 경계를 지우고
뿌리처럼 흙 속에 잠기는 것들,
깃털을 뽑듯이 몸 비워
거죽으로 남은 나무들의 시간
적멸을 찾아가는 온기 잃은 불빛들
그림자처럼 등 뒤로 사라지고
빈 들의 쓸쓸함으로
누군가를 기다리는 저무는 날
물관이 끊긴 나목에 무채색의 꿈을 올린다
순결한 위무를 위해
寒天 / 이만섭
가파른 벼랑을 올라
바람을 무동 태우는 권적운 아래
새들을 비운 공중이 한 마장 차가운 그늘이다
이득히 솟은 저 해발이
수만갈래 수은 빛으로 반짝일 때
기립하는 삼나무 숲
우듬지마다 백화를 피워놓고
한 호흡 폐활량으로 일제히 기쁨을 올린다
외쳐도 외쳐도 기척 없는 간극
무슨 거리가 저토록 까마득하기만 한 것일까
아침을 차고 오른 서리까마귀
진종일 텅 빈 공간을 비행하다가
저녁 무렵에 접는 날개처럼
활공으로 남긴 자리가 더욱 궁금하다
저 가파른 난간에 걸린 매화나무
북방을 건너온 바람이 가지 끝을 에우는데
허공은 꽃 피울 수 있을까
붉다와 희다 사이 / 이만섭
색은 꽃에서 왔는지도 모른다
나무가 나무로만 살아가기에는 너무 지루했을 거야
사람과 사람 사이
저 눈 부신 빛을 끌어다가
자태를 꾸미기 위해 색이 필요했을지도 몰라
우리가 약속을 하고 말을 섞는 것도
어쩌면 꽃을 얻기 위해서지
그런 꽃들이 자유롭게 필 수 있도록
언제라도 비워둔 허공
그래서 나무는 꽃으로 색을 완성했거든
더는 말이 필요치 않은 진리처럼
나무는 죽어서도 꽃으로 남아
이름을 영원에 새겨놓지
푸른 날 장미넝쿨 아래를 지나는 소녀
그 마음을 물든 빛깔이 있다
먼 길 / 이만섭
가도 가도 오지 않는 먼 길을 간다
노새처럼 등짐 가득 싣고 터벅거리는 행여는
세월의 그늘에 가려 가뭇없더니
어디만큼 왔냐 헤이면
손차양 아래 어른거리며 놓여 있다
문밖에 나서면 지천이 길인데
그 가운데 먼 길을 간다
산모퉁이를 휘도는 냇물처럼 걷다가
강가에서 물푸레처럼 쉴 제
푸른 잎 뒤적이며 재촉하던 샛바람
길은 질러가야 빠르다지만 그게 쉬운 일인가,
아지랑이 거리로 무지개의 거리로
이정표조차 지워져 사라진 듯해도
어느새 가을 하늘처럼 파랗게 색칠해놓고
홀가분하게 나앉아 있건만
해진 들메끈 고쳐 매는 고단한 구절양장은
생의 도정에 채찍질로 오는구나
먼 길이여, 내 고단한 발길 아래로 오라
나는 맨발이 아니어서
아직도 멀기만 한 것인가
달빛 몽유에 들다 / 이만섭
창의 경계에 한 자락 흐드러진 장다리꽃밭
푸른 이랑 사이로 흰 나방떼 난다.
머뭇거릴 새 없이 버선발로 쫓는데 그림자만 뒤따른다
너는 오는데 나는 왜 쫓는 것일까,
풍등처럼 옷깃 휘적거리며 적요 속으로 꺼져가는 중일까,
어디만큼 당도하니 박우물 가에 웅성거리는 나방들,
달을 찾아 투신하는 듯 부산한 날겟짓인데
우물 속 들어앉은 달 보이지 않는다.
나방을 쫓는 나와 달을 쫓는 나방 사이
이슥토록 떠다니는 환한 분말가루 손끝으로 만지면
저만치 달아났다가 돌아서면 금세 어깨 위에 내려앉는다.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난 달빛 속을 헤매는
나는 흰 나방이 된 것일까,
의자의 키 / 이만섭
누군가 어깨 위에 무게를 얹을 때
비로소 자리는 드는 의자
의자의 키는 그렇게 사라진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하나의 사물이 지워지듯
무관한 듯 묵묵히 이루어지는 일
굳은 정강이뼈로 몸을 의지하는
삐쩍 마른 의자의 다리가 외롭기만 하다
키가 작아도 외로운 것이다
무게를 지닌 것이 외롭다는 것은 이례적이다
아니 모든 무게는 외롭다고 해야 하나
건물의 기둥처럼 언제나 무게만으로 반복 중인데
정녕 소멸해버린 키를 더는 찾을 수 없다
오래전 의자는 그런 이유로 왔다
의자 이전의 나무는 층층이 키를 올리며
하늘을 향해 살았을 것인데
그것은 엄밀히 말해 나무의자를 위한 층계였다
이제는 제 무게를 하나의 운명처럼
꿋꿋이 견디며 자리를 지키는 까닭에
번번이 사라지는 키였다
누가 분리수거장에 의자를 내놓았다
낡고 허름해져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이
의자는 몸을 세워보는 것이다
누군가 어깨 위에 무게를 얹는다면
절름거리는 다리는 이내 쓰러지고 말 것이다
이미 구차해진 자리에
키를 일으켜 서 있는 저 의자는
그물 / 이만섭
저것은 코로 사냥하는 짐승
냄새로 바람을 유인하여 품에 들이는데
부릅뜬 눈 한 번 감았다가 내려놓는 사이
포만감으로 원심력을 잃는다
참새를 잡아 무논 엿 마지기를 장만했다는 사내는 그 비결을 아무에게도 귀띔해주지 않았다 그는 또 장마에
저수지 물꼬를 트고 나온 잉어를 두 가마니나 건져 올린 적도 있었다고 자랑했지만, 그 방법 또한
끝내 귀를 재웠다 그 같은 일망타진식 一網打盡式 취향에 대해 일체 입을 다물고 사는 사내를 우리는 직조인간이라고 부른다
오늘도 서녘에 되새 떼들이 그물을 치는 것을 보았는데
먹이 가뭄이 시작되는 듯 붉은 하늘가에 공중이 도망 다니는 게 역력했다
새의 깃털은 그물을 피하려고 나는 것이며
물고기의 지느러미는 그물을 빠져나가고자 흔드는 것이지만
수많은 눈으로도 제 몸 부리는 줄 모르며
한 입 크게 벌려 폭식을 즐기는 자가
어느 날 그물 세례를 받고 구석에 처박힌 것이 목격되었다
그 큰 입으로도 홀쭉한 배를 움켜쥐고 굶어 죽은 것이다
- 시와표현 - 2013, 여름호
종이컵, 그 입술에 대한 예의 / 이만섭
한 사람이 방금 그와 주고 받은 입술을 팽개치며 자리를 떴다
다른 한 사람도 방금 그와 주고 받은 입술을 팽개치며 자리를 떴다
모두 그렇게 마지막을 확인할 여유조차 없이 돌아섰다
바닥에 뒹굴면서도
아직 온기를 간직한 입술들,
충격에 빠져 멍하니 벌린 입 다물지 못해
고스란히 드러난 혀의 얼룩들,
관계들, 거짓들,
사랑은 그렇게 끝났다
너무도 짧았다
입술은 왜 달고 태어났니?
한 번의 사랑이 독이 될 줄 몰랐다
서로 입김을 뿜어 올리던
다정했던 자리 버려진 무덤처럼 쓸쓸하다
저 무례한 시간 밖에서 다른 한 사람이 온다
입술 나눈 적 없는데
등 굽혀 조용히 거두워간다
- 시인정신 - 2013, 여름호
키위새는 언제 날아오르나 / 이만섭
바구니 속 키위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떼굴떼굴 제집 찾아들듯 구석으로 흩어지는 저녁이다
저 알들은 밤사이 깨어나 새가 되어도 날지 못하리,
날이 어두웠으니 아침에 주워 담으리라
다음날은 잊고,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누가 바구니에 키위를 담아놓았나,
발끝에 차인 바구니가 다시 엎질러졌다
이번에는 아침이다
아직도 깨어나지 않은 알들은 수분이 빠져나간 건포도처럼 말랑거린다
발끝은 졸탁이라도 저지른 듯
과도로 거드는 부화의 껍질들이 키위새의 깃털처럼 빠득거린다
푸르뎅뎅하게 다시 태어난 키위가
감쪽같이 사라지는 지상 5피트의 공중
키위새가 날아간 아침이다
- 시인정신 - 2013, 여름호
사라진 먼집 / 이만섭
언제부터인가 기억 밖으로 먼집이 사라졌다
세월의 등 뒤에서 뚝심 있게 나를 지켜보더니
생의 여율목에서 그만 놓쳐버렸다
그런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는 삶의 두레질이
조그은 실망스럽고 부끄럽다
아! 그때였던가, 내 마음 허전하기 시작할 무렵
기억에서 빠져나가는 중이었을까, 아무런 기척도 없이
그래서 나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던 것은 아닐까,
허물어진 흙담 위에 핀 박꽃을 보려는 것처럼
저녁 비낀 햇살은 공중에 고추잠자리 풀어
이끼 낀 장독대를 맴돌게 하고
오랫동안 비어 있어 연기조차 잊어버린 굴뚝의
처마 끝에 거울로 된 집을 올린 무당거미는
저녁이면 달맞이 드는 각시 나방을 위해
허공에 투명한 방 하나 꾸며놓았는데,
집이 사라지니 모든 게 속절없이 떠나갔구나
무엇이 내게서 기억을 송두리째 앗아갔을까,
봄날이면 살구꽃 만발해놓고, 귀엣말로
아직도 이처럼 한 시절 고이 간직하고 있다고
삶의 추임새처럼 속삭여주던 먼집이여,
돌아가지 못해도 마음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가슴 따뜻한 흔적이여,
기억에서 머물 때 잘해주지 못해 미안하고나
구부러진 길 / 이만섭
비켜가는 길이 있다 괜찮다는 듯이,
올곧게 자라는 들메나무에 자리 하나 내주고
그 곁을 흐르는 도랑물을 위해 몸을 안쪽으로 밀어 넣으며
길 밖의 것들 거느리고 간다
가다 보면 까맣게 잊고 지내는 풍경들
민낯을 드러내며 반갑다고
길이 아니면 세상천지 이처럼 조우할 수 있겠느냐며
지도에 없는 안부를 전해준다
산경에 들면 어느 비탈은
발길을 경배처럼 공중으로 들어 올리는데
무지개 등을 밟듯 걷노라면
구절양장을 걸어온 삶은 어느덧 사라지고
저만치 발아래 옹기종기 모인 풍경을
지나온 길이 다독거리고 있다
담장이 비켜선 골목인들 다를까,
고양이처럼 슬금슬금 그늘을 밟고 가다가
전봇대 근처에서 그늘을 햇빛에 얼굴 내보이고
다시 몸 구부려 가는 길
비켜가고 비켜가서 손 내밀어 악수한다
세상의 방식을 익혀 사는 게
길인 것을 안다
- 유심 - 2013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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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섭 시인: 전북 고창 출생
현 거주 : 경기도 하남시 창우동
2010년 신춘문예 경향신문 詩 당선 - [ 직선의 방식 ]
첫댓글 박숙인님 고맙습니다.^^ 좋은글 잘보겠습니다.
카페지기 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