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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의사항】
Ⅰ. 국가지정문화재(국보) 지정
안건번호 동산 2015-02-001
1. 포항중성리신라비(浦項中城里新羅碑)
가. 심의사항
‘포항 중성리 신라비’의 국보 승격 여부를 부의하오니 검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나. 제안사유
ㅇ 감사원의 ‘문화재 보수 및 관리실태’ 감사결과(2014.4.15),역사적․학술적․예술적 가치가 큰 매장문화재에 대해서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하는 방안을 마련하도록 조치됨에 따라 국가귀속 매장문화재 보관․관리기관으로부터 국가지정문화재 지정신청을 받음
ㅇ ‘포항 중성리 신라비’는 국립문화재연구소 고고연구실로부터 신청(2014.9.16)을 받아 관계전문가의 조사(2014.11.20.)를 실시하였음
ㅇ 이 사안에 대해 본 위원회에서 국가지정문화재 국보지정의 가치가 있다고 검토되면 지정예고(30일간)하려는 것임
다. 주요내용
◦ 지정현황 : 보물 제758호(2012.02.22.)
◦ 명 칭 : 포항 중성리 신라비(浦項中城里新羅碑)
◦ 소유자(관리자)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 소 재 지 : 경상북도 경주시 불국로 132
◦ 수 량 : 1기(殘片)
◦ 규격(cm) : 세로 104.0×가로 49.0×12.0~13.0㎝
◦ 재 질 : 화강암
◦ 형 식 : 비(碑)
◦ 제작연대 : 501년(지증왕2) 추정
라. 조사자 검토 의견
ㅇ 調査文化財 <浦項 中城里 新羅碑> 1基는 2009년 5월에 住民에 의하여 행정구역상 慶尙北道 浦項市 北區 興海邑 中城里 167-1번7지에서 발견된 현존 最古의 新羅碑이다. 모양이 일정치 않은 세로 104.0㎝, 가로 49.0㎝, 두께 12.0∼113.0㎝, 무게 115㎏의 花崗巖 1면에만 전체 12行 20字로 陰刻된 도합 203字의 碑文이 확인되었으며 碑石 下端部의 약 20㎝ 공간에는 刻字하지 않았다. 碑石은 碑面 上端部 一部와 右側面 一部가 떨어져 나갔을 뿐 碑文의 대부분은 判讀이 가능할 정도로 良好한 상태이다.
調査文化財 <浦項 中城里 新羅碑>는 2009년 5월에 발견된 후 同年 9월에 發見紀念 學術심포지엄을 거친 후 2012년 2월 22일에 國家文化財 寶物 第1758號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慶尙北道 慶州市 佛國路 132의 國立慶州文化財硏究所에 의하여 所藏․維持․管理되고 있다.
調査文化財 <浦項 中城里 新羅碑>는 新羅의 政治的․經濟的 文化內容을 硏究․確定지을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어 歷史的․學術的 價値가 매우 크며 製作時期도 지금까지 最古의 新羅碑로 알려진 智證王4(503)년의 浦項 冷水里 新羅碑보다도 2년이나 앞서는 新羅 最古의 碑이다. 더욱이 調査文化財 <浦項 中城里 新羅碑>보다 製作時期가 늦은 <蔚珍 鳳坪里 新羅碑>(法興王 11, 524)도 이미 1988년에 國寶 第242號로 지정되고 <浦項 冷水里 新羅碑>(智證王 4, 503)도 1991년에 國寶 第264號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따라서 調査文化財 <浦項 中城里 新羅碑>는 國家文化財 國寶로 昇格 指定하여 硏究하고 保存․管理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마. 의결사항
ㅇ원안가결 : 국보 지정.
조사보고서
▢ 書誌記述 : 調査文化財 <浦項 中城里 新羅碑>의 形態記述은 다음과 같다.
浦項 中城里 新羅碑 / [製述者不明] ; [書寫者不明] ; [刻者不明]. -- 石板. -- [製作地不明] : [製作處不明], [智證王 2(501) 推定].
1基 : 12行 20字 ; 세로 104.0×가로 49.0×두께 12.0~13.0㎝. 무게 115.0㎏.
狀 態 : 모양이 일정치 않은 세로 104.0㎝, 가로 49.0㎝, 두께 12.0∼13.0㎝, 무게 115㎏의 花崗巖 1면에만 전체 12行 20字로 陰刻된 도합 203字의 碑文이 확인되었으며, 碑石 下端部의 약 20㎝ 공간에는 刻字하지 않았다. 碑石은 碑面 上端部 一部와 右側面 一部가 떨어져 나갔을 뿐 碑文의 대부분은 判讀이 가능할 정도로 良好한 상태이다.
傳來歷 : 2009년 5월에 住民에 의하여 행정구역상 慶尙北道 浦項市 北區 興海邑 中城里 167-1번지에서 발견된 현존 最古의 신라비로 그 후 同年 9월에 發見紀念 學術심포지엄을 거친 후 2012년 2월 22일에 國家文化財 寶物 第1758號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慶尙北道 慶州市 佛國路 132의 國立慶州文化財硏究所에 의하여 所藏․維持․管理되고 있다.
判讀文 : □□□□□□辛巳□□中斯盧湜□□□□□□□□□
□□□□□喙部習智阿干支沙喙斯德智阿干支□□□
□□敎沙喙了抽智奈麻喙部本智奈麻本牟子□□□□
喙沙利夷斯利白爭人喙評伐斯彌沙喙夷須牟旦□□□
伐喙斯利壹伐皮末智本波喙柴干支弗乃壹伐金評□□
□沙干支祭智壹伐使人奈蘇毒只道使喙念牟智沙□□
□喙鄒須智世令于居伐壹斯利蘇豆古利村仇鄒列支□
□□干支沸竹休壹金知那音支村卜岳干支走斤壹金知
□□塑伐壹昔云豆智沙干支宮日夫智宮奪了今更還□
□□牟旦伐喙作民沙干支使人卑西牟利白口若後世更
□□□□人者與重罪典書與牟豆故記□□□□□□□
□□□□□□沙喙心刀里□□□□□□□□□□□□
旣指定 : 國寶 第198號 <丹陽 新羅赤城碑(眞興王 11(550)>, 國寶 第242號 <蔚珍 鳳坪里 新羅碑(法興王 11(524), 1988.11.04)>, 國寶 第264號 <浦項 冷水里 新羅碑(智證王 4(503), 1991.03.15.)> 등
ㅇ현상
調査文化財 <浦項 中城里 新羅碑> 1基는 2009년 5월에 住民에 의하여 행정구역상 慶尙北道 浦項市 北區 興海邑 中城里 167-1번지에서 발견된 현존 最古의 新羅碑이다.
調査文化財 <浦項 中城里 新羅碑>는 모양이 일정치 않은 세로 104.0㎝, 가로49.0㎝, 두께 12.0∼13.0㎝, 무게 115㎏의 花崗巖 1면에만 전체 12行20字로 陰刻된 도합 203字의 碑文이 확인되었으며, 碑石 下端部의 약 20㎝ 공간에는 刻字하지 않았다. 碑石은 碑面 上端部 一部와 右側面 一部가 떨어져 나갔을 뿐 碑文의 대부분은 判讀이 가능할 정도로 良好한 상태이다.
調査文化財 <浦項 中城里 新羅碑>는 2009년 5월에 발견된 후 同年 9월에 發見紀念 學術심포지엄을 거친 후 2012년 2월 22일에 國家文化財 寶物 第1758號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慶尙北道 慶州市 佛國路 132의 國立慶州文化財硏究所에 의하여 所藏․維持․管理되고 있다.
ㅇ 내용 및 특징
調査文化財 <浦項 中城里 新羅碑>에서 殘存하는 碑文은
“□□□□□□辛巳□□中斯盧湜□□□□□□□□□/ □□□□□喙部習智阿干支沙喙斯德智阿干支□□□/ □□敎沙喙了抽智奈麻喙部本智奈麻本牟子□□□□/ 喙沙利夷斯利白爭人喙評伐斯彌沙喙夷須牟旦□□□/ 伐喙斯利壹伐皮末智本I波喙柴干支弗乃壹伐金評□□/ □沙干支祭智壹伐使人奈蘇毒只道使喙念牟智沙□□/ □喙鄒須-智世令于居伐壹斯利蘇豆古利村仇鄒列支□/ □□干支沸竹休壹金知那音支村卜岳干支走斤壹金知/ □□塑伐壹昔云豆智沙干支宮日夫智宮奪了今更還□/ □□牟旦伐喙作民沙干支使人卑西牟利白口若後世更/ □□□□人者與重罪典書與牟豆故記□□□□□□□/ □□□□□□沙喙心刀里□□□□□□□□□□□□”
으로 判讀되고 있으며 判讀譯文은
“辛巳年 (某月) 中에 折盧□, 喙部의 習智阿干支와 沙喙의 斯德智 阿干支가 沙喙(部)의 了抽智 奈麻, 喙部의 本智 奈麻에게 교시하였다. 본래 牟子인 喙(部)의 沙利와 夷斯利가 아뢰기를(白) ‘爭人(소송당사자)은 喙(部)의 評公과 斯彌, 沙喙(部)의 夷須와 牟旦伐, 喙(部)의 斯利壹伐과 皮末智, 本彼(部)의 喙柴 干支와 弗乃壹伐, 金評□ 干支와 祭智壹伐, 使人인 奈蘇와 毒智입니다’ 라고 하였다. 道使인 喙(部)의 念牟智, 沙喙(部)의 鄒須智가 世間에 居伐의 壹斯利와 蘇豆, 古利村의 仇鄒列支 干支와 沸竹休 壹金知, 那音支村의 卜岳 干支와 走斤 壹金知와 塑伐壹에게 명령한다. 옛날에 말하기를 ‘豆智沙 干支의 宮과 日夫智의 宮이 빼앗았다’고 하였는데 이제 다시 (그것)을 牟旦伐에게 돌려주라. (이에) 喙(部)의 作民 沙干支의 使人인 果西牟利가 알리기를 ‘만약 後世에 다시 말썽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으면 重罪를 준다’ 라고 하였다. 典書인 與牟豆가 (이러한) 연고로 기록한다. 沙喙 心刀里가 □한다(새긴다)”
로 해석되고 있다
調査文化財 <浦項 中城里 新羅碑>의 내용은 “豆智 沙干支의 宮과 日夫智의 宮이 牟旦伐의 것을 빼앗았는데 이로 인해 말썽이 일어나 爭人들이 소송을 제기하였다. 이에 喙部의 習智 阿干支와 沙喙의 斯德智 阿干支가 沙喙(部)의 了抽智 奈麻, 喙部의 本智 奈麻에게 진상을 조사하도록 명령하였다. 牟子 2명이 爭人을 조사하고 道使는 분쟁과 관련된 지역의 지배층에게 지시하여 조사하게 하였다. 즉 과거 豆智 沙干支의 宮과 日夫智의 宮이 빼앗았던 사실을 밝혀내어 본래 주인에게 되돌려 주도록 하고 향후 이에 대한 소송이 제기되지 못하도록 하는것”이다
調査文化財 <浦項 中城里 新羅碑>는 여러 학자들의 연구를 종합하면 新羅史 硏究에 있어 획기적인 資料이다. 碑의 發見場所가 浦項 冷水里 新羅碑의 발견장소로부터 8.7㎞ 밖에 되지 않는 가까운 거리인데다 碑文의 內容도 유사점이 많다는데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地方民이 관여된 財産과 관련하여 分爭이 있었다는 점, 이들 분쟁에 대해 신라의 지배층들이 합동으로 判決을 내리고 있었다는 점, 判決 이후 이들 문제에 대한 앞으로의 再發防止를 명시하고 있었다는 점 등의 유사성이 있고 官職名과 官等表記의 유사성 및 浦項 冷水里 新羅碑에 나타나는 人物과 同一 人物로 추정되는 人名 등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당시 新羅의 政治的․經濟的 文化內容을 硏究․確定지을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歷史的․學術的 價値가 매우 큰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調査文化財 <浦項 中城里 新羅碑>는 특히 지금까지 발견된 新羅碑 중에서 그 年代가 가장 앞선 碑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 신라의 書藝史를 연구하는데 획기적인 資料가 될 것이다. 우선 文章記述이 능숙하거나 세련되지 못한 점으로 보아 당시 新羅에서는 中國의 漢文이 크게 보편화되지 않았음을 推定해 볼 수 있으며 또한 碑文의 書體로 보아 中國의 漢朝 또는 魏晉時代 書藝의 影響을 크게 받지 않고 있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碑의 書體를 굳이 中國의 書藝發展의 過程上에서 비추어 본다면 小篆으로부터 隸書로 移行되어 가는 과정상의 古隸에 비견해 보거나 상하 長方形의 小篆體로부터 좌우 偏旁形의 隸書體로의 移行하는 과정상에서 잠시 나타났던 波磔이 없는 古隸體에 비견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中國의 書體와 書風에 별로 영향을 받지 않은 新羅의 自生的․土俗的인 書體․書風이라 하겠다. 글자의 結構가 不均衡의 調和를 이루면서 土俗的이고 庶民的인 익살로 넉넉한 여유로움의 자유를 구현하는 無定形的 書藝美學을 창출하고 있다. 이는 어느 하나의 書體․書風만을 고집하지 않고 篆法․隸法․楷法은 물론 行法까지도 두루 攝取․融合하여 不均衡의 調和를 구현하고 있는 新羅的 自生 書藝인 것이다.
調査文化財 <浦項中城里新羅碑>는 統一新羅 以前의 新羅時代의 審美意識과 初期 新羅의 書藝史를 밝히는데 획기적인 資料일 뿐 아니라 統一新羅 以前의 歷史와 文化․藝術의硏究에 귀중한 資料로 評價되어 이미 2012년 2월 22일에 國家文化財 寶物 第1758號로 지정되어 현재 慶尙北道 慶州市 佛國路 132의 國立慶州文化財硏究所에 의하여 所藏․維持․管理되고 있다
調査文化財 <浦項 中城里 新羅碑>의 製作時期에 대해서는 學界의 논란이 없지 않은데 國立慶州文化財硏究所의 學術硏究에 의하면 碑文의 첫 文段의 “□□□□□□辛巳□□中斯盧湜□□□□□□□□□”에서 ‘辛巳’의 干支가 보이는데 이는 碑文의 內容이나 表記法 등으로 볼 때 新羅 智證王 2(501)년인 501年으로 추정되나 한편으로 碑文에서 漢文을 구사한 能力이 현저히 떨어지고 新羅의 옛 國號인 ‘斯盧’가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보다 60년이 빠른 訥祗王 25(441)년으로 추정하는 硏究者도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調査文化財 <浦項 中城里 新羅碑>의 製作時期가 智證王 2(501)년인 501年이라 하더라도 지금까지 最古의 新羅碑로 알려진 智證王 4(503)년의 浦項 冷水里 新羅碑보다도 2년이나 앞서는 新羅 最古의 碑인 것이다. 더욱이 調査文化財 <浦項中城里新羅碑>보다 제작시기가 늦은 <蔚珍 鳳坪里 新羅碑>(法興王 11, 524)도 이미 1988년에 國寶 第242號로 지정되고 <浦項 冷水里 新羅碑>(智證王4, 503)도 1991년에 國寶 第264號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따라서 調査文化財 <浦項 中城里 新羅碑>는 國家文化財 國寶로 昇格 指定하여 硏究하고 保存․·管理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ㅇ 지정사례
<新羅碑>의 國家文化財 指定事例는 다음과 같다
•국보 제98호 丹陽 新羅赤城碑 <眞興王 11(550)>
•국보 제42호 蔚珍 鳳坪里 新羅碑 <法興王 11(524)> 1988.11.04.
•국보 제64호 浦項 冷水里 新羅碑 <智證王 4(503)> 1991.03.15.
ㅇ문헌자료
•國立慶州文化財硏究所編, 「浦項中城里新羅碑」. 慶州 : 國立慶州文化財硏究所, 2009.
•國立慶州文化財硏究所編, 「發見紀念學術 심포지엄 浦項 中城里 新羅碑」. 慶州 : 國立慶州文化財硏究所, 2009.
•金昌鎬, 「古新羅金石文의 硏究」. 서울 : 서경문화사 2007.
•朱甫暾, 「金石文과 新羅史」.서울 : 지식산업사 2002.
•李文基, “蔚珍鳳坪新羅碑 中古期의 六部問題”. 「韓國古代史硏究 2」 (1989).
•盧重國, “迎#日冷水里碑”. 韓國古代社會硏究所 編, 「譯註韓國古代金石文Ⅱ」(新羅Ⅰ․伽倻篇). 서울 : (財)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1992.
•李明植, “蔚珍鳳坪碑” .韓國古代社會硏究所 編, 「譯註韓國古代金石文Ⅱ」(新羅Ⅰ․伽倻篇). 서울 : (財)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1992.
다육이 옵투샤가 꽃을 피웠습니다. 고생을 해서 꽃이 시원찮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