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하늘로 날아오르기까지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초의 비행 기구를 고안하고서 40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비행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첨단 자재와 엔진, 날개나 프로펠러 등이 필요했다. 다빈치는 아이디어로 가득한 인물이었으나 그의 시대에는 모두 현실화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의 놀라운 생각은 400년 가까이 공상으로 존재해야 했다. 지금도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비행의 원리를 4세기 전의 범인(凡人)들이 어찌 알 수가 있었을까. 천재가 시대를 이끌어가나, 그들의 천재성은 시대를 잘 만나야 빛을 발하는 법이다.
100년 전 태어난 하이브리드의 개념
21세기 자동차의 총아로 자리잡은 하이브리드 또한 마찬가지. 놀라지 마시라, 하이브리드의 뒤안길을 거슬러 오르다 보면 1905년 11월 23일까지 되짚게 된다. 주인공은 H. 파이퍼라는 발명가. 그는 전기 모터와 휘발유 엔진을 통합한 파워트레인 특허신청을 냈는데, 당시 신청서류에 따르면 그가 고안한 새 구동계는 0→시속 25마일(약 40km) 가속을 ‘불과’ 10초 만에 해내는 성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시대는 그것으로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너무나 빨리 발전한 휘발유 엔진 기술을 탓할 수밖에.
20세기 초, 남다른 길을 걸었던 이는 파이퍼만이 아니었다. 파리 전기자동차회사(Compagnie Parisienne des Voitures Electriques)는 1897년부터 1907년까지 크리거(Krieger, 1903년)를 비롯한 일련의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발표했다. 스포츠카의 아버지 페르디난트 포르쉐의 이름도 등장한다. 오스트리아 야콥 로너사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던 포르쉐는 복잡한 구조의 변속기를 전기 모터로부터 분리하는 시스템을 고안했다. 이 회사는 훗날 이를 발판 삼아 휘발유 엔진으로 제너레이터를 돌리는, 근대적 원리의 하이브리드카를 개발했다.
미국의 제너럴일렉트릭, 독일의 지멘스와 같은 거대기업들도 20세기 초 하이브리드카를 내놓았다. 미국 시카고의 우즈 모터회사는 1917년, 최고시속 32(전기 모터)~56km(휘발유 엔진)의 성능을 내는 병렬식 하이브리드카를 발표했다. 산발적으로 이어온 하이브리드 메커니즘은 북미지역에서 한동안 쓰였던 디젤-전기 모터 열차로 현실화되기도 했지만 좀처럼 생활 속으로 파고들지는 못했다.
개념 등장 이후 한 세기도 채 지나지 않은 1997년, 도요타는 사상 최초의 양산 하이브리드카 프리우스를 발표해 ‘하이브리드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1.5X 70마력 휘발유 엔진과 44마력 전기 모터를 함께 쓴 프리우스는 22.3km/X 에 이르는 놀라운 경제성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비슷한 시기 북미 시장에 첫발을 내디딘 혼다 인사이트의 연비는 무려 32km/X .
도요타와 혼다가 기술 개발 이끌어
2001~02년 연속 미국 내 환경친화차 1위에 오른 혼다 인사이트는 알루미늄으로 만든 835kg의 가벼운 차체에 3기통 1.0X 68마력 휘발유 엔진과 144V 니켈-메탈 하이드라이드(Ni-MH) 배터리를 엮어 0→시속 100km 가속 12.1초, 최고시속 180km의 성능을 과시했다. 결국 프리우스나 인사이트가 미국인들을 사로잡은 이유는 경제성만은 아니었다는 말. 인사이트 구동계(IMA)의 기본적인 원리는 프리우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엔진에 많은 부하가 걸리는 가속 때는 모터가 최대 5kg·m 정도의 토크를 내어 연비 상승을 억제하면서 휘발유 엔진을 뒷받침한다. 이 때 모터와 엔진의 저회전 토크는 거의 같은 수준. 정속주행 때는 폭넓은 희박연소 영역을 지닌 VTEC 엔진만으로도 안정된 고효율성을 실현할 수 있다. 감속할 때는 보통 버려지는 운동 에너지를 전기로 변화시켜 배터리에 충전한다. 에너지 효율성을 높이는 포인트 중 하나. 정차중일 때는 프리우스와 마찬가지로 엔진 아이들링을 멈춰 불필요한 연료 소모와 배기가스 배출을 없앤다. 멈춰 있다가 다시 출발할 때의 구동력은 모터의 몫.
올해 초 2세대 프리우스를 발표한 도요타가 이와 함께 내놓은 ‘하이브리드 시너지 드라이브 시스템’은 양산 하이브리드카가 일반적으로 써온 패러렐(병렬) 방식에 고전적인 시리즈(직렬) 방식을 더해 효율성과 운동성을 동시에 추구한다. 출발 순간처럼 에너지 효율성이 떨어질 때는 모터에 의존하고 정속주행을 하는 동안은 엔진으로 바퀴를 굴리는 동시에 제너레이터 충전까지 한다. 급가속은 엔진과 모터의 공동작업으로 이뤄지고 감속 에너지는 고스란히 배터리에 충전된다. 배터리는 언제나 일정한 전압을 유지하도록 세팅되어 있으며 충전량이 떨어지면 제너레이터는 즉시 재충전을 시작한다.
하이브리드 기술은 기본적으로 무척 복잡하고 개발비용도 크다. 도요타가 양산 하이브리드카 개발계획을 밝혔을 때 대부분의 메이커들이 반신반의했던 이유도 바로 양산하기까지 투입되는 막대한 비용 때문이었다. 선두주자로 떠오른 도요타는 요즘 하이브리드 기술 이전으로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다. 2006년 하이브리드카 양산을 선언한 닛산이 도요타 하이브리드 기술을 도입한 대표적인 예. 도요타로서는 시장에서의 우위를 지킬 수 있고, 후발주자들은 중복되는 개발비용을 줄일 수 있는 게임이다.
SUV와 스포츠카로 영역 확대
포드는 지난 5월 말 미국 현지에서 이스케이프 하이브리드의 계약을 받기 시작함으로써 렉서스 RX400h를 준비중인 도요타를 앞질러 ‘세계 최초의 하이브리드 SUV 양산 메이커’라는 타이틀을 전리품으로 챙겼다.
현재 데뷔를 준비중인 하이브리드카는 도요타 SUV 하이랜더와 캠리, 렉서스 RX400h. 렉서스는 차세대 GS와 LS에도 고성능 하이브리드 버전을 마련할 예정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고, 도요타 툰드라 픽업의 후속 모델 FTX도 하이브리드 구동계를 얹을 계획이다. 하이랜더와 RX400h는 올 연말, 캠리 하이브리드는 내년 데뷔 예정. 인사이트와 시빅 하이브리드를 시판중인 혼다는 이미 최근 어코드 하이브리드를 공식 발표했다. 닛산은 알티마와 인피니티 FX 시리즈 하이브리드를 준비중이고 GM도 하이브리드 트럭과 SUV를 개발하고 있다.
새로 등장할 조짐을 보이는 하이브리드 스포츠카도 주목. 경제성과 친환경성을 최대 무기로 내세운 하이브리드카의 태생배경을 생각하면 고성능 스포츠카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조합이다. 하지만 지난 제네바 오토살롱에 등장한 이탈디자인의 도요타 알레산드로 볼타 컨셉트카는 렉서스 RX400h의 하이브리드 구동계를 이용해 ‘하이브리드 수퍼 스포츠카’라는 개념을 처음 선보였다. 도요타는 또 지난 6월 열린 굿우드 페스티벌 오브 스피드에 프리우스의 고성능 버전인 프리우스 GT를 공개했다. 굿우드 페스티벌 사상 처음 등장한 하이브리드카. 프리우스 GT는 야리스 T 스포츠(일본명 비츠 RS)의 4기통 1.5X 99마력 휘발유 엔진과 550V 82마력 전기 모터를 얹고 시스템 최고출력 145마력을 낸다. 이 차의 0→시속 100km 가속성능은 8.7초. 최고출력을 110마력으로 조절한 기본형도 10.9초면 시속 100km에 도달한다.
현대도 올 연말이나 내년 하이브리드카 생산 가능성을 예고하고 있다. 양산 이후 지금까지 하이브리드카는 친환경, 높은 경제성 등 ‘감성적’ 요소에 의존해 인기몰이에 성공해온 것이 사실. 그러나 기술 발전에 따라 하이브리드카의 이미지는 고성능, 고효율로 옮겨가는 분위기다. 전문가들이 전망하는 2010년 하이브리드카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3%. 메인 스트림으로 파고들기에는 역부족이겠지만 연료전지 자동차 시대로 가는 징검다리 이상의 합리적인 대안 역할을 하기에는 모자람이 없을 듯하다.
일상생활 곳곳에 스며든 하이브리드
하이브리드(Hybrid)의 원래 뜻은 잡종. 난데없이 자동차와 함께 등장한 이 용어는 실상, 우리 생활 여기저기에 자리잡고 있다. 금융권에서는 ‘하이브리드 채권’이라는 말을 종종 들을 수 있다. 이는 주식과 부채의 중간 성격으로 만기가 없고 은행이 청산될 때까지 상환의무도 없는 유가증권으로, 은행의 반영구적인 자본조달 수단.
‘하이브리드 쌀’이라는 말은 들어본 적 있는지. 성질이 다른 두 종자 사이에서 태어난 잡종 1대를 하이브리드 쌀이라 부른다. 하이브리드 쌀은 부모 세대의 두 가지 벼에 비해 수확량이 월등히 많아 세계적 ‘종자사업’의 새로운 목표물로 떠오른 아이템. 그러나 높은 수확량은 멘델의 유전법칙에 따라 2대 이후 사라진다. 이것이 하이브리드 쌀의 단점이라고? 천만의 말씀. 1대의 풍성한 수확을 맛본 사람이라면 해마다 1대 잡종 씨앗을 사다 심어야 하므로 ‘농업 비즈니스’로서의 가치는 오히려 높다.
밀도가 낮은 자연에너지를 여럿 결합해 효율성을 높이려는 하이브리드 발전도 미래형 컨셉트. 집광형 태양전지와 태양열 집열판을 결합시킨 광열 하이브리드 발전이 대표적인 예다. 일본 히다치 연구소는 1998년 3월 이바라기현 히다치시에서 NAS(나트륨 유황) 전지와 풍력 발전, 태양광 발전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발전 시스템을 시험하기도 했다.
웰빙 열풍을 타고 인기를 얻고 있는 녹차두유나 클로렐라 죽·냉면 등은 모두 두 가지 이상 성분의 장점을 결합한 식품. 맥아와 쌀을 섞은 신세대 맥주와 갖가지 열대과일을 혼합해 묘한 맛을 내는 트로피카나 주스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소니 플레이스테이션 2는 대표적인 하이브리드 가전제품. 소니컴퓨터엔터테인먼트(SCE)가 2000년 3월 개발한 이 가정용 게임기는 2003년 새모델로 진화하면서 게임은 물론 DVD를 재생할 수 있어 어지간한 가정용 AV 시스템 역할을 혼자서 해낸다. 마지막으로 우리들 바로 곁에도 하이브리드 제품이 하나씩 있으니, 그 이름하여 동영상 촬영과 MP3, 전자결재까지 가능한 핸드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