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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스토리우스에 나타난 안디옥 신화의 구원론적 이념
|구름하늘
앞서 우리는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특색을 설명함에 있어서 클레멘트의 신학을 표본으로 내세웠다. 그리하여 그 이후의 신학 발전 전체를 클레멘트의 구원론적 이념과 기독론을 기본 개념으로 하여 고찰하였다. 안디옥 신학의 경우는 그 처지가 좀 다르다. 안디옥의 경우는 클레멘트와 같은 위대한 교부가 그 초창기에 등장하지 못하였다. 안디옥의 감독들, 이그나시우스(Ignatius)나 데오빌루스(Theophilus)는 그리 뚜렷한 안디옥 신학의 특색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사모사타의 바울은 극히 제한된 단편만 남겼을 뿐이므로 그의 사상을 충분히 풍부히 설명할 길이 없다. 디오도레나 데오드레도 네스토리우스만큼 자료가 남아 있지 못할 뿐 아니라 안디옥 신학 사상의 현저한 내용을 네스토리우스만큼 잘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한편 네스토리우스는 그의 저서 '헤라클레이데스의 책'을 통하여 그의 사상을 충분히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으며, 그는 모든 면에 있어서 안디옥 신학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에게 있어서 던지 안디옥 신학 사상의 윤곽을 잡아 가지고 그 후에 이 신학파를 역사적으로 추적하여 보고자 한다.
알렉산드리아 신학 전통에서는 인간성의 완성을 그 불멸성에 두었다. 인간은 '불멸의 존재’ (an immortal being)로서 완성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가장 긴요한 메시지는 “하나님께서는 불멸자의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지상(地上)의 성품을 하늘의 성품으로 변화시키셨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네스토리우스는 인간성의 완성을 그 존재의 천사와 같은 영광에서 본 것이 아니고 인간의 순종에서 본 것이다. 즉 형이상학적이라기보다 윤리적이다. 네스토리우스는 순종의 인격 구조에 있어서 인간성의 완성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네스토리우스의 가장 긴요한 메시지는 “그리스도는 그의 고난과 그 자신의 완성을 통하여 우리의 순종을 완전케 하셨다” 로서 요약할 수 있다. 네스토리우스 자신이 그와 같은 순종의 생활 특히 고난을 통한 순종의 생애를 살았다. 그의 비극적인 고난의 생애를 통하여 그는 이 순종의 이념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죽기까지 이 순종의 이상을 견지하였고, 불의 앞에도 순종의 참 모습을 잃지 않았고, 하나님의 의로운 신원을 믿고 기다리는 자세를 잃지 않았다.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의 신학에서 인간성의 완성에 대한 이념적 차이가 서로 상이한 구원론을 산출하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차이는 저들이 받은 바 계시의 서로 상이한 국면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깨89 7/1 26-27면 제 12부: 기원 100-476년—복음의 빛을 가로막음 ***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구부린 것은 그노시스파만이 아니었다. 5세기초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가 사실상 하나 속의 두 위격, 즉 인간 예수이자 하나님의 신성을 지닌 아들이었다고 가르쳤다.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낳을 때, 사람을 낳은 것이지 신성을 지닌 아들을 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견해는 단성론(“하나의 본성”)과 일치하지 않았다. 단성론에서는 하나님과 아들 사이의 연합이 분리할 수 없는 것이며, 예수께서는 두 가지 본성을 가지셨지만, 실제로는 온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온전한 사람인 오직 하나의 존재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마리아는 단지 인간 예수를 낳은 것이 아니라, 참으로 하나님을 낳은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두 이론은 모두 이전 세기중에 일어났던 논쟁의 부산물이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는 그리스도가 아버지보다 열등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관계를 묘사할 때 호모우시오스(하나의 실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니케아 공의회는 기원 325년에 아리우스의 견해를 배척하면서, 예수는 사실상 ‘아버지와 같은 실체’라고 판결하였다. 기원 451년에 칼케돈 공의회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화신이라고 단언하였다. 그리하여 바빌로니아-이집트-그리스의 삼위일체 신 개념은, 자신과 아버지는 분리된 두 개체로서 결코 동등하지 않다고 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밀어냈다.—마가 13:32; 요한 14:28. |
1. 하나님과 그의 세계 통치 :
하나님의 이 세상 통치는 '정의로운 통치(just administration)'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통치에는 난폭한 일이라든가 폭정이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이 세상을 정의로써 다스리실 뿐만 아니라, 또한 오래 참으심으로써 다스리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오래 참으시는 통치의 결과는 첫째로 의로운 자는 불의한 자에게 그 폭정 밑에 고난받게 되는 것이며 이로써 결국에 가서는 불의한 자의 불의가 완전하게 되기 위함이다. 동시에 의로운 자는 그들의 고난을 통하여 그 위엄이 더욱 서게 되며 불의한 자는 아무 변명의 여지가 없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선악간에 마음대로 선택케 하신다. 선을 텍하는 자들에게는 악을 참도록 하시며 악을 택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반항하여 싸우게 내버려 두신다. 이와같이 하여 하나님의 세계통치는 진행되며 종말에까지 이를 것이다. 네스토리우스에 있어서는 하나님은 '사람의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의로우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에 있어서 하나님의 의가 항상 전면에 나타나고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의로운 성격을 완성시키는데 작용할 뿐이다.
사랑의 순수성이 있어서나, 말에 있어서나 행위에 있어서, 각 사람은 하나님을 선하고 의로운 분으로서, 지혜롭고, 능하신 분으로서, 그리고 조물주요 하나님으로서 사랑할 것이다.
2. 사탄 :
사탄은 하나님을 배반하였다. 그는 이유 없이 질투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심을 질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사람을 속였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날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멸망시키시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탄의 오해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멸망시키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사탄이 원하였던 것과는 정반대로 행하셨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멸망시키지 않으신 것을 보자 그는 인간들을 유인하여 그들을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사탄이 행하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불순종케 하는 일이며 하나님과 인간을 서로 원수되게 하는 일이다. 그는 어디서나 인간을 충동하여 하나님께 죄를 범게 한다. 그러나 그는 다만 그리스도의 완전한 승리의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뿐이다.
3. 그리스도에 있어서의 인간성의 승리 :
그리스도는 그의 완전한 순종으로 우리의 불순종을 완성하셨다. 그는 범죄한 인생을 취하시어 모든 점에 있어서 가난하게 되셨다. 더우기 시탄은 모든 수단을 다하여 그를 하나님의 목적에서 떠나게 만들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목적에서 조금도 떠나지 않으셨다. 그는 처음부터 표적을 행하시든가 권세 있게 가르치시든가 한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처음에는 다만 순종하실 따름이요 모든 계명을 지키실 뿐이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승리의 때까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더욱 확실히 할 뿐이었다. 폭군의 완전한 패배는 바로 그의 이 완전무결한 순종에서 온 것이었다. 그의 완전한 순종은 마침내 사탄을 그의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리셨고, 그의 모든 능력을 박탈하셨다. 네스토리우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으로 하여금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셨다. 이와 같이 하여 사탄에게는 아무 구실도 없게 되는 것이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단 한순간도 강제로나 변덕으로 사탄을 파하시는 일은 없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구제받을 아무 구실도 주시지 않으셨다.
이로 인하여 이 모든 오래 참으시는 때를 사탄에게 주셨고, 심판의 날까지 자기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셨다. 그러나 지금은 오대 참으심의 때, 즉 그의 권세의 때가 그에게 허락되어 있다. 그 후에 그는 완전히 심판을 받게 될 것이며, 사탄과 그의 폭군적 역사에 가담한 모든 자들은 의로운 자로부터 구별될 것이다.
알렉산드리아 교부들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은 주로 신적인 영광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에게 인간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도덕적 탁월성 또는 그의 완전한 의, 즉 겸손과 고난에 있어서의 권위를 의미하였다. 네스토리우스에 있어서 이 '형상' (image)은 가장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알렉산드리아 교부들에게는 '형상'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뿐이었다. 그런데 네스토리우스에게는 형상은 순종의 형상도 될 수 있고, 불순종의 형상도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형상을 보존하셨다”고 말할 때나 "인간성에 있어서 잃어버린 형상을 회복하셨다.”고 말할 때 이것은 분명히 예수님의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순종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요, 순종하려는 의지와 능력, 즉 도덕적 탁월성을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에 대하여 질투함으로써 그 형상을 잃어버렸다고 말하고 있다. 즉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순종할 수 없게 되었으며, 그의 순종의 형상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네스토리우스는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또한 질료적 요소(material element)라고 부른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의의 모습을 지키심으로서 인간성의 의를 회복하실 때에 “그리스도는 인간성의 질료적 요소를 새롭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범죄한 종의 형상을 입으신 것은 인간의 질료적(質料的) 요소를 회복하시기 위함이다. 이리하여 인간성이 승리를 얻을 수 있었고 그것도 인간성 자기의 힘으로써였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이 되셨다. 그것은 그와 같이 하심으로 인간성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기 위함이었고, 인간성에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시기 위함이었다. 이와같이 하며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질료적 요소를 회복하시고, 또한 인간도 계명을 지킴에 있어서 범죄하지 않을 수가 있다는 것을 보이셨다. 마치 계명을 범함으로서 본래 타락하였던 것을 인간 후로도 회복하기에 충분한 것처럼 하셨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타락은 저 중풍 병자처럼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 걸을 수 없어 보호자들이 대신 걸어 주고 있다. 그리하여 그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신 것 “일어나 걸으라. 네가 이미 고침을 받았으니 곧 스스로 걷기 위함이니라"고 하신 말씀이 헛되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종의 형상을 입으셨고, 계명을 지키심에 완전 하시어 모든 이름 위에 탁월한 이름을 받으셨다. 그리하여 그의 질료적 요소의 회복으로 말미암는 자들은 모두 계명의 준수와 지혜로써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이 까닭에 질료적 요소의 회복도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다.
말씀이 인간이 되신 것은 인간 홀로도 계명을 지키고 범죄하지 않기 위함이다. 만일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서가 아니라 말씀 때문이라면 그것은 마치 중풍병자가 들것에 매여 다니는 것처럼 스스로 걷는 것이 못 된다. 그러나 "일어나 스스로 걸으라”고 말씀하신 대로 예수의 인간성은 스스로 계명을 완전히 지켰던 것이다.
이 모든 중요 계명에 대하여 그는 순종하였다. 그리나 그의 인간됨 이외에 다른 무엇 때문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 그 용이함 때문이라고 생각되지 않기 위함이었다. 실지로 그는 순종이나 영예나 권세나 영광에 있어서 어떤 끄는 것을 힘 입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빈곤, 멸시, 연약함 등으로 인하여 순종할 생각을 소멸시켜 버릴 그런 것들만 그에게 남아 있었다. 그는 순종함에 있어서 다른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였다. 다만 그는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애썼을 뿐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들을 사랑하였을 뿐이었다.
그가 모든 사람들 사이에 행하실 때, 그 모든 계명이 그를 에워싸고 불순종의 힘이 그에게 침노하여 왔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것에 있어서 용기 있게 대처하여 갔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아무 특별한 또는 보통 이상의 도움을 이용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사용한 것은 모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모두에게 공통된 것을 사용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가 저 특별한 것 때문에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며 그것들 없이는 죄에서 보전(保全)되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기 위함이다. 따라서 먹는데 있어서나 지는데 있어서나 그는 모든 계명을 지켰고, 어떠한 고통이나 격동에 있어서도 그의 생각은 확고하였다. 왜냐하면 그의 뜻은 하나님의 뜻에 매여 있었고, 따라서 아무것도 그를 하나님께로부터 분리시킬 수가 없었고, 그는 하나님과 구별되지 아니 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아니하였고, 그가 그의 '형상' (Prosopon)<네스토리우스에 있어서 Prosopon이란, 낱말은 대단히 중요한 말이다. “프로소폰”이란 말은 본래 가면이란 말로서 ''낯”을 의미하게 되었고, 더 나가서 ‘대표하는 자’(representative)를 의미하기도 하였다. 네스토리우스이 있어서는 예수가 곧 그의 아버지 하나님의 Prosopon으로 있었고, 이것이 아들과 아비지가 하나인 근본 원리로 되어 있다. 우리는 이것을 ‘형상 또는 품격' 이라고 번역하고자 한다.>으로 있던 그를 위하여 살았다. 이와 같이 하여 그는 그 '형상' 을 흠과 티가 없이 보전하였고, 이로써 그 본성(人間性)에 대하여 승리를 주었던 것이다.
그는 모든 점에 있어서 순종을 성취하였으므로, 모든 다른 사람들과 같이 요한의 세례를 어떤 지상 (supreme)의 것인 양 받았다. 그는 무죄한 자로서 실지에 있어서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았으나, 그의 순종의 위대함으로 인하여 그는 그것을 마치 필요로 하는 사람처럼 받았던 것이다. 그가 그의 본래의 존영과 영광에 합당하게 행하지 아니하시고, 마치 명령자에 복종하듯이 행하신 일은 지고의 순종에 속한다. 더우기 그는 그로 하여금 세례를 베풀게 하시되 마치 범죄한 자가 면죄를 필요로 하는 자처럼 세례를 받으셨던 것이다. 실상 이것은 일반적 순종에 속한다. 즉 그는 자기 자신의 품격(Prosopon)에 있어서 아무 것도 요구하시거나 취하거나 하지 않으시고 그의 품격(Prosopon)으로 있는 그(人同生)의 품격에 있어서 행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그의(人間의) 뜻을 준비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이 품격은 자기 자신의 품격이었고, 그는 그의 품격을 자기의 품격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그 품격은 하나였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하늘로부터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던 것이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를 내가 기뻐하노라.”
그리하여 성령도 비둘기 같이 내려 오시어 그의 위에 머물렀다. 아들이 내려 오셨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의 (즉 하나님의) Prosopon을 취하시고 자기 자신의 Prosopon이었던 것은 그(하나님)와 구별되지 않게 된 그가 곧 아들이셨기 매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욱신으로부터 나실 때부터 하나이셨다. 성령이 임하시고, 가장 높은 자의 능력이 너를 덮으리니, 그러므로 너로부터 나실 거룩한 자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다. 여기서 아들이 오시리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의 (예수의) Prosopon 에 있어서 그를 (하나님) 취하셨던 그는 다름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경륜을 그에게 (예수에게) 주신 바 바로 그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점에 있어서 승리한 후에 그리고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신 후에 그는 다시금 또 다른 싸움들을 시작하였다..………. 그는 우리의 것들, 즉 인간적인 것, 약한 것들에 있어서 다만 고상한 순종으로 위로를 받았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아무 권세도 가지지 못하였고 아무 우월성도 갖지 못하였다. 그는 핍박 받았고, 매 맞았고, 모든 사람들을 두렵게 하는 두려움으로 무서워하였다. 새나 짐승들 같이 그는 머리 둘 곳도 갖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여기저기 다니면서 상하였고 억울함을 당하였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순종을 위하여서이다.
이 완전한 순종과 승리의 결과로서 그는 천국 소망을 전파하고 선언할 권세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승리한 그에게 그의 승리의 명예에 대한 댓가로서 천국의 소망을 선포하고 전할 권세가 주어졌다. “기뻐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제는 이 세상이 심판받았느니라. 이 세상의 주권자가 정죄함을 받았느니라. 내가 땅으로부터 높임을 받는 날에는 모든 사람을 나에게로 이끌리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 그리하여 보냄을 받아서 모든 사람을 가르쳤고 표적과 이적과 병 고치는 일 등 기타 모든 일을 행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를 기쁘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고, 또는 순종을 질투해서가 아니고, 가르침을 받은 모든 자들의 신앙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그의 제자들의 순종을 위하여, 사용하였던 것이다.
그가 나라를 선언한 것은 “그 폭군의 폭정으로부터 우리 포로들을 구출하여 그에게로 이끌기 위함이며 우리로 하여금 그의 나라와 후사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으로서 모든 인간적 처지에 참여함으로써 가장 동정심이 많은 대제사장이 되셨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을 자기를 위하여 또 동족을 위하여 제물로 바치셨다.
그의 육신의 날에 그는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신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의로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그가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 그러므로 하늘의 부르심으로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이여, 우리의 고백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자. 그는 자기를 그의 권속 가운데서 모세와 같이 만드신 자에게 충성하셨던 것이다.
최상의 겸비는 자기 자신의 것은 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것들만을 구하는 인간성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겸비가 그에게 있어서 이루어졌다. 이것은 우리에게 겸비를 가르치기 위하여서이다. 그는 이 하나의 목적으로 통일되어 있어서 사탄이 불순종을 도입할 틈이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죽음을 참고 승리를 거두는 것 뿐이었다. 그는 이 죽음도 참았다. 그리하여 죽음에 대하여 승리를 얻었고 죽음을 완전히 멸하였다. 이로써 그는 두 가지 일을 행하였다. 즉 그는 사탄을 패배시켰고 그로부터 불순종의 소망을 완전히 때앗아 버렸다. 많은 사람이 죽음의 공포로 눌림을 받고 있으므로, 그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고난받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의로운 보상(just compensation)을 지불하셨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의 죽음을 자기에게 부당하게 임한 죽음과 바꾸셨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계명을 준행하여서 죽음에 서까지 면제되게 되었고, 우리를 위한 승리의 선택까지 받은 후에 그는 기만당한 자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그와 같은 모양의 생을 자취하였다. 그리고 그는 우리를 위하여 즉 기만당한 자들을 위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그는 죽음을 투기장으로 이끌어 내었다. 이와 같이 하여 죽음을 멸할 필요가 있었다. .…..… 그러므로 그는 다른 사람들의 심판을 미리 당하였다. 그러나 아무 얻는 바도 없이 부당하게 죽음을 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순종과 무비한 사랑을 획득하였다. 이 승리는 자신을 위하여서가 아니고 우리의 승리를 위하여서였다. 이와 같이 하여 그가 정복함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서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서였다. 아담의 패배가 모든 사람의 패배의 원인이 되었던 것 같이, 아담의 승리는 또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승리를 얻게 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인간성은 승리를 거두었고, 사탄은 패배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의 승리를 높이셨고, 그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는 영광을 주셨고 그리하여 이 모든 이성적 능력들이 모두 그의 승리 앞에 놀랐고, 무릎을 꿇고 그에게 정당하게 주신 바 그 이름을 찬양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모든 혀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이루신 바 이 의로운 경륜을 고백하기에 이른다. 진실로 그는 화평과 조화 가운데 땅을 다스리는 것이요, 그의 모른 행위로 저들을 자기에게로 이끄시되 설복(persuation)에 의하시고, 힘(force)으로 하지 아니 하신다.
이상을 요약하면 네스토리우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히브리적 하나님의 개념이다. 이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의로운 세계 통치자로 인식된다.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태도는 사랑이요, 사람의 하나님에 대한 태도는 사랑과 결부된 순종이다. 사탄은 까닭없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을 질투하였다. 그리하여 사람을 기만하여서 불순종에로 이끌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사람을 멸하시기를 원했다. 그러나 사탄의 기대는 헛되었다. 그는 다만 자기의 불순종과 불의를 심판받을 때를 기다릴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프로소폰 (prosopon)으로 계신 분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내려오셔서 육신을 입으신 것이 아니다. 예수가 곧 하나님의 프로스폰으로 계셨고, 또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프로소폰을 취하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가 곧 아들이시다. “이는 내 사랑하는 이들이라고” 하심과 같다. 그는 완전히 인간이었다. 만일 그가 인간성 이외의 다른 어떤 원인에 의하여 계명을 순종한다면 그것은 인간성의 승리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간성은 아직도 들것에 들리어 다니는 중풍병자처럼 자기 힘으로 걷는 것이 못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순종치 않는 인간성을 멸하지 않으시는 것은 그의 의(義) 때문이다. 예수는 처음부터 이적을 행하며, 권세를 가졌던 것 같지 않다. 그는 모든 계명을 지키며 순종의 형상(image)을 지킬 아무 기쁨도 가지지 못하였고 오히려 그와 같은 일을 낙심케 하는 것만이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순종의 형상을 지켰다. 사탄은 다른 사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예수도 속여서 하나님을 배반케 하려하였다. 그리하여 모든 불의한 폭정과 무법을 다 행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헛 것이었다. 그는 완전히 패배당하였다. 마지막으로 남은 죽음까지도 예수께서는 감수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승리는 완전히 되었다. 이것은 인간성의 사단에 대한 승리를 의미한다. 예수에게 있어서 우리의 순종은 완전히 되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알백산드리아와 안디옥의 그리스도의 죽음을 이기시는 일에 대한 신앙 사상을 비교함이 좋을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에 있어서는 육신이 말씀에 의하여 취한 바 됨으로 이 육신에 있어서 죽음은 폐지되었다. 왜냐하면 말씀은 그 본질에 있어서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육신은 이제는 생명의 소유물로 되었으am로 육신도 불가사적(不可死的, immortal)으로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형이상학적 사상은 히브리 사상에는 낯설다. 네스토리우스에 있어서 죽음은 정당화되지 못한다. 그것은 죽음이 의인이요. 무죄한 자 그리스도에게 부당하게 임하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계명을 완전히 지키셨다. 그리하여 죽음에서 조차 면제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죽음을 당한 것은 그것에 해당되어서가 아니요, 우리를 위하여 죽음을 폐하기 위하여서였다.
4. 남은 고난:
그리스도에 있어서의 인간성의 승리로 말미암아 사탄은 전체적인 패배를 당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하나님의 아들들의 그에 대한 전쟁이 남아 있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도 계속 기만을 일삼으며, 그의 정죄와 그에게 설복당한 자들의 정죄가 아직도 더욱 분명하게 되어야 하겠기 때문이다. 이 남은 싸움은 그에게 설복당하지 않는 자들의 승리를 위함이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합법적으로 승리를 거두어야 상금을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의 사탄과 죽음에 대한 싸움은 그리스도의 싸움과 흡사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도 그의 승리를 뒤따르며 죽음을 무로 돌리기 위해서이다. 그리스도의 승리가 특유한 승리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어서는 아니 된다. 그리스도의 승리가 정당한 승리이며 인간성이 합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사탄이 같은 인간성에 있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서도 정복을 당한다는 것을 보이게 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피택자들에 대한 사탄의 공격은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공격과 모든 점에 있어서 병행된다. 그의 창조자는 그의 이 공격을 강제로 억제하지 않으신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모든 능력을 다하여 하나님의 피택자들을 공격하며, 그의 모든 악함을 나타내고, 온갖 잔인한 고통으로 저들을 고문한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저들은 정복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가 성도들에게 부당하게 초래한 죽음으로 인하여 사탄의 우월성은 완전히 무시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그를 정당한 심판에 처하셨다. 그는 우리를 부당하게 핍박하였고, 우리를 파멸키 위하여 공연히 싸웠다. 하나님을 적대하고 그의 모든 성도들을 적대하는 이 모든 그의 계교로 인하여, 그의 기만으로 인하여, 모든 종류의 감사치 않음과 교만과 폭정으로 인하여 그는 의로운 심판을 받는 것이다.
그는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하도록 내버려 두신다. 그리고 성도들은 순종 가운데 고난을 참음으로써 사탄은 때가 그에게 주어져 왔고, 이것은 심판의 날까지 이른다. 그러나 심판의 날에 그는 완전 심판받게 될 것이며, 의로운 자들로부터 완전히 구별되게 될 것이다. 그 때에는 폭정(tyranny)에 그와 함께 참여한 자들까지도 사람을 미워하고 그를 정죄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하나님의 공의는 마침내 완전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된 후에
모든 것이 다 잘 된 것을 보고서. 우리는 오는 세상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때에는 그 즐거움을 때앗긴 것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게 되며, 이 이상 더 교훈을 받을 필요도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진실로 네스토리우스에 있어서 가장 필요하였던 것은 하나님의 공의가 완전히 이 땅에 이루어지며 모든 폭정 (tyranny)이 보복되는 일이었다. 그는 '모든 것이 다 잘되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날을 기다려 마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을 빼앗으려는 원수 사탄이 그리스도와 모든 성도의 완전한 순종과 인내 앞에 결국 완전히 패배당하고 하나님의 심판이 완성되는 것, 이것이 곧 그에게 있어서는 구원이었다. 이리하여 가장 엄격한 (rigoristic) 신학을 그는 세웠던 것이다. “일어서, 걸으라, 진실로 너는 걷도록 고침을 받았느니라” 이것이 네스토리우스의 금언이었다. '순종’, ‘순종의 형상’ 이것이 그의 사상이었고, 생활이었고, 생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