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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11)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강은 드디어 바다가 되어 하늘과 만나게 되나니!
☆ [종주 순례(연 4일째)] * 제5구간-① (청량산→ 단천교) ☆
▶ 2020년 08월 17일 (월요일)
☆… 이른 아침 (06:00) 청량산 입구의 숙소인 ‘하늘정원’(팬션)을 나왔다. 오늘은 청량산에서 출발하여 낙동강 물줄기를 따라 ‘퇴계 선생 예던 길’을 걸을 것이다. ‘오늘의 낙동강 종주’는 도산의 ‘퇴계 선생’을 뵈러 가는 여정이다. 식당에서 간단하게 김밥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큰 길(35번 도로)에 나오니, 고요한 아침, 낙동강에는 아침안개가 피어오르고, 청량교 너머에 솟은 청량산은 짙은 안개에 싸여 있었다. 안개 낀 강과 산이 어우러져 그려내는 산천의 풍경이 한 폭의 수묵화(水墨畵) 같다. 고요하고 유현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비경이다. 맑은 기운이 천지에 가득하고 신선한 공기가 폐부에 스며든다. 청량산은 깊은 묵언으로 아침을 열고, 홀로 가는 ‘낙동강 길손’을 조용히 배웅하고 있었다.
□ 2020.08.17.(월) [낙동강 종주 오늘의 여정] 청량산 ~ 도산서원 ~ 안동댐
낙동강 종주 제5구간은 세 개의 소 구간으로 나누어 진행된다. ① 낙동강 청량산~단천교[퇴계 예던 길] 구간, ② 단천교~퇴계묘소~퇴계종택[퇴계의 삶과 철학] 구간, ③ 도산서원~안동댐~안동역[퇴계의 학문과 교육 그리고 안동댐] 구간으로 나누어 진행한다. 우선 오늘 1단계 여정은, ‘퇴계 예던 길’이다. 퇴계 선생이 어린 시절부터 만년에 이르기까지 안동 ‘도산’에서 낙동강을 따라 봉화군 명호면 ‘청량산’까지 오가던 길이다. … 오늘 나는 600년 전 선생의 숨결을 따라 걷는다!
* [청량산 입구 ‘하늘정원’ 팬션](06:00)→ 강 따라(35번 도로)→ 가송리 삼거리→ (-농암종택·분강서원)→ 가송교(‘고산정’ 갈림길)→ [안동선비순례길 5코스 '예던 길‘]→ 가사리 ’월명정‘→ 낙동강 절벽길→ 벽력암 전망대→ 맹개마을→ 백운지→ 단천교→ (928도로)→ 고개 너머→ 육사 시비공원(목재고택)→ 이육사문학관→ 수졸당→ 퇴계선생 묘소→ (928도로)→ 상계교(-계상서당)→ 퇴계종택→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산길)→ 도산서원로(’도산십이곡‘ 시비)→ 도산서원 입구 주차장(-도산서원)→ (애일당)→ (35번로) 분천리 도산서원 삼거리→ 도산면 동부리 삼거리(-안동호반 월천서당)→ 도산면 서부리(-예안향교)→ 안동시 상아동 사거리(하차)→ 산너머 길[안동 북순환로]→ 외야천-월영교-(안동댐)→ 안동 강변길-[저녁식사]→ 안동역(19:25)
☆… 오전 6시 10분, 오늘의 트레킹에 돌입했다. 봉화군 청량산에서 안동 도산면 가송리(갈림길)까지는, 낙동강 물길과 나란히 가는 35번 도로를 따라 걷는다. 가송리 삼거리 도착했다. 이제 낙동강 여정은 경상북도 ‘안동시 권역’에 접어들었다. ‘퇴계 예던 길’은, 여기 가송리에서 서쪽으로 고리천을 따라 도산(면)으로 가는 35번 도로를 버리고, 낙동강 물길을 따라서 이어진다. 길목의 강변에 있는 ‘농암종택’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이정표의 [5코스]가 가송교 건너 내가 택한 [퇴계예던 길 2코스]
* [낙동강 ‘퇴계 예던 길’ 제2코스]→단천교 → [원천]→ [퇴계묘소]→ [종택]
☆… 낙동강 물줄기를 따라 ‘도산과 청량산을 잇는’ 퇴계 예던 길은 세 개의 코스가 있다.
* [제1코스]☞ [농암종택-징검다리 길]▶ 청량산→ 가송교 건너지 않고→ 농암종택→ 낙동강[징검다리]→ 맹개마을→ 백운지→ 단천교→ 원천(이육사문학관)→ 퇴계종택]
* [제2코스]☞ [축융봉 강안의 절벽 길]▶ 청량산→ 가송교 건너→ 가사리마을→ 월명정→ [강안 절벽의 산길→ 벽력암 전망대]→ 맹개마을→ 백운지→ 단천교→ 원천(이육사문학관)→ 퇴계종택]
* [제3코스]☞ [건지산을 넘어가는 산길]▶ 청량산→ 가송교 앞→ 가송민박(-농암종택 갈림)→ 농암종택 뒷산 [500고지 건지산 산길]→ 청량산 조망대→ 단천교→ 원천(이육사문학관)→ 퇴계종택]
이 중 빠르고 제일 편한 길은 [제1코스]이다. 그런데 이 길은 낙동강 물이 불으면 징검다리가 물에 잠긴다. 오늘은 물이 불어 건너갈 수가 없다. [제3코스]는 가송교에서 낙동강을 건너지 않고 농암종택의 뒷산인 건지산 능선을 따라 가는 길인데, 500고지의 산을 오르내려야 하는 힘든 산길이다.
* [제2코스]는 가송교를 건너, 가사리마을[月明亭]에서 강안을 따라가는 맹개(매내)마을까지의 벼랑의 산길인데, 비록 낙동강 절벽이 험하고 위험하기도 하지만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의 아름다운 풍경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조망하면서 그 강물을 가슴에 품을 수 있는 코스이다. 지형으로 말하면, 농암종택 맞은 편 축융봉 절벽에 난 벼랑의 산길이다. 절벽 위 ‘벽력암 조망대’에 서면, 유장한 낙동강의 풍경과 그 주변의 아름다운 산수 그리고 ‘농암종택’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안내판 [안동 선비순례길 5코스] ☞ 내가 가는 [퇴계 예던 길 2코스]
☆… 오늘 나는 ‘퇴계 예던 길’ [제2코스]를 택하여 종주에 들어갔다. [제1코스]가 제일 빠르고 쉬운 길이기는 하지만, ‘오늘 같은 날은 강물이 불어 건너갈 수 없다.’ 비록 물이 적어 그 징검다리를 건널 수 있다 하더라도 나는 그 길을 가지 않는다. [제3코스]는 강에서 멀리 떨어진 산길이라 낙동강을 따라 종주하는 의미가 적고, 내가 택한 ‘예던 길’ [제2코스]는 비록 멀고 힘들기는 하지만 가장 강과 가까이 연해 있으며 경치가 아름다운 코스이기 때문이다. 가사리 마을 입구의 안내판에서는 이 ‘예던 길’ [제2코스]를 ‘안동 선비순례길 5코스’라고 명명하여 개략도와 코스를 게시해 놓았다. (선비순례길 5코스는 고산정에서 시작하여, 단천교→ 칼선대→ 왕모산성까지가 이어지는 코스이다.)
* [고산정(孤山亭)] — 퇴계 선생도 자주 찾았던 가송협 절경의 정자
31번 국도 가송리 삼거리에서 한참 내려가면 ‘가송교’가 있다. 이른 아침, 물안개가 자욱한 가송교, 여기에서 낙동강을 건넌다. ‘퇴계 예던 길’ 제2코스로 접어든 것이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왼쪽(0.4km)으로 물길을 따라 올라가면, 강안의 절벽 아래 ‘고산정(孤山亭)’이 있다.
孤山亭
고산정은 정유재란 때 안동 수성장으로 활약한 바 있는 성성재(惺惺齋) 금난수(琴蘭秀, 1530~1604)의 정자이다. 퇴계 이황(李滉)의 제자인 금난수는 당시 안동의 명승지 가운데 한 곳인 이곳 가송협(佳松峽, 아름다운 소나무가 있는 협곡)의 절벽 아래에 이 정자를 짓고 ‘일동정사(日東精舍)’라 불렀다. 정자의 주위에는 외병산(外屛山)과 내병산(內屛山)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낙동강 주변의 송림과 함께 독산(獨山)이 솟아 있어 절경을 이루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의 기와집이다. 퇴계와 금난수의 시(詩)가 현판으로 걸려 있다.
고산정-낙동강-독산
금난수(琴蘭秀)는 35세인 1564년(명종 19)에 이미 안동 예안면(禮安面) 부포리에 있는 현재의 ‘성성재종택’(경북문화재자료 264) 아래쪽에 성재(惺齋)라는 정자를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고산정(孤山亭)은 그 후에 지은 것으로, 주변 경관이 뛰어나 퇴계 선생을 비롯한 선비들의 내왕이 잦았던 곳이다. 정자 앞으로 낙동강 강물이 시원하게 흐른다. 예전에는 이곳에 학(鶴)이 많이 서식했다고 하나 지금은 없다. 정자 왼쪽에 조선총독부에서 세운 조학번식지(鳥鶴蕃殖地)라는 천연기념물 비가 서 있다.
평소 금난수를 아낀 퇴계 선생은 경치가 아름다운 고산정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퇴계의 시 「서고산벽(書孤山壁)」「유고산(遊孤山)」「고산견금문원(孤山見琴聞遠)」등은 이 정자에서 지었다. 고산정에 보존된 이황의 시「서고산벽(書孤山壁)」이다.
일동이라 그 주인 금 씨란 이가 日洞主人琴氏子
지금 있나 강 건너로 물어보았더니 隔水呼問今在否
쟁기꾼은 손 저으며 내 말 못 들은 듯 耕夫揮手語不聞
구름 걸린 산 바라보며 한참을 기다렸네 愴望雲山獨坐久 ─《退溪集》(권2)
* [가사리 월명정에서 강안을 따라가는 길] — 안개가 피어오르는 유현한 풍경
☆… 오전 7시 15분, 가사리마을에서 내려와, 낙동강 강안에 있는 ‘월명정’에서 본격적인 트레킹에 돌입했다. ‘월명정(月明亭)은 휘영청 달 밝은 날이면 동쪽 축융봉을 넘어온 달이 낙동강 수면에 비치어 온 강변을 환하게 밝힌다’는 곳이다. 그러나 오늘, 이른 아침의 월명정 강안(江岸)은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었다. 신비스럽고 유현한 풍경이다. 이곳에 [이정표](고산정 0.8km←[월영정]→단천교 9.1km)가 있다. 신발끈을 조이고 복장을 정비하고 조용히 발걸음을 옮긴다.
가송교
산행의 들머리 [월명정]
태초의 정적이 흐르는 고요한 아침이다. 신선한 강안의 공기, 쾌조의 발걸음이다. 길은 강의 가장자리 둔덕에 나 있었다. 아직 햇살이 들지 않는 응달이다. 비록 강가에 뽀얀 안개가 흐르고 있었지만 서늘하고 신선한 아침 공기가 머리를 맑게 한다. 장마철, 사람이 다니지 않는 강변길은 잡초가 무성한 풀밭이다. 얼마가지 않아 산길에는 홍수에 쓸려온 쓰레기가 가득했다. 일전의 폭우가 내렸을 때 강물이 이 길 위에까지 범람한 것이었다. 아침 이슬을 흠뻑 머금고 있는 풀밭 길, 등산화를 적시고 바지를 적신다. 물이 고인 곳이 많아 걸음마다 철벅거린다. 그러나 발아래에서 넘실거리며 흐르는 강물이 몸과 마음을 유연하게 한다.
* [혼자서 가는 길, 낙동강 비경] — ‘흐르는 강물처럼’ 인생을 생각하다
☆… 혼자서 걷는 길, 길의 앞뒤 어디에도 인적은 없다. 고도를 높여가는 절벽길이 나왔다. 원주(圓柱)의 지지대를 박아 밧줄로 연결한 가드레일이 설치되어 있다. 가파른 바윗길을 올라, 절벽 위에 섰다. 돌아보니 낙동강 유장(悠長)한 강물 위에 안개가 피어나, 가송교에서 청량산-축융봉 허리에까지 뽀얀 강에는 안개가 띠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강 아래쪽을 바라보니 호수 같은 강물과 강안의 절벽 길에도 안개가 자욱하다. 자연은 한 폭의 유연한 수묵화를 그리고 있었다. 지금 이 시간 이곳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참으로 아름다운 낙동강의 비경(秘境)이다. 강은 이렇게 스스로 절묘한 신비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낙동강 물안개와 청량산
… 지금 이 시간, 나는 없다. 그냥 자연이 있을 뿐이다. 나의 존재가 의식되지 않는 이 순수한 무아지경(無我之境), 혼연히 무구(無垢)한 경지. 호젓하고 맑은 기운이 온몸을 감싼다. 지극한 자연 속에서는 내가 의식되지 않는다. 모든 생명은 자연의 섭리일 뿐이다.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무연히 흐르는 나의 생각 속에 물의 언어가 떠오른다. 무작위다. 그냥 ‘흐르는 강물처럼 —’이라고 하자!
흐르는 강물처럼
우리 살아가는 삶의 길
저 물처럼 흘러서 가자
가다보면 만날 때도 있고
가다보면 헤어질 때도 있는 것
함께 갈 땐 너와 내가 따로 없는
하나로 흘러가고
갈림길일 땐 미움 없는 그리움으로
조용히 자기의 길을 가자
아픔도 삭이고 눈물도 삼키고
미움도 지우고, 그러나 애틋한 사랑 …
흐르는 물처럼 가자
헤어졌다가도 다시 만나면
거리낌없이 하나가 되는
너와 나 그리하여
우리가 되는 ―
* [산속의 숲길, 비어 있는 벤치] — 기다리는 삶이 비록 부조리하다고 해도 …
☆… 오전 7시 40분, 강물 가까이 내려온 길이 다시 산으로 올라간다. 바위가 아니라 흙길로 올라가는 산길이다. 한참을 올라갔다. 붕긋한 고갯마루가 제법 높아서 강물이 저만큼 아래로 내려다보인다. 거기 강을 향하여 두 개의 벤치가 있었다. 누군가를 오래도록 기다리고 있는 빈 벤치 ― 문득 샤무엘 베케트의「고도를 기다리며」가 떠올랐다. …
이 작품은 시지포스가 신의 형벌을 받아 평생 바위를 산 정상을 향해 밀어 올리는 것처럼, 두 부랑자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50년 동안이나 오지도 않는 ‘고도’를 계속 기다리고 있다는 내용이다. 산 속에 있는 두 개의 빈 벤치를 바라보며 기다림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무엇인가를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희망이니 꿈이니 하는 용어를 쓰면서 그것을 위하여[기다리며] 오늘의 삶을 영위해 나간다. S. 베케트도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의 삶을 단순한 ‘기다림’으로 정의를 내리고 그 기다림 속에서 인간존재의 부조리성을 보여준다.
잠시 비어있는 벤치에 앉았다. 고요한 시간이다. 나무들 사이로 강을 내려다본다. 비록 인생이 부조리하다고 해도, 어느 새 아침 해가 떠서 건너편 산에는 밝은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다. 인적 없는 숲 속 쾌적하고 은은한 시간이 감미롭다. 그렇게 머물다가 다시 산길을 걷는다. 홀로 걷는 고요한 숲속의 길이다. 인생은 본질적으로 홀로 가는 길이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순결한 자유라고나 할까. 평소 일상에서 끓는 오만 가지 생각과 오욕칠정이 다 어디로 사라졌는가.
* [청정한 산속의 숲길] — 화사한 햇살, 유유히 흐르는 강물의 풍경
길목에 예쁘게 디자인한 이정표[←고산정 2.0km+맹개마을 1.7km→]가 있다. 산길을 내려가다 보니 아, 길이 끊어졌다. 작은 골짜기가 폭우에 침식되어 깊은 벼랑을 이루고 있었다. 잠시 난감했지만 비교적 완만한 사면을 찾아 겨우 통과했다. 길은 다시 산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통나무를 잘라 계단을 만들어놓았다. 길은 가팔랐다. 그리고 길었다. 숲속에 맑은 햇살이 스며든다. 화창하고 밝은 날이다. 연초록의 나뭇잎이 산뜻하고 청정한 질감으로 다가온다. 울창한 나뭇잎 사이로 아련히 강이 내려다보이고, 강 건너 옹기종기 ‘농암종택’의 기와집도 눈에 들어왔다.
* [벽력암 나무테크 전망대의 망중한] — ‘조건 없는 사랑이 아름답다!’
☆… 오전 8시 16분, ‘벽력암 전망대’에 도착했다. 가송마을에서 출발하여 1시간이 소요되었다. 머뭇거리지 않고 걸어온 결과였다. ‘벽력암’은 천인단애의 높은 암벽이다. 그 절벽 위에 장방형의 널따란 나무테크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강 쪽으로 활짝 열린 시야, 가송마을에서 흘러내려오는 낙동강의 유장한 풍경이 그야말로 진경산수화다. 깊게 흐르는 강의 좌우에 첩첩이 솟아있는 산봉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맞은 편 산은 예던 길 제2코스가 지나는 ‘건지산’이다. 무엇보다, 바로 강 건너 건지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강안에 자리 잡고 있는 고풍스러운 ‘농암종택’의 기와집이 고즈넉하다.
청명한 하늘 아래 밝은 햇살이 내리는 강변의 풍경은 눈부시게 화사했다. 서늘하게 불어오는 부드러운 강바람이 산행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준다. 물을 마시고 잠시 다리를 풀어놓았다. 혼자이기에 느끼는 호젓하고 느긋한 이 자유가 좋다. 이 무위자연의 망중한이 깊어,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데 가슴 속은 무엇인가 넉넉하고 충만한 느낌이다. 조용히 하늘을 우러러보고 숙연이 강물을 내려다본다. 누군가 ‘그 멀고 먼 낙동강은 왜 가는데?’ 했을 때, 난 그 자리에서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말하지 않았다. 사실 그때 김상용의 싯구가 입가에 번졌을 뿐이다. ‘(왜 사냐건) / 웃지요’ 그렇다, 사는 데 무슨 이유가 필요한가. 서초동 친구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그냥!’이다. 삶이나 사랑에서 조건이나 이유가 없다. 인생에서 조건이 붙기 시작하면 삶은 치사해지기 시작한다. 조건 없는 사랑이 아름답다!
* [농암종택(聾巖宗宅)을 바라보며] — 안동댐 수몰로 도산 아래 분천에서 옮겨 지은 집
‘농암종택’은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의 종택(宗宅)이다. 이현보는 1504년(연산군 10)에 사간원 정언으로 있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 안동으로 유배되었다.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원래 종택이 있던 분천마을이 수몰되어 안동의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있던 종택과 사당, 긍구당(肯構堂)을 영천 이씨 문중의 종손 이성원이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2007년에 분강서원(汾江書院)도 옮겨와, 지금은 분강촌(汾江村)으로 불리며,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어 있다. 이현보의「어부가」는 조선시대 시가문학의 길을 열었다.
강 건너편 [농암종택]
*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 효심이 지극한 선비, 영남의 강호가도(江湖歌道)
이현보(1467년(세조 13)~1555년(명종 10)는 본관은 영천(永川) 이(李)씨이며, 호가 농암(聾巖)이다. 1498년(연산군 4)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32세에 벼슬길에 올라 예문관검열·춘추관기사관·예문관봉교 등을 거쳐, 1504년(연산군 10) 38세 때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이때에 서연관의 비행을 탄핵했다가 안동에 유배됐으나 중종반정으로 지평에 복직된다. 밀양부사·안동부사·충주목사를 지냈고, 1523년(중종 18)에는 성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이후 병조참지·동부승지·부제학 등을 거쳐 대구부윤·경주부윤·경상도관찰사·형조참판·호조참판을 지냈다. 1542년(중종 37) 76세 때 지중추부사에 제수됐으나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둔다. 이황(李滉)·황준량(黃俊良) 등과 교유했으며 고향에 돌아와서는 시를 지으며 한가롭게 보냈다. 농암은 퇴계(1501~1570)보다 34살이 많지만, 의기상통하여 우정이 매우 깊었다.
저서로는 『농암집』이 있으며, 작품으로는 전하여오던 「어부가(漁父歌)」를 장가 9장, 단가 5장으로 고쳐 지은 것과 「효빈가(效嚬歌)」·「농암가(聾巖歌)」·「생일가(生日歌)」 등의 시조작품 8수가 전한다. 조선시대에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인 문인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문학사에서 강호시조의 작가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농암에 올라보니 노안(老眼)이 유명(猶明)이로다
인사(人事)ㅣ 변한들 산천이딴 가샐가
암전(巖前) 모수모구(某水某丘)ㅣ 어제 본듯하여라”
농암은 산수(山水)를 특히 좋아하여 죽장망혜(竹杖芒鞋)로 산림을 헤매고 산을 오르며 분강(汾江)에 배를 띄우고 당대의 명사들과 어울려 시를 짓고 노래 부르기를 즐겨했다.「어부가」양편(兩篇)은 이 같은 그의 강호생활을 솔직하게 반영한 노랫말이다. 특히「어부가」를 다듬는데 퇴계가 깊이 관련했는데, 이는「어부가」가 농암 이후 남인계(南人系)의 대표적 가요로 자리 잡은 원인이 되었다. 16세기 이후 남인계의 대표적 가요는 농암의「어부가」와 퇴계의「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이고 서인계(西人系)의 주된 가요는 율곡의「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였다. (「고전문학사전」, 권영민)
* [‘맹개마을’을 지나며] — 퇴계 선생이 혼자, 또는 제자들과 다니시던 길
☆… 벽력암 전망대에서 넓은 길을 따라 조금 내려오면 ‘맹개(매내)마을’이다. 별장인 듯한, 멋진 집도 있고 몇 채의 농가도 있다. 맹개마을은 강과 고도가 비슷한 강변 마을이다. 강가의 너른 농지도 있다. 여기에서 낙동강 징검다리를 건너가면 학소대 그리고 바로 농암종택이다. 이 징검다리 길은 ‘퇴계 예던길 제1코스’에 해당한다. 여기서부터 하류의 단천교까지는 모두 한 길이다. 이 길은 퇴계 선생이 12세부터 숙부 이우 선생에게 학문을 배우기 위해 청량산 오산당(지금의 청량정사)까지 걸었던 길이다. 선생은 노년에도 청량산 50리 길을 제자들과 함께 걸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를 존경하는 후학들이 먼 길을 찾아와 옛 스승의 발자취를 따라 이 길을 거닐었다. 맹개마을은 내가 걸어온 가사리 마을과 단천교 여정의 중간지점 쯤 된다. 동네를 지나 넓은 밭 가장자리에 나 있는 길을 걷는다. 밭이 끝나는 자리에서 산으로 올라가는 나무테크 계단이 앞을 가로막는다. 산길은 아주 가팔랐다. 참으로 무궁무진 산위로 이어지는 가파른 길이었다.
* [다시 산으로 올라가는 길] — 그리고 가파른 절벽길을 지나다
☆… 오전 8시 57분, 낙동강이 아득히 내려다보이는 고지의 숲속에 나무테크 전망대가 있다. 저만치 발아래에서 흐르는 낙동강의 푸른 물결을 조망하며 땀을 식히는 곳이다. 전망대에서 바라보이는 강 건너 산이 ‘건지산’이다. 강을 배경으로 하여 벼랑에 서 있는 소나무가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낸다. …
다시 이어지는 길은 바위절벽 아래의 벼랑길이다. 작은 골짜기를 건너는 테크 다리를 지나, 숲속의 오솔길을 걷는다. 아직까지 몸 상태는 좋았다. … 오늘은 아침부터 스틱이 없었다. 어제까지 나의 다리에 큰 도우미 역할을 했던 스틱, … 어떻게 되었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어제 이봉원 님 경운기에 두고 내린 것이었다. 오늘 아침, 어제 확인했던 전화번호로 전화를 했더니, 스틱은 자기가 가지고 있다면서 반색을 했다. 그리고 흔쾌히 오늘 낮 12시에 퇴계종택 앞으로 와서 전해주겠단다. 나의 부주의로 인해 괜히 사람을 번거롭게 하여 여간 미안하지 않았다. 선선히 응해주는 마음이 고맙기 그지없다.
* [퇴계 예던 길(산길)을 벗어나 단천교] — ‘내살미’-‘백운지’ 마을 앞을 지나는 포장도로
☆… 오전 9시 6분, 산속의 오솔길을 벗어나서, 차가 다닐 수 있는 산간도로에 나섰다. 이제 험한 산길이 끝난 것이다. 강물은 계속해서 길의 오른쪽 아래에서 흐른다. 유속이 느려 호수처럼 맑은 수면, 수량이 많아 넘실거리는 풍경이 여유가 있다. 좁은 흙길 도로가 끝나고, 2차선 아스팔트 도로가 시작되었다. 강변의 직선도로이다. 길의 좌측에는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고 띄엄띄엄 농가가 있다. ‘내살미’ 마을이다. 길가의 밭에는 잘 익은 수박이 뒹굴기도 하고, 과수원도 있고 인삼밭도 있었다.
축륭봉 벼랑길을 넘어온 강변길
단천교
강변에 2층 다락의 팔각정이 있어 잠시 다리를 풀고 쉬었다. 거기에는 강변드라이브를 나온 중년의 부부가 있었다.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하다가 낙동강 종주 여정을 이야기했더니 성원의 말을 하면서 시원한 두유 한 캡을 건네주었다. 시원하고 달고 고소했다. 초면부지의 길손에 대한 그 정성이 고마웠다. 건투를 빌어주는 두 분과 인사를 나누고 길을 나섰다. 오전 9시 25분, 백운지 마을버스(안동 567번) 정류장을 지났다. 안동역을 시발점으로 도산면사무소-도산서원 입구-원촌마을-단천교를 경유하여 이곳까지 왕래하는 버스의 종점이다.
* [‘단천교’ 건너 둑방길] — ‘단천마을’을 돌아서 가는 이육사 문학관 길[원촌]
☆… 오전 9시 35분, ‘단천교’를 건넜다. 바로 단천마을이다. 이제 낙동강은 왼쪽 아래로 흐른다. 다리를 건너면 928번 지방도로가 이어진다. 고개 넘어 원촌-도산으로 가는 2차선 아스팔트길이다. 이제 ‘도산’으로 가는 빠른 길은 이 도로를 따라 가면 된다. 낙동강은 왼쪽에서 흘러내려가 멀리 우회하여 도산서원 앞으로 이르게 된다. 그런데 단천교를 건너서 나는 928도로가 아닌, 강변을 따라가는 길을 택하여 걸었다. 단천마을 앞, 강을 따라가는 둑방길이다. 그 길목 입구에 ‘이육사 문학관 길’이라고 이정표를 세워놓았다. 찻길을 피해 조용한 탐방로[낙동강 선비 예던길 제4코스]를 개설한 것이다. 분명 많이 돌아서 가는 길임을 알면서 찻길보다는 호젓한 길을 택하여 걸음을 옮겨 놓았다.
화창한 날씨, 햇살이 좀 따갑기는 했지만 기분이 좋다. 그렇게 약 2km쯤 내려와서 단천마을 안으로 들어와 고갯마루[뒷재]에 이르러 928번 도로와 만난다. 오전 10시 7분이었다. 도로를 따라오면 10분 정도면 될 것을 약 40분 넘게 돌아서 온 것이다. 낙동강 ‘종주(從走)’라는 근본을 잃지 않았다. …♣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