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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것을 말하고 행할 수 있지만, 정직성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 율법의 중한 바 가운데 하나다. 그것은 자체의 가치, 곧 결과와 무관하게 가지고 있는 가치가 있다. 정직성은 최선의 정책으로 입증될 것이다. 고백적 교회들로부터-성경으로부터 추출된 신조 위에 세워진 교회들-떠나게 되면, 자유주의 설교자는 거의 자기 손아귀에 들어왔던 기회들, 곧 고백적 교회들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해 그 교회들의 성격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릴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만약 자유주의 진영이 정말로 교회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한다면, 복음적 그리스도인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었으므로, 우리는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주님을 부인하지 말아야 한다. 현재까지는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다. 교리적 기초가 복음주의 교회들의 현장에서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다. 또한 떠나야 하는 것이 ‘보수주의자’가 되지 말아야 할 매우 생생한 이유가 있는데, 바로 교회가 보유하고 있는 신탁재산이다.
복음적 교회들의 기금은 매우 분명한 신탁으로 유지되고 있다. 그것들은 성경과 신앙고백에 나타난 복음 전파를 위해 다양한 기구들에 맡겨졌다. 그것을 다른 목적에 사용하는 것은 신탁을 범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현재 상황이 비정상적이라는 사실이 인정되어야 한다. 이전 세대의 경건한 사람들이 복음 전파를 위해 바친 기금, 오늘날의 철저하게 복음주의적인 회중이 바친 기금의 일부가 복음적 신앙과 정반대의 것을 전파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이런 상황이 계속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이 어떻게 종료될 수 있을까? 최선의 방법은 자유주의 목사들이 고백적 교회들로부터 자발적으로 떠나는 것이다. 그들은 고백적 교회들의 고백을 명백한 역사적 의미에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목적이 다른 사람들이 한 조직 내에서 억지로 일치를 이루도록 강요당하는 것만큼 분란의 위험이 큰 상황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분리를 지지하는 것이 뻔뻔스러운 불관용의 예가 되지 않을까? 그런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반론은 비자발적 단체와 자발적 단체 사이의 차이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다. 비자발적 기관은 차이에 대해서 관용해야 하지만, 자발적 기관은 그 존재의 근본 목적에 관해서는 관용이 없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단체는 사라지는 것이다. 국가는 비자발적 기관이다. 개인은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국가의 일원이 된다. 국가는 개인이 선택하는 종교적 목적에 연합할 개인의 권리를 보호할 뿐이다.
복음주의 교회들은 자발적 단체 가운데 하나이다. 복음주의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어떤 메시지에 동의하고, 그 메시지를 전파하기 위한 목적으로 모였으며, 이것이 성경을 근거로 한 신조에 천명되어 있다. 메시지를 전파하기 위한 기본 목적을 가지고 형성된 단체가 그 메시지에 대항해서 싸우는 사람들에게 단체의 자원과 이름을 제공하는 것은 관용이 아니라, 부정직일 뿐이다. 그런데도 교리적 교회들의 이름으로- 그 헌장에서, 또한 거기서 안수를 받고자 하는 신청자들에게 요구하는 선서에서 명백히 교리적인 교회들- 비교리적 종교를 가르치도록 허용하는 것이 바로 그런 부정직이다. 교회는 정치적 클럽보다 더 정직했으면 했지 덜 정직해서는 안 된다.
자연주의적 자유주의 신학이 복음주의 교회에서 분리되면 교회의 규모는 당연히 크게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기드온의 3백명은 미디안을 향해 진군하기 위해 처음 모였던 3만2천 명보다 더 강력했다. 분명 현재는 치명적인 결점으로 인해 몹시 걱정되는 상황이다. 교회 기관들이 성경과 역사적 신조들 속에서 발견되는 복음만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복음의 정반대가 될 수밖에 없는 형태의 종교적 가르침을 전파하고 있는 것을 그리스도인이 발견하고 경악하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그것이 참되든 거짓되든 단순한 ‘이단’이 아니다. 즉 기독교적 가르침의 몇 가지 요소에서 빗나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자유주의 신학은 전혀 다른 뿌리에서 나왔으며, 본질적으로 자체의 통일된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사람이 믿음의 한 부분을 포기했다고 해서 그의 믿음 전체가 파괴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영적 움직임을 검토할 수 있는 참된 방법은 논리적 관계 속에 있다. 논리는 역동성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생각의 논리적 함의는 조만간 일어나게 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현재 존재하고 있는 자연주의적 자유주의 신학은 상당히 통일된 독립적 체계를 가진 현상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독교 신앙의 논리적 잔재를 자체의 체계 속에서 점점 제거해 나갈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 인간, 권위의 자리, 그리고 구원의 길에 관해 기독교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또한 그것은 신학에서만이 아니라, 삶 전체에 있어서도 기독교와 다르다.
자유주의 신학이 기독교 교제 속으로 들어오려면 지성의 변화만큼 완전한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생각의 교제가 사라진 곳에 감정의 교제, 즉 머리의 교제와 구별되는 심장의 교제가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변화를 하나님께서 일으키시기를! 그러나 현재의 상황이 무시되어서는 안 되며, 직접 대면하여 처리되어야 한다. 기독교는 뼛속까지 반기독교적인 운동에 의해 내부로부터 공격당하고 있다.
이런 시대에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무엇일까? 특히 교회 안에서 책임을 맡은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무엇일가?
첫째, 그들은 지적, 영적 전투를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을 격려해야 한다. 기독교를 변호하는 일보다는 기독교를 전파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변호는 덜 하고 전파를 더 많이 할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그 훨씬 이상의 것을 의미할 때가 많다. 그들이 정말 의도하는 것은 복음을 지적으로 변호하는 활동 전체를 그만두게 하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의 말은 큰 전투를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 타격을 가하는 것이다.
사실은 복음의 변호에 더 많은 시간이 사용되어야 한다. 진리는 오류에 대비되지 않고서는 선명하게 제시되지 못한다. 실제로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이 논쟁으로 되어 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난 오류들 때문에 복음적 진리가 선포되었다. 일은 항상 이렇게 진행될 것이다. 이는 인간 마음의 근본적 법칙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현재의 위기를 계산에 넣어야 한다. 기독교를 변호하지 않고도 전파할 수 있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날은 지나갔다.
복음의 반대자들이 교회를 거의 장악한 지금, 복음의 변호를 조금이라도 피하는 것은 순전히 주님에 대한 불충성일 뿐이다. 거의 오늘날의 위기에 비교될 만한 큰 위기가 과거 교회사에 있었다. 그중 하나가 2세기에 있었는데, 영지주의자들에 의해 교회의 생명 자체가 위협을 받았다. 또 다른 위기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거의 잊혀지던 중세에 있었다. 그런 위기의 때에 하나님은 항상 교회를 건지셨다. 그러나 신학적 평화주의자를 사용해서 건지신 것이 아니라, 진리를 위해 싸우는 끈질긴 논쟁자들을 사용해 건지셨다.
둘째, 교회 안에서 책임을 맡은 그리스도인들은 사역 신정차들의 자질을 판단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위하는가, 그리스도에 대적하는가?” 하는 질문이 안수 신청자들 심사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일어나야 한다. 이 문제를 애매하게 만들려는 시도가 때로 있어 왔다. “신청자들이 진리의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그를 보내서 선포할 뿐 아니라 배우게도 하자”라고 말하곤 했다.
이렇게 되어 복음의 또 다른 반대자가 교회 회의에 들여보내지고, 또 다른 거짓 선지자가 죄인들에게 자기 의라는 비참한 누더기로 자신을 감싸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으로 나아가라고 용기를 주고 있다. 그런 행동은 실제로는 신청자 자신에게도 ‘친절한’ 것이 아니다. 부정직한 생활로 들어가도록 격려하는 것은 절대로 친절한 일이 아니다. 사람을 위해 철저히 거짓된 친절을 베풀고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향한 자기들의 충성을 기꺼이 포기하는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셋째, 교회 안에서 책임을 맡은 그리스도인들은 회중의 일원이라는 위치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을 보여야 한다. 이 문제는 목사를 선택하는 일과 관련해 자주 일어난다. 이런저런 사람이 놀라운 설교자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의 설교의 내용이 무엇인가? 그의 설교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충만한가? 대답은 종종 애매하다. 그 문제의 설교자가 교회 내에서 좋은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으며, 교리 혹은 은혜를 부인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목사직으로 초청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하지만 그런 소극적 확신으로 만족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단지 ‘부정하지 않는’ 정도의 설교자로 만족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그런 만족감을 허물어 버리시기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정하지 않는’ 사람들의 목회 속에서 사람들이 멸망당하고 있다.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하나님께 우리에게 십자가 부인하기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불이 붙은 설교자들, 그들의 전 삶이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 주신 복되신 구주에 대한 불타는 감사의 제물이 되는 설교자를 보내 주시기를!
넷째, 가장 중요한 것으로, 기독교 교육의 갱신이 있어야 한다. 무수히 많은 경우에 사람들이 기독교를 거부하는 단순한 이유는, 그들에게 기독교가 무엇인지에 대한 조금의 인식도 없다는 것이다. 최근 교회사의 현저한 사실은 교회 안에서 무지가 끔찍할 정도로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진전은 부분적으로 교육의 전반적인 쇠퇴에 기인한다.
문학과 역사에 관한 한 그러하다. 오늘날 학교 교육은 가장 저항이 적은 노선을 따라야 하며, 마음속에 무엇인가를 넣어 주기 전에 마음에서 어떤 것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황당한 관념에 의해 무너지고 있다. 또한 내용을 희생시키고 방법론만을 강조하는 경향, 고도로 정신적인 인류의 유산을 희생시키고 물질적으로 유용한 것만을 강조하는 경향에 의해 교육이 무너지고 있다. 나아가서 이런 개탄스러운 경향이 국가의 통제가 음흉하게 확대됨으로써 영속화될 위험이 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무지가 특별히 확산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교육에서의 일반적인 쇠퇴 이상의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교회 안의 무지의 확산은, 기독교는 삶일 뿐, 교리이기까지 한 것은 아니라는 거짓된 관념의 논리적이고 필연적인 결과다. 만약 기독교가 교리가 아니라면 당연히 기독교에 교육은 불필요할 것이다. 이 악은 치료되어야 한다. 이 악은 우선적으로 가정에서 기독교 교육의 갱신에 의해 치료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교회가 발견할 수 있는 모든 교육적 수단에 의해서도 치료되어야 한다.
모든 진지한 그리스도인에게, 기독교 교육은 현재의 주된 책무다. 기독교가 무엇인지 사람들이 모른다면 기독교가 존속될 수 없다. 오늘날 사람들은 기독교에 반대하는 말을 풍부하게 들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렇게 공격받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어야 공평할 것이다.
오늘날 이런 대책들이 필요하다. 오늘날은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 진지하게 기도하면서 일해야 하는 시대다. 교회 안에 무서운 위기가 발생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복음적 교회의 사역 속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는 많은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다. 전통적 용어를 애매하게 사용함으로써, 견해의 차이를 단순한 성경 해석의 차이로 설명함으로써, 신앙의 근거 자체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올 수 있는 길이 확보된 것이다.
과거에 맞추는 허상은 벗어 버리고, 현재 발생하고 있는 참된 의미가 드러나도록 하자는 조짐들이 나타나고 있다. 현재 기독교 교육은 성경의 빗장을 공공연히 풀어 내던지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교리를 폐기된 개념으로 강등시켜 애매한 상태로 만들어 버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절망할 여지란 없다. 다만, 우리의 소망이 모래 위에 세워져서는 안 된다. 그 소망은 위험을 알지 못하는 무지 위에 세워져서도 안 되고, 오직 하나님의 귀한 약속 위에 세워져야 한다. 목사들뿐만 아니라 평신도들도, 이 시련의 때에 새로운 열심으로 하나님의 말씀 연구로 돌아와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전투는 사랑과 신실함으로 수행될 것이다. 파당과 개인적 적대감은 사라질 것이지만, 하늘에서 온 천사라 할지라도 십자가의 복된 복음과 다른 복음을 전파하면 거부될 것이다. 각 사람은 어느 편에 설지 결정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바른 결정을 내리게 하시기를!
가까운 미래에 어떤 일이 발생할지 우리는 섣불리 말할 수 없다 최후의 결과는 물론 분명하다. 하나님은 자신의 교회를 버리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용기를 시험하고 있는 지금 이때보다 더 어두운 시기에도 교회를 건져 내셨다. 어두운 시간이 지나면 새벽이 오게 되어 있다. 오늘날 이방 종교가 기독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교회 안으로 들어오고 있으나, 2세기에도 비슷한 싸움이 있었고 교회는 이겼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은 인간의 공로를 의지한다는 점에서 중세 율법주의와 유사하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때에 또 다른 종교개혁이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우리의 영혼은 시련을 당한다. 우리는 겸손한 자세로, 자기 피로 우리를 사신 구주만을 의지하면서 우리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을 뿐이다. 미래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으며,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실 수단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현재의 복음적 교회들의 사실을 직면하고, 아직 시간이 있을 때에 자신의 성실성을 회복하는 것이 그 방법일 수 있다. 한 순간도 낭비할 수 없다. 복음에 저항하는 세력이 거의 지배력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교회가 완전히 자연주의로 넘어가고, 영혼의 근본적인 필요가 현존하는 교회 내에서가 아니라 밖에서 만족되며, 결국 새로운 기독교 단체들이 형성될 수도 있다.
어떤 해결책이 나오든지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겸손히 모여서, 말로 다할 수 없는 은사로 인해 그리스도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경배하는 구원받은 남녀의 무리들이 어딘가에는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직 그런 무리들만이 영혼의 필요를 만족시킬 것이다. 오늘날 자주 잊혀지고 있지만, 인간의 마음에는 한 갈망이 있다. 바로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교제하기를 원하는 깊고 애처로운 갈망이다.
사람들은 기독교적인 연합, 조화, 협동에 대해 많이 듣는다. 그런데 이 연합은 주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연합, 혹은 고작해야 조작적이고 독재적인 위원회들의 연합이다. 이는 화평 안에서 이루는 성령의 연합과 얼마나 다른가!
오늘날과 같은 갈등의 시대에도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상 주위에 진정으로 모이는 회중들이 있다. 정말로 목사인 목사들이 있다. 그러나 많은 도시들에서 그런 회중을 찾기가 쉽지 않다. 세상의 갈등에 지친 사람들이 영혼의 안식을 위해 교회를 찾는다. 그러나 거기서 무엇을 발견하는가? 아, 너무도 자주, 사람들은 세상의 혼란을 그대로 발견하고 만다.
설교자는 은밀한 묵상과 능력의 자리에서 나오지 않고, 그의 메시지에는 하나님 말씀의 권위가 스며 있지 않으며, 인간의 지혜는 십자가의 영광 뒤로 멀리 감춰지지 않았고, 오히려 당시 사회 문제에 대한 인간의 의견 혹은 죄의 거대한 문제에 대한 손쉬운 해답이 있을 뿐이다. 세상의 전쟁이 심지어 하나님의 집 안에까지 들어와, 평안을 찾아온 사람의 마음은 슬픔에 젖게 되는 것이다.
분쟁으로부터 피할 피난처는 없는가? 어떤 사람이 와서 인생의 전투를 준비할 수 있는 그런 안식의 장소는 없는가? 두세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여서, 잠시나마 나라, 종족과 종족을 분리시키는 모든 것을 잊고, 인간의 자만심을 잊고, 전쟁의 열정을 잊고, 노사분쟁의 복잡한 문제들을 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서 넘치는 감사로 연합할 수 있는 곳은 없는가? 만약 그런 곳이 있다면, 거기가 바로 하나님의 집이며 천국의 입구다. 그리고 그 집의 문지방 아래에서, 지친 세상에 새 힘을 줄 강이 흘러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