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매화마을은 금년 3/8(금)부터 3/17(일)까지 제23회 광양매화축제를 개최한다. 매년 100만 인파가 몰려 축제기간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복잡하여 우리 일행은 복잡한 시기를 피하여 행사 직전에 찾아왔다.
우리는 섬진경로당 맞은편 도로변에 차를 잠시 세우고 내려 오후 2시가 막 지나 해설사의 안내를 받아 아래 안내도의 4번 추억으로 코스에 접어들었다.
1번 사랑으로 코스를 거쳐 포토존에 올라 단체 기념사진을 찍고 홍쌍리매실가와 대숲을 지나 쫓비산 가는 길 인근의 주막 매화밭 속의 야외식탁에 앉아 매실막걸리를 기울이는 풍류를 즐기기도 하였다.
이어 영화촬영지를 거쳐 전망대 정자에서 섬진강과 지리산을 배경으로 흐드러지게 핀 매화를 실컷 감상하며 도로변으로 내려와 약속시간 4시 30분에 오는 버스를 기다리는 순서로 산책을 즐겼다.
매화마을에서 버스에서 내리니 뜻밖에도 다압면의 김상균면장이 직접 우리를 영접하러 나왔다. 허규판회장과 인사를 나누고 행사 해설사가 나와 청매실농원 입구까지 친절한 동행 안내를 해준다.
김상균면장이 허규판회장과 인사를 나눈다.(14:01)
'홍쌍리매실가'라 쓰인 비석이 세워진 길을 따라 청매실농원으로 올라가며 해설사가 청매실농원과 홍쌍리명인에 대하여 자세한 설명을 해준다.
매화가 며칠만 더 있으면 축제기간 중 완전만개가 되겠으나 현재 상태로도 충분히 멋진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길가 좌우 곳곳에 매화를 소재로 한 시를 새긴 시비가 세워져있다.
이퇴계의 도수매(倒垂梅), 노천명의 설중매 시비다.
매화박물관은 축제기간에 문을 열기 위하여 오늘은 문을 닫아 놓았다고 한다.
포토존 주위에 피어난 매화를 담아보았다. 매화는 색깔에 따라 백매화, 홍매화, 청매화로 나뉜다고 하는데, 나는 눈이 어두워서인지 이번에 청매화는 보지 못하였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섬진강과 지리산을 배경으로 매화꽃이 활짝 피었다.
제법 가파른 길을 따라 해설사와 함께 청매실농원으로 올라간다.
홍쌍리명인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미친 듯이 옛 항아리들을 수집하였다는데, 1930년 이전 것들만으로, 즉 거의 100년 이상된 항아리 3천 개를 모아 6만평의 농원 곳곳에 매실을 담아놓았다고 한다.
홍쌍리의 시아버지 김오천선생(1902~1988)이 일본에 가기 직전인 1917년 맨 처음 매화를 심은 곳으로 올라왔다.
김오천선생은 광양에서 1902년에 태어나 조실부모하고 8살에 남의 집 머슴살이를 시작하여 그간 새경을 받아 돈을 모은 후 17살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탄광에서 광부로 13년 간 일하며 모은 돈으로 45만평이나 되는 땅을 샀다. 농사 지을 논밭이 아니라 농장을 조성하기 위하여 돌밭의 악산을 샀다. 1931년 귀국하면서 밤과 매실나무 1만 여 그루를 가져왔다.
작은 토종밤이 주를 이루던 백운산에 개량종 밤나무를 심어놓고 3년 후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10년간 일본 후쿠오카현의 농장에서 새로운 밤나무 재배기술을 익혀 돌아와서 새로운 육묘접목기술을 백운산 일대에 널리 보급하였다.
백운산은 밤의 결실에 가장 이상적인 북동향으로 난 줄기와 풍부한 강우량, 토질이 좋고 토심이 깊어서 밤나무가 자라기에 최적의 환경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특히나 섬진강의 바다안개가 기온을 완충시켜주는 보호막 역할을 하여 백운산의 밤은 일반 밤들보다 더 크고 굵게 자라며 전분과 당질이 많아 굽거나 삶아도 비타민C가 파괴되지 않는다고 한다.
김오천선생의 노력으로 마을 사람들이 너나없이 경사진 산에 밤나무를 심어 1960~70년대 농가소득 증대로 보릿고개를 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계속적인 신품종 밤의 개발과 전국적인 보급으로 박정희대통령의 표창과 산업훈장을 받았다.
1972년 그의 나이 70세 되던 해에 그로 인하여 부를 일구게 된 마을사람들이 그의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마을 입구에 율산공원을 조성하고 그 안에 공적비를 세우고 그에게 율산(栗山)이라는 아호를 증정하였다.
다음은 이날 위 거리에서 촬영한 동영상이다.
https://youtu.be/S7wN4beluYU
이번 여행 중 무엇보다 홍쌍리여사를 직접 만나보고 싶었는데 해설사를 따라 그냥 지나치고 대숲으로 향하였다.
우리 일행 중 일부는 자유시간에 청매실농원에 들어가서 묘소를 돌보는 홍여사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하는 걸 듣고서 현장에까지 가서 홍여사를 직접 만나보지 못한 게 너무나 아쉽다.
이번 여행이 끝나고 홍쌍리에 관한 저서가 이미 여러 권 발간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여행 직후 바로 양평도서관에서 아래 홍쌍리의 저서를 대여받아 읽어보았다. 그녀의 파란만장하고도 드라마틱한 삶의 이야기를 읽으며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
홍쌍리는 1943년 밀양에서도 소문난 부잣집 8남매의 셋째로 태어났다. 노래 잘하고 예쁜 그녀가 광대가 될까 두려워한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를 국민학교만 졸업시키고 부산 국제시장에서 건어물 장사하던 삼촌집에 보내어 버렸다.
타고난 활달함과 남 퍼주기 좋아하는 심성이 장사꾼의 재질을 발휘하여 알이 가장 굵고 실한 밤을 대는 장래 시아버지 김오천의 눈에 띄었다. 결국 그녀는 며느리로 스카우트당하여 1965년 전라도 깡촌 광양 산골짜기로 시집가서 이듬해부터 밤나무숲과 대숲을 베고 매화나무를 심어 가꾼 이야기가 펼쳐진다.
결혼 초기 남편이 형제의 권유로 광산에 투자했다가 오일쇼크로 부도가 나서 그 큰 땅을 다 날리고 화병으로 무기력해진 남편을 33년간 병 수발을 들며 무진 고생을 하였으나 억척스레 이를 극복하였다.
피와 땀과 눈물로 일가를 이루어 시아버지는 밤의 왕으로, 며느리는 매실의 여왕으로 둘다 대통령표창과 산업훈장을 받았는데, 우리 어릴 적 부산 생활의 모습과 그녀의 투박한 부산사투리도 정겹다. 관심 있는 분들의 일독을 강력히 권한다. (3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