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는 정규 교육을 많이 받지는 못했지만 열렬한 독서광이었다. 어릴 적에는 아버지의 서재를 샅샅이 뒤져가며 책을 읽기도 했고 1차 대전중 전선에서도 책을 놓지 않았고 뮌헨의 그의 아파트에서 맨 처음 구입한 가구가 책장이었다 한다. 히틀러는 쿠데타 실패 후 란츠베르크 감옥에서 [나의 투쟁]을 썼다. 그 1부작은 1923. 12월 집필을 시작한 지 불과 1년이 채 안 된 1924. 10월에 탈고 했고 2부작은 출소 후 연설이 금지되었던 1925. 7월에서 1926. 8월 간 1년 남짓한 기간 중 집필했다. 지금 서점에 가보면 [나의 투쟁]이 번역되어 나와 있는데 그 책의 두께가 결코 만만치 않음을 볼 수 있다.
[나의 투쟁]은 그가 제국의 총통이 되기 전까지는 베스트셀러는커녕 비평가들과 독자들에게 완전히 외면당할 정도로 인기가 없었고 히틀러 자신도 공상에 잠겨 쓴 습작이었다고 스스로 평했을 정도였다. 그는 "무솔리니는 얼마나 아름다운 이탈리아어를 쓰고 말하는지! 나는 그렇게 독일어를 쓰고 말하지 못한다네"라고 측근에게 털어놓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의 투쟁]은 우리 정치인들이 선거에 나가기 전에 대필가를 동원해 쓰는 그런 유의 자서전이 아니다. 감옥에서 면회객들도 통제해 가면서 상당한 집중 끝에 내놓은 오롯이 그의 생각이 담긴 책이다.
히틀러는 사후 1만 6천 권 정도의 책을 소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집중해서 책을 읽고 밑줄을 그어가며 그때 마다의 착상을 필기하기도 했다. 본질적인 것만 기억하고 그 외의 것은 잊어버리는 '에센스 독서법'도 나름 알려져 있다. 책을 향한 히틀러의 열정은 여가를 즐기거나 재미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독서는 그에게 지극히 심각한 일이었다. 히틀러는 나중에 자신이 읽었던 책의 주제에 관해 그의 추종자들에게 되풀이해서 이야기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 내용을 머릿속에 담아 놓기 위해서였다 한다. 티머시 라이백이 지은 [히틀러의 비밀서재]를 중심으로 히틀러의 사상 형성에 영향을 미친 책을 살펴보자.
그가 1차 대전중 서부전선에서 읽은 책은 막스 오스본Max Osborn의 [베를린]이었다. 이 책에는 수도 베를린에 대한 히틀러의 평생에 걸친 집착과 과격한 프로이센 쇼비니즘의 초기 흔적들이 나타난다. 오스본은 이 책에서 헬레니즘을 비굴하게 모방한 건축가들이 수많은 독일 도시의 아름다움을 망가뜨렸다면서 브란덴부르크 문이나 노이에 바허Neue Wache 같은 게르만 민족 특유의 시각을 고수한 건축물을 찬양했다. 브란덴부르크 문은 고대인의 완벽한 아름다움과 독일 북부 평원의 용맹한 스타일이 조화된 '프로이센의 궁극적 본질'을 표현한 작품이었고, 이 건축물의 주인인 프리드리히 대왕은 히틀러의 롤모델이었다. 히틀러는 군 복무 중 2번의 휴가를 모두 베를린으로 갔고, 언젠가는 '세계의 수도'가 될 것이라 했다.
디트리히 엑카르트Dietrich Eckart는 히틀러보다 21살 연상으로 히틀러의 멘토였다. 그는 히틀러에게 첫 트렌치코트를 사주고 처음 비행기를 태워 주었으며 베를린 연극 공연을 보여 주었고, 글 쓰는 법을 가르쳐 주고 그의 글을 실어 주면서 히틀러의 정서적, 지적 세계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히틀러의 반유대주의에 관심을 기울이고 불을 질렀다. 그가 각색한 [페르 귄트]는 당시 큰 성공을 거둔 연극이었고 베를린에서만 600회 넘게 상연되었다. 입센이 쓴 '파우스트 북유럽판'인 이 서사시는 주인공 페르 귄트가 젊은이 특유의 자만심으로 똘똘 뭉쳐 세계의 왕이 되겠다고 노르웨이의 외딴 마을을 떠나 세상으로 나가는 이야기로, 엑카르트가 각색한 희곡 첫 장면에서 "저는 위업을 이루고 싶어요"라고 선언한다. 엑카르트는 실제로 "우리에겐 기관총 소리에 익숙한 지도자가 필요하다. 사람들이 두려워서 오줌을 지릴만한 인물이 필요하다. 관료도 필요 없고 많은 지식도 필요 없다"라고 했고 히틀러에게서 그가 찾던 이상을 찾았고 기꺼이 그의 후원자이자 멘토가 되었다.
히틀러는 정적이었던 디켈을 밀어낸 후 나치당의 소위 '디켈 결핍증', 즉 철학적, 이념적 규범 부재를 불식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나치 당원증에 추천 도서 목록을 인쇄해 넣었는데, 여기에는 고트프리트 페더 [이자의 족쇄], 알프레드 로젠베르크의 [국가의 적, 시오니즘], 헨리 포드의 [국제적 유대인]이 포함되었다. 자동차 왕 포드는 이윤이 증가하면 근로자 봉급을 두 배로 올려준 것으로 유명하지만 지독하고 공공연한 반유대주의자였다. 그는 미국 다음으로 독일이 유대인의 세계적 음모에 가장 많이 노출되어 있다고 했다.
매디슨 그랜트의 [위대한 인종의 쇠망]도 히틀러의 서재에 남아 있던 책으로 반유대주의를 부추겼다. 그랜트는 히틀러에게 인구 변동이 정치 지도자나 군사동맹보다 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걸 보여 주었다. 그랜트가 깨달은 건 시간과 인구 변동이라는 냉혹한 두 힘의 교차였다. 그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사실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인다"라고 선언한 미국 독립의 아버지들조차 노예를 소유했고 인디언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경멸했다고 했다. 그는 "그들의 마음속 평등이란 그저 자신들과 바다 건너 영국인이라는 뜻에 불과하다"라고 했다. 실제로 출신 민족을 따져 이민 수용 여부를 결정한 1924년의 미국 이민법은 1935년 나치의 뉘른베르크법의 모델이 되었다.
19세기 영국의 역사가이자 비평가인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은 히틀러의 롤모델이었던 프리드리히대왕의 2,100쪽짜리 전기를 썼던 사람이다. 그는 영웅 숭배론으로 유명했고, "인류의 역사는 위인들의 전기에 불과하다"라거나 "위대한 인물은 어떤 식으로라도 도움이 된다. 그가 어떤 유형의 인물이든 그를 연구해 보면 반드시 뭔가를 얻게 된다"라고도 했다. 그는 독일 사상을 높이 평가했고 반유대적이었다. 그래서인지 나치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히틀러는 1924년 자신의 재판에서 칼라일의 말을 끌어와 변론을 마무리할 정도로 그는 히틀러의 몰입적인 감성 구조를 효과적으로 자극했다.
히틀러가 인류에게 재앙을 가져온 건 부인할 수 없지만 그의 생애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닐 것이다. 히틀러는 청년 시절부터 당시의 타락한 청년들과는 달리 담배도 안 피우고 술도 마시지 않았다. 여자와도 특별한 관계를 맺지 않았다. 하루의 대부분을 독서로 보내던 이 청년은 그저 수줍음이 많은 청년이었다. 그의 시대가 1939. 9월 폴란드 침공 이전까지만 머물렀더라면 아마도 제2의 비스마르크 정도로 평가되지 않았을까? 타락한 한 시대를 목도하고 있는 우리에게는 과연 어떤 영웅이 나타날지, 그 목마름이 범상찮음을 온몸으로 느낀다.
[히틀러의 비밀 서재, 티머시 라이백 지음, 박우정 옮김] 참조 및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