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요약> 어디에 나를 맡길까?/ 로마서 6:15-18
로마서는 바울의 서신서 중에 가장 유명하고 또 사랑받는 성경입니다. 그런데 실상 읽다보면 해석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느낍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로마서를 강해하면서 저 유명한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 사상을 설파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람이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것이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만 된다는 것 때문에 “행동이 따르지 않는 신앙인”에 대한 비판이 끊이지 않습니다.
로마서 6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의의 종>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는 죄의 종노릇에서 벗어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또 하나의 오해가 등장합니다. “죄의 종이었을 때는 죄를 짓지만, 의의 종이 되었으니 의로운 일만 한다.”는 엄청난 오해입니다. 실상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지으며 삽니다. “아니요! 나는 오늘은 죄를 하나도 안 지었어요!”라고 항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은 “내가 생각하는 죄에 해당하는 일을 오늘은 안했다.”는 뜻일 뿐입니다.
로마서 6장 16절 “아무에게나 자기를 종으로 내맡겨서 복종하게 하면”이라는 문장에 주목해보십시오. “내 맡기다(παρίστημι)”라는 말은 그 의미가 “제공하다”(offer), “참여하다”(present), “준비하다”(stand by), “곁에 위치하다”(to place beside)라는 뜻을 지녔습니다. 생각해보면, 자기가 좋아서 스스로 자기를 내어준다는 뜻입니다. 자기 마음이 하는 선택을 무조건 따라가면, 그 길이 결국에는 다시 빠져나오기 힘든 굴레가 되고, 반드시 사망에 이른다는 것이 바울의 경고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선택할 때에 신중해야하겠지요. 동시에 자신이 지금 하려고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 깊이 생각해야하지 않겠습니까?
결국 여기서 말하는 <죄의 종>이란 자기 마음 가는 대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런 삶에 익숙해져서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지 혼미해진 상태라고 보면 됩니다. 옆에서 보면 단박에 문제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데, 정작 자신은 모르는 것입니다. 어쩌면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잘못되었다고 알려주어도 절대로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을 보면, 바울은 지금 너무 쉽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망의 반대는 생명입니다. 죄의 종이 그 감옥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전해 받은 교훈의 본에 마음을 순종하는 것”(6:17)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라는 모범을 마음 깊이 새기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우리의 삶을 비추어보는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죄의 종이 의의 종이 되어 해방을 맛보았다고 다 된 것처럼 선포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것을 당연시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바울이 15절에서 말한 걱정거리를 유발하는 셈이 되고 맙니다. “은혜 아래에 있다고 해서, 마음 놓고 죄를 짓자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라는 말 속에는 깊은 주의사항이 담겨있습니다. 즉, 신앙이란 그리고 우리에게 의롭게 되는 일이란 이미 일어난 “완료형”이기도 하지만,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진행형”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다는 말에 감사하는 것은, 그 감사의 감격을 반드시 기억하고 유지하려는 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는 것은 참으로 기쁘고 행복한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주관적으로 오용하면 안 됩니다. 우리에게 은혜는 수동적으로 받는 선물이지, 내 마음대로 소유하고 사용할 수 있는 도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신앙의 만병통치약”이 절대로 아닙니다. 죄를 마음대로 지어도 된다는 “허가증”은 더더욱 아닙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호의의 결과이고, 죄와 사망과 투쟁하는 그리스도인의 힘겨운 삶을 격려하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며, 내가 내 마음을 맡겨야 할 곳이 어딘지를 알고, 의와 생명의 길을 걸어가면 참 좋겠습니다.
2024년 9월 8일
홍지훈 목사